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돈오점수 및 육조단경 평석(선림보전)에 대한 고찰
육조대사가 처음 사용한 말인 돈수는 단경의 돈수편을 살펴볼 때, 悟後에 대한 언급이 아니어서,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의 점수와는 애당초 무관한 말이며 배치되는 말도 아니다. 돈오돈수란 말이 먼저 나온 말이므로 당연하다. 하지만, 悟後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는 뜻이지 오후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단경에서는 오후수행에 대해 점수도 돈수도 아닌 다만 수행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대사가 말하는 견해상의 돈점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돈오점수의 점수는 오전의 점차 견해와는 다른 것이며, 일행삼매의 뜻으로 보면된다. (돈오점수의 돈점은 오후사에 관한 것이지만, 육조대사의 돈점은 오전의 견해에 관한 것이므로 양자를 비교하면 곤란하다.)
신수대사의 게송은 돈오점수가 아니다. 그 게송은 5조의 명에 의하여 지은 것이고, 신수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처한 적도 없으며 사상으로 내세운 일도 없어서 애당초 돈점 논란과는 무관한 상황이었는데, 그를 돈오점수사상의 시조로 말하는 것은 마녀사냥이다. 굳이 말을 한다면,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미오점수(未悟漸修)라고 볼 수 있으며, 오전에 닦음(점수)이나 닦는다는 말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잘못된 생각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깨달음이 노력없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어서, 별다른 말이 없으니 그대로 닦는다는 말을 허용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재송도인과 같은 예외도 있으므로 간별해야 한다.
단경에 근거할 때, '돈점'은 悟前에 있어서 깨달음에 대한 견해의 빠름과 더딤이며 (悟後로 오해하면 답답한 일이다. 또한, 견증이 아닌 견해라는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단박'이란 말은 悟前의 계정혜 등을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박이란 말이 시간적 찰나의 뜻만이 아니라, 견증이 아닌 견해의 빠름이라고 볼 때, 돈오란 말이 해오도 포함한다는 이론적 여지를 여기서 보게 된다.)
세울 때는 닦은 후에 깨닫는 것이어서 순서와 시간이 있지만, 세우지 않을 때는 닦음과 깨달음에 순서와 시간이 없어서 말만 다를 뿐 모두 일상삼매를 뜻한다. 돈오편에서 진여본성을 단박에 본다고 했고, 돈수편에서는 자성을 단박 닦는다고 하였다. (거울의 먼지를 턴다는 식의, 즉, 능소에 의한 이분법적인 미오점수의 닦는다는 相見을 타파하는 의미이며, 오후에 修證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경지침의 유전돈법편에 나오는 돈오돈수란 말의 전후를 보아도 모두 오전의 점차적인 견해를 반박하는 내용이다. 즉, 오전의 점계와 점수를 반박하면서 돈오돈수로 자연히 합성된 말이다. 법문 도중에 딱 한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주된 표현방식이 아니고, 독립된 사상으로서 내세운 말도 아니다. 아래와 같이 종조본에서는 점계 대신 점수, 돈수 대신 돈계(돈오)로 나온 것을 볼 때, 대사께서 양자의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았으며 후대에서도 의미를 두어 해석하지 않았기에 생긴 결과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단경의 한 항목씩을 차지하는 중요한 용어들이 뒤바뀌어 전해짐을 생각하기 어렵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에 대한 논란은 의미가 없다.일행삼매와 일상삼매 중 어느 편이 옳으냐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육조대사의 강조점은 일상삼매의 체험 후, 일행삼매로 귀결된다. "일행삼매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라고 나와 있는데, 항상하지 않기에 항상하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고 닦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원래 항상하다면 그냥 "삼매" 라고 해야 하며, 일행이란 말이 앞에 붙을 이유가 없다.: 관리자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迷卽漸契 悟人頓修) : 단경; 8.무념(無念) : 돈황본
*종보본에는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닦고 깨친 이는 단박에 계합한다[迷人漸修悟人頓契]>로 되어 있으나, 근본 뜻은 앞의 항목과 같다.
돈오돈수만큼은 성철선사께서 어이없는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불이라고 하는 조주선사도 말을 잘못해서 나귀 뱃속을 세번 면치 못했다는 말을 비춰보면, 그런 실수로 고인의 수행경지를 폄하하는 것은 좋지 않겠으나 권위에의 맹종은 비판의식을 흐리게 하는 문제가 있다. 경전을 잘못 설하면 마설이 된다는 말도 기억할만 하다.
육조단경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전에 준한다. 당시 교학만이 팽배했던 중국의 불교수행환경에서 올바른 선종수행의 이론적 토대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후에 나오는 조사어록보다는 경전에 가까운, 즉, 경전과 어록의 중간적 교량적 위치에 있는 내용이며, 자연히 이변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배경에서의 이변의 용어 의미를 성철선사께서 사변의 의미로 받아들이신 것 같다. 또한, 29세 때의 오도후 송광사에서 보조스님의 저서를 독파하면서 오해가 있었던 듯 싶다. 구경각만이 견성이라는 선입관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후 당대 대선지식이었던 만공선사를 수덕사 정혜사 동안거에서 만났을 때, 깨달음에 대한 인가가 참으로 가볍게 이루어진다고 느끼신 것은 이미 오도하셨기에 어쩌면 당연하다. (돈오에 대한 인가는 진정한 수행을 할 줄 안다는 인가이며, 성철선사께서 바랬었던 수행을 마쳤다는 인가는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바랬던 것은 수기(授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한다. 또한, 전법의 인가와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간월도에서 다시 만나 화두가 얼마나 성성하시냐고 물었을 때, 만공선사가 3번 확철대오했노라고 하시고 화두는 성성하지 않노라고 해준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화두가 성성한지 아닌지를 따지는 수행자의 경지를 넘어서, 배고프면 밥먹고 고단하면 잠자는 도인의 경지라는 말씀은 아니셨을까 ? ("성성적적한 식심이 조복되어야 의단이 독로한다"는 봉암사 태고선원장 정광스님의 법문을 참고할만 하다.) 아뭏든, 그 이후 선지식에 대한 실망감으로 선지식으로부터의 인가를 받지 않고 홀로 수행하셨다. 그 영향으로 아래와 같은 모순된 설명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열반 다큐 1편 참조) : 관리자
수행불행과 구경묘각의 관계는 어떠한가 ? 아래 서언 및 평석을 따르면, 식심견성과 같은 말이라고 하는 구경묘각 후에 다시 수행불행이 있다는 말이 된다. 구경묘각이 수행의 종착점이라고 볼 때, 이는 기본 개념의 모순이다.
