不汚染修 번역에 대한 고찰 (성철/대원/청화/전강 선사)
師曰 什麽物 恁麽來
曰說似一物 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장경각]
대사가 말씀하셨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한 물건이라고 말씀드린다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그러면 닦아 증득[修證]하는가?" (증득이란 말은 완료의 의미를 내포하므로 현재형으로 쓰면 어색하며, 의미상으로 보아도 증득이란 말은 여기서 사용해서는 맞지 않는다. 청화선사처럼 닦아 증한다고 번역해야함. 문법이 틀리면 의미 자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還可"가 생략된 번역의 오류로 보임. 주관을 세우지 못하고 글자를 따라 횡설수설하는 느낌이 든다.)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닦음이 없는 돈수라면 "없다"고 해야하므로 자체 논리 상 모순임.)
대사가 말씀하셨다."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不汚染]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
[바로보인 출판사] 전등록 중에서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닦아서 증득하였는가?" ("還可"가 생략된 번역의 오류로 보임)
"닦아서 증득한 일은 없지 않으나 물들은 적 없습니다."
"이 물들은 적이 없는 것만이 부처님들이 보호해 생각케 하신 바이다. (제불의 호념이란 말이 해탈지견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원문이 틀린 것이 아님. 원문의 오류로 오해한 자체 번역 오류로 보임.)
그대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장경각과 바로보인출판사의 번역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닦아 증득[修證]한다는 말에서 증득의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사변의 증득이고 후자는 이치적, 즉 이변의 증득이다. 이치는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기에 진행형이 아닌 과거시제로 씀은 당연하다. 여기서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解悟이든 證悟이든 : 청화선사 법문內 정의 참조) 실증적인 체험을 말한다. 하지만 전자의 번역을 보면 (닦음 없는 돈수를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 오후수행에서의 사변의 증득은 보통 점차적이므로) 현재형으로 쓰고 있다. (悟後事는 수행자의 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修證卽不無를 살펴보자. 닦음이 없다는 식의 변견적 돈수라고 한다면 不無이 아니라 無라고 해야한다. 不無란 말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감으로 보아 있다에 더 가까운 중도적 표현이다. 따라서, 닦음이 없다는 돈수의 모순이 언어 논리에 의해 스스로 증명되는 셈이다.
결국, 사변의 증득과 이변의 증득으로만 각기 해석했기에 양쪽 모두 번역의 오류가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본다.
[청화선사]의 법문 중에서
6조 혜능 스님께서 다시 묻기를"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그러면 도리어 앞으로 더 닦고(修) 증(證)할 것이 있는가?이렇게 물었습니다. 아! 깨달아 버렸으니까 다시 닦을 것이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6조가 물을 때는 벌써 마음으로 인가(印可)를 한 것입니다.
회양 선사가 대답해 드리기를 "수증불무(修證不無)나" 닦고 증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염오즉부득(染汚卽不得)입니다"
한편, 청화선사의 법문 중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를 보자. 한문에 천학하지만, "還"이란 말의 의미를 본다면 아무래도 청화선사님의 번역이 맞는 것 같다. 따라서, 돈오, 즉 이변의 증득은 이미 심중으로 인가한 것이기에 과거시제는 보이지 않으며, 여기서는 사변의 수증('증득'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음)을 말하기에 현재형으로 쓴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
[전강선사]의 몽산법어 23편(불교티비 사이트)
설사일물 즉부중이니까 옳기는 옳다, 바로 인가는 했는데, 그 도리가 구경각인가 ?
조주스님이며 부처님이시며 오후의 수증지묘를 말씀했고, 육조스님도 수증이 있다고 했으니 구경각을 이루지 못한 분들이겠는가 ?
회양선사 분상에는 아직 구경각을 못했으니 물은게지.
육조스님께서도 당신은 구경각을 해 가지고 앉았지만은 후학을 볼 때에는 "네가 悟는 했다마는 수증이 있나 ?" (환가수증부?) (관리자 : 한자 사전에 還자는 "또" 혹은 "다시"의 뜻이 있음)
"수증은 즉불무, 오염부득입니다." 닦아 증함은 수증은 없지 않습니다. 오염부득입니다.
이것이 悟여, 오염을 얻지 못하는 것이 누진통이여, 거기서 그대로 인가한 것이여,
전강선사의 법문, 역시 청화선사의 법문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汚染卽不得에 대하여 :
不汚染을 설명하면서 '허공 가운데 있는 먼지들이 허공을 더럽힐 수 없다'고 비유하는 말을 불교방송에서 들었다. 이는 신수의 게송 가운데 나오는 밝은 거울과 티끌, 먼지의 비유와 같다. 이런 비유들이 얼핏 이해하기는 쉬우나, 육조대사의 게송에 나오는 자성청정의 이치와는 어긋나는 말들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체성이 같아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며, 육조대사의 게송의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즉, 빛의 차원에서는 어둠을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汚染卽不得을 '오염될 수 없다'로 번역하는 경우, 오염과 오염될 대상(능소)으로 나뉘게 되는 문제가 있어서 자성청정의 도리와 어긋나며, 이런 말의 허물을 피하려면, '오염이란 말은 할 수가 없다'로 번역해야 명확해지지만, 어쩔 수 없이 오염되지 않는다고 표현하거나 이분법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더라도 그 허물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dail345?Redirect=Log&logNo
'***풍경소리 > 착한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을 읽고 (0) | 2007.09.07 |
---|---|
돈오돈수/돈오점수 및 육조단경 평석(선림보전)에 대한 고찰 (0) | 2007.09.06 |
대우 거사 '과정 그 자체가 결과' (0) | 2007.09.06 |
시인 조영관 / 시화의 달 (0) | 2007.08.24 |
시인 조영관 / 정도리 바닷가에서 (0) | 2007.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