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나고 죽는 것은 너무나도 큰일이다(生死事大)
(永嘉玄覺禪師가 광동성 소관 曹溪로 내려가 6祖 慧能祖師를 참문했다. 그는 3배를 올린 후 祖師 둘레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나서 拄杖子를 내던지고는 똑바로 서 있었다.)
묻는다 : 대저 사문(沙門)은 3천 威儀와 8만 세행(細行)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대는 어느 곳에서 왔기에 그처럼 건방진가.
답한다 : 生死의 일이 너무너무 重大하고 한순간인지라 3천 威儀를 갖출 겨를이 없습니다.
묻는다 : 어찌해서 生滅이 없음을 體得하지 못하고 時間에 빠름이 없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가?
답한다 : 不生不滅을 體得하면 태어남이 없고 깨침에는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
(慧能은 여기서 “네 말이 맞다”며 玄覺을 곧바로 認可했다.)
모든 宗敎가 추구하는 窮極的인 目的 중의 하나는 삶과 죽음의 超越이다. 佛敎는 죽음을 超越하는 方法으로 생사일여관(生死一如觀)을 提示한다. 中國 禪佛敎의 禪僧들은 죽음이 다가왔음을 體感하면 ‘임종게(臨終偈)’라는 詩를 남기고 앉은 채로 또는 선 채로 입멸하는 좌화(坐化), 입화(立化)라는 涅槃美學을 만들어 냈다.
中國人들은 예로부터 죽음을 虛妄한 슬픔과 悲嘆으로 맞기보다는 人間解放으로 기꺼이 收用하면서 가는 者를 즐겁게 보내고자 했다. 그 代表的인 예의 하나로 婦人이 죽자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 띄워놓고 長短을 치며 祝賀했다는 莊子를 꼽을 수 있다.
莊子는 婦人이 저 絶對自由의 世界로 먼저 가는 것을 오히려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中國의 葬禮式을 보면 이러한 生死觀을 쉽게 感知할 수 있다. 시골의 경우 葬禮式 運柩行列 앞에 農樂隊가 나가며 북, 징, 장구 등을 치고 새납을 불며 音樂을 演奏한다. 始終一貫 슬픔의 바닷속 같은 西洋의 葬禮式보다는 中國의 葬禮式에서 樂天的이고 生死를 뛰어넘는 達觀의 境地가 엿보였다.
옛 禪僧들의 죽음은 어떠했나.
그들은 죽음을 豫感하면 陽地바른 산속 잔디밭이나 숲속으로 들어가 홀연히 坐化했다. 屍身이 썩은 자리에는 잔디나 풀이 유난히 우거졌다. 그래서 바랑(鉢囊)하나 울러 멘 채 지팡이(후일 拄杖子, 錫杖이 됨) 짚고 구름 따라 물 따라 산길을 行脚하는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은 길을 가다 우거진 풀숲을 만나면 先代 禪僧들의 墓所로 看做, 合掌하고 禮를 올렸다. 佛敎는 人體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대 元素로 構成돼 있다고 본다. 죽으면 뼈는 썩어 �으로, 살은 썩어 물로, 호홉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禪僧들은 죽음을 ‘本來面目’으로 돌아가는 日常的인 自然回歸로 받아들였다고나 할까. 禪宗의 初期 修行은 이와 같은 生死의 原理를 깨우치기 위해 墓地에 살며 백골관(白骨觀, 一切의 感情과 意識이 斷絶된 境地의 體驗)을 하거나 홀로 숲속 동굴 등에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苦行 參禪하는 個人主義的 두타행(頭陀行)이였다. 이들을 頭陀行者, 또는 一名 능가사(楞伽師)라 일컫는다. 寺刹을 짓고 모여 사는 개산주사(開山住寺)의 傳統은 제4代 祖師 道信(580-651)때 시작됐다.
