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의 나물 바구니[靈照菜藍]
(龐居士와 가장 切親한 道伴인 단하천연선사가 어느날 龐居士의 집을 訪問했다. 대문앞에 이르러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물캐러 나가는 딸 靈照를 만났다.)
묻는다 : 居士께서는 집에 계시는가?
답한다 : (바구니를 땅에 내던지고 두 손을 모은 채 섰다.)
묻는다 : 居士께서 계시는가?
답한다 : (바구니를 집어 들고 아무 말 없이 나물을 캐러 나가 버렸다.)
단하도 여기서 발길을 돌려 되돌아 가버렸다. 얼마 후 龐居士가 外出에서 돌아왔다. 딸 靈照로부터 단하선사가 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 龐居士가 물었다.
“단하는 계시냐?”
靈照가 대답했다.
“떠나가셨습니다.”
居士는 “땅바닥에 우유가 끈적거리는구나!”라고 했다.
‘영조채람(靈照菜藍)’이라는 話頭 내용이다. 龐居士의 딸 靈照는 그 이름만큼이나 神靈스럽고 才氣 넘치며 상근기(上根器)의 禪氣가 번뜩이는 在家 선자(禪者)였다. 靈照는 禪林을 行脚하는 아버지 龐居士를 따라 다니며 侍奉했다. 대나무 조리를 저자에 내다 팔아 龐居士의 끼니를 마련해 올리고 온갖 수발을 했다. 靈照는 아버님 龐居士를 侍奉하면서 禪理를 익혀 오도(悟道)의 境地에 이르렀다. 일정한 修行도, 高僧의 至道도 전혀 받은바 없이 말하자면 獨學으로 大成을 한 셈이다.
단하천연선사(738-824)는 長安으로 科擧를 보러가다가 龐居士를 만나 함께 佛家에 入門한 친구고 道伴이다. 龐居士가 佛家 入門이후 가장 가깝게 지낸 禪師이고 서로가 수시로 집과 절을 찾아 法談을 나눈 道得의 伴侶者 이다. 따라서 단하는 龐居士 家族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터였다. 俗家 因緣에 비유하자면 叔父같고, 집안아저씨 같은 處地였다.
단하를 맞는 靈照의 禮意가 無禮한 듯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禪家의 禮法으로 보면 전혀 그렇치 않다. 아주 如法하게 不在中인 아버지 龐居士를 대신해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는 禮儀를 갖추고 있다. 우선 靈照가 두손을 얌전하게 모은 채 서 있는 것은 當時의 世俗 禮法에서도 正中하고 단정한 禮節로 勸獎됐다. 問題는 바구니를 땅에 내던진 行動이다. 바구니를 내던진 것은 龐居士의 부재(不在)를 象徵한다. 禪理的으로 한발 더 나아가면 龐居士의 있고(在) 없음(不在)과 같은 形象에 얽매이지 않는 分別심의 超越을 意味한다.
여기서는 바구니를 見性, 解脫의 象徵으로 擴大 解析할 수 있고, 涅槃이라는 佛法의 보금자리에도 安住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떨어버린 一切皆空의 境地를 象徵한 行動言語가 된다. 그러나 이때 靈照가 바구니를 내던진 것은 손님을 맞는 禮儀를 갖추기 위해 염수이립(殮手而立)하려고 행한 行爲쯤으로 보아 넘기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단하선사도 두 번째 물음을 통해 龐居士의 不在를 거듭 확인하고는 그냥 돌아갔다.
이 대목에 대해 일부 評釋은 단하가 靈照의 첫번째 對答에서 龐居士의 不在를 미처 못 알아차린 것처럼 解說하고 있다 단하 정도의 1급 禪師를 그렇게 아둔하게만 볼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단하가 靈照의 境地를 떠보기 위해 알아채지 못한 척하고 다시 물어 보면서 그녀의 다음 行動을 지켜본 것으로 풀이하고 싶다. 어쨋든 靈照는 극히 日常的이고 自然스러운 行動으로 禪을 갈파한 한편의 선연극(禪演劇)을 演出했다. 특히 그녀의 주도 綿密하고 圓熟한 禪的 擧動은 禪의 達人이라는 단하선사도 欣快히 認定한 水準級이었다.
