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어떻게 볼 것인가
정성본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졸업. 일본 愛知學院 대학원 석사. 驅澤대학 석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선학과 교수. 저서로는 <중국 선종의 성립사 연구><신라 선종의 연구><선의 역사와 사상>등이 있다
1. 육조단경 무엇이 문제인가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간주되고 있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선학·선사상을 연구하고 실천수행하는 사람들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선문헌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 《육조단경》(790년경 성립)이 출현한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육조단경》을 읽고 연구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은 《육조단경》이 선불교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선문헌인가를 가히 짐작하게 한다. 특히 한국불교에서는 고려시대 보조지눌이 《대혜서장》과 《육조단경》을 중요시하였다.
지눌은 《육조단경》을 인쇄하고 유포하는 발문(跋文)에서 《단경》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사실 《육조단경》은 지눌 이후로 《금강경》과 함께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세기 초 돈황에서 발견된 《육조단경》은 《단경》연구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였고, 지금까지 6종의 돈황본이 학계에 소개되어 전하고 있으며, 세계의 선불교에 관심을 갖는 수많은 국제학술회의에는 《육조단경》을 주제로 하는 연구 발표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육조단경》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나 돈황본의 교정본도 중국에서 여러 권 출간되었으며, 성립 문제나 선사상의 구명은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작자 문제를 비롯하여 《육조단경》의 성립과 제작의도, 《단경》에서 전하는 육조혜능전, 선사상사에서의 위치 등 해명되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필자는 1989년 〈육조단경의 성립과 제문제〉(민족사 간행 《육조단경의 세계》에 수록)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단경》의 성립 문제와 선사상의 문제점을 제기하였고, 일본 인도학불교학회에서도 〈육조단경 비판〉이란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필자의 《육조단경》에 대한 견해는 변함이 없는데, 한국불교에서는 아직도 경전이나 《육조단경》의 내용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실천정신을 체득하려고 하는 구도적인 의지보다는 단순히 부처나 조사의 말씀이라는 경전 신앙으로 집착하는, 몰지각한 선입견에 사로잡힌 아류의 무리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에 필자는 일찍이 혜능의 제자 남양혜충이 ‘남방종지 비판’으로 《육조단경》을 비판한 사건이나, 마조의 제자 《대의선사비문》에 언급된 《육조단경》에 대한 기록, 그리고 종밀의 저술이나 당나라 조사선 시대 선승들의 《단경》에 대한 태도 등을 참조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육조단경》의 문제를 재음미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2. 육조단경의 출현-신회의 단어(壇語)와 혜능의 단경(壇經)
일본 고마자와 대학 선종사연구회에서 간행한 《혜능연구》(1978년 간행)와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이 편집한 《육조단경제본집성》에는 돈황본 《육조단경》(S. 5475 號本. 1922년 일본 矢吹慶輝가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발견하여 소개함)을 비롯하여 10여 종에 이르는 《육조단경》의 이본(異本)을 수록하고 있다.
또 최근 중국에서 양증문(楊曾文)이 돈황박물관에 소장된 《육조단경》의 교정본을 간행(1993년)한 이후로 주소량(周紹良)이 《돈황사본 단경원본》(1997년, 북경, 문물출판사)을, 이신(李申)이 《돈황단경 합교간주(合校簡注)》(1999년 간행)에 5종의 돈황본 《육조단경》을 원본 영인과 교정본으로 출판하였다. 돈황사본 《육조단경》 5종은 다음과 같다.
1.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본. S. 5475호본. (首尾 제목이 있는 完帙本)
2. 중국 돈황박물관 소장본. 077호본. (首尾 제목이 있는 完帙本.)
3. 중국 북경도서관 소장본. 79호본. (斷片)
4. 중국 북경도서관 소장본. 48호본 (首部 缺. 後部 14쪽 및 尾題 있음)
5. 중국 여순박물관 소장본. (首題및 序品 3쪽).
현재 알려진 돈황본 《육조단경》은 5종으로 제목이나 내용이 모두 일치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최초로 만들어진 《육조단경》의 원본을 필사하여 유통된 것으로, 원초의 형태를 각각 똑같이 유지하면서 전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상 5종의 돈황본 《육조단경》을 서로 대조하고 새로운 교정본을 만들면서 돈황본 《육조단경》이 최초에 만들어진 원본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따라서 일찍이 야나기다가 제시했던 《단경》의 고본(古本)을 설정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의 학자들이 《단경》 내용의 다양함을 지적하면서 몇 단계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몇 단계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어떤 작자에 의해서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을 필사하여 전래된 것이 돈황본 《육조단경》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구성과 내용은 다양하지만 《단경》이 성립된 당시(790년경) 하택신회의 남종을 비롯하여 선종 각파에서 널리 성행된 보살계 수계설법과 망념이 없는 진여자성을 단번에 깨닫도록 주장하는 남종 돈교의 선사상을 체계화하여 육조혜능의 구도 이야기와 설법집의 형식으로 출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상황과 선사상을 종합한 것이기에 《단경》의 구성과 내용은 다양한 것이지만 전체에 걸쳐서 근저에 흐르는 선사상은 《단경》의 제목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남종 돈교’와 ‘반야바라밀법’ ‘돈오견성’ ‘번뇌 망념이 없는 진여자성의 자각(無念)’ ‘머무름이 없는 자각의 실천(無住)’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기본 정신인 반야사상과 불성사상을 선의 실천으로 통합한 새로운 선불교의 실천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먼저 돈황본 《단경》을 중심으로 《단경》이라고 이름붙인 문제의 제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돈황본 《단경》은 다음과 같이 긴 제목을 붙이고 있다.
南宗頓敎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六祖慧能大師 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一卷.兼授無相戒.
제목을 보면 《단경》의 내용과 전체적인 개요를 파악할 수 있는데, 돈황본 《단경》에만 이러한 긴 제목을 붙이고 있는 것은 원초의 형태와 제목을 그대로 소박하고 충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단경》의 성립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항상 문제의 초점이 되는 것은 《단경》의 제목인데,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의 어록 가운데 《단경》의 제목과 비슷한 《남양화상돈교해탈선문직료성단어(南陽和尙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이하 《단어》라고 약칭함)가 있다.
신회가 혜능의 제자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혜능의 설법집이라고 간주되는 《단경》의 입장과 그 선사상을 계승하여 설법한 어록이 신회의 《단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신회의 《단어》에서 《단경》으로 발전된 것이 자료의 성립 연대나 선사상의 발전에서 볼 때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단경》의 작자는 혜능의 구법(求法) 이야기와 설법집으로 《단경》을 만들 적에 실제 남종 돈교의 선사상을 펼친 신회의 《단어》와 선어록을 많이 채용하고 변경하여 한층 발전된 선사상을 혜능의 설법으로 재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경》의 ‘단’은 신회의 ‘단어’를 이어받은 것으로 《단경》의 제목에서도 무상계를 수계하면서 내린 설법이라고 한 것처럼, 계단(戒壇)을 의미하는 것임에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도 이론이 없다. 신회의 어록인 《단어》는 그가 남양 용흥사에서 도속(道俗)들을 위해 수계설법과 함께 설한 법문을 기록한 것인데, 신회 역시 당시 중국불교나 북종선에서 널리 성행하고 있는 대승보살계 수계의식의 전통을 이어 남종 돈교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보살계 수계설법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단어》란 일반 도속을 위해 개설된 보살계단에서 설한 수계의식과 더불어 설한 남종 돈교의 선법문집을 기록한 것이다. 신회의 보살계 수계의식은 종래의 전통적인 권위주의나 형식적인 의례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실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돈황본 《단경》의 제목이나 〈서품〉에서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단경》은 육조혜능이 소주 대범사에서 일반 도속들에게 내린 무상계(無相戒)의 수계설법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계란 《금강경》의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반야사상을 토대로 한 무상심지계(無相心地戒)로서 《단경》에서 주장한 독자적인 남종 돈교의 대승보살계 정신이다. 돈황본 《단경》에서 주장한 무상계의 수계설법 내용은 ‘자성삼귀의’(22단) ‘사홍서원’(23단) 등인데, 무상심지계란 자성(自性)의 자서자수계(自誓自受戒)이다. 즉 진여자성이 자기 스스로의 자각적인 서원과 맹세로 스스로 수계받는 지극히 간단한 대승보살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신회의 《단어》나 《단경》에서 말하는 ‘단’이란 계단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수당대의 불교계에 당시 일반적으로 널리 성행되었던 대승보살계의 수계의식을 선불교의 실천정신에서 재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당대 중국불교에서는 천태지의(天台智확)를 비롯하여 《범망경》의 주석과 보살계 수계의식이 성행되었고, 선종의 4조 도신(道信, 580∼651)도 《보살계법》이라는 한 권의 저술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북종선의 자료인 돈황본 《대승무생방편문》과 신회의 《단어》도 당시 선종의 대표적인 보살계 수계설법집의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역대법보기》나 종밀의 《원각경대소초》 등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신라 출신인 정중무상(淨衆無相) 선사가 성도 정중사에서 도속에게 널리 보살계 수계설법을 행한 사실도 전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 선종 각파에서도 대승보살계 수계의식이 성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육조혜능의 무상계 수계설법집의 형식으로 편집된 것이 《단경》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당시의 보살계 수계설법을 하는 계단은 도속 일반인에게 불법의 인연을 심어주는 장소였으며, 또한 《단경》의 서품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조사의 개당(開堂)설법으로서도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법회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신회의 어록처럼 《단어》라고 하지 않고 《단경》이라고 명명하였을까?