등신불(等身佛)
육신상(肉身像), 眞身象이라고도 불리는 中國 禪佛敎만이 독특한 ‘涅槃美學’이다. 辭典上 意味는 사람의 키와 똑같게 만든 佛像을 말한다. 그러나 成佛의 境地를 이룬 解脫道人이 죽은후 肉身 그대로 佛像이 된 것이야말로 훨씬 실감나는 等身佛이요 무생무사(無生無死)다. 그러나 成佛의 境地를 이룬 解脫道人이 죽은 후 肉身 그대로 佛像이 된 것이야말로 훨씬 실감나는 等身佛이요 무생무사(無生無死)다. 中國 禪宗의 경우 6祖 慧能祖師(638 - 713)이후 禪師들의 臨終은 대체로 座奪入亡이 慣行化됐고 坐化는 곧 높은 道力을 象徵해 왔다. 等身佛은 바로 이 坐化의 延長線上에 位置한다. 禪家의 장법(葬法)에는 다비장, 난제답장(難提答葬 : 屍身을 탑속에 埋葬하는 方法), 항장(缸葬), 土葬 등 4가지가 있다. 이 중 缸葬은 앉은 자세로 入寂한 禪僧의 屍身을 큰 옹기 도가니(缸)에 넣고 密封한다.
또 아예 본인 스스로가 缸 안에 들어가 앉아 入寂하는 경우도 있다. 密封한 缸은 3년 또는 5년 後 開封한다. 지역의 氣候 風土와 入滅者의 體質, 道力에 따라 뼈만 남기도 하고 살갗이 그대로 말라붙어 肉身이 온전한 미라가 되기도 하다. 미라가 된 禪僧은 그 屍身을 꺼내 肉身 위에다 금물(金泥)을 입혀 佛像처럼 모신다. 이것이 바로 等身佛이다. 通常 金尼를 입히기 전 香을 바르고 생옻을 칠해 모양을 낸 후 精製한 옻을 칠한다.
踏査中 만나본 가장 생생한 等身佛은 踏査의 맨 첫 旅程이었던 구화산 마공령의 조동종 만년선사(일명 백세궁)에 있는 明代 无瑕禪師(1513-1639) 眞身像과 광동정 소관시 조계 남화선사의 6조 慧能 肉身像이었다. 구화산 新築 肉身殿에도 최근의 等身佛 2軀가 있으나 年代가 아직은 一淺하다.
우선 无瑕禪師 眞身상은 두 팔을 앞으로 �쳐 든 坐像인데 살갗이 너무도 생생하고 눈, 코, 입, 귀 모양이 살아 있는 사람의 것과 다름없다. 무하(无瑕)선사는 北京 出生으로 明 萬曆 연간인 24세 때 오대산으로 出家, 해옥(海玉)이라는 法名을 받고 2년 후 구화산으로 내려왔다. 无瑕는 향민(鄕民)들로부터 “唐祖 佛敎 隆盛期에는 구화산에 3백80여 개의 寺刹이 入立했으나 唐末 皇帝가 道敎 방사(方士)의 誘惑에 빠져 구화산의 佛敎寺刹을 완전히 毁滅시켜 승중(僧衆)이 모두 하산한 이래 4백 년 동안 구화산에 僧侶가 한 명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주민들 이야기 가운데는 지장보살의 化身으로 推仰받은 옛날 구화산의 신라승려 김교각(金喬覺)의 逸話도 들어 있다. 지장보살은 석존 入滅 후 彌勒佛이 出現하기까지 몸을 6도(道)에 나타내어 天上서 地獄까지의 一切衆生을 敎化하는 大慈大悲한 菩薩을 말한다.
산중의 해와 달(山中日月)
- 의성 방거동(龐居洞) 龐溫居師
산중의 해와 달은 한가로이 오가고 (山中日月 閑來往)
동구의 저녁 연기 예와 다름없고나 (洞口煙霞 自古今)
호북성 의성시 와집진 방거촌(龐居村) 龐居士 동굴(龐居洞).‘中國의 유마거사’ ‘범부부처(凡夫佛陀)’라 불리는 中國 禪佛敎 最高의 재가(在家)禪師인 龐溫居士(740-808)의 現住所다.
