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선불교(禪佛敎)

선불교 30. 한 방울의 조계 시냇물

slowdream 2007. 9. 14. 23:25
 

* 한 방울의 조계 시냇물[曹源一滴水]


묻는다 : 어떤 것이 曹溪의 물 한 방울입니까?

 답한다 : 曹溪의 물 한 방울이다.


 唐末 5대 때 덕소(890-971)라는 중이 법안종 開山祖인 문익선사를 찾아가 慘聞한 禪問答이다. 話頭로는 ‘조원일적수(曹源一滴水)’라 한다. 덕소는 法眼禪師의 “조계의 물 한 방울이란 바로 曹溪의 물 한 방울” 이라는 말에 돌연 개오(開悟), 평생 동안 54명의 善知識을 참문해도 풀지 못한 佛法의 根本 眞理에 대한 의단(疑團)을 풀었다.


 이 禪問答의 核心은 ‘曹源一滴水’다. 조원(曹源)은 禪宗의 發祥地인 六祖 慧能의 行化 도량 寶林寺(현 남화선사)가 있는 地名 ‘曹溪’를 말한다. 따라서 曹溪라는 시냇물의 물 한 방울은 바로 禪佛敎 佛法의 根源이며 頓悟 南宗禪의 核心 禪思想, 禪法의 要諦를 뜻한다. 덕소의 참문은 6조 혜능선(慧能禪)의 核心 要地, 즉 佛法의 根本이 무엇이냐는 質問이다.


 法眼은 慧能禪의 要旨는 바로 慧能禪이라는, 質問을 되풀이하는 반어법(反語法)으로 答한다. 禪宗의 宗志는 本來가 말과 文字로 說明할 수 없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眞如當體고 人間의 지해(知解) 저 너머에 있는 光域의 眞理다. 그래서 法眼은 禪의 요체(曹源一滴水)를 質問子가 물은 ‘曹源一滴水’로밖에는 달리 說明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曹溪 慧能祖師의 佛法은 人間의 知性과 理解를 超越한 絶對性, 究極性, 永遠性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法眼禪師는 오직 그와 같은 慧能의 禪法은 理論的 說明이나 分析的 理解를 떠나서 直觀的 감지(感知)로만 接觸할 수 있음을 說破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부처가 8만4천 法問을 통해 說破한 眞理, 達磨가 中國에 와서 傳播하려 한 佛法의 根本精神, 6조 慧能이 喝破한 禪宗의 要諦가 同格의 班列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曹源一滴水’는 흔히 禪에서 佛法大義를 象徵하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達磨가 印度로부터 와서 전하려 한 佛法)’와 똑같은 뜻이다. 六祖 慧能의 佛道를 象徵하는 話頭로는 ‘曹源一滴水’ 외에도 ‘조계로상(曹溪路上)’ ‘조계의지(曹溪意旨)’등이 있다.


조계의 심인을 얻은 사람(曹溪得旨)


 묻는다 : 曹溪의 佛法을 누가 얻었습니까?

 답한다 : 佛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묻는다 : 和尙께서 얻으셨습니까?

 답한다 : 나는 佛法을 모른다.


 馬祖와 함께 禪宗 法脈의 兩大 山脈을 이룬 石頭希遷禪師(700-791)에게 天皇道悟라는 學人이 참문한 禪問答이다. 天皇道悟(748-807)는 후일 藥山惟儼, 단하천연과 함께 石頭의 3대 제자가 됐다.


 道悟의 물음도 역시 ‘曹源一滴水’와 같이 ‘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을 曹溪 慧能祖師의 심인(心印)으로 환치(換置)한 질문이다. 佛法은 언제나 자기 自信의 問題이며 내적인 問題이다. 따라서 佛道는 스스로가 깨치는 것이지 어떠한 敎育에도 依存하지 않는다. 石頭의 마지막 對答 “나는 佛法을 모른다”는 그런 問題는 質問할 事項이 아니니 네 자신의 內面이나 깊이 省察하라는 뜻이다.


 石頭의 할아버지인 慧能祖師에게도 이같은 問答이 있다.

 묻는다 : 황매(黃梅 : 5조 弘忍)의 뜻은 누가 얻었습니까.

 답한다 : 佛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묻는다 : 和尙께서도 얻으셨습니까?