(「단경」의 근본 사상은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이요, 식심견성은 법신불(法身佛)인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이어서 견성(見性 성품을 봄)이 곧 성불(成佛 부처를 이룸)이므로, 깨달은 뒤[悟後]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修行佛行]고 분명히 하였다.) 19p (불기 2534년 3쇄)
○불(佛)은 구경묘각(究竟妙覺)이며, 십지(十地)·등각(等覺)도 미혹중생이니, 정오정각(正悟正覺 바르게 깨치고 바르게 깨달음)이 아니다. 식심견성은 정오정각을 말함이니, 그것은 구경묘각이라야 한다. 25p
직입불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구절은 단경에 나오지 않으며, 육조대사가 한 말이 아니다. 영가대사의 일초직입여래지를 줄여서 평석에서 임의로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는데, 여래지란 말은 단경의 원문에는 없고 평석에만 나오는 말이다. 영가대사가 여래지란 말을 구경묘각과 같은 말로 썼던 것은 아닐 것이다. (60p 참조)
직료성불은 단경에 딱 한번 나오는 말인데, 그것도 육조대사가 직접한 말이 아니고 당시의 항간에 떠도는 말이었다. 즉, 대사가 출가하기 전에 손님이 한 말이다.(58p 참조)
이런 말들은 당시 북쪽에 있던 신수의 점수사상에 상대해서 쓰인 말이며, 본래성불의 입장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다. 육조대사는 한평생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강원 강사처럼 교학에 입각하여 법문했을 리도 없다. 단경에 나오는 불지 또는 성불 등의 의미는 교학에 나오는 세분화된 의미와는 달리 포괄적인 그리고 이변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전강선사의 몽산법어에도 일초직입여래지는 理卽頓悟로 해석하고 있다. 즉, 이변의 일이다.)
점차를 없애는 것이 <단경>의 근본 방침이라고 했는데, 근기가 낮은 이는 차츰 계합한다고 말씀하신 대사의 법문에 비춰어 볼 때, 일체의 점문을 배제했다면, 근기가 낮은 이는 깨닫지 말라고 했단 뜻인지 모르겠다. 아니라면, 근기를 높여야 한다는 법문이 있어야 할 법하다. 빨리 계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돈오를 말한 것일 뿐, 그것이 점문을 배제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막상 돈황본에는 점수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돈오를 다른 사본에서 돈계라고도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깨달음이란 계합한다는 뜻이다. 漸契란 말이 있으니 점오란 말도 상정할 수는 있다. 바람직하지 않기에 사용되지 않을 뿐이다.)
* 여러 겁을 잘못 헤매다가도 찰나 사이에 오달하므로 '돈(頓)'이라고 한다. 육조의 법문은 유돈무점(唯頓無漸 오직 '돈'만 있고 '점'은 없는 것)이어서 돈오하면 곧 바로 불지에 들어가[直入佛地] 지위, 점차를 없애는 것이 <단경>의 근본 방침이니, 육조는 이를 '직료성불(直了成佛당장 성불해 마침)'이라고 표현하였다. 32p
* 식심, 견성, 대오(大悟), 돈오는 원해 묘각인 내외명철을 내용으로 한다. 그리하여 삼현(三賢), 십성(十聖)을 뛰어넘었으므로 돈오돈수라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선(六祖禪)의 근본 사상이다. 그러므로 돈법, 돈교로써 일체의 점문(漸門)을 배제한 것이다. 35p
구경묘각처럼 닦음을 완전히 마쳤다는 말이라면 終修가 되어야 할 듯하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설명하면 어떨까 ? 길을 걸어가다가 차를 타고 가는 경우, 간다는 말도 할 수 있고, 가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있다. 차안에서는 걷지 않으므로 가는 것이 아니지만, 차밖에서는 앞으로 진행하니까 간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이와 같이 볼 때, 오후점수를 틀린 말이라고만 한다면 차안만을 생각하는 좁은 견해이다. "교가의 점수사상으로 어지럽게 된 종문" 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어지러워진 느낌이다. : 관리자
법달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하기를 "이후로 생각생각 부처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하니,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하였다.
法達 言下 大悟 自言 已後 念念修行不[책에는 佛로 바르게 됨]行 大師言 卽佛行 是佛 - 敦 三四五(51)
* 대승사본에는 '부처님 행 닦기를 원한다[願修佛行]', 흥성사본에는 '바야흐로 부처님 행을 닦는다[方修佛行]'고 하였으나 뜻은 같다. 덕이본과 종보본에는 이 구절이 빠졌으나, 다른 세 본에는 수록되어 있으므로 상관이 없다.
돈오견성(頓悟見性)하면 불지(佛地)이므로 오후점수(悟後漸修 깨친 뒤에 점차로 닦음)는 필요없고 부처님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는 교가의 점수사상으로 어지럽게 된 종문(宗門)에 일대 활로(活路)가 되는 것이다.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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