일본의 학자 야나기다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적어도 《육조단경》의 작자는 도선(道宣)의 《계단도경(戒壇圖經)》을 의식하고 있었다. 《단경》이라는 이름은 도선의 《계단도경》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논하고 있다. 야나기다는 또 “《전등록》 28권에 전하고 있는 혜충 국사의 《단경》에 대한 비판은 하택신회가 도선의 《계단도경》을 개작하여 자기 맘대로 창의(創意)를 더하여 자파의 《단어》로 만든 것을 혜충 국사는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논하고 있다.
혜충 국사의 비판은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야나기다의 주장에 필자는 찬성할 수 없다. 필자는 이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 그러면 왜 《육조단경》을 ‘경’이라고 칭하고 있는가? 돈황본 《육조단경》의 〈서품〉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단경》은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이 소주 대범사 강당의 계단에서 일반 도속 대중들을 위하여 남종의 독자적인 ‘무상심지계’라는 대승보살계 수계설법을 하게 된 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그 장소에 모인 대중들과의 시절 인연을 빌려서 남종 돈교의 선사상인 반야바라밀법과 남종의 종지를 남종의 조사인 육조혜능의 설법으로 확립하는 형식을 확증하려는 의도로 만든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당시 대범사 강당에 모인 만여 명의 대중과 소주(韶州)지사인 위거(韋據) 등이 혜능에게 설법을 간청하고, 제자인 법해에게 혜능의 설법을 기록하도록 하며, 후대에 널리 유통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단경》의 서품은 《금강경》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단경》의 제목에 명시하고 있는 ‘남종 돈교 최상의 대승 마하반야바라밀경’은 《금강경》의 입장이며, ‘육조혜능이 소주 대범사에서 도속 대중들을 위해 무상심지계를 수계하고 남종의 법문을 베푼 설법경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남종의 새로운 조사 육조혜능이 설한 ‘남종 돈교의 경전’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작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중국에서 ‘경’이란 글자는 ‘불변의 진리나 도리’ ‘법이나 도(道)’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서적의 이름에서는 성인의 교시나 말씀을 기록한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오경(四書五經)이며 《효경(孝經)》 《태현경(太玄經)》 《다경(茶經)》 《식경(食經)》 《사경(射經)》 등도 이와 같이 사용된 이름들이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의 경전도 이러한 중국인들의 관례에 따라 ‘성인의 진실된 말씀’이란 의미로 ‘경’이라고 칭하게 되었는데, 결국 학문이나 종교 등의 근본, 진실된 도리나 법문을 기록한 책을 경전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진 수당대의 위경(僞經)은 제외하더라도 앞에서도 언급한 도선의 《계단도경》과 《육조단경》 그리고 돈황에서 발견된 《태자성도경(太子成道經)》이라는 변문(變文:싯다르타 태자가 출가 성도한 이야기)에 ‘경’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는 것은 확실히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단경》은 확실히 신회의 《단어》를 전제로 한 제명(題名)인 것이다. 그러나 신회의 어록인 《단어》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단경》은 남조의 조사인 육조혜능이 남종 돈교의 종지와 부처님으로부터 전래된 불법의 전등법통을 확정한 의미있는 성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특별히 편집된 경전이기 때문이다.
신회의 어록인 《단어》와는 차원을 달리하여 《단경》을 ‘경’이라고 칭하고 있는 까닭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자의 의도를 돈황본 《단경》의 본문을 통해서 살펴 보기로 하자. 돈황본 《단경》에서는 육조혜능이 부처와 보살과 같이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서 ‘성스러운 지위의 조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작자는 돈황본 《육조단경》에서 오조홍인 문하의 대표자인 신수(神秀) 선사와 행자의 신분이었던 혜능 간에 벌어졌던 깨달음의 노래(心偈)를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가운데, 신수의 심중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신수 상좌는 깊이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이 깨달음의 노래(本心의 게송)를 화상께 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깨달음의 노래(본심의 게송)를 올리지 않는다면 오조께서는 어떻게 내 심중의 얕고 깊은 견해를 파악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반드시 깨달음의 노래를 지어 오조께 올려서 나의 의지를 보여 드리리라. 법을 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것은 도리어 범부의 마음으로 저 성스러운 지위(聖位)를 탈취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깨달음의 노래를 지어 올리지 않는다면 끝내 법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한동안 깊이 생각하니,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로다. 밤 깊은 삼경에 이르러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 틈을 타서 드디어 남쪽 복도 밑 중간 벽에 깨달음의 노래를 적어 놓고 가사와 법을 구하려고 하였다.
만약 오조께서 이 깨달음의 노래를 보시고 이 게송을 말씀하시며, 만약 나를 찾으신다면, 나는 화상을 친견하고, “즉 이것은 제가 지은 게송입니다.”라고 말하리라. 오조께서 이 깨달음의 노래를 보시고 만약 이 정도의 경지로는 가사와 법을 전해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내가 미혹하고 전생의 업장이 무거워 법을 얻을 인연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성스러운 조사의 뜻(聖意)은 측량키 어려운 것이니 나도 쓸데없는 망심을 쉬도록 하자.
여기서 《단경》의 작자는 신수로 하여금 “법을 구하는 일은 옳으나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범부의 마음으로 성스러운 조사의 지위(聖位)를 탈취하려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성스러운 조사의 뜻(聖意)은 측량키 어렵다.”라고 독백하게 하고 있다. 또 신수가 밤중에 남몰래 깨달음의 노래를 벽에 쓴 이튿날, 오조홍인화상이 신수를 불러놓고 대화하는 가운데, 신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수 상좌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이 게송은 제(신수)가 지은 것입니다. 감히 조사의 지위를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원하옵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제자에게 조그마한 지혜가 있어 불법의 큰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있는지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도 《단경》의 작자는 신수로 하여금 “감히 조사의 지위를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단경》은 조사의 위치(지위)를 정말 범부의 차원에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존엄하고 성스러운 지위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더욱이 오조홍인 문하를 대표하는 교수사 신수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고 인정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실로 작자의 심의 있는 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택신회가 육조현창운동을 전개한 이후로 전대(前代)의 조사가 차대(次代)의 조사를 인증하는 인가증명으로서 가사를 전하는 전의부법(傳衣付法)은 한 시대(一代)에 오직 한 사람(一人)에게만 법을 부촉하도록 주장하였고, 또한 법을 전하는 사실을 증명하는 게송(傳法偈)을 전수하는 조사의 위치를 성위(聖位)로 간주하도록 분위기를 고조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의부법이나 전법게의 전수로서 차대의 조사를 인정하도록 하고 있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소재로 오조홍인과 노행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러한 조사의 전형으로 육조혜능을 탄생시키려고 하는 것이 《육조단경》의 제작 의도인 것이다. 사실 돈황본 《단경》에는 “살아있는 부처(生佛)가 여기에 계신다.”라고 경탄하고 있으며, 《조계대사전》에도 당대의 명승인 인종 법사가 혜능이 달마로부터 전래된 가사를 지니고 있음을 보고 예경하면서 “어찌 예측이나 했으랴! 남방에 이와 같이 무상의 법보(法寶)가 있을 줄이야!”라고 감탄하는 일절을 전하고 있다.
