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선불교(禪佛敎)

선불교 28. 佛性엔 南北이 없다

slowdream 2007. 9. 14. 23:23
 

* 佛性엔 南北이 없다[佛性無南北]

-五祖寺 6조전(六祖殿), 六祖慧能祖師


 묻는다 : 너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원하느냐?

 답한다 : 영남 신주(현 광동성 신흥현)서 온 백성이온데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묻는다 : 너 같은 邊方의 오랑캐가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답한다 : 사람에겐 비록 南, 北이 있겠지만 佛性에야 어찌 南, 北이 있겠습니까.


 호북성 黃梅의 동산선사(現 5祖寺)는 6조 慧能의 出家, 得法度量이다. 慧能祖師는 널리 알려진 대로 頓悟 南宗禪을 開倉 , 東亞細亞 仙佛敎史에 커다란 劃을 그은 事實上의 中國佛敎 禪宗 宗祖다. 바로 이 6祖 慧能이 出家해 得法한 도량이 5祖師고 그를 頓悟 南宗의 開倉者로 키워낸 스승은 5祖師 方丈 5祖 弘忍이었다.


 中國 禪宗史에서 한 사람의 禪師가 出家 得法度量, 수계도량, 開堂 說法度量, 行化度量, 圓寂度量등을 각각 가진 예는 6祖 慧能과 馬祖 道一大師 뿐이다. 그리고 이 2명에 關聯된 度量들은 現在까지도 모두가 잘 保存돼 오고 있다. 나무꾼 慧能이 발심(發心), 호북성 黃梅 5祖師로 出家해 5祖 弘忍祖師를 慘聞한 첫 禪問答이 바로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이라는 話頭가 됐다. 나무장사나 하던 無識한 慧能이었지만 그 떡잎부터가 대기(大機)를 번득였다.


 弘忍祖師는 당시 野蠻人 取扱을 하던 邊方의 오랑케 慧能의 “佛性에야 어찌 南, 北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對答에 큰 材木임을 直感, 內心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위 首座들 耳目 때문에 겉으론 無視해버린 채 방앗간으로 가서 쌀방아나 찧으라고 물리쳤다. ‘佛性無南北’이란 慧能의 대답은 佛性은 만유(萬有)에 平等하게 存在한다는 ‘涅槃經’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과 같은 脈絡이다. 다시 말해 佛敎의 基本思想인 佛性平等론이다. 慧能은 後日 이와 같은 佛性論을 우리 자신이 本來부터 갖추고 있는 원만구족한 자성(自性)으로 具體化시켜 自性을 철견하면 곧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南宗 頓悟禪을 꽃 피웠다.


 6조 慧能의 俗姓은 노(盧)씨다. 그래서 그는 5조사 行者시절 ‘盧行者’라고 불렸다. 할아버지 故鄕은 하북성 탁현이지만 父親이 地方官吏로 광동성 신주(현 신흥면)에 근무하게 돼 그는 신주에서 出生했다. 慧能은 세 살 때 父親을 여의고 家計가 어렵게 되자 나무장사를 해서 홀어머니를 奉養했다. 따라서 그는 一字無識의 나무꾼이었다. 그러나 이는 禪宗의 종지인 ‘불립문자(不立文字)’와 ‘頓悟見性’을 드라마틱하게 展開하기 위해 後代에 假託한 것으로 보인다. 실은 상당한 水準의 識見을 가졌고 佛敎 經典도 出家 전에 읽었던 것 같다.


 慧能은 24세의 노총각이었다. 어쨌든 그는 갈료(猲獠 :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쯤되는, 몸에 털이 난 짐승)라고 蔑視받는 中國의 邊方 廣東城 出身에 산골서 지게 목발이나 두드리는 一字無識의 나무꾼이었다. 신주 장날 홀어머니 奉養을 위해 나무를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한 托鉢僧을 만났다. 托鉢僧은 길옆의 民家 대문 앞에서 施主를 얻고자 木鐸을 치며 ‘金剛經’을 讀訟하고 있었다.