내 집은 오래 전 산 속에 자리잡아
일찍이 이미 성안을 떠난 고장
엉성한 초가 삼간이 고작이고
한 칸 길이는 열두 자 안팎
자식한테 물려줄 것도 없고
텅 비고 텅 비어 앉을 자리도 없느니
집안을 둘러봐도 그저 텅 비었을 뿐
공하고 공하니 돈이 있을 리 없다
해가 뜨면 공 속을 거닐고
해가 지면 공 속에 눕는다
나는 보잘것없는 촌 늙은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
집안엔 아무것도 없고
입을 열면 공공(空空)을 설한다
<은사거(隱士居) 편액>
龐居洞 柱聯의 글귀를 대하는 순간 떠오른 龐溫居士의 偈頌이다. 龐居士의 詩는 적빈(赤貧)의 無所有와 일체개공(一切皆空)을 對比시키면서 대도자연(大道自然)속에 沈潛해 唯唯自足하는 自畵像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의 龐居洞 柱聯 7言2句도 이와 같은 龐居士의 한 물건도 없는 絶對가난과 텅 빈 空 속에서 自適하는 絶對自由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글귀로서 遜色이 없다. 龐居師 家族의 生計手段은 주로 婦人과 딸이 조리, 대바구니 등을 만들어 市場에 내다 팔았던 것으로 記錄돼 있다. 그리고 아들은 農事를 짓고......
어쨌든 龐居師 一族이 耕作했던 밭은 千年을 예와 다름없이 밀을 키워내고 있다. 사람의 마음밭(心田)도 이와 같이 意識作用을 통해 萬物을 生成해 낸다. 그래서 禪師들은 世上萬事가 人間의 심지(心地)에 달려 있다고 누누이 說破한다. 人間 本然의 自性(老婆의 佛心)은 龐居士 一家族이 耕作했던 저 언덕처럼 예나 다름이 없다. 그렇건만 江漢平野 위에 뜬 구름(世俗人心)은 唐 中期 龐居士가 살았던 時節과는 判異하게 바뀌었음을 實感케 한다. 龐居洞의 청신녀 후노파가 無斷居住로 홀대를 받는 판국이니 말이다.
나는 이러한 感懷를 한줄 읊어 龐居洞 돌기둥에 새겨진 7言2句에 答하고 老婆를 作別했다.
노파의 마음달 홀로 둥근데(老婆心月孤圓相)
강한평야 위에 뜬 구름은 예와 다르구나(江漢浮雲異昔時)
* 부처를 뽑는 과거장[選佛場]
사방에서 모여들어(十方同一會)
각기 무위를 공부한다(各各學無爲)
여기는 부처를 뽑는 곳(此是選佛場)
마음을 비워 급제해 돌아들 간다(心空及第歸)
龐居士가 馬祖道一禪師(709-788)를 참문하고 지어 바친 偈頌이다. 龐居士 一代記를 素材로 한 元나라 때 演劇[월명화상도류취(月明和尙度柳翠)]는 主人公 월명이 舞臺에 登場하면서 龐居士의 이 詩를 읊조린다. 이 演劇은 明, 靑代까지도 傳乘돼왔다.
中國 禪宗 寺刹들은 禪房을 선당(禪堂), 또는 選佛場이라 한다. 그리고 ‘選佛場’이라는 懸板밑에는 흔히 붓글씨로 龐溫居士의 話頭 ‘心空及第’를 써 붙인다. 選佛場은 관리를 뽑는 科擧場인 選官場에 比喩, 부처를 선발하는 곳이란 뜻이다. 그 由來는 龐溫居士와 檀瑕天然禪師의 出家 逸話에서 비롯됐다.
각각 科擧를 보러 가다가 偶然히 同行이 된 두 사람은 한 行脚僧을 만났다. 세 사람은 함께 茶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중이 “選官場보다는 選佛場으로 가서 부처가 되는 게 몇 백배 값진 일”이라고 하자 龐溫과 檀瑕가 “부처는 어떻게 선발하느냐”고 물었다. 중은 찻상 위의 찻잔을 위로 들어올리고는 “알겠습니까”하고 반문했다. 두 사람이 “그 높은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자, 중은 강서(江西)에 가면 馬祖禪師가 있는데 거기가 참다운 選佛場이라고 일러 주었다.
중이 찻잔을 들어올린 行動言語(Body Language)는 마음만 비우면 選佛 科擧에 及第할 수 있고, 成佛을 하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무심히 茶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安定된 한도인(閑道人)으로 살 수 있다는 暗示였다. 두 사람은 여기서 科擧길을 포기하고 그 길로 馬祖를 참문, 龐溫은 馬祖門下의 在家僧이 됐고, 檀瑕는 다시 石頭 希遷禪士를 참문한 후 出家僧이 됐다.
