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偈頌 한 구절을 너무 張皇하게 풀이했다. 그러나 禪은 향 한 개비 타는 속에서 전 宇宙가 타버리고 刹那의 한 생각을 멈추는 데서 世界 平和가 꽃핀다. 심지어 글자 한 자 속에다 宇宙 眞理를 돌돌 말아 싸버린다. 어쨌든 慧能 - 南嶽 - 馬祖 3대에 걸쳐 거듭 强調된 ‘無一物’이라는 불법(佛法)의 底意는 오늘에도 변함이 없다.
南嶽懷讓禪師가 六祖 慧能을 처음 讖文했을 때의 얘기다. 慧能이 물었다.
묻는다 : 어떤 物件이 이렇게 왔는가?
답한다 :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慧能이 묻고 南嶽이 答한 禪問答이다. 이 問答도 慧能의 ‘本來無一物’이라는 도론(道論)의 延長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날 한 중이 馬祖를 찾아가 물었다.
묻는다 :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란 무슨 뜻입니까?
답한다 : 우는 아이를 달래는 말이다.
묻는다 : 울음이 그치면 어떻게 합니까?
답한다 :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묻는다 : 이 두 種類 외의 사람에게는 무어라고 하실 겁니까?
답한다 : 한 물건도 아니다[不是物]라고 할 것이다.
묻는다 :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찌하실 겁니까?
답한다 : 대도(大道)를 손에 쥐어 주지!
馬祖가 말하는 ‘불시물(不是物)’ 역시 慧能의 ‘本來無一物’을 옮겨놓은 것으로 열 번 찍어도 똑같은 목도장이라고나 할까. 佛法, 즉 宇宙 大自然의 眞理는 現象界로 보면 森羅萬象이 存在하지만 本體論으로 보면 空이요, 無라는 얘기다. 佛敎 華嚴哲學은 森羅萬象의 現像을 법계연기(法界緣起)에 따라 生成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本體系를 제법무아(諸法無我), 諸行無常이라 한다.
世界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라는 겨자씨 한 알에 宇宙에서 제일 크다는 수미산을 집어넣는다는 ‘겨자씨 안의 수미산’이 바로 禪의 장기다. ‘本來無一物’도 이처럼 그 한 句節 속에 禪의 대의(大意)를 몽땅 끌어 담고 있다.
끝으로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의 ‘佛性’을 살펴보자. 佛性이란 말은 經典上으로 ‘涅槃經’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句節에 딱 한 번 나온다. 餘他의 經典에는 佛性이란 말이 전혀 없다. 모든 衆生이 다 같이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涅槃經’의 ‘佛性平等論’은 佛敎 平等思想의 根源이다. 慧能이 偈頌의 셋째 句節에서 ‘佛性’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와 같은 萬物平等의 宇宙的 絶對平等론을 展開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慧能이 托鉢僧의 ‘金剛經’ 讀經 가운데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일으키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句節을 듣고 發心을 했다는 傳說에 問題點이 있다고 본다. 結論부터 말한다면 慧能의 出家 發心 傳說과 得法偈는 서로 矛盾을 일으키고 있다. 慧能은 결코 一字無識이 아니었고 出家전 이미 ‘涅槃經’ 같은 經傳을 耽讀했다고 보고 싶다. 그 단적인 證據 하나가 偈頌에 ‘佛性’이란 말을 使用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처음 曹溪에 到着해 그 地方 유지인 유지략(劉志略)의 집에 寄宿하고 있을 때 유씨의 고모인 무진장비구니에게 ‘涅槃經’을 解說해 준 일이다. 慧能은 5조로부터 衣鉢을 傳授받고 조계로 내려왔다. 아직도 정식 비구계를 받은 바 없기 때문에 俗人의 身分으로 유씨 집에서 食客 生活을 했다.
어느날 在家 修行으로 法名까지 받은 유씨의 고모가 ‘涅槃經’을 念誦하는 소리를 듣고 유씨에게 저게 무슨 經典 念誦이냐고 물었다. 유씨는 “涅槃經인데 뜻이 아주 深奧해 말로 說明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때 慧能은 ‘涅槃經’을 전혀 읽은 일이 없지만 무진장비구니의 念誦을 잠깐 듣고서도 그 大義를 把握, 유씨에게 멋들어진 解說을 해주었다. 급기야 無盡藏 비구니도 이튼날 아침 慧能이 묵고 있는 손님방으로 건너와 ‘涅槃經’ 講說을 청해 듣고 거듭 感歎했다. 유씨는 여기서 慧能에게 感動, 조계하(曹溪河) 건너에 있는 보림사(寶林寺) : 현 남화선사의 전신)의 重修 費用을 화주하고 慧能과 자기 고모를 入住시켰다. 여기서도 글자는 모르고 오직 듣는 것만으로 뜻을 달통해 ‘涅槃經’을 講說했다는 극적인 傳說로 敍述하고 있지만 실은 慧能이 이미 ‘涅槃經’에 깊이 穿鑿(천착)해왔음을 暗示한다.