특히 ‘살아있는 부처(生佛)’로 간주하는 혜능의 구법과 남종 돈교의 설법집을 붓다가 설한 경전에 비준하여 《육조단경》 혹은 《법보단경》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선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조사’라는 위치를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부처’나 ‘여래’와 동등한 불법을 체득한 정법의 상승자로 간주하여 성스러운 존재로 존경하게 하기 위한 작자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육조단경》은 선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이며, ‘성위의 조사’로서 ‘생불’로 추앙된 육조혜능이 남종 돈교의 종지를 설한 법문집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처음부터 의도된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당대에 걸쳐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중국인들이 만든 많은 위경(僞經)이 제작된 것처럼, 《단경》의 작자가 일부러 ‘경’이라고 명명한 것도 위경의 제작에서 배운 것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육조혜능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선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혜능이 설한 남종 돈교의 종지에 경전과 같은 차원의 성스러운 설법집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일부러 ‘단경’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즉 《단경》의 작자가 처음부터 신회의 어록인 《단어》를 의식하면서 남종의 새로운 성스러운 조사의 지위와, 신회의 스승인 혜능의 입장을 고려하여, 신회의 어록인 《단어》의 차원을 초월한 선불교의 새로운 조사인 육조혜능의 권위있는 설법집으로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이름 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육조단경》의 작자는 남종 돈교의 새로운 경전으로서 그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경’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육조단경》은 누가 만든 작품인가? 도대체 선종의 어떤 계통의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었으나 모두 한결같이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단경》의 작자 문제는 현재의 자료로는 그 누구도 시원스럽게 해결할 수 없는 연구 과제의 하나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답안을 제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이 문제를 사고해 왔던 견해와 가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단경》의 편집자로 ‘홍법제자 법해집기(弘法弟子 法海集記)’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서품에도 “소주지사인 위거는 혜능의 문인인 법해 스님에게 혜능의 법문을 모아서 기록하게 하여 후대에 유통하도록 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단경》 가운데 ‘법해’의 이름은 혜능의 10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단경》의 2, 3, 47, 50, 51, 53, 54, 58단 등 여러 곳에 보이는데, 육조혜능과의 문답자로서 마치 《금강경》의 수보리와 같은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경》의 58단에도 “이 《단경》은 법해 상좌가 편집했다.”라고 하면서 혜능 � 법해로 이어지는 《단경》 품승자의 계보에까지 법해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단경》에서 법해의 존재는 실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일찍이 야나기다는 《단경》의 편집자인 법해를 우두종(牛頭宗) 계통의 선승으로 간주하고 최초의 《단경》은 우두종에서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었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돈황본 《단경》에 혜능의 10대제자 가운데 신회나 지성(志誠)·법달(法達)·지상(智常)에 대해서는 간단한 약전과 혜능의 법을 잇게 된 기연(機緣)을 전하고 있는데, 법해에 대해서는 전기나 기연이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소주지사 위거나 법해라는 인물은 모두 《단경》에만 등장하고 있는 인물로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들에 대한 자료는 찾아 볼 수 없다. 이 두 사람 모두 돈황본 《신회어록》의 혜능전에 이름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전등록》 제5권에 ‘소주법해선사전’이라고 전하는 일단은 혜능의 다른 제자들의 전기처럼 《단경》에 의거하여 후대에 새롭게 만들어 첨가한 전기이기 때문에 사실로 간주하기 어렵다. 이처럼 《단경》의 편집자인 법해에 대해서는 실제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아마도 《단경》의 작자는 《신회어록》 혜능전에 혜능의 제자로서 혜능과 대화를 하고 있는 법해라는 인물을 채택하여 《단경》의 편집자로 등장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단경》의 작자가 신회를 편집자로 하지 않고 법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사실 《단경》의 10대제자 가운데 혜능의 정법을 이은 인물은 하택신회이기 때문이다. 법해라는 혜능의 제자를 등장시켜 오조홍인-육조혜능-하택신회로 이어지는 남종 돈교의 정법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록하여 주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붓다의 정법이 마하가섭에게 전래된 사실을 아난이 경전을 결집하여 간접적으로 입증하게 하고 있는 구상과 똑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단경》의 작자문제를 거론할 때 반드시 인용되는 자료가 위처후(韋處厚, 773∼828)가 지은 《대의선사비명》(《全唐文》 715권)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다.
낙양의 하택신회는 (육조혜능의) 불법(總持)을 깨달아 인가받고 홀로 지혜의 안목을 드달렸다. 당시의 선승(북종선?)들은 진실에 미혹하여 귤을 탱자라고 하는 등 불법의 본체를 바꾸고 있었다. 그래서 드디어 《단경》을 만들어 종지를 전하여(傳宗) 우열(優劣)을 가리도록 하였다.
(洛者曰會,得總持之印,獨暉瑩珠.習徒迷眞,橘枳變體,竟成壇經傳宗,優劣詳矣.)
일찍이 중국의 호적(胡適) 박사는 이 일단을 근거로 《단경》의 작자를 신회로 간주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경전종(壇經傳宗)’이란 말의 해석인데, 호적 박사는 종밀의 《배휴습유문》에 인용한 ‘조종전기(祖宗傳記)’를 가리키며, ‘단경’과 ‘전종’을 모두 신회계통에서 전하고 있는 책 이름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호적의 해석을 비판한 사람이 중국 학자 여징(呂生)의 《중국불학원류약강(中國佛學原流略講)》(중국, 中華書局, 1979년, 231쪽 참조)이다.
야나기다도 《어록의 역사》에서 “전종(傳宗)이란 10대제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재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논하면서 돈황본 《단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혜능의 10대제자를 거론한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단경의 전종’이란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이 남종 돈교의 종지를 설한 것을 편집한 《단경》을 제자들이 품승(稟承)하고 전지(傳持)하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돈황본 《단경》의 〈서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혜능이 10대제자들에게 《단경》을 품승하고 잘 전하여 소지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점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참고로 돈황본 《단경》에 《단경》의 전지와 품승을 강조하고 있는 곳은 3, 40, 47, 49, 58, 59, 60단 등이다. 《단경》 〈서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소주지사는 드디어 제자인 법해 스님에게 혜능 대사의 설법을 잘 기록하고 편집하여 후대에 유행하도록 지시하였으며, 불도를 배우는 사람들과 이 남종 돈교의 종지를 이어받아 서로 서로 전수하고 의지하며 믿게 하고, 품승(稟承)하도록 하기 위해 이 《단경》을 설하였다.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의 설법집인 《단경》은 최초부터 경전의 결집 형식을 빌려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며, 남종의 종지를 집약한 《단경》을 제자들에게 전지하고 품승케 하기 위한 것임을 전권에 걸쳐서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혜능이 10대제자들에게 부촉하는 다음과 같은 일단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사가 말했다.
“그대들 10대제자들이여! 이후로 법을 전하라.서로 서로 한 권의 《단경》을 전수하며 근본을 잃지 않도록 하라. 《단경》을 품수(稟受)하지 않으면 남종의 종지를 얻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이 《단경》의 종지를 얻었으면 대대로 널리 유행하도록 하라. 이 《단경》을 얻게 되면 나를 만나서 친히 나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다.”
10대제자들은 혜능의 가르침을 받고 각기 이 《단경》을 베껴 써서 서로 서로 대대로 유통하였다. 이 《단경》을 가진 자는 반드시 견성(見性)하게 된다.
돈황본 《단경》은 정말 10대제자들에게 내린 인가증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주의해야 할 것은 10대제자의 대표자인 신회는 그의 어록에 《단경》에 대하여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또 다음의 일단에는 《단경》의 품승과 전지에 대하여 한층 더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대사께서 조계산에 주석하시며 소주와 광주에서 40여 년 간 중생을 교화하셨다. 문인(門人)에 대해서 말한다면, 출가 재가를 합쳐 3∼5천 명으로 말로써 다할 수가 없을 정도다. 만약 종지에 대해서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것을 의지케 하였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종지를 품승하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어느 곳에서 언제 어느 때에 누구로부터인지 그 성명을 명기하여 서로 부촉하도록 해야 한다.
《단경》의 품승이 없으면 남종의 제자가 아니다. 아직 《단경》을 품승하지 못한 사람은 그가 비록 돈교의 가르침을 설할지라도 근본의 종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언쟁을 면하기 어렵다. 돈교의 법을 인가받은 사람은 오로지 수행에 힘쓸 뿐이다. 언쟁은 바로 승부의 마음이니 도에 위배될 뿐이다.
말하자면 남종의 종지는 《단경》이며 그것을 품승, 전지하고 전수하는 사람이야말로 남종의 종지를 얻은 사람이다. 《단경》의 품승과 전지 전수가 없으면 남종의 정법제자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전지 전수할 때에는 연월일을 밝힌 시간과 장소를 명확히 하고 서로 서로 부촉하고 전수할 것을 주의시키고 있다. 그러면 육조혜능이 이렇게 종파적인 편견에 떨어진 졸부였을까?
이 일단의 후반은 북종계의 《능가경》의 전지주장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는데, 《단경》의 작자는 남종 돈교의 입장을 《단경》의 품승과 전지 전수로서 특징지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단경》을 품승하지 못한 사람은 남종의 제자가 아니다. 아직 《단경》을 품승하지 못한 사람이 비록 돈교의 법문을 설할지라도 그 근본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일절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똑같은 남종 가운데서도 돈교법문을 설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단경》의 품승과 전지 전수로서 남종의 정통법통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육조혜능으로부터 새롭게 전개된 남종 돈교의 종지를 상승하는 정통법계를 규정하려는 의도로 주장된 일단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단경》에서 주장한 10대제자를 중심으로 한 일파의 입장을 분명히 확정지으려고 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앞에서 인용한 《대의선사비명》에서 “마침내 《단경》의 전종(傳宗)으로 우열을 분명히 밝혔다”라고 하는 일절은 분명히 《단경》의 품승과 전지를 강조하는 이러한 입장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돈황본 《단경》에는 앞에서 인용한 49, 40단의 《단경》 품승과 전지에 대한 주장에 직결된 것으로 《단경》의 전수로서 남종 종지의 품승을 입증시키려 한 사자(師資) 간의 전법 사실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단경》은 법해 상좌가 편집한 것이다. 법해 상좌가 입적하면서 동학인 도제(道?)에게 부촉하였고, 도제가 입적하면서 제자 오진(悟眞)에게 부촉하였다. 오진은 지금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 있으며, 지금 이 법(남종 돈교)을 전수하고 있다.