 답한다 : 못 얻었다.

 묻는다 : 왜 못 얻으셨습니까?

 답한다 : 나는 佛法을 모른다.


 6조 慧能이 答하고 한 중이 물은 ‘황매의지(黃梅意旨)’라는 話頭다. 여기서는 ‘祖師西來意’ ‘曹溪得旨’가 ‘黃梅意旨’로 바뀌었다. 이 話頭에서 한 가지 注目할 점은 6조 慧能뿐만 아니라 5조 弘忍도 부처와 同格의 깨침을 이룬 禪佛敎의 법원(法源)으로 推仰받고 있다는 事實이다. 禪宗思想 부처와 同列의 祖師로 推仰받는 사람은 達磨, 弘忍, 慧能뿐이다. ‘黃梅意旨’나 ‘曹溪得旨’라는 말은 곧 佛法의 眞理, 석가모니의 8만4천 法問과 같은 意味를 담고 있다.


고요히 앉아 있지 말라[不住寂靜]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관(觀)하는 것은 病일 뿐 禪이 아니다.

마냥 앉아 있는 것은 몸을 拘束하는 것일 뿐 마음에 무슨 利益이 되겠는가.“


 六祖 慧能의 上堂說法이다. 慧能祖師는 36년간(677-713)의 남화선사 行化에서 ‘六祖 檀經’으로 結集된 大法師(현 대감사) 說法을 비롯, 金科玉條의 法問과 禪問答을 남겼다. 慧能의 傳記와 語錄은 저 有名한 ‘檀經’으로 集約돼 傳해오고 있다. 六祖의 語錄을 一名 ‘법보단경(法寶壇經)’이라고 한다. ‘法寶’란 널리 알려진 대로 석가모니의 敎說, 즉 8만4천 法問을 뜻한다. 바로 佛敎의 眞理다. 그러니까 慧能의 語錄은 부처의 法問과 똑같이 佛敎의 眞理를 說破한 經典이요 바이블이란 얘기다.


 六祖는 跏趺坐 틀고 앉아 적정(寂靜)을 즐기는 禪修行을 사선(死禪)이라 하여 痛烈히 批判한다. 그는 앞의 上堂法問에 이어 다음과 같은 偈頌을 읊는다.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않고

죽어서는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네.

어차피 냄새나는 한 구의 뼈다귀일지니

生命의 偉大한 敎訓과 무슨 相關 있으랴.”


 六祖는 이처럼 跏趺坐 틀고 앉아만 있는 死禪을 거듭 峻嚴하게 批判했다. 慧能이 말하는 生命의 偉大한 敎訓이란 고요함 속에 묻혀 妄覺의 歲月을 사는 데 있지 않고, 自信의 運命과 歷史의 主體로서 菩薩行을 통해 社會 參與를 하고 歷史的 存在로서 사회제도(社會濟度)에 熱情을 바치는 뜨거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 어둠, 추위, 더위 등으로부터 逃避하거나 隱遁하는 게 아니라 이를 克復해 苦難의 現實을 極樂으로 바꾸려는 努力과 意志다. 參禪修行은 이와 같은 熱情과 革命的 推進力을 뒷받침할 에너지의 場을 마련해주는 手段일 뿐이다. 頓悟 南宗禪의 境遇, 參禪 自體를 目的으로 하거나 모든 修行의 終着点으로 삼는 것을 斷然코 拒否한다. 고요와 戒律에 執着하는 禪은 죽어 있는 枯木이나 불 꺼진 재 같은 고목사회(枯木死灰)일 뿐인 死禪이다.


 禪은 깊숙이 內在한 채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普遍理性을 우리 意識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禪은 사람이라는 動物이 사랑, 正義, 自由, 眞實을 渴求하도록 하는 普遍的이고 宇宙的인 대생명(大生命)을 스스로 體驗케 한다. 그래서 禪은 뼈다귀처럼 乾燥하거나 차디찬 것을 단연 拒否한다. 용솟음치는 生命力과 希望, 그리고 지금 現在 눈앞에 드러나 있는 생생한 事實만을 肯定한다.


“자성부동을 보는 것이 선이다” [見自性不動是禪]


“선지식들이여, 어떤 것을 坐禪이라 하는가. 밖의 一切 善惡 境界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自性이 움직이지 않음을 보는 것을 선(禪)이라 하느니라.”