방온(龐蘊)은 호남성 형주(현 형양시) 出生의 儒生이었다. 그의 父親은 형양 太守로 대대로 儒學을 공부한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家門에 걸맞는 높은 學識을 갖춘 知性人이었고 결코 가난한 촌뜨기가 아니었다. 南泉普元禪士의 語錄인 ‘南泉語要’나 ‘景德傳燈錄’의 <南泉章>에서는 그를 ‘학사(學士)’라 부르고 있다. 즉 그는 學文의 境地가 상당한 水準의 儒生이었다는 얘기다. 옛 禪宗 語錄인 ‘조당집’에 나와 있는 그의 傳記는 아주 간단하다.
당시 강서성 홍주(현 남창시)의 馬祖道一과 남악 형산의 石頭希遷禪士 門下가 天下 秀才들이 모여드는 敎育場으로 名聲을 떨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現實을 反影하는 代表的인 事例 하나가 ‘강호제현(江湖題賢)’이라는 古事成語다. ‘江’은 馬祖의 主席地인 강서성의 첫글자, ‘湖’는 石頭의 主席地인 호남성의 첫글자를 각각 딴 것이고 諸賢은 지금도 ‘在野人士’ ‘草野에 묻혀있는 知識人’ 등을 치켜세울 때 자주 使用하는 成語다.
龐溫의 佛家 入門은 儒家 學士라는 한 젊은 知識人이 새로운 時代의 變革을 재빨리 읽고 波濤를 따라 흐름을 같이한 수파축랑(隨波逐浪)의 自己革新 같다.
묻는다 :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한다 :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몽땅 들이마시면 그때나 말해주마
龐溫居士가 酒幕집에서 만난 한 行脚僧의 권유로 科擧試驗을 포기하고 강서성 홍주(현 남창시) 개원사(현 우민사)로 馬祖를 찾아가 참문한 禪問答이다. 話頭로는 ‘마조서강(馬祖西江)’이라 한다. 龐溫이 最初로 禪林에 발을 내딛는 入學式이기도 하다.
우선 龐溫居士의 물음에 知識人다운 知性과 識見이 번득인다. 그가 質問한, 一切 存在와 同一한 次元에 있지 않은 사람은 通常의 絶對者, 超越者를 뛰어넘은 極限의 超脫者, 超克의 絶對者를 말한다. 通常의 超越者나 絶對者는 萬法의 하나일 뿐이다. 龐溫이 말하는 一切의 差別을 克復한 사람, 一切의 存在와 無關한 사람은 絶對와 超越까지도 버린 解脫道人 , 곧 宇宙的 人格者를 뜻한다. 禪林은 이러한 最上의 人格者를 흔히 祖師, 또는 道人이라고 일컫는다. 과연 어떤 사람이 現實에 實存하는 그런 人格者일까.
馬祖의 對答은 通常의 常識으로는 不可能한 境地가 바로 그런 人格이라는 것이다. 좀 어렵게 말한다면 그러한 人格이 바로 도(道)인데 道는 人間意識이 分別作用을 일으키기 이전부터 存在해 왔고 人間의 通常의 思惟方式인 分別意識으로는 說明이 不可能하다는 애기다. 馬祖는 道란 分別意識 以前의 問題이며, 言語文字로는 說明할 수 없는 言語道斷이 道의 本質임을 나타내 보이는 對應으로 서江의 물을 例示했다.
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시는 것은 現實世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不可能’을 象徵한다. 그러니까 馬祖는 龐溫에게 네가 물은 萬法과 짝하지 않는 超克의 絶對者는 네가 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 수 없는 것처럼 言語 文字론 說明이 不可能하다는 점을 누누이 强調해오고 있다. 道는 다만 直觀을 通해 감지(感知)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龐溫은 이 한마디 禪問答에서 豁然大悟하고 ‘心空及第’ 라는 偈頌을 지어 바쳐 馬祖에게 자신의 깨친 境地를 認定받았다. 그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바로 깨침의 要諦라는 점을 꿰뚫었던 것이다.