어쨌든 ‘金剛經’에는 ‘佛性’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로 보아 慧能은 出家前 切望的인 자신의 人生을 悲觀하면서 부처가 죽음을 앞두고 最後로 설한 ‘涅槃經’을 이미 耽讀했었을 법하다.
慧能의 得法偈는 그의 禪思想과 禪法, 家風을 含蓄한 ‘檀經’의 核이다. 神秀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결코 때묻지 않도록 하라”는 偈頌은 慧能의 偈頌을 ‘大學生’이라 한다면 ‘中學生’ 정도다. ‘佛性(自性, 眞如)’ 이라는 유(有)를 털고 닦는 修行으로 지켜나가자는 얘긴데 佛性 自體까지도 공무(空無)로 보는 慧能의 佛性觀에 비해 화끈한 맛이 전혀 없다.
5祖 弘忍은 頓悟와 絶對 空無를 밝힌 慧能의 心偈를 壯元 及第시켜 자신의 後繼者로 삼았다. 여기서 頓悟 南宗禪의 문이 열려 오늘에까지 南宗禪 一色의 禪佛敎가 동아시아에 繁盛하고 있다.
나무꾼 출신 慧能이 祖師(부처와 同格의 知見을 갖춘 禪僧)가 됐다는 점은 民衆的인 親近感을 한층 더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慧能은 후일 話頭가 된 ‘本來無一物(一名 ’보리본무수‘ 라고도 함)이라는 단 한 수의 偈頌으로 돈종(頓宗)의 문을 활짝 열었고 5조의 後繼者로 禪宗 제6대 祖師의 班列에 올랐다. 물론 9세기 以後의 禪宗은 慧能의 南宗이 天下를 統一했지만 頓悟와 漸悟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 論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慧能이 5조로부터 衣鉢을 傳受 받은 過程과 조계 보림사에 자리를 잡기까지에는 波瀾萬丈한 歷程이 展開된다. 5조 弘忍은 慧能의 偈頌을 보고 “바로 이거다” 하고 내심 快哉를 불렀지만 一團 떼내서 발로 밟아 뭉개고 난 다음 저녁때가 되자 拄杖子를 짚고 慧能이 방아를 찧고 있는 방앗간으로 갔다.
묻는다 : 쌀방아는 다 찧었는냐?
답한다 : 방아는 이미 다 찧었습니다만은 아직 키질을 못했을 뿐입니다.
(弘忍 祖師는 빙그레 웃음을 짓고는 拄杖子로 디딜방아를 세 번 두드린 후 方丈室로 돌아갔다.)
이른바 ‘삼경수법(三更受法)’이라는 慧能의 得法 古事다. 5조가 “방아를 다 찧었느냐”라고 물은 것은 견성(見性)을 이루었느냐는 隱語的인 質問이다. 慧能은 “이미 깨치기는 깨쳤는데 마치 쌀과 뉘를 가려내는 키질 같은 깨침의 檢證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對答한다. 실은 慧能의 偈頌을 보고 심인(心印)을 찍은 바 있지만 5조는 그래도 한번 더 檢證해보고자 방앗간을 찾아갔던 것이다.
5조는 여기서 完全 契合, 拄杖子로 방아를 세 번 때려 “三更에 내방으로 오라”는 行動言語로 後繼者 承繼式을 擧行할 뜻을 밝힌다. 세 번 친 것은 三更, 곧 한밤중을 象徵한다. 弘忍祖師는 한밤중 方丈室로 온 慧能에게 後繼者 咐囑의 證票로 達磨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袈裟와 밥그릇을 주고는 일렀다.
“지난날 達磨가 中國으로 와서 法脈 承繼의 신표(信標)로 이 袈裟와 발우를 전해주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이 의발(衣鉢)이 是非하고 다투는 物件이 됐으니 너 以後로는 이를 다시 信標로 傳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五祖와 六祖의 後繼者 承繼式이었다.
