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 禪僧의 權威와 威嚴을 나타내는 법구(法具)인 佛子와 拄杖子 얘기를 좀 해보자. 佛子는 원래 삼(麻)이나 짐승의 털로 만들어 파리, 모기 등을 쫓는 털이개 모양의 生活用具였다. 禪僧들은 이 生活用具에 煩惱를 털어낸다는 象徵的 意味를 附與, 禪僧의 權威를 나타내는 法句로 活用하면서 불진(拂塵)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렇게 돼 佛子는 眞理當體, 佛法, 道를 象徵하는 法具로 자리를 굳혔다. 禪問答에서는 言說 대신 佛子를 세우기도 하고, 세웠던 佛子를 내려놓거나 내던지기도 한다.
묻는다 : 너는 사람들에게 어떤 法을 가르쳐주느냐?
답한다 : (百丈懷海는 대답으로 佛子를 세워 보였다.)
문는다 : 그것뿐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또 있는가?
답한다 : (百丈은 佛子를 내던지고 나가 버렸다.)
百丈이 스승 馬祖의 물음에 佛子를 세워보인 것은 眞理當體, 佛法을 가르쳤다는 象徵이다. 馬祖는 다시 佛法을 뛰어넘는 究極의 境地를 追窮한다. 이에 百丈은 佛子를 내던져 어떠한 形象에도 얽매이지 않는 究極의 解脫 境地임을 보여준다. 멋진 去量이다. 馬祖는 여기에서 百丈의 法力을 欣快히 認定, 後繼者로 認可한다.
佛子 대신 빗자루를 세우고, 내던지기도 한다. ‘미치광이 중’으로 有名한 천태산 국청사의 습득(拾得)에게 潙山靈祐禪師가 “어떤 것이 너의 家風인가?”라고 물었을 때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세워 보였던 것도 역시 百丈이 佛子를 곧바로 세운 것과 같은 의미다. 즉 나, 습득은 이처럼 언제나 여여한 眞理當體로 存在한다는 당당함이 엿보이는 對答이다.
묻는다 : 어떤 것이 祖師의 뜻입니까?
답한다 : (천룡화상은 佛子를 들어 보였다.)
大梅法常(752-839)의 제자인 천룡화상과 한 중의 禪問答이다.
묻는다 : 佛法의 大義는 무엇입니까?
답한다 : (臨濟義玄禪師는 佛子를 세워 보였다.)
臨濟宗을 開倉한 臨濟義玄禪師(?-866)와 한 學人의 禪問答이다. 천룡과 臨濟는 다같이 佛子를 세워 보이는 것으로 對答을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禪師들이 佛子를 즐겨 세우는 것은 言語로 說明할 수 없는 眞理當體를 說明하기 爲한 경우가 大部分이다.
拄杖子도 역시 禪僧의 權威를 象徵하는 法具의 하나다. 원래는 산길 行脚을 하는 禪僧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였다. 禪佛敎의 黃金 時代였던 唐나라 中期부터 拄杖子는 佛法, 佛道를 象徵하는 法具로 方丈들이 上堂法語를 할 때나 雲水衲子들과 法去量을 할 때 거의 必需品처럼 使用했다.
묻는다 : 和尙의 病患에 좀 差度가 있으십니까?
답한다 : (나한계침선사는 拄杖子로 땅을 짚으면서) 그대는 이것도 아픔을 느낀다고 여기는가?
한 중이 나한 계침선사(867-928)를 問病한 禪話다. 나한계침이 “이 拄杖子도 아픔을 느끼느냐”는 反問에서 使用한 拄杖子는 ‘무엇에도 執着하지 말라’는 象徵이고 더 나아가서는 ‘부처는 없다’ 는 深奧한 禪理를 說破하고 있다. 生死를 완전히 떠나 存在할 수 있는 解脫의 부처나 道人이란 있을 수 없다. 태어났다 죽어가는 自然大道를 순순히 따르는 것이 곧 道人이다. 나한선사의 拄杖子는 밥먹고 잠자며 지내는 이 삶이 곧 涅槃이고, 煩惱가 바로 보리인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죽은 후의 적정 涅槃을 設定하는 것은 한낱 어리석은 妄想이라는 소식을 전해준다. 道人은 拄杖子(나무막대기)처럼 나고 죽는 것을 超越한다는 象徵이다.
禪은 이처럼 털이개 하나, 지팡이 한 개에도 無限의 象徵性을 附與해 佛子를 세우고 내던지는 속에 8만 4천 法問을 壓縮하는 獨特한 象徵體系를 가지고 있다. 가령 비공(鼻孔 : 고삐뚫은 소 콧구멍)=本分․인위(人爲), 南山=妙用, 북수(北水)=空寂․故鄕, 새끼고양이(猫兒)=法․道, 철안(鐵眼 : 무쇠눈)=一切를 내다보는 銳利한 見識, 말(馬)=靈妙한 마음자취, 당나귀=天地未分前의 空寂한 道理 등은 禪이 가지고 있는 獨特한 象徵體系의 代表的 事例들이다. 佛子와 拄杖子도 禪學 象徵體系에서 法身․佛法․眞如自性․眞理 本體 등을 뜻하는 象徵물이다.