이 일단에는 《단경》의 품승과 전수자의 계보로서 ‘법해-도제-오진’으로 이어지는 3대 전승의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편집자 법해가 도제, 오진 등 손제자에게 전래된 후대의 법계를 기록한 연대적인 모순이 있기 때문에 이 일단은 후대에 첨가한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되겠지만, 원래 《단경》은 혜능의 육성법문을 법해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회의 어록에서 주장된 선사상보다 한층 더 발전된 남종의 선사상을 혜능의 설법으로 후대에 편집한 것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일단도 〈서품〉의 말에 부응하는 입장으로 빈번하게 주장하는 《단경》의 품승과 전수된 사실을 밝혀서 이를 입증시키기 위해 《단경》의 작자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경》의 전수와 품승의 계보는 송대 초기에 재편된 혜흔본(惠昕本) 《단경》에도 보이는데, 이것은 《단경》의 성립과 실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경》은 남종 내부에서 육조혜능의 정통을 주장하는 어느 일파가 《단경》의 품승과 전지를 새롭게 강조하는 가운데 혜능의 3대 법손이 되는 오진이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학자 야나기다는 이것을 기준으로 《단경》의 작자를 오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오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가 없어 더 이상 이 문제를 추론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돈황본 《단경》은 북종의 《능가경》 전지전수설과 신회가 처음 주장한 전의설(傳衣說), 《금강경》의 전수설 등의 영향을 받아 《단경》을 가지고 남종 돈교의 정법상승의 법통설을 주장하려는 전법의 증명(인가증명)으로 내세우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10대제자에게 부촉하는 49단에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단경》을 얻은 사람은 내가 친히 가르침을 설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말이나 “《단경》을 얻은 이는 반드시 견성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단경》의 품승과 전지를 남종의 종지인 돈오견성과 결합시켜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금강경》에서 주장한 수지공덕을 생각나게 하는 말인데, 어쨌든 《단경》은 처음부터 《금강경》을 모델로 하여 남종 돈교의 성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혜능의 설법집으로 편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부처님의 경전에 비준하여 ‘경’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그 한 증거인데 이것은 부처님과 조사와의 동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10대제자에 비준하여 혜능의 10대제자를 인정, 《단경》의 품승과 전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단경》 〈서품〉의 기록을 비롯하여 10대제자에게의 부촉, 《단경》의 품승과 전지의 공덕을 설하고 있는 것은 거의 모두 《금강경》의 구성과 양식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황본 《단경》에 혜능이 10대제자에게 부촉하고 있는 일단은 다음과 같다.
대사는 드디어 문인 법해·지성·법달·지상·지통·지철·지도·법진·법여·신회를 불렀다. 대사가 말했다. “그대들 열 명의 제자들은 가까이 오라! 그대들은 다른 제자들과는 같지 않다. 내가 죽은 뒤에 그대들은 각기 한 지역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설법하여 근본의 종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게 하려 한다.”
돈황본 《육조단경》에 혜능의 10대제자 중에 전기나 기연(機緣)을 싣고 있는 사람은 지성(志誠)·법달(法達)·지상(智常)·신회(神會) 네 사람뿐이며 편집자인 법해에 대하여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점도 부사의한 일이다. 그리고 일찍이 야나기다 씨도 논한 바와 같이 《단경》의 10대제자 가운데 신회 이외의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이며, 또한 지성 등 4명의 기연도 사실 《단경》의 작자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사실 돈황본 《단경》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오조홍인, 북종의 신수, 남종의 혜능, 하택신회 등 이 4명 이외에는 전부 《단경》의 작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등장인물인 것이며, 또한 홍인·신수·혜능·신회도 역사상의 실전(實傳) 인물이 아니고, 작자가 창작한 《단경》상의 등장인물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치 《삼국지》라는 객관적인 기록인 역사자료를 토대로 하여 후대에 《삼국지연의》라는 역사소설을 만든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단경》의 제명이나 〈서품〉에서 말하고 있는 ‘소주 대범사’라는 장소를 비롯하여, ‘소주자사 위거’나 ‘법해’ 등도 《단경》의 작자가 창작한 지명과 사찰 이름이며, 가공의 등장인물이다. 이것은 10대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경》이 역사적인 실전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단경》에서 주장하는 10대제자를 그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혜능의 문하를 대표하는 역사적으로도 확실하고, 당대의 명승으로 활약한 남양혜충 국사나 사공산의 본정(本淨) 선사·영가현각 선사·남악회양 선사·청원행사 선사 등은 10대제자에도 들지 못한 졸부인가?
《단경》의 작자는 처음부터 통속적인 ‘혜능 구법 이야기’라는 문학작품으로 편집했기 때문에 당시에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인 인물들을 송두리째 언급하지 않고 일부러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서 《단경》을 편집한 것이다. ‘혜능 구법 이야기’라는 육조혜능의 출현을 소재로 한 통속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를 재미나게 엮어가기 위해서는 실존인물보다도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서 창작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단경》의 작자는 처음부터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신회어록》 ‘혜능전’에 이름만 보이는 법해를 편집자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 실제로 《단경》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혹은 남종의 어떤 계통의 사람이 만든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해답을 분명히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기서 필자의 결론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앞에서 인용한 《대의선사비명》에 언급된 신회에 대한 평가와 《단경》의 전종에 대한 기록에 다시 한번 주목해 보려고 한다.
낙양의 하택신회는 (육조혜능의) 불법(總持)을 깨달아 인가받고 홀로 지혜의 안목을 드달렸다. 당시의 선승(북종선?)들은 진실에 미혹하여 귤을 탱자라고 하는 등 불법의 본체를 바꾸고 있었다. 그래서 드디어 《단경》을 만들어 종지를 전하여(傳宗) 옳고 그름(優劣)을 가리도록 하였다.
(洛者曰會, 得總持之印, 獨暉瑩珠. 習徒迷眞, 橘枳變體, 竟成壇經傳宗, 優劣詳矣.)
여기서 귤이 탱자가 되는 이야기는 안자(晏子)의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상황의 변화가 인간의 기질을 바꾼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그리고 《단경》이라는 서명의 기록은 초기 선종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으로 역사적인 자료로서 믿을 만한 것이다. 이것은 《조당집》(952년작)과 《전등록》 28권에 혜충 국사가 남방의 종지를 비판한 곳에서 《단경》이라고 언급한 것보다도 훨씬 오래된 역사적인 자료이다.
따라서 필자는 《대의선사비명》에서 지적한 것처럼, 《단경》은 육조혜능-하택신회의 법을 계승한 신회 계통의 어떤 인물에 의해 ‘혜능의 구법과 설법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의선사비명〉의 기록과 돈황본 《육조단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신회의 비중, 그리고 오조홍인-육조혜능-하택신회로 이어지는 남종의 정통법계를 계승하고 있는 선종 법통의 존재적 위치 등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러면 먼저 돈황본 《단경》에서 신회의 존재 위치와 비중을 살펴 보자.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돈황본 《단경》에서 주장하는 혜능의 10대제자 가운데 전기가 확실한 사람은 신회뿐이며, 특히 어린 나이에 육조혜능을 참문한 기연을 싣고 있는 것 이외에도 혜능의 후계자로서 간접적으로 지목하는 혜능의 20년 후의 현기(懸記, 예언)는 실로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돈황본 《단경》에는 혜능의 10대제자와 지성·법달·지상·신회 등의 4인이 혜능을 참문한 기연을 싣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조홍인-육조혜능-신회로 이어지는 법통을 골격으로 한 것이며, 나머지는 이를 보조하고 구색을 갖추는 역할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으로 그 어떤 누구를 혜능의 후계자로 천명하려고 한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실로 10대제자라는 구성도 북종선의 전등록인 《능가사자기》 〈홍인장〉에 홍인의 10대제자설에 자극을 받고 새롭게 편성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뒤에 마조의 10대제자도 이러한 전례를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10(十)’이라는 숫자는 《화엄오교장》 등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원만의 숫자(圓數)로서 무궁무진함을 현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혜능의 10대제자 또한 스승 혜능의 원만한 지혜와 덕성이 무궁무진하게 구현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돈황본 《단경》에서 주장하는 10대제자는 육조혜능-하택신회로 이어지는 법통설에 그 중심이 있으며, 지성·법달 등 나머지 사람들은 사실 신회의 그림자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혜능의 20년 예언은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는 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잠시 돈황본 《육조단경》에서 주장하는 혜능의 20년 예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법해 상좌가 대사 앞으로 나아가 말씀 올렸다. “대사께서 돌아가신 뒤에 가사와 법은 누구에게 부촉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서 말했다. “법은 이미 부촉하였다. (누구에게 부촉했는지) 그대들은 묻지 말라. 내가 입적한 뒤 20여 년쯤에 삿된 법이 혼란스럽게 일어나 우리 남종의 종지를 혹란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때 어떤 사람이 출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법의 옳고 그름을 확정하여 종지를 수립하게 될 것이다. 즉 그가 바로 나의 정법을 받은 사람이다.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혜능의 입적(713년) 후 20여 년이라면 당나라 현종의 개원 20년(732년) 신회가 활대 대운사에서 북종의 숭원(崇遠) 법사를 상대로 종론을 펼친 때를 가리킨 것인데, 《단경》은 《역대법보기》 〈혜능장〉에서 처음 주장한 것을 채용하고 있다. 원래 이 이야기의 원형으로 보이는 《신회어록》에는 혜능의 입적 후 40년의 예언으로 되어 있는데, 40년이 20년의 잘못된 기록이 아니라면 신회 생전에 20년 예언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혜능의 20년 예언을 최초로 주장한 자료는 신회의 남종 독립과 북종 공격의 종론을 계승하고 있는 사천 보당종의 전등록인 《역대법보기》이다. 돈황본 《단경》은 《역대법보기》의 주장을 채택하여 신회를 혜능의 정법상승자로 확정시키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뒤에 종밀도 《배휴습유문》이나 《원각경대소초》 등에서 돈황본 《단경》에서 주장한 혜능의 20년 예언을 근거로 하여 하택신회가 육조혜능의 정법상승자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하택신회라는 인물은 스승 혜능의 정법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중국선종에 부각된 선승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스승 혜능의 존재가 뛰어난 제자 신회의 ‘육조현창운동’과 ‘남종 독립’ ‘돈오견성’ 등의 독창적인 선사상을 펼치게 됨으로써 한층 더 분명하게 노출된 것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종 공격과 활대의 종론의 기록인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과 《신회어록》 〈혜능전〉 등에 언급되고 있는 육조혜능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은 실제 《단경》의 구성과 소재가 되고 있다. 말하자면 《단경》으로 종합되고 있는 육조혜능에 관한 모든 것이 신회의 ‘육조혜능 현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승되고 발전된 것이라는 점이다.