 讀訟에 귀를 귀울이고 있던 慧能은 “마음을 비우고 곧장 생각을 일으키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句節을 듣는 순간 가슴에 찡해오는 佛心을 느꼈다. 그의 初發心은 이내 出家로 이어졌다. 어머니께 出家를 고하고 호북성 황매 동산선사로 5祖 弘忍을 찾아 갔다. 5조사 行者가 된 慧能은 8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디딜방아를 찧는 일을 했다. 여기까지가 5祖師에 얽힌 6조 慧能의 出家 因緣이다. 5조 弘忍으로부터 見性을 認定받은 득법(得法)과 전의부법(傳衣付法)의 法脈 承繼도 5祖師에서 이루어졌다.


慧能까지의 6代 祖師들에게서 일어나는 禪思想의 變革을 살펴보자.

初祖 達磨부터 4祖 道信까지의 禪法은 한마디로 능가종풍(楞伽宗風)이었다. 물론 道信祖師에 이르러서는 昭儀經典을 ‘楞伽經’에서 ‘般若經’으로 바꾸고 절을 지어 머무르며 함께 모여 參禪하는 개산주사(開山住寺)의 僧家共同體를 이루어 禪宗 叢林의 씨앗을 胚胎시켰다. 따라서 初期(達磨-3祖僧瓚) 楞伽宗의 楞伽師(習禪者)들이 행한 個人主義的 頭陀行 禪法은 상당한 變革을 한 셈이다. 그러나 戒律과 禪法, 능가(楞伽:마음)와 般若(智慧), 念佛과 成佛을 三位一體로 統一하려는 禪思想과 이를 일행삼매(一行三昧)로 實踐하는 修行法을 强調하는 漸悟禪法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흔히 禪學에서는 4조 道信까지의 禪宗 宗風을 ‘자교오종(藉敎悟宗 : 敎學에 依支해 頓悟의 깨침을 이루는 宗風)’이라 한다. 藉敎悟宗의 禪法이 갖는 特徵은 段階的인 修行을 밟아 점차로 깨침을 얻는 점오(漸悟)로 要約된다. 이와 같은 藉敎悟宗의 漸悟禪法은 弘忍祖師에 이르러 頓悟의 심지법문(心地法門)으로 바뀌는 一代 革命이 單行된다. 弘忍의 著述 <最上昇論>으로 集約된 돈오(頓悟)禪法은 6조 慧能에 이르러 뿌리를 내리면서 漸悟祖師의 漸悟禪法과 확연히 구분되는 이른바 慧能의 南宗을 誕生시켜 ‘남돈북점(南頓北漸)’ ‘남능북수(南能北秀)’로 나뉜다.


 神秀의 北宗은 1백년 남짓 崇山을 中心한 洛陽, 長安 일대서 勢를 떨치다가 消滅되고 頓悟 南宗 天下의 禪宗時代가 열린다. 따라서 6祖 慧能은 禪宗史에 分水嶺을 이룬 劃期的인 人物이며 現在의 韓, 中, 日 仙佛敎는 물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禪思想과 禪學의 實質的인 開倉者다.


마른 똥막대기다.

 - 6조 慧能祖師/雲門文偃禪師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本來無一物]

 -조계 남화선사(南華禪寺), 慧能祖師 행화 도량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菩提本無樹)

마음이란 거울 또한 받침대 위에 놓는 물건이 아니다 (明鏡亦非臺)

佛性은 언제나 청정하거늘 (佛性常淸淨 : 돈황본 ‘법보단경’)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本來無一物 : 유통본 ‘육조단경’)

어디에 티끌이 있으랴 (何處有塵埃)


 동토(東土) 禪宗의 實質的 創始者 6祖 慧能(635-713)의 득법게(得法偈)다. 혜능(慧能)祖師는 동아시아 佛敎의 宗敎改革을 이룬 ‘中國의 마틴 루터’다. 慧能의 오도송(悟道頌) ‘本來無一物’은 단순한 得法偈(스승으로부터 깨침을 認定받은 見性의 詩)나 일개 話頭 次元 이상의 意味를 갖는다. 慧能이 5祖 弘忍에게 자신의 깨친 바를 읊어 바친 이 詩는 禪宗史에서 1.頓悟頓修의 南宗禪 浮上. 2.南宗과 北宗의 分立. 3. 祖師地位 承繼革命 등 禪宗史에 하나의 噴水領을 이루는 契機가 됐다.