龐溫은 馬祖를 참문, 크게 깨친 후 自身의 고향인 호남성 형양으로 돌아가 馬祖와 雙璧을 이루고 있는 石頭禪師를 참문했다. 石頭 讖文 때도 馬祖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質問을 했다. 石頭는 對答대신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馬祖와 같은 道에 대한 說明이 不可能함을 뜻하는 行動言語다. 그런 말은 입밖에 안 내는 것이 도리고, 입을 놀려서 說明할 수도 없는 問題라는 애기다.
진리는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데 있다 [神通倂妙用 運水與搬柴]
날마다 하는 일 별다른 것 없고
오직 나 스스로 탈없이 지낼 뿐.
무엇 하나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니
어디서 무얼 해도 災難 찾아들 리 없다
빨강이니 자주색이니 누구를 이름인고
이 山中은 티끌 하나 없는 平和로운 고장
나의 神通力과 妙用은 어떤 것이냐 하면
물이나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네.
龐溫居士가 石頭禪師에게 지어 바친 깨달음의 시다.
石頭禪師가 어느날 門下에 와 있는 龐溫에게 물었다.
묻는다 : 그대는 나를 만난 이후로 날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답한다 : 날마다의 일을 물으신다면 입을 열어 對答할 나위가 없습니다.
묻는다 : 그대가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는가?
답한다 : (龐居士는 대답으로 앞의 偈頌을 지어 올렸다.)
“神通倂妙用 運水與搬柴”이라는 偈頌이 나온 緣由다. 이 偈頌에 滿足해하며 “그대는 검은색(出家僧侶)을 택하겠는가, 흰색(在家僧侶, 俗人)을 택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龐溫은 “원컨대 思慕하는 분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對答, 削髮 염의를 拒否한 후 一生을 居士(在家僧)로 살았다. 그때 그에게는 이미 婦人과 1남 1녀가 있었다. 그는 佛道를 이루겠다며 妻子까지도 버리는 ‘出家’를 選擇하지 않았다. 그가 굳이 俗人의 삶을 택한 것은 家難을 함께 나누며 사는 妻子를 툇마루 아래로 걷어차버리고 훌훌 떠나는 非情한 ‘가출(家出)’같은 出家를 않고 在家 凡夫로서도 佛道를 成就할 수 있다는 自信感 때문이었다.
아마도 ‘유마경’에서 이러한 自信感을 얻었으리라. 그는 ‘유마경’ <불도품>의 “무위법(無爲法)을 攄得한 다음에야 비로소 제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자라면 끝내 佛法을 이룩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믿었다.
또 유마는 문수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기도 했다.
“진정한 佛法은 出家 修行生活에 있지 않다. 關鍵은 主觀的 修養과 心境의 淸淨 與否를 看破하는 것이다. 財産을 恒常 無常한 것으로 보고, 妻妾이 있으되 5慾에서 떠나 노니는 것이 진정한 菩薩行이다”
中國의 古典인 ‘예기(禮記)’ <禮文>篇에도 “人情이 성왕(聖王)의 밭이다”라고 해 妻子를 아끼고 사랑하며 거느리는 인정(人情)이 곧 성(聖)과 根本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밝혔다. 龐溫은 자기 자신을 카테고리화해 自己 生活을 規定해 놓을 경우 자칫 한발을 잘못 내디뎠다가는 법집(法執), 또는 無位法에 얽매이는 이장(理障)에 떨어지고 만다는 점을 나름으로 熟知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出家를 拒否한 데는 이럴 境遇에 대한 素朴한 두려움과 羞恥心이 作用했을지도 모른다.
龐居士는 禪林에 入門한 후 財物을 境界하는 다음과 같은 偈頌을 남겼다.
世上 많은 사람들 돈을 尊重하지만
나는 刹那의 古謠를 사랑한다.
돈이 많으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지만
古謠하면 眞如의 本性을 나타낸다.
龐居士가 石頭에게 지어 올린 오도송(悟道頌) [運水與飯柴]로 돌아가 보자. [運水與飯柴]는 平常心이 곧 道[平常心是道]임을 대표하는 話頭의 하나로 膾炙돼오면서 많은 中國 哲學者들의 讚嘆을 자아냈다. 龐居士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日常生活이 바로 나의 五妙하고 無窮한 神通力이며 眞理라고.