신회의 남종 독립과 육조현창운동의 성과를 이용하여 혜능 구법 이야기로 편집한 것이 《단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돈황본 《단경》에 주장하고 있는 것 가운데 달마의 가사는 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에게 차례로 법을 전해 주면서 그 인가증명으로 전해 주었다는 전의설(傳衣說)과, 남종 돈교의 종지로 규정하고 있는 돈오견성의 선사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반야바라밀법과 자각의 주체인 불성을 깨닫는 돈오견성설의 두 골격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남종 돈교의 선사상은 구체적인 실천사상으로, 마음에 일체의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과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 무상(無相)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남종의 종지를 좌선의 정의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으며, 일행삼매(一行三昧)의 구체적인 실천정신으로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모두 신회가 처음 주장한 선법을 토대로 하여 한층 더 발전시킨 선사상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금강경》의 선양이나 무상심지계인 대승보살계의 수계설법도 모두 신회의 어록인 《단어》를 토대로 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말하자면 《금강경》의 실천사상인 반야바라밀법에 기반을 둔 남종의 삼학설(三學說)·돈오견성·무념·무상·무주설·좌선의 정의와 일행삼매, 《금강경》의 선양, 선종의 법통설과 전의설(傳衣說) 등 《단경》에서 주장하는 모든 선사상이 신회에 의해 새롭게 주장된 남종의 선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새롭게 혜능의 설법집이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편집된 것이 돈황본 《육조단경》인 것이다.
그리고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는 당시의 선사상을 수용, 선불교의 독자적인 대승보살계 수계법문으로 설법하는 인연을 만들어 혜능 출세개법(出世開法)의 무대로 설치하고 있는 작가의 구상은 실로 《단경》이라는 멋진 ‘혜능 구법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돈황본 《육조단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상의 선사상과 개념화된 용어는 거의 모두 신회의 주장을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신회어록》의 선사상보다도 한층 더 발전된 사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사상의 역류현상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 선종사상사에서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한 안목을 갖추지 못한다면 선사상사를 바로 볼 수 없게 된다.
여기서는 《단경》을 둘러싼 선사상사의 고증을 다룰 여유가 없으므로 이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지만, 이러한 선사상사적인 시각에서 돈황본 《육조단경》의 성립 연대를 추정한다면 《역대법보기》(774년)와 《조계대사전》(781년)의 영향을 받고 《보림전》(801년)에 영향을 미친 점으로 봐서, 《조계대사전》과 《보림전》의 중간쯤인 8세기 말(790년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돈황본 《단경》은 신회(684∼758)의 입적 후 30여 년이 지난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더욱이 현종의 말기에 돌발한 안사(安史)의 대란(大亂) 이후 급변한 시대적인 사조와 선사상의 발전을 반영한 것으로 신회 이후에 발전된 남종선의 사상적인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단경》의 작자는 혜능의 20년 예언을 응용하여 신회의 정법상승을 강조하는 한편, 선사상의 기술에도 신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경향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43단의 지성이 참문하는 기연을 기록한 일단에 북종 신수의 교설로 소개하고 있는 계·정·혜 삼학설이 있다.
“모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계(戒)라고 하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慧)라고 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계정혜인 것이다.”라고 하는 북종 신수의 삼학설은 사실 신회의 《단어》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단경》의 작자가 이것을 일부러 북종 신수의 교설로 규정하면서 혜능의 심지법문 삼학설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신회를 옹호하려는 배려에서 응용된 심의 있는 처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삼학설을 혜능의 정법상승자인 신회의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며, 스승 혜능의 선사상보다도 제자인 신회의 선사상이 시대적으로 선행된 모순을 드러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소개된 문헌자료로서 《단경》의 작자를 확정할 만한 직접적인 근거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일단 《대의선사비명》에 전해진 기록과, 돈황본《단경》에 나타난 신회라는 인물의 존재적 비중과 그 위치를 고려하여 신회 계통의 어떤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란 점을 가정해 두고자 한다.
《단경》의 작자는 왜 자기의 이름을 숨기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단경》을 제작하였으며 그 필연성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는 남종의 조사로서의 육조혜능상의 정립과 남종 돈교의 성전으로서의 《단경》이고, 두번째는 신회의 남종 독립과 육조현창운동 이후 전통적인 북종 신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의미에서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이 출현하게 된 통속적인 대중문학작품으로서의 《단경》으로 보려는 것이다.
먼저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의 설법집인 성전으로서의 《육조단경》을 제작할 필요성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그것은 즉 육조혜능을 남종의 조사로서 새로운 선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성위(聖位)의 조사로 추앙하여, 남종 돈교의 종지를 설한 경전으로서의 의미와 권위를 부여하려고 편집한 점이다. 신회의 육조현창운동 이후 혜능의 존재는 달마계 선종의 제6대째 정법상승자로서, 또한 돈교의 종지를 설한 남종의 조사로 추앙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신회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을 비롯하여 《신회어록》 《역대법보기》 등에 전하고 있는 〈육조혜능전〉이나, 《조계대사전》 등은 그러한 신회의 육조현창운동의 성과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혜능의 제자인 신회의 설법집인 어록은 이미 몇 종류가 세상에 널리 유포되고 있었으며, 또한 달마의 어록인 《이입사행론》과, 도신과 홍인, 북종 신수의 설법집도 전래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종의 조사인 육조혜능의 정리된 전기나 그의 육성을 전하는, 남종 돈교의 종지를 전하는 설법집은 없었다. 또한 북종의 신수나 혜능의 제자인 신회는 입적 후에 곧바로 왕실로부터 명예스러운 선사호(禪師號)가 하사되었으나, 혜능이 입적한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예스럽고 권위있는 선사시호는 없었다.
사실 《단경》의 출현 이전의 혜능의 모습은 제자 신회의 입을 통해서만이 알려진 한정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북종 신수의 법계가 달마계의 선종에서 비정통인 방계임을 입증하고 배척하기 위해 신회의 입을 통해 선종의 역사상에 등장된 남종의 상징적인 조사로서의 존재인 육조혜능이었으며, 신회의 주장과 그늘에 가리워진 일부의 희미한 모습밖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회어록》과 《역대법보기》의 육조혜능전이 거의 모두가 그러한 신회의 북종 공격과 법통설의 주장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혜능상인 것이다. 육조혜능전으로 가장 오래된 왕유의 《육조혜능선사비명》(《전당문》327권)도 신회의 간청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역시 이러한 입장의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조계대사전》(781년작)이라는 독자적인 육조혜능전을 기록한 전기집도 있는데, 이것은 법재(法才)의 《광효사예발탑기》 등의 자료에 의거하여 혜능이 활약한 조계 보림사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록한 육조혜능의 전기집이다.
말하자면 단편적인 육조혜능의 전기는 신회의 주장을 토대로 약간 만들어지긴 했으나 종합적이지는 못하였고, 또 실제 혜능의 남종 돈교의 종지를 설한 교설은 이러한 자료로서는 파악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단경》의 작자는 남종의 조사로서의 육조혜능의 전기와 남종 돈교만의 특색있는 종지를 혜능의 육성 설법집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 알려진 여러 가지 혜능에 관한 자료들을 모두 수집하여 무상심지계 수계설법의 계단 설법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남종 돈교의 종지를 개연한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구상하여 편집한 것이 《육조단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신회가 주장한 조통설(祖統說)과 전의설은 당시 가장 번성한 북종선의 세력에 대한 공격무기로 제시한 것이었으며, 혜능계의 남종이 달마계 선종의 정통 법통을 상승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인가증명으로 제시된 임시방편의 억측이었다.
그러나 안사의 대란 이후 정세의 변화와 함께 북종선이 쇠락하면서, 소위 남북대립의 시대가 지난 지금, 혜능의 존재는 새로운 시대에 남종선의 조사로서 선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자로 추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육조단경》은 수당대에 많이 만들어진 위경(僞經)의 종류나 달마의 권위 있는 이름을 씌운 《달마론》 등의 출현과 똑같은 사정에서 육조혜능의 설법집이라는 형식과 권위를 뒤집어 씌운 후대의 저술인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남종의 조사인 육조혜능에게 기대한 신앙의 일면이기도 한 것이며,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남종의 조사 혜능의 설법집인 《단경》을 편집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두번째의 시각으로 본다면 《단경》은 처음부터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의 출현 이야기로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혜능이라는 인물이 그의 제자 신회에 의해 선종의 역사상에 희미하게 등장하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남종의 조사로서 어떤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고 있는 점이다.