 慧能의 頓悟 南宗禪은 佛敎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出世間主義 佛敎를 입세간주의(入世間主義) 佛敎로, 貴族佛敎를 民衆佛敎로, 머릿속 觀念佛敎를 生活속 實踐佛敎로 바꿔놓은 일대의 佛敎 革命이었다. 8世紀 以後의 東亞細亞 佛敎에선 이 禪宗이 主導的 佛敎 宗派로 信仰 實勢를 形成해왔다. 오늘의 韓國, 中國, 日本佛敎도 慧能의 南宗禪을 原流로 하는 禪宗이 主導하고 있다. 慧能의 悟道頌(一名 改悟詩, 得法偈)은 이 엄청난 佛敎革命의 물꼬를 튼 獅子吼다. 우선 이 偈頌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가 아주 드라마틱하다.


 어느날 5조 홍인(弘忍)이 後繼者 제6대 祖師를 정하고자 제자들의 심게(心偈 : 깨친 바를 읊은 시)를 公募했다. 호북성 黃梅 동산5조사 弘忍祖師 門下의 學人들은 이미 後繼者 물망 0순위로 지목돼온 首上座 신수(神秀)가 5祖의 의발(衣鉢 : 後繼者 承繼의 證票로 주는 先代 祖師의 袈裟와 밥그릇)을 傳授하리라 생각하고 아무도 心偈를 써올리지 않았다.


 5祖의 心偈 公募는 각자 자신 있는 사람은 누구나 偈頌을 지어 僧堂과 方丈室을 連結하는 복도 벽에 붙이도록 했다. 神秀首座가 맨 먼저 偈頌을 지어 僧堂 복도 벽에 붙였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身是普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다(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결코 때묻지 않도록 하라(莫使箬塵埃)


 神秀의 이 偈頌이 方丈室 옆 복도 벽에 붙자 다른 學人들은 예상대로라는 듯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6조 慧能은 저 邊方의 산골인 광동성 신흥현 하노촌에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나무 장사를 하다가 5조사로 출가, 방앗간에서 벼를 찧고 있는 노(盧)행자(慧能의 俗姓이 盧氏임)였다. 그러니까 5조사에 出家한 지 8개월밖에 안 되는 24살의 늦깍이였다. ‘늦깍이’란 한국 절집안의 俗語로 나이를 먹은 후, 또는 世俗서 結婚까지 했다가 뒤늦게 出家해 깨달음을 얻은 僧侶를 말한다. 그 반대는 ‘올깍이’라 하는데 7,8세때 童子 出家해 절에서 어린시절부터 成長한 僧侶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慧能의 偈頌은 이처럼 唯一無二하게 5조의 後繼者 選拔 心偈 公募에 제출된 神秀의 偈頌에 對抗해 내놓은 心偈였다. 通俗的 常識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異變이었다. 幼稚園生(行者)이 大學院生(首座)한테 대든 格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결과부터 말한다면 5조는 두 개의 偈頌 중 慧能의 心偈를 택해 일개 行者(아직 중이 되지 못한 채 절의 職責을 맡은 僧侶들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豫備僧侶)를 ‘祖師’라는 엄청난 班列에 올려놓는 波瀾을 일으켰다.


 慧能의 出家 얘기를 해보자. 그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나무장사로 홀어머니 이(李)씨를 奉養하는 가난에 찌들고 배움에 굶주린 삶을 살던 노총각 이었다. 거기다가 사람 取扱도 못받는 광동성 산골 사람이었다. 그는 家難한 집안살림, 아무 希望도 없는 앞날 등 悲觀的 自暴自棄에 빠져 있던 靑年이다. 어찌하던 이 苦痛스러운 現實로부터 逃避, 苦難의 人生에서 헤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러던 참에 어느날 신흥현 所在地 장에 나가 나무를 팔고 오던 중 한 托鉢僧을 만나 出家를 發心했다. 어머니한테 黃梅로 가서 중이 되겠다며 거듭 出家 許諾을 懇請했다.