 六祖의 曹溪 寶林寺(현 남화선사) 行化 당시의 上堂法問이다. 깊은 산속 禪房에 跏趺坐를 틀고 앉아 고요에만 머무는 적정부동(寂靜不動)의 參禪修行을 境界한 說法이다.


 東亞細亞 禪宗의 뿌리인 曹溪 남화선사의 沿革을 잠시 살펴보자. 남화선사의 全身인 寶林寺 創建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조(南朝) 양나라 천감 원년(502)이다. 寶林寺라는 절을 建立하게 된 緣起는 印度僧 지약삼장법사가 우연히 曹溪를 지나다가 曹溪에 흐르는 시냇물을 마셔보고는 물맛이 甘味롭고 이상해 周圍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曹溪 건너편 寶林山을 쳐다보니 山麓이 秀麗하고 樹木이 鬱蒼해 절터로는 明堂이라 생각됐다. 그래서 즉시 門徒들에게 寺刹을 建立하라고 指示했다. 절은 2년 후인 천감 3년에 完工됐고 양 무제가 ‘寶林寺’라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때 지약삼장이 다음과 같이 豫言을 했다고 傳한다.


“170년 뒤 이곳에서 누군가가 무상법보(無上法寶)을 說해 道를 얻는 자가 수풀처럼 많겠다[得道者如林].”


 一說에는 이 豫言의 ‘보(寶)’자와 ‘림(林)’자를 따서 절이름을 寶林寺라 지었다고도 한다.

六祖의 上堂法語는 形式的, 外向的인 禪法을 단호히 排擊한다. 그는 坐禪을 안으로 自性을 보는 것이 선(禪)이고, 밖으로 一切의 對象에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좌(坐)라고 正義했다. 이는 一切의 現像에 좋다, 나쁘다 하는 分別적 判斷을 내리며 끄달려 다니느라 마음에 昏亂을 일으키지 말아야 생겨날 때부터 지녀온 本質이 진공(眞空)인 自性을 바르게 維持하고 쓸 수 있다는 뜻이다.


 慧能이 거듭 强調하는 ‘자성(自性)’은 存在의 本體, 本性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진여(眞如)의 別稱이기도 하다. 禪學에서는 本來부터 어떠한 汚染에도 물들지 않는 淸靜性과 아무리 사용해도 모자람이 없는 圓滿具足함을 가진 心性을 말한다. 自性을 다른 말로는 佛性, 自心, 自性淸淨心이라고도 한다.


 自性의 本質은 어떠한 것에도 머무르거나 執着하지 않는 眞空이고 절대공(絶對空)이다. 이러한 眞空의 實踐構造는 언제, 어디서나 가고, 멈추고, 앉고, 눕는(行住坐臥) 存在의 活動 一切를 恒常 변함없는 한 가지 마음으로 행하는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동선(動禪)이다. 즉 적정(寂靜)에 執着해 멍청히 앉아 있는 사선(死禪)이 아니라 行, 住, 坐, 臥 라는 4위의(四威儀)로 要約된 存在樣態를 자유롭게 행하되 그 行動 하나하나에 安住하거나 執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좀 더 쉽게 말한다면 모든 行動의 事前事後에 計算的이고 公利的인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一切의 行爲는 行爲를 끝냄과 同時에 잊어야 한다.


 6祖의 動禪은 후일 馬祖의 祖師禪에 이르면 ‘4위의(行,住,坐,臥)가 도량(道場)이고, 3업(身, 口, 意業)이 불사(佛事)’라는 한층 더 激烈한 實踐構造를 强調한다. 여기서는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自性의 淸靜性과 眞空性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業報가 아니라 훌륭한 佛事가 된다는 積極性을 强調한다.


 慧能은 人間 存在의 밑바탕인 性品은 本來가 깨끗한 것인데 공연히 청정(淸淨)이라는 마음을 일으켜 對象化시켜놓고 거기에 執着하면서 깨끗하다는 妄想을 일으킨다고 喝破한다. 6조는 이 法問의 말후구를 “미(迷)한 사람은 寂靜을 찾아 그에 執着하고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지만 입으론 남의 是非 長短을 말함으로써 도(道)에 크게 어긋난다”는 것으로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