만약 혜능이라는 사람이 홍인의 문하에서 신수와 같이 전기가 분명하고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혜능에 대한 카리스마적인 매력과 궁금증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경》의 작자는 이러한 신회가 제시한 혜능의 매력을 변방 오랑캐 출신인 행자의 신분으로 달마계의 정법을 구하는 감동적인 구법 이야기와 남종 돈교의 종지를 설하는 행화를 골격으로, 당시의 선불교상에 새로운 종교문학의 주인공으로 구상하여 많은 수도인들에게 용기와 가능성의 힘을 제시하고자 《육조단경》을 저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원래 《단경》의 작자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단경》을 만들면서도 어떤 확실한 역사적인 근거자료를 토대로 하여 혜능전과 그의 설법집을 만들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목적으로 《단경》을 편집하려고 했을지라도 혜능에 대한 확실한 역사적인 근거자료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경》의 작자는 오히려 시대적인 요청에 부흥하여, 신회의 육조현창운동으로 전개된 흥미있고 대중성이 풍부한 다양한 화제를 소재로 하여 구도자의 정신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육조혜능 구법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즉 황매산 오조홍인의 도량을 무대로 하여 문하를 대표한 북종 신수와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영남의 변방 오랑캐 출신인 나무꾼 노행자 혜능의 구법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각색하여 만든 것이 《육조단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법을 체득하기 위해 노모를 두고 멀리 황매산의 선지식을 찾아 불굴의 구도정신을 제시하고, 북종 신수와 깨달음의 게송으로 한판 승부를 하고 달마로부터 전래된 정법을 상승하고, 그 인가의 증명으로 가사를 전수받아 조사의 지위를 얻게 된 전법의 사실과 불법상승의 유래를 혜능이 대범사 강단에서 스스로 회고담으로 이야기하게 하고 있는 작자의 교묘한 구상은 시대의 독서물로서 풍미하기에 충분한 드라마였다.
최근 돈황에서 발견된 돈황변문(敦煌變文) 가운데에는 《태자성도경(太子成道經)》 《대목건련명간구모변문(大目乾連冥間救母變文)》 《여산원공화(廬山遠公話)》 《순자변(舜子變)》 《파마변문(破魔變文)》 《항마변문(降魔變文)》 등 중국불교에서 찬술된 종교 문학이 많이 소개 되고 있다. 변문(變文)이란 경전이나 불교의 내용을 일반 사람들이 알기 쉽게 변경하여 이야기 책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따라서 《유마경변문》이나 《아미타경변문》 《법화경변문》 등이 많이 출현하고 있다. 어떤 경전에 대한 변상도(變相圖)는 경전의 내용을 압축하여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한폭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며, 변문은 경전의 내용을 평이하고 알기 쉬운 이야기로 재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돈황본 《육조단경》도 이러한 돈황변문과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만든 선불교의 구법 이야기(변문)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단경》은 육조혜능의 출현을 소재로 한 선불교의 구법 이야기를 문학적인 차원에서 만든 ‘혜능 출현 이야기’로서 당대의 선종 계통의 사람이나 일반인들에게 보급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컨대 당시 《단경》은 선불교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작품이었을 것이며, 그러한 사실은 돈황본 《단경》이 지금까지 5종류나 발견되고 있다는 점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초기 당대 선종의 입장에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고찰해 보자. 안사의 대란 이후 8세기 말경, 당대의 선종은 북종선 시대가 막을 내리고, 혜능계의 남종선 각파가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종파는 종밀을 중심으로 하는 신회계의 하택종, 사천의 정중종과 보당종, 금릉의 우두종, 강서 마조계의 홍주종 등이 각기 독자적인 선풍을 드날리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단경》을 혜능의 설법집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당시 선종 각파에서 《육조단경》을 혜능이 친히 설한 설법집으로 간주하고 인정한 권위있는 성전으로 생각했었다면, 당대 선종 각파 선승들의 어록이나 설법에 《육조단경》이 빈번하게 인용되고 회자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단경》에서도 자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선종 각파에서는 서로서로 《단경》의 품승과 전지를 주장하면서 옹호했을 것이다. 더욱이 앞에서도 인용한 《대의선사비명》이나 《전등록》 제28권에 수록된 혜충 국사의 《단경》 비판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또 혜능계의 남종의 입장임을 주장하는 선종의 사람들은 자파의 조사인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권위있는 《단경》을 그들의 저술이나 어록, 선종의 역사서적 등에 많이 인용함은 물론 주석서나 《단경》 찬탄도 많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 선종계 사람들의 저술이나 어록, 전등사서 등에는 《육조단경》의 인용은 물론, 그 어느 곳에서도 《단경》이라는 서명을 언급한 곳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앞에서 자주 언급한 《대의선사비명》과 혜충 국사의 남방 종지 비판은 그러한 입장을 표명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엄종 징관(澄觀)의 《화엄경수소연의초》나 종밀의 《도서》 《배휴습유문》 《원각경대소초》 등의 저술에도 《육조단경》의 깨달음의 노래(心偈) 일절을 편의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인용자료의 근거가 되는 《단경》이라는 책명은 그 어느 한 곳에서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황벽의 《전심법요》나 《동산어록》 《보림전》 《조당집》 등의 선종 어록과 선종사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대 선종의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왜 선승들은 《단경》의 내용을 편의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면서, 고의적으로 《단경》이라는 책 이름은 일체 밝히지 않고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의 결론을 먼저 밝히면, 당대 선종의 사람들은 당시 많이 유행하고 있는 유명한 《육조단경》을 남종 돈교 혜능의 설법집인 성전으로 간주하지 않고, 통속적인 문학작품 ‘혜능 구법 이야기’로 가볍게 읽었기 때문이다.
《대의선사비명》과 《전등록》 28권, 혜충 국사의 《단경》 비판에 서명을 밝히고 있는 것은 아마도 최초의 일로 이례적인 사건이지만, 이것은 모두 비판적인 의도를 가지고 언급한 것이며, 또한 육조혜능과는 전연 관계 없는 기사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육조단경》을 혜능의 설법집으로 인정하면서 자기들의 저술이나 어록 등에 다른 권위 있는 조사의 어록이나 선적처럼 공공연히 그 서명과 내용을 인용하고 거론하는 것을 일부러 기피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당대 선종의 사람들이 《육조단경》을 혜능의 설법집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경》을 ‘혜능 구법 이야기’로서 구도자의 일생을 묘사한 종교문학으로 가볍게 읽었지만, 실제로 《단경》을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이 남종의 종지를 설한 권위있는 성전으로 인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즉, 《육조단경》은 처음부터 어떤 작자에 의해 ‘혜능 구법 이야기’로 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자가 일부러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익명의 ‘법해’라는 혜능의 제자를 편자로 제시한 것도 당시 《단경》을 다른 선적과 마찬가지로 남종 돈교의 선사상을 천명하기 위한 저술로서 보다는 ‘혜능 구법 이야기’인 문학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작자는 《단경》의 출현 이후 선종 계통의 사람들의 강력한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육조단경》은 출현한 당초부터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된 책이었다. 당대의 선종 사람들이 《단경》을 많이 읽고 편의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면서도 공공연히 《단경》이라는 책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한 증거이며, 앞에서도 인용한 《대의선사비명》에 언급하고 있는 일절은 당시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등록》 제28권에 남양혜충 국사가 남방 종지를 비판한 곳에 “남방 종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단경》을 가지고 이리저리 바꾸고, 누추한 말을 섞어서 성인의 말을 깎아 버리고 후학들을 어지럽히니 어찌 가르침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한 일이다. 우리 종지는 망하는구나!.”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혜흔본 《육조단경》의 서문(967년작)에도 “옛날 우리 육조 대사께서 널리 학인들을 위하여 견성 법문을 직접 설하시어 모두가 스스로 깨달아 성불하게 하셨다. 그것을 《단경》이라고 하고 후학들에게 유통하여 전하셨다. 고본(古本) 《단경》은 글이 복잡하고 어지러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처음에는 기쁠지 모르나 나중에는 싫증나게 한다.”라고 비평하고 있다.