 어머니가 挽留하자 외삼촌이 “그래도 꼭 出家를 하겠다면 저 洞口밖 큰 바위에 가서 出家 許諾을 받아오라” 고했다. 慧能이 바위 앞에서 7일동안 밤낮으로 기도를 올리며 출가 許諾을 빌자 급기야 바위가 두조각으로 갈라졌다. 말하자면 동네 守護神(큰 바위)으로부터 許諾을 받은 셈이다. 이 바위는 그래서 ‘별모석(別母石)’ 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現在까지도 광동성 신흥현 낭촌 입구 패방 옆에 있다고 한다. “남화사지” “신흥현지” 등에 나와 있는 慧能祖師 出家 傳說이다. 참고로 밝혀둘 것은 慧能의 語錄 [육조단경(六祖檀經 : 略稱 檀經)]은 이미 英譯된 지 오래고 中國 중요 古傳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慧能의 傳記는 많이 알려졌고 ‘檀經’ 硏究로 博士學位를 받은 사람이 國內外에 不知其數다.


 5조 弘忍은 벽에 붙은 慧能의 偈頌을 보고 내심 크게 기뻤다. 그러나 學人들의 期待와 耳目 때문에 “이것도 아직 本性을 철견(徹見)하지 못한 것”이러고 ‘平價切下’하고는 벽에서 떼서 발로 밟아 뭉개 버렸다. 慧能이 ‘本來無一物’이라는 偈頌을 지은 에피소드도 널리 알려진대로 아주 재미있다. 그는 一字無識으로 방아나 찧고 있는 行者였다. 쌀이 빨리 찧어지도록 힘을 보태기 위해 등에 돌을 지고 방아를 열심히 찧고 있는데 한 老僧이 방앗간을 지나가면서 神秀의 偈頌을 念誦했다. 慧能은 이때까지 5祖가 心偈 公募를 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형(師兄), 왜 그리 입을 우물우물하고 다니십니까. 혹 부아통(否牙痛)이라도 터지시는 일이 있으신지요.”


 老僧은 慧能의 물음에 自初至終을 알려주고 偈頌은 앞으로 5祖의 뒤를 이어 6祖가 될 神秀首座의 後繼者 應募 心偈니 잘 외워 두어야 한다고 했다. 慧能은 老和尙에게 그 偈頌의 內用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神秀의 偈頌과 그 뜻하는 바를 說明 듣고 난 慧能은 幢突하게도 老僧에게 부탁했다.


 “나도 한 수 지을 테니 사형께서 좀 받아 文字化시켜 주십시오. 저는 글자를 몰라 文字化는 못하고 다만 말로만 偈頌을 읊을 수 있을 뿐입니다.”


 老僧은 內心 가소롭지만 旣往에 말려들었으니 하는 생각으로 “그럼 어디 한번 읊어보라”고 했다.


 ‘本來無一物’이라는 慧能의 오도시(悟道詩)는 이렇게 해서 지어진 偈頌이다. 老僧은 慧能의 偈頌을 복도 벽에 붙어 있는 神秀의 偈頌 옆에 나란히 붙였다. ‘本來無一物’은 後代에 南宗禪의 ‘頓悟’와 도는 修行을 닦아 얻는 게 아니라는 ‘도불용수론(道不用修論)’을 뒷받침하기 위해 改作한 것이겠지만 興味진진하다. 언뜻 봐도 慧能의 偈頌이 훨씬 더 매끄럽고 그럴 듯해 보인다. 神秀의 偈頌은 흔히 말하는 점수(漸修) 쪽이고 敎學的인 데 비해 慧能의 偈頌은 돈오(頓悟)고 禪學的이다. 慧能의 悟道頌에서 由來한 ‘本來無一物’이라는 話頭는 仙佛敎의 불성론(佛性論)과 修行論을 明快하게 드러낸 一句다.


 韓, 中, 日 東北亞 3국은 물론 전 大乘佛敎圈의 主導的 宗派인 禪宗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慧能의 頓悟 南宗禪이 主唱한 佛性論과 修行論에 따르고 있다. 慧能의 偈頌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기에 앞서 附言해둘 事項이 하나 있다. 偈頌의 核心인 세 번째 句節이 元來는 “佛性의 淸淨性엔 변함이 없다(佛性常淸淨)”이었는데 後代에 “本來 한 물건도 없거늘 (本來無一物)”로 改作됐다는 점이다.