慧能이 五祖寺로 出家한 지 불과 8개월만의 일이다. 아직 禪房에 跏趺坐를 틀고 앉아 參禪 한번 제대로 못해봤고 正式 比丘戒도 못받은 行者였다. 그야말로 破格이다. 法脈 承繼의 신표인 衣鉢이 慧能에게 전해진 걸 알게 되면 절안은 발칵 뒤집힐 게 뻔하고 禪房 學人들이 慧能을 해치려 할 것이다. 그래서 弘忍祖師는 衣鉢을 전한 후 곧바로 慧能을 데리고 황매로 나와 陽子江을 건너 현 호북성 구강역까지 배웅하면서 남쪽으로 가 숨어 있으라고 일렀다.
혜 능 : 大師께서는 앉아 계십시오. 제가 노를 젓겠습니다.
5조 : 아니다 오히려 내가 너를 건네주마.
혜 능 : 제가 미망(迷妄)에 빠져 있을 때는 스승께서 건네주시고, 제가 개오(開悟)한 후에나 스스로 건너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저에게 감히 노를 잡지 못하게 하시는군요
5 조 : (껄걸 웃으면서) 그렇다. 그래.
弘忍祖師와 慧能이 陽子江 구강나루를 배 저어 건너면서 주고받은 問答이다. 五祖는 나루에 到着하자 배를 빌린 후 이렇게 친히 노를 저어 慧能을 건네주고는 또 남쪽 길이 시작되는 현 구강역까지 데려다 주면서 惜別의 정을 나누었다. 慧能은 不撤晝夜 계속 걸어서 남쪽 廣東省으로 내려갔다. 예상대로 五祖寺는 발칵 뒤집혔다. 五祖가 慧能을 傳送 보내고 절로 돌아온 다음날 方丈室의 後繼者 承繼 信標物인 衣鉢이 없어진 걸 안 禪房學人들이 몰려와 顚末을 물었다. 五祖는 “저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던 능(能)行者가 가지고 갔다”고 公開했다.
慧能이 行者로 방아를 찧던 五祖寺 방앗간은 復元돼 지금도 그 옛날 이야기를 實感케 하고 있다. 學人들은 論議 끝에 慧能을 追擊, 衣鉢을 빼앗아 오기로 하고 四稟將軍 出身인 진혜명 이라는 學人을 選拔해 慧能의 뒤를 쫓았다. 급기야 能行者는 광동성과 강서성, 복건성 등 3성의 境界에 있는 대유령에서 五祖寺를 떠나온 지 2개월 만에 慧明學人에게 慧明은 “慧能 오랑캐야, 어서 그 衣鉢을 놓고 가라! 그러지 않으면 搏殺을 내겠다” 고 고함을 지르며 能行者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能行者는 하는 수 없이 袈裟와 鉢衣를 길가 큰 바위에 올려 놓고는 숲속으로 숨어버렸다. 慧明이 바위 위의 衣鉢을 아무리 거두려 해도 衣鉢이 바위애 찰싹 다라붙은 채 떨어지질 않았다. 慧明은 급기야 “行者여, 行者여, 나는 오직 佛法을 위해 온 것이지 衣鉢을 탐해 온 것이 아니니 제발 나와서 한 소식을 가르쳐 달라”고 哀願을 했다. 慧能은 그때서야 숲속에서 나와 慧明學人에게 說했다.
“네가 이미 佛法을 위해 왔다면 모든 因緣을 쉬고 한 생각도 내지 말라. 禪도 惡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 어떤 것이 明上座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
무념으로 종지를 삼는다[無念爲宗]
禪知識들이여, 나의 이 法問은 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無想으로 체(體)을 삼으며 無住로 근본(本)을 삼는다. 無想이란 現象界에 있으면서 現象界를 여윔이요, 無念이란 생각하면서 생각이 없음이다. 無住란 사람의 本性이 世間의 善惡과 請託, 친원(親怨) 關係로 다투고 攻擊할 때에도 一切를 공(空)한 것으로 여겨 앙갚음을 하거나 해칠 생각을 내지 않고 지나간 일은 一切 다시 생각치 않는 것이다. 자성(自性)은 本來 한 法도 얻을 것이 없거늘 만일 얻은 바가 있다고 하여 妄靈되이 화복(禍福)을 설한다면 바로 이것이 雜된 사견(邪見)이다. 그러므로 나의 法問은 無念을 宗으로 삼는다.
六祖 慧能의 禪思想이 집약된 上堂法語다. 慧能祖師 曹溪 寶林寺로 다시 돌아온 것은 五祖로부터 祖師 자리를 承繼받은 지 15년만인 676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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