龐居士는 仰山이 佛子를 세워 仰과 腹을 뛰어넘는 眞如佛法을 보이자 그에 同感, 肯定했다. 그러나 仰山은 “그럴 듯하다”는 龐居士의 말에 말려들어 “이 佛子를 세운 게 올려다 보는 거냐, 내려다 보는 거냐”라고 分別心을 내 對答을 채근한다. 이는 仰山이 佛子를 들어 提示한 ‘自己 定立’이 徹底한 것이 아니었음을 내 보인 虛點이기도 하다. ‘그럴 듯하다’는 龐居士의 反應을 洽足한 肯定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마음에 걸려 다시 물은 仰山의 質問은 結局 스스로 부족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龐居士 쪽에서는 이미 仰山의 反問을 敗着으로 看做했지만 仰山은 이를 自覺하지 못하고 ‘佛子를 세운게 仰이냐 腹이냐’는 反問을 통해 龐居士를 檢證, 破綻으로 몰아넣겠다는 計算이다.
“저 돌기둥이 證言해 주리라.”
龐居士는 自信과 仰山의 勝敗를 判定할 審判으로 돌기둥[露柱]을 지정, 仰山을 묵사발 내버렸다. 中國 절은 木槽 殿閣이라도 외주(外柱), 또는 內部 補助 기둥으로 석주(石柱)를 많이 사용한다. 露柱는 바로 이 돌기둥을 말하는데 절에선 흔하고 흔한 물건이다. 그러나 禪學에서는 露柱도 하나의 象徵物로 知覺과 정식(情識)을 완전히 벗어난 眞實을 밝게 꿰뚫어 보는 정법안장을 뜻한다.
절간의 돌기둥들은 몰아치는 風雨를 딛고 묵묵히 서 있으면서 온종일 절을 드나드는 사람을 지켜본다. 人生이라는 것도 어떤 意味에서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法身의 存在 樣態도 돌기둥과 같다. 龐居士가 돌기둥을 證人으로 세우자고 한 이유는 돌기둥이 갖는 이러한 象徵性 때문이었다. 露柱는 禪語錄에 자주 登場한다.
묻는다 : 達磨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답한다 : 저 돌기둥에게 물어보렴.
묻는다 :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답한다 : 나는 더 모르겠는걸.
石頭 希遷禪師(700-791)의 법제자인 흥국진랑이 沙彌時節 石頭에게 참문한 禪問答이다.
묻는다 : 중, 부처란 무엇입니까?
답한다 : 돌기둥에 올라간 고양이다.
묻는다 : 잘 모르겠는데요.
답한다 : 돌기둥한테 물어보렴.
藥山惟儼禪師(751-834)의 제자인 비수혜성화상과 한 學人이 去量한 禪話다. 두 개의 禪問答이 다 말로 說明할 수 없는 深奧한 佛法眞理를 돌기둥에 比喩한 것이다. 돌기둥은 말을 하지 못하는 無情物이지만 善과 惡, 聖人과 凡夫를 分別하지 않고 절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묵묵히 지켜본다. 佛性, 佛法이란 것도 이처럼 分別의 世界를 넘어 萬人을 平等하게 包容하는 眞理다. 물론 돌기둥이 사람을 지켜본다는 것은 象徵的 表現일 뿐이다.
禪에서는 無情物도 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世俗的 思考體系로는 “당나귀가 우물을 엿본다”고 表現해야 맞지만 禪에서는 “우물이 당나귀를 엿본다”고 表現할 수도 있다. 조동종 開山祖의 한 사람인 조산본적선사(840-901)는 “우물이 당나귀를 엿본다(井覰驢)”는 有名한 話頭를 남겼다.
龐居士와 仰山의 法去量은 돌기둥을 證人으로까지 세우자고 맞서는 가운데 더욱 강경해진다. 仰山은 “그래 이경우를 천하 어느 禪師한테 가서 말해도 좋다”고 反擊한다. 다시 말해 누구한테 물어봐도 패한 게임이 아니라는 자신만만한 말투다. 그러나 이미 게임은 돌기둥의 判定으로 끝나버린 것을......이 禪問答에 대한 後世의 平價는 龐居士가 기선을 잡는 主演이고 勝子라는 데 一致한다.
그러나 仰山의 禪氣도 대단한 것이었다. 즉 두 사람이 ‘佛子’라는 무정설법(無情說法)과 ‘돌기둥’ 이라는 無情說法으로 각각 對決하면서 다같이 ‘仰’이니 ‘腹’이니 하는 文字 명상(名相)을 否定한 점에서는 一致한다. 龐居士나 仰山 다같이 淸淨한 자성(自性)의 本體는 本來가 ‘올려다본다’거나 ‘내려다본다’는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이러한 分別 以前의 '無分別‘을 그 本質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脈絡이다. 다만 仰山이 비꼬는 듯한 肯定(음, 그렇군)을 疑心함으로써 敗着을 한 것뿐이다
龐居士가 佛家 歸依를 決心하고 모든 財産을 버린 후 호북성 양번 녹산사로 移住하면서부터 그의 婦人과 1남1녀도 篤實한 在家佛子가 됐다. 특히 그의 婦人 龐老婆와 딸 靈照는 단순한 信徒次元의 佛子가 아니라 한 소식한 道人의 風貌를 보여 주었고 禪語錄에 話頭를 남기는 등 龐居士 못지않은 수준급의 ‘禪僧’ 대열에 드는 法力을 發揮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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