 ‘本來無一物’이라는 表現이 涅槃에서조차도 安住하지 않는 부주열반(不住涅槃)의 絶對無를 强調하는 禪學의 공무사상(空無思想)을 보다 明快하게 드러내고 있다. 改作된 ‘本來無一物’은 慧能祖師 遷化後 90년쯤 지난 801년 著作으로 慧能의 法脈 繼承을 밝힌 ‘조계보림전(曹溪寶林傳)’에서부터 登場한다. 改作이 ‘佛性常淸淨’보다 훨씬 멋들어진 表現이긴 하지만 根本的인 意味에선 큰 차이가 없다.


 慧能의 說法集인 ‘檀經’은 그 流通本이 여섯 種類나 돼 어느 것이 진본(眞本)인지를 분간키 어려웠다. 그러던 중 20세기초 돈황 석굴에서 ‘남종돈교 최상승 마하반야바라밀경 6조 慧能大師 어소주대법사 사법단경’이 발굴돼 世界 禪學界가 이 ‘檀經’을 가장 오래된 초본(鈔本)으로 公認했다.


 ‘檀經’과 關聯해 하나 꼭 덧붙여 두어야 할 얘기가 있다. 佛敎는 석가모니와 당시 부처의 境地나 다름없던 유마힐거사, 보살들의 說法集 외에는 ‘경(經)’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經’은 부처의 말씀을 뜻한다. 따라서 석가모니 시대 이후 說法集에 ‘經’을 붙인 예는 中國 仙佛敎의 慧能祖師가 唯一한 境遇다. 이 한 가지 事實만으로도 6祖 慧能은 부처와 同格의 班列에 서 있는 ‘中國 禪宗의 석가모니’임을 實感할 수 있다. 實際로 現在도 中國 禪宗은 佛誕日보다는 6祖 誕辰日(음력 2월 8일)을 重視하고 行使도 巨創하다.


 우리 모두는 本來부터 전혀 모자람이 없는 佛性(自性, 眞如)을 充分히 갖추고 있다. 그리고 自性의 本質은 늘 깨끗하고 공(空)할 뿐이어서 먼지가 않을 틈새조차 없다. 自性이란 이처럼 本來가 淸靜하기 때문에 汚染만 되지 않으면 그 自體가 바로 도(道)다. 따라서 깨침이란 修行을 통해 밖으로부터 얻는 게 아니라 오직 마음을 밝혀 깊숙이 묻혀 있는 自性의 本質을 徹見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自性이니, 佛性이니, 道니 하는 말은 부득이한 言語的 表現일뿐 그 實體는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空을 本質로 한 眞如當體일 뿐이다.


 慧能의 偈頌은 무엇이라고도 이름할 수 없고 긍극적으론 佛性이라는 것조차도 있을 수 없는 절대공(絶對空)의 佛性論을 喝破하고 있다. 이와 같은 佛性論은 老子의 ‘道德經’ 첫머리에 나오는 “道를 道라 이름하게 되면 이미 不變의 眞理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와 똑같은 脈絡이다. 老子가 유가(儒家)의 道를 批判하면서 提示한 이러한 眞理觀과 慧能의 佛性觀(佛法에 대한 정의)은 全的으로 一致한다.


 慧能의 5언 絶句 偈頌의 마지막 句節에서 읊조린 “어디에 먼지 앉을 틈새가 있으랴(何處有塵埃)”는 한마디로 修行이 必要없다는 무수무증(無修無証)의 修行論이다. 六祖의 孫子뻘인 馬祖道一禪師에 이르러서는 아예 道는 修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도불용수론(道不用修論)’으로 發展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돈오론(頓悟論)이다. 이것이 대충 要約해본 慧能의 偈頌 ‘本來無一物’의 내용이다.


 改作된 ‘本來無一物’은 頓悟를 활짝 드러내 보인 偈頌의 核心이다. 제1, 제3구의 본(本)은 위나라 왕필의 ‘노자주(老子註)’에 따르면 時間的으로 앞서고, 價値面에서 優越하다는 두 가지 意味를 갖는다. 쉽게 말해 本源的이고 根源的 이라는 말이다. ‘無一物’의 무(無)는 頓悟 南宗禪을 떠받치고 있는 般若 空觀思想의 核이다. ‘檀經’은 無란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相對的 立場과 모든 煩惱를 여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유(有)의 根源을 무(無)로 본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모든 存在의 밑바탕은 공(空)이다.