宋代의 儒學者 양작은 龐居士의 이 獅子吼를 “자득(自得)한 사람의 말이요, 가장 道理에 到達한 것이다”라며 讚嘆했다. 또 많은 哲學者들이 孟子가 堯舜의 도(道)에 담긴 깊은 뜻을 日常生活에서 實踐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解說한 뛰어난 현자(賢者)라면 龐居士는 日常生活 그대로가 道임을 드러내 보인 ‘자득(自得)에 達通한 道士’였다고 讚揚했다.
龐居士를 비롯한 祖師禪의 禪師들은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日常生活’의 活動을 통해 마음의 직관(直觀)과 日常性을 重視하는 大衆的 修行體系를 새로운 佛敎의 實體를 提示했다. 이는 自主的인 人間性의 啓發을 標榜한 것이기도 하다. 禪佛敎가 내건 (敎外別傳, 不立文字)’라는 기치도 絶對的인 人間信賴와 個性의 强調를 달리 表現한 말일 뿐이다. 完全한 樂觀論的인 人間信賴와 個性主義는 당시 새롭게 胎動한 時代精神이기도 했다.
禪師들은 ‘平常心是道’의 實踐方法으로 대중과 더불어 生産勞動에 直接 參加해 農事일 하고 찻잎을 따는 등 ‘농선병행(農禪倂行)’을 修行의 戒律로 삼았다. 이른바 ‘청규정신(淸規精神)’이다. 馬祖의 法師 百丈懷海禪師(479-814)는 선문규식(禪門規式, 一名 百丈淸規)을 制定, 淸規精神을 戒律化 했다.
이는 托鉢과 報施에 依存하면서 訓詁的인 經典註釋과 祈福佛敎를 展開하던 敎學佛敎에 대한 佛敎改革이고, 旣成佛敎를 否定하는 일대 ‘革命’이었다. 龐居士의 偈頌은 물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平素의 活動이 그대로 ‘부처의 活動’ 이라고 說破하고 있다. 馬祖系統의 祖師禪(一名 홍주종, 江西禪, 祖師禪)은 이를 ‘작용즉성(作用卽成)’이라는 말로 表現한다.
禪學 用語로는 ‘全體作用說’ 또는 ‘체용일여(體用一如)’라고도 한다. 이는 本體와 作用은 銅錢의 앞뒷면처럼 同時的이고 상즉적(相卽的)인 關係라는 뜻이다. 따라서 日常生活의 活動도 佛性(法身,本體)의 作用이며 그대로가 眞理라는 것이다. ‘體用一如論’은 馬祖禪의 長子인 潙仰宗의 禪師들이 더욱 深化, 發展시켰고 그 사촌인 臨濟宗의 開山祖 臨濟義玄禪師가 ‘差別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라는 公案을 통해 꽃을 피웠다. ‘平常心是道’를 떠받치는 禪學 理論體系인 體用一如論을 具體化시킨 公案이 龐居士의 ‘運水給搬柴’와 臨濟의 ‘無位眞人’이다.
達磨의 著述로 알려진 <혈맥론(血脈論)>도 일찍이 ‘全體作用說’을 主唱했다.
“부처란 印度말이며 覺醒을 뜻한다. 覺이란 영각(靈覺)을 말하며 機會에 應하고 事物을 대함에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며, 손발을 움직이는 日常의 活動이 모두 自己 靈覺의 성(性)과 다른 것이 아니다. 性은 곧 마음이요, 마음은 곧 부처요, 부처는 곧 道요, 道는 곧 禪이다.”
<血脈論>의 이와 같은 體用一如論과 馬祖의 說法은 脈絡이 같다. 馬祖는 이렇게 說破했다.
“지금 그대가 보고 듣고 知覺하고 인식하는[見聞覺知] 作用이 본디부터 그대의 本性이며 本心이다. 마음을 떠나서 달리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龐居士가 말하는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 그대로 부처의 行動’이라는 것도 達磨, 馬祖의 說破와 趣旨가 같다.
그러나 朱子學의 倫理體系는 作用이 그대로 成이라는 體用一如論을 絶對 排擊한다. 그 이유는 體用一如라면 유가 倫理學의 根幹인 수양론(修養論)이 成立될 수 없기 때문이다. 禪宗內에서는 점수론(漸修論)을 주장하는 北宗의 경우 ‘작용즉성(作用卽成)’을 내세우는 祖師禪의 頓悟를 强力히 批判한다. 6祖慧能