혜흔이 말하는 고본 《단경》은 아마도 돈황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혜흔은 고본 《단경》을 재편집하여 간행하면서 서문을 쓴 것이다. 또 송초의 낭간(郞簡)의 《육조법보기서》(1056년작)에도 《육조단경》이 문자가 상스럽고 번잡하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송대 종감(宗鑑)이 편집한 《석문정통》 제8권 〈의천장〉에도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육조단경》과 《보림전》 등은 모두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할 책으로, 그 거짓되고 허망함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명승 도겐(道元)은 《정법안장》 〈사선비구(四禪比丘)〉에 “《육조단경》은 견성이란 말이 있다. 이 책은 바로 위서(僞書)이다.”라고 비판한 기록들도 잘 알려진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육조단경》은 《단경》을 혜능의 설법집으로 간주하고 선양하는 선승들까지도 ‘상스럽고 번잡한 책’이라고 비난받고 있었다. 송초 혜흔의 《단경》 서문이나 낭간의 서문에 지적한 것처럼, 《단경》은 최초로 혜능의 남종 돈교의 종지를 설한 성전이라기보다 오히려 문장이 저속하고 번거로운 통속적인 문학작품인 ‘혜능 구법 이야기’로 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단경》을 정말로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간주하고 신앙화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문장의 저속함과 번잡한 내용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고, 혜능의 설법집으로서의 내용을 고증하지 않았음을 《단경》 비판자들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냉정하게 셍각해 볼 때 《단경》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황매산 오조홍인의 문하에서의 ‘혜능의 구법 이야기’는 너무나도 통속적이며 비속한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육바라밀의 보살도 수행과 무아와 공사상의 실천을 수행하는 선불교의 차원에서 볼 때 전의설과 전법게라는 인가증명의 실물을 가지고 불법의 행방을 논하는 법통설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돈황본 《단경》에서 제시한 수미(首尾)의 제명과 서품 등 곳곳에서 혜능의 설법으로 주장하는 반야바라밀법과 무념·무상·무주의 실천사상은 무슨 의미로 설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통속적인 이야기책을 혜능의 역사적인 자서전으로 인정하고, 또한 신회가 북종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통설과 전의설을 가지고 혜능이 정법의 유래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있는 내용은 사실 문학작품의 차원을 벗어나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했다고 하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이 가사를 전하는 전의설과 같은 인가증명으로 해결되는 유상(有相)의 종교란 말인가? 인가증명으로 정법의 상승이 가능하다면 교외별전이나 정법안장의 주장은 의미없고 쓸모없는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대승불교의 정신인 반야바라밀법을 체득하는 구도자의 정신에서 볼 때 《단경》의 이야기는 역시 종교적인 차원에서 공공연하게 거론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북종의 신수는 ‘낙양 장안 이경(二京)의 법주(法主)이며, 삼제(三帝)의 국사’로 당대에 최고로 존경받은 당시의 명승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경》에서 주장하는 홍인 문하의 졸부, 혜능의 조연자로 연출된 신수를 역사적인 인물로 간주해서는 정법을 바로 봐야 할 우리들의 혜안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당대 선종 계통의 사람들은 이와 같이 ‘혜능 구법 이야기’로 만들어진 《단경》이었음을 지혜의 안목으로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경》을 ‘혜능 구법 이야기’책으로 통속적인 소설(變文)처럼 가볍게 읽었을 뿐, 《단경》을 사실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남종의 종지를 설한 성전으로 간주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대 선종의 선문헌이나 선승들의 저술, 어록 등에는 《단경》이라는 서명을 공공연히 제시하면서 인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택신회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자임하는 종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단경》이란 서명을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경》은 남종의 조사인 육조혜능을 주인공으로 했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대 선종의 사람(선승)들은 《단경》을 단순히 ‘혜능 구법 이야기’라는 통속적인 문학작품(變文)으로 읽었을 뿐이지,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이 설한 남종 돈교의 종지라고 간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당대 선승들은 《단경》을 읽고 그 내용의 일부를 자기의 저술이나 어록 등에 편의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면서도 《단경》이라는 책 이름을 의도적으로 명기하지 않았다. 이는 《단경》을 혜능과 남종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픽션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창작물인 ‘혜능 구법 이야기’책으로 가볍게 취급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단경》이 급속히 보급되자, 처음에는 단순히 ‘혜능 구법 이야기’책으로 가볍게 읽혀졌던 《단경》도 새로운 평가의 시대를 맞게 된다.
즉 남종의 조사로서 선종의 이상적인 인격인 육조혜능상(六祖慧能像)이 ‘혜능 구법 이야기’인 《단경》을 통해서 점차로 역사적인 혜능의 모습과 혜능의 선사상으로 간주되고 인정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단경》도 ‘혜능 구법 이야기’인 본래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역사적인 인물 혜능의 실전과 그가 설한 남종 돈교의 선사상으로 인정하고 신봉하려는 새로운 육조현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송대 초기의 선승들이 《단경》의 재편운동과 함께 저속하고 번잡한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면서 점차로 《단경》을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간주하고 인정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경’이라고 명명한 제목에 맹종적으로 빠져들면서 《단경》을 성전으로 받들어 모시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이러한 《단경》의 유통과 더불어 인식의 변질을 살펴보면서, 송대 초기 선승들이 요구하는 육조혜능의 모습(像)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당나라 시대에 일본 승려 원인(圓仁, 794∼846)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수집한 경전 목록(《입당구법목록》)에는 그가 장안에서 《조계산 제육조 혜능대사설 견성돈교 직료성불 결정무의 법보기단경(見性頓敎 直了成佛 決定無疑 法寶記壇經)》(沙門 法海集)을 입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원진(圓珍, 814∼891)은 복주(福州), 온주(溫州), 대주(臺州)에서 《단경》을 입수했다고 그의 목록에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에 유통되고 있는 《단경》은 모두 돈황본과 똑같은 《단경》이었으리라 보아지는데, 당나라 시대에는 ‘혜능 구법 이야기’책인 《단경》이 전국 각지에 널리 유포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시대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방인인 일본 승려들의 눈에는 ‘혜능 구법 이야기’도 혜능의 설법집인 소중한 선문헌으로 간주하고 모두 목록에 기록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고려시대 보조지눌의 〈단경발문(壇經跋文)〉에 언급된 내용도 원인의 목록과 같은 점으로 봐서 돈황본 계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일본의 무착도충(無着道忠)이 고려시대에 간행된 《단경》을 입수하여 소장한 사실과 원인(圓仁)의 목록과 똑같은 긴 《단경》의 제목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경》의 한국 전래 문제에 관하여는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자. 《단경》의 유포는 지역적인 확대뿐만 아니라, 독자층도 폭넓게 형성되었다. 출가 승려뿐만 아니라 일반 세속인들에게도 인기있는 이야기 책이었던 것 같다. 그 한 가지 예로서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미도(味道)〉라는 율시(律詩)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일절이 보인다.
7편(七篇)의 진고(眞誥), 선사(仙事)를 논하고, 1권(一卷)의 단경, 불심(佛心)을 설한다.
중국 양나라 시대의 유명한 도사 도홍경(陶弘景)의 저술인 《진고(眞誥)》와 《육조단경》을 읽은 백낙천이, 도교에서 주장하는 신선이 되는 가르침과 《단경》에서 설하고 있는 불심의 자각으로 도의 경지를 음미하고 있음을 읊고 있는 일단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 권의 《단경》은 아마도 현재의 돈황본과 똑같은 책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백낙천은 또 그의 〈증표직(贈杓直)〉이라는 제목의 시에도 그가 일찍이 젊었을 때에는 《장자》의 〈소요편〉에 마음을 쏟았고, 요즈음에는 심지(心地)를 가지고 남종선에 회향하고 있다고 읊고 있는데, 그가 여기서도 《장자》의 〈소요편〉과 남종의 심지법문을 대비하고 있다. 특히 남종선의 실체를 ‘심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역시 《단경》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이 당대의 문인들까지도 《단경》을 읽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처음 ‘혜능 구법 이야기’로 만들어진 《육조단경》도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송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육조혜능이 친히 설한 남종 돈교의 종지로 간주하고 성전시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혜흔(惠昕)과 설숭(契崇)이라고 할 수 있다. 서력 976년(太歲 丁卯)에 씌어진 혜흔본 《단경》의 서문에는 대략 다음과 같이 《단경》을 재편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옛날 우리들의 육조대사께서는 널리 학인들을 위하여 곧바로 견성 법문을 설하시어 모두가 스스로 깨닫고 성불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설법집을 《단경》이라고 하는데, 후학들을 위하여 유포되어 전하고 있다. 고본(古本)은 문장이 번거로워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처음에는 기쁜 마음이지만, 곧 싫증이 난다. 나는 정묘년(976년)에 사영탑원(思迎塔院)에서 두 권으로 나누고 11문(門)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특히 그는 “옛날 우리들의 육조대사께서는……”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단경》을 육조혜능이 설한 남종 돈교의 견성성불 법문으로 확실히 믿고 있음을 단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래서 번거롭고 조잡스러운 문장을 일부 수정하여 재편된 《단경》을 출판하고 있는 것이다.
혜흔이 고본 《단경》을 문장이 조잡하고 번거롭다고 비판한 것은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의 설법집인 성전으로 간주하고 읽어 볼 때에 그러한 느낌을 받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혜흔이 말하는 고본 《단경》이란 한 권으로 된 책으로 현재 전하고 있는 돈황본과 동일한 《단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혜흔은 한 권으로 된 고본 《단경》을 두 권으로 나누고, 내용도 11단으로 분류하여 재편된 《단경》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설숭(1007∼1072)은 《단경》 찬탄문을 지었으며, 1056년(至和 3년) 3권본 《단경》으로 재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津文集》11권. 郞簡의 〈六祖法寶記敍〉 참조)
이와 같이 송대 초기에 《단경》의 재편 운동은 《단경》을 육조혜능의 역사적인 전기와 설법집으로 믿고, 남종의 성전으로 재편하는 운동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단경》의 재편 운동은 《단경》의 출현 이후 약 100여 년 동안의 시대적인 흐름과 함께 도속 일반에게 널리 유포되어 읽혀져온 《단경》의 시대적 호응에 대한 불가피한 편승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누누이 언급한 것처럼, 사실 당대 선종의 선승들은 《단경》의 출현에 대한 올바른 안목으로 냉정을 잃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통속적인 선불교의 구도적인 문학작품인 ‘혜능 구법 이야기’로 가볍게 읽었을 뿐,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의 설법집인 성전으로는 간주하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선종어록이나 기타의 선문헌에는 《단경》이라는 책 이름이 한 곳에도 명기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선종의 역사를 기록한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단경》에서 주장한 전의설이나 전법게를 비롯한 선종 법통설 등을 받아들여서 자파의 새로운 선종사서로 엮은 조사선의 전등록 《보림전》이나, 《조당집》에도 《단경》 혹은 《육조단경》이라는 책 이름은 한 곳에도 밝히지 않고 있다. 즉 당대의 선종사서나 선종어록 등에서 《육조단경》을 혜능의 설법집으로 간주하고 역사적인 인물 혜능과 연결시켜서 인용한 자료는 한 점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선승들의 뛰어난 안목으로 불법을 바로 판단하였고, 육조혜능이나 《단경》이라는 권위에도 떨어지지 않는 정법 안목을 구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남양혜충과 같이 남방 종지라고 강조하면서 육조혜능의 성의를 손상하는 《단경》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육조단경》을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공인한 최초의 선종의 역사서는 1004년에 도원(道原)이 편집한 《경덕전등록》이었다. 즉 《경덕전등록》 제5권 육조혜능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을 기록하고 있다.