또한 龐居士가 딸 靈照에게 말한 “땅바닥에 우유가 끈적거린다”의 原文은 ‘적토우내(赤土牛嬭)’다. 龐居士의 이 말은 앞에 “단하는 계시냐?”고 反問한 점등으로 미루어 보아 딸 靈照를 나무란 것으로 “禪의 本來 境地인 大地(붉은흙)에 牛乳의 흰색을 칠해 엉망진창이 됐다”는 의미다. 일부 옛 禪宗 文獻은 龐居士의 이 말을 “이 년아, 우리 가문에 먹칠을 하다니!”라는 뜻이라고 註釋하기도 했다.
그러나 禪에서는 責望이 오히려 ‘稱讚’이다. 따라서 龐居士의 靈照에 대한 責望은 나물바구니를 던져 자신의 不在를 알린 禪的 行動言語가 ‘괜찮았다’는 肯定이라고 봐야 한다. 다음 禪話는 이를 證明해주는 명괘한 證據다. 돌아갔던 단하가 “아까는 자네를 한 대 먹였잖나!”라고 말했다. 바로 이 한마디가 조금전에 靈照의 단하 接待에 대한 稱讚이다. 이때 단하는 “아까는 내 입이 벙어리를 强要당했거든!”이라고 應手, 역시 靈照의 禪氣를 肯定했다.
禪話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거사 : 자네야 본래부터 벙어리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벙어리로 만들 작정인가?
단하 : (佛子를 내던지고 나가 버렸다)
거사 : 이보게 선사, 선사!
단하 : (돌아보지도 않았다)
거사 : 벙어리만 된 것이 아니라 귀머거리까지 돼버렸군!
靈照는 절집 風俗으로 따지자면 龐居士의 侍子였다. 龐居士 一家族이 녹문산으로 이사하면서부터 집안 식구가 모두가 在家僧으로 佛道를 따라 살았다. 居士와 靈照 父女는 禪房을 두루 찾아 다니는 行脚을 했고 부인 龐老婆와 아들은 녹문사를 드나들며 道得의 境地를 넓혀나갔다. 靈照는 龐居士 一家中 거사 다음으로 오도의 境地가 높은 再家僧 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龐居士가 딸 靈照와 함께 쌀이는 조리를 팔아서 食生活을 解決하며 四方을 遊歷하고 다니던 어느날이었다. 父女가 市場으로 조리를 팔러 나가던 중 龐居士가 구름다리를 내려가다 넘어졌다. 이를 본 딸 靈照가 재빨리 아버지 곁으로 가서 일부러 넘어졌다. 龐居士가 “너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묻자 靈照는 “넘어지신 아버지를 제가 副軸해 일으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龐居士는 “多幸이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 됐구나” 했다.
무슨 演劇의 한 場面 같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면 서서해야 되는데 전혀 엉뚱하게도 옆에 와 넘어져 놓고 넘어진 사람이 일어나도록 거들어주겠다니 정말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퍼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禪話는 靈照의 禪氣가 번뜩이는 기막힌 逸話다. 우리가 흔히 술 취한 사람을 副軸할 때 “같이 취한 척 하라”는 말을 한다. 靈照가 龐居士 옆에 넘어진 것을 이와 같은 論理로 說明하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다만 어려운 禪家의 話頭를 풀어나가는 緊張感을 풀기 위해 떠올려 본 客談일 뿐이다.
話頭로는 ‘영조부변도(靈照夫邊倒)’라 한다. 靈照가 이렇게 넘어진 것이 곧 아버님을 副軸하는것‘이라고 한 對答이 바로 이 話頭의 核心處고, 선리(禪理)의 閃光이다. 아버지는 땅에 넘어져 있고 딸은 서 있는 形象은 서로 反對대는 相對的 對立이며 넘어져 있음[倒]과 서 있음[立]의 구분이다. 禪은 이같은 相對的 分別을 곧 모든 煩惱의 根源으로 보기 때문에 단호히 거부한다. 앉아 있음과 서 있음., 凡夫와 聖人 등으로 나누는 二分法的이고 對立的인 分別心만 없애면 바로 佛道에 到達할 수 있다고 누누이 强調한다,
禪이 目標하는 解脫의 成就는 分別意識의 消滅 없이는 전혀 不可能하다. 따라서 見性의 出發點도, 終着地도 하나같이 ‘分別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모든 修行의 歸結点도 바로 分別심의 消滅이다. 靈照는 이래서 자신도 龐居士 옆에 넘어짐으로써 아버지는 넘어져 있고, 딸은 서 있는 ‘差別’과 相對的 分別을 없애버린 것이다. 分別心으로부터 생겨난 ‘差別相’ 이야말로 人間의 마음을 汚染시키는 萬病의 原因이다. 이럴진대 分別心과 차별상(差別相)을 없앰으로써 넘어진 龐居士를 거들어 일으키겠다는 靈照의 行動 以上의 相扶相助는 있을 수 없다. 참으로 엄청난 소식이다.