 이는 “天地萬物은 有로부터 생기고, 有는 無로부터 생긴다(萬物生於有 有生於無)”는 老子의 無思想에 바탕하는 存在論과 一致한다. ‘일물(一物)은 主人公이 있는 絶對無의 世界, 즉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한다.


 그러나 南宗禪은 絶對無의 空을 體得했다 하더라도 그 自體에 執着하거나 安住하며 도(道)를 圖式化하는 것을 禁忌視하는 積極的인 깨침의 實踐構造를 强調한다. 道에의 安住는 道의 本質인 공(空)을 否定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일물(無一物)이다. 다시 말해 道니, 空이니 하는 것조차도 버리고 百尺竿頭 進一步를 통해 얻는 絶對空의 世界에서 ‘無心’해야 한다.


 ‘檀經’은 空에 執着하거나 安住하는 것을 이렇게 境界하고 있다.

 “그대가 모든 執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하더라도 죽음과 같은 고요에 빠지지 않도록, 깎아지른 듯한 虛空에 떨어지지 않도록 主義할지니라.”


 無執着에 대한 ‘執着’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百尺竿頭 進一步다. 요사이 흔히 쓰는 말로 ‘벼랑끝 戰術’이다. 禪은 이처럼 現象界를 否定해 얻은 空이라는 眞理 自體까지도 즉각 否定해버리는 無限 否定의 肯定法을 즐겨 사용한다.


 日本의 世界的인 禪學者 스즈키 다이세스는 이와 같은 無限 不正法을 ‘즉비(卽非)의 論理’라고 했다. 卽非란 ‘金剛經’의 “般若는 般若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다(第一波羅密 卽非第一波羅密 是名第一波羅密)”와 같은 論法을 말한다. 이 밖에도 “凡夫는 凡夫가 아니다. 그러므로 凡夫다(凡夫子 卽非凡夫 是明凡夫)”등 ‘金剛經’에는 이러한 예의 論法이 많이 나온다. 다시 말해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다"라는 論理다.


 法脈上 六祖 慧能의 曾孫子뻘인 百丈懷海禪師의 語錄 <百丈錄>을 다음과 같이 展開하고 있다.  “菩薩은 菩薩이 아니니 그래서 菩薩이라 한다. 法은 法이 아니며 法 아님도 아니다.”


 禪에서는 對立 없는 곳에 對立이 있고, 對立을 그대로 두고서 對立에 구애받지 않는 소식을 理解하지 않고서는 禪師들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때로는 ‘아니오’가 ‘예’ 이고, 無가 有이며 有가 無가 된다. 이를 흔히 無分別의 分別, 무작(無作)의 作, 平等 속의 差別, 差別속의 平等이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가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하나가(一卽多 多卽一)되는 統合의 原理가 도출된다. 이와 같이 肯定과 否定, 有와 無라는 2분법적 區分과 相對的 分別을 뛰어넘어 모든 法 사이에 나타나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회통적 關係를 禪學은 ‘회호(回互)의 論理’ 또는 ‘왕환(王還)의 論理’ 라고도 한다.


 불회호(不回互)란 낱낱의 個體가 各自의 立場에 머물러 있고 統合되지 않은 狀態다.  卽非의 論理는 禪思想 體系를 構成하는 重要한 論理의 하나다. 衆生이 곧 부처라는 絶對平等의 불성론(佛性論)도 論理的으로는 回互의 틀 속에 들어간다. 여기서 結論的으로 强調해둘 점은 科學과 論理學이 客觀的, 원심적(遠心的)인 데 비해 禪은 主體的, 求心的이라는 점이다.

 禪은 道에의 執着을 버리고 日常生活 속에서 깨침을 積極 實踐할 것을 要求한다. 이와 같은 깨침의 實踐構造는 세속회향(世俗回向)이라는 한 마디로 壓縮된다. 즉 하늘로 향하는 깨침의 形而上學的 價値의 方向을 아래로 돌려 形而下學的 日常生活을 豊饒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임을 强調하는 生活佛敎로서의 禪佛敎의 實踐構造다.

 偈頌의 核心인 제3구 ‘本來無一物’을 敎學的으로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다.


 ‘世間 萬象이란 마음이 빚어내는 幻想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모두는 實際 存在하는 것이 아니며 한낱 환영(幻影)일 뿐이다. 따라서 萬象이 돌아가는 最終 終着点은 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