소주지사 위거는 대사께 대범사 강당에서 묘한 법문을 설해 주실 것과 아울러 무상심지계를 수계하여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의 설법을) 문인이 기록하여 《단경》이라고 하였으며, 세상에 많이 유행되었다.
특히 도원의 《경덕전등록》은 경덕(景德) 원년에 국가에서 공인한 대장경에 편입(入藏)된 역사적인 선종사서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선종 일부에서 사사롭게 널리 유통되고 주장된 내용이 이제는 국가에서 공인한 역사서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처음 ‘혜능 구법 이야기’와 같은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진 《육조단경》이 송대 초기에 이르러 혜능의 설법집으로 국가적인 공인을 받고 세간에 널리 유포되게 된 것이다. 또한 《전등록》 제5권에는 《단경》의 편집자인 법해를 혜능의 제자로 기록하고 그의 약전을 수록하고 있으며, 그 후미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여 놓고 있다.
《단경》에서 말하는 문인 법해(法海)라는 사람이 곧 선사인 것이다.
말하자면 《전등록》은 《단경》을 육조혜능의 친설법집으로 확정함과 동시에 편자인 법해를 실존 인물로 입전(立傳)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등록》 제5권 〈혜능전〉과, 혜능 제자들의 전기는 거의 모두 《조계대사전》과 《육조단경》등에 언급된 자료를 근거로 하여 그대로 실제 인물로 간주하고 수록하고 있다. 특히 혜능의 제자로 전기를 싣고 있는 《단경》의 편집자인 법해·지성·법달·지상·하택신회 등의 전기는 돈황본 《육조단경》에 전하고 있는 혜능의 10대제자와 참문 기연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돈황본 《육조단경》의 10대제자 가운데 신회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단경》의 작자가 《단경》상에 등장시킨 가상의 인물로, 사실 신회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등록》의 편자는 《단경》을 혜능의 친설법집으로 간주하고 믿었기 때문에 법해 등 10대제자의 기연을 실제 인물로 확신하고 그들의 전기를 《단경》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싣게 된 것이다. (아니면 고의로 혜능 문하의 제자들 숫자를 많게 하기 위해 수록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시킨 거짓 전등사서가 되고 만 것이다.) 어쨌든 《육조단경》을 혜능의 친설법집으로 확정하고 공인한 것은 《전등록》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앞서 혜흔 등에 의한 《단경》의 재편과 성전화 운동의 성과를 답습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전등록》의 국가적인 공인을 의심할 사람은 없으리라. 또한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단경》의 유행과 육조혜능이라는 남종 조사의 권위까지 합쳐지면서 일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단경》을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성전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전등록》의 공인된 입장을 근거로 하여 설숭은 《단경》의 찬탄문을 짓게 되었고, 《단경》을 3권으로 다시 재편집하여 간행하면서 혜능의 설법집임을 힘있게 주장하였다. 설숭의 《단경》 재편 간행을 기념하여 1056년 3월에 작성된 낭간(郎簡)의 〈육조법보기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혜능 대사는 달마의 법을 이은 중국선종의 제6대 조사이다. 그래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육조(六祖)라고 불렀다. 《법보기》는 대개 육조가 설한 그의 법문집이다. 그의 법문은 생명(生靈)의 근본이 된다.
《전등록》 이후의 송대 불교계(선종)에서는 《육조단경》을 육조혜능의 설법집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단경》에서 설한 그의 법문은 “생명(生靈)의 근본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인 신비성까지 내포된 불가사의한 성전으로 신앙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송대에는 《단경》의 작자가 창작하여 묘사한 혜능의 모습도 점차로 현실적인 인간의 차원을 벗어나 선불교의 이상화된 조사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단경》도 ‘혜능 구법이야기’에서 이젠 먼 옛날의 역사적인 인물인 ‘혜능 조사의 구법과 설법’으로 신앙과 신비성까지 첨가해서 유포되었던 것이다. 즉 처음 ‘혜능 구법 이야기’로서 만들어진 《육조단경》은 당대 선종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었지만,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송대에 이르러서는 《단경》을 혜능의 친설법집으로 인정하고 성전시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혜능 구법 이야기’의 주인공인 혜능의 모습은 자연히 당나라 시대의 역사적인 실존 인물과 함께 인식하게 되었고, 《단경》에 등장된 혜능상(像)이 선종의 육조혜능상으로 탈화(脫化)되어 하나로 고정관념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혜능의 구법 이야기’로서 《단경》의 제작은 당대 선종의 흥융과 함께 육조혜능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선불교의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혜능 구법 이야기’인 《단경》에 묘사되어 있는 노행자 혜능의 모습은 종래 중국 선종의 사람들이 추구하려고 한 이상적인 조사상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승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중국선종의 조사로서는 최초로 천박한 오랑캐(�껴) 출신 행자의 육신으로 확실히 깨달아 체득한 구현자로서 중국의 선불교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남종의 조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열반경》 27권 〈사자후보살품〉 등에서 설하고 있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주장은 사실 중국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디까지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이상적인 원리를 설하고 있는 경전상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단경》의 작자가 제시하고 있는 ‘혜능 구법 이야기’에서는 짐승과 같은 오랑캐 출신인 노행자가 그러한 이상적인 원리의 테두리를 부수고 육신의 모습 그대로 불성을 분명히 깨닫고 반야의 지혜를 현시하며 남종 돈교의 법문을 펼치고 있는 살아 있는 조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선종의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육조혜능의 출현을 구법 이야기로 엮은 드라마틱한 《육조단경》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선불교의 이상적인 조사상의 전형으로서의 필요성을 《단경》에서 찾고 구하게 되면서,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며 점차적으로 신앙화되어 전승되어 오게 된 것이다.
《육조단경》이 송대 선종에서 혜능의 설법집으로 또, 남종의 성전으로서 정착하게 된 이유도 변방 오랑캐(�껴) 출신인 나무꾼 노행자의 비약적인 견성성불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과 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대의 ‘혜능 구법이야기’가 송대에는 남종의 성전으로 추앙되는 등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육조단경》을 만든 작자의 뛰어난 문학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혜능의 설법집으로서 《육조단경》이 중국 선불교의 사상에 미친 영향도 지극히 많았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 선불교 사상사에서 《단경》의 출현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다른 기회에 발표하고자 하는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선불교의 실천 사상을 확립한 금자탑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대승불교의 양대 골격인 반야사상과 불성사상을 선의 실천으로 통합하여 체계적인 수행으로 선불교 실천 철학을 확립한 것이다. 이러한 《육조단경》의 선사상을 토대로 하여 조사선의 심지법문과 생활종교가 전개되었고, 또한 《보림전》에서는 《단경》의 사상과 전법게를 이어 받아서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이심전심으로 전래된 불법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하고 있다.
이상으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한 마디 더 첨가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근 20여 년 간 《육조단경》을 수차례 읽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연구하면서 느낀 점은 《단경》의 주장과 내용에 사상적인 모순점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정상적인 선문헌으로는 볼 수 없는 전의설과 법통의 논쟁을 강조하는 유상(有相)의 종교를 불교 정신이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법(心法)의 불교 정신과 선사상은 일체 만법이 공(空)한 것을 자신이 직접 체득하여 반야의 지혜를 전개하는 것이다.
《단경》에서는 혜능의 법문으로 반야바라밀법·무주·무상·무념을 누누이 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의(傳衣)로 인가를 증명한다든가 한 사람에게만 불법을 전한다는 등 소승보다도 못한 법통 상승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세속적인 정치구조보다도 더 조잡스러운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오조홍인이 육조혜능에게 가사와 함께 법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전한다는 것인가?
전할 법이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전한다는 것인가? 사실 《단경》의 이러한 이야기는 문학작품으로 만든 것이기에 이러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선사상적인 한계도 많이 보인다. 육체와 마음의 이원론적인 사고는 《단경》의 선사상적인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으며, 돈오견성·심지법문·36대법(對法) 등에 많은 대승경전을 의용하고 있는 것은 경전의 형식과 권위주의적인 한계를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단경》을 비롯하여 선어록을 읽고 배우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정법의 안목을 갖추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 외도이다. 《단경》과 일체의 경전의 권위까지 초월하여 지금 여기서 자기의 정법의 안목을 일상 생활에 지혜롭게 전개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선불교를 공부하는 것이나 참선수행을 하는 의미도 사실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갖추기 위한 것이다. 선학연구란 선의 문헌이나 선어록 등을 읽는 일이다. 즉 선의 고전(古典)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읽는 것이다. 좌선 수행도 결국 깨달은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읽는 일이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깨닫는 일이다. 선의 문헌과 자기와 주객이 일체가 되고, 자기 속의 심연(深淵)을 삼키는 것이다.
우리가 선문헌을 읽고 배우는 참된 의미는 글자를 통해서 외우고 익히는 문자가 아니라, 선어록과 자기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으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일이다. 필자가 여기서 비판적인 시각에서 논해 본 《육조단경》도 마찬가지이다. 《육조단경》을 진지하게 마음의 눈으로 읽고 배우면서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각자의 안목을 갖추는 것이 진정한 참선 수행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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