禪에서는 이렇게 象徵的인 行動言語를 통해 禪理를 說破할 수 있는 才能을 상근기라 한다.따라서 영조는 아버지 龐居士 못지 않는 상근기를 가진 智慧덩어리 禪知識이었다. 마지막 龐居士의 말 “다행이 아무도 보지 않아서 됐구나!”는 “그래,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구나! 됐다, 가자!” 라며 툭툭 털고 市場으로 조리를 팔려 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龐居士는 딸의 道得을 欣快히 認定하고 기뻐한 것이다.
참으로 이 話頭에 대한 日本 禪學者 이리야 요시다카의 解說을 보자. 그는 靈照가 넘어진 것을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동병상린이 보여주는 유마거사의 대자비심에 비유했다. 또 [선문염송집]에 나오는 묘지광의 偈頌 “龐公이 땅에 넘어지자 딸은 걱정을 나누었다.”를 인용 부주열반(不住涅槃)의 菩薩行을 實踐한 대비천제(大悲闡提)의 慈悲行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靈照가 아버지 龐居士를 능가하는 菩薩이었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무리고, 그저 귀염둥이 딸다운 擧動에 지나지 않음을 看過해서는 안된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靈照의 재롱 같은 動作에 菩薩行의 妙用이 부드럽고 自然스럽게 간직되어 있다는 점도 認定은 했다.
靈照가 龐居士 옆으로 가 넘어진 이 禪話에 대한 두 가지 解說 중 어느 것이 더 그럴듯한 지는 讀者들의 趣向에 따를 일이다. 禪家의 話頭를 解說하는데 敎學의 經典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祖師禪의 話頭를 다루는 데는 祖師禪 本領의 獨創的인 禪學 理論을 可能한 한 動員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龐居士의 婦人 龐老婆도 딸 靈照 못지 않은 禪의 境地를 보여주고 있다. 龐居士 家族은 父傳 女傳이고, 夫唱婦隨로 佛道를 닦은 선가(禪家)였다.
龐居士는 初期 佛敎에 가장 有名한 居士였던 부대사(傅大士 : 일명 무주선혜 497-569)와 함께 中國 佛敎史의 兩大 居士이고, 서농의 最高 居士이다. 副大師도 [심왕명(心王銘)] 등의 著述을 통해 후일 祖師禪의 基本 禪思想이 된 ‘즉심즉불(卽心卽佛)’을 說破함으로서 中國 禪佛敎를 胚胎시킨 禪杖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은 中國 禪佛敎의 兩大 居士로서 禪宗의 獨特한 家風인 ‘居士佛敎’를 確立한 在家禪宗(在家禪宗)의 開山祖다.
龐居士의 또다른 特技할 만한 行狀은 儒敎에서 佛敎로 轉換한 유입불료(儒入佛了)의 代表的인 事例라는 점이다. 唐나라 때는 佛敎가 興盛, 이런 예가 적지 않았다. 반대로 宋, 원나라 때는 僧侶가 儒學者로 變身하는 불입유료(佛入儒了)가 나타난다.
代表的인 예의 하나가 30년동안 佛門에 있다가 나가서 儒敎 상리학(像理學)의 大家가 된 장재(長載)다. 唐,宋代의 佛敎와 儒敎는 상호 對立의 裏面에서는 幕後 交流도 活潑했다. 주이, 정호, 정이 같은 大儒學者들도 佛敎硏究가 깊었다. 주희의 경우는 현 복건성 복주 용천사에서 주희 記念亭子(水雲亭)가 建立돼 지금까지 保存돼오고 있을 정도로 禪宗 寺刹들을 遊歷하면서 禪理에 깊이 穿鑿하기도 했다.
龐居士와 그의 家族은 많은 詩人墨客들로부터 傳記的 特徵에 어울리는 尊敬과 憧憬의 對象이었고 그림, 演劇 등의 素材가 돼 宋, 元, 明代는 물론 오늘에까지 그 名聲이 이어지고 있다. 唐末 抒情詩人 이군옥은 “뒷날 구름 봉우리 사이로, 다시 와서 龐居士를 찾으리라”고 읊조렸다. 또 明末 靑初의 文人 탁발지는 그의 長男에게 보낸 편지에 龐居士 家庭의 安貧樂道를 본받아야 할 거울로 提示했다.
“大家族이 단란하게 무생(無生)을 이야기하는 立場이 된다면 이것이 千古에 으뜸가는 家庭의 즐거움이니라.”
龐老波가 남긴 이런 禪話가 있다.
龐老婆가 齋를 올리려고 어느날 녹문사를 찾아갔다. 擔當 僧侶는 무슨 回向이냐고 물었다. 龐老婆는 머리에 꽂은 빗을 뽑아서 쪽머리 뒤쪽으로 꽂고는 “이것으로 回向은 끝났소” 라며 되돌아 나가버렸다.
話頭로는 ‘방노파 회향(龐老婆回向)’이라 한다. 녹문사는 바로 龐居士 一家族이 隱居해 사는 녹문산에 있는 절이다. 녹문산은 後漢의 방덕공이라는 사람이 隱居한 곳으로 有名하다. 現在는 절은 없다. 원래 龐居士가 자리잡은 양번(옛날 양양과 번양을 통합한 시)은 三國志의 舞臺로 은사(隱士)들의 傳說과 또 그들이 隱居했던 동굴, 산 등이 많다. 龐居士 一家族이 살았던 녹문산과 말년 2년여동안 隱居한 龐居洞도 예부터 전해오는 有名한 隱居處 였다.
回向이란 부처님께 供養을 올려 얻은 功德을 남에게 돌려주는 것을 말하는데 現在는 절집에서 ‘竣工式’과 같은 意味로도 使用된다. ‘龐老婆 回向’이라는 話頭의 포인트는 빗을 옮겨 꼿은 行動言語다. 진정한 慈悲行에서는 베푸는 자(주는 자)와 받는 자가 따로 없다. 이른바 무주상(無住相)보시다. 龐老波는 이와 같은 慈悲行을 행하는 回向에는 누구를 위한다는 功利主義的 打算이나 自律, 他律의 次元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빗의 方向만 바꾸어 꽂음으로서 慈悲行이란 단지 方向을 바꾸는 회향(回向)일 뿐이라고 說破한 것이다.
그는 빗의 方向만 바꾸어 꽂음으로써 ‘回向’이라는 文字의 意味를 멋지게 풀어 보였다. 즉 어떠한 因緣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무연(無緣)’의 慈悲行이야말로 진짜 大慈大悲心이라는 얘기다. 산뜻하고 감칠맛나는 ‘無緣의 回向’이다. 禪은 이처럼 빗 한번 옮겨 꽂는 行動에도 엄청난 法問을 含蓄시킨다. 結果的으로 世俗的인 齋供養 장사나 하고 있는 녹문사 중한테 따끔한 한소식을 가르쳐준 것이다.
龐居士 家族은 집안에서의 日常生活中에도 서로 법거량을 하며 살았다. 말하자면 家庭生活 自體가 한 마음으로 佛道를 닦는 和氣靄靄한 參禪이요 修行이었다고 할까.
龐居士가 하루는 禪靜에 들어 있다가 말했다.
“아, 어렵구나 어려워! 열섬이나 되는 참깨를 나무 위에다 널어놓듯이!”
아내 龐老波가 이 말을 듣고는 “아! 쉽구나 쉬워! 寢臺를 내려서서 땅을 밟듯이!”
옆에 있던 靈照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려울 것도 없고, 쉬울 것도 없구나. 마치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것 같을 뿐이네.”
이 禪話를 話頭로는 ‘행로난(行路難)“이라 한다. 원래 ’行路難‘은 6祖時代 이래로 널리 불려온 民謠의 하나다. 龐居士의 말은 佛法의 光明을 一切 存在(개개인)에 비추어 道人이 되도록 하는 衆生諸道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龐老婆는 그렇게 놓은 觀念的 以上에만 기울지 말고 땅이 바쳐주는 大地 위에서 살고 있는 衆生이 바로 부처니 本來의 마음자리만 찾으면 衆生의 佛性은 쉽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靈照는 衆生과 부처를 區分하는 分別心을 撲殺냄으로써 龐居士 夫婦의 쉽고 어렵다는 二分法的인 對立을 一擧에 떨쳐버린다. 가장 禪理에 맞는 말이다.
[禪門念頌]은 세 사람을 將棋板에 比喩하며 龐居士를 졸(卒), 龐老婆는 마상(馬象), 靈照는 차포(車包)라고 평했다. 靈照가 가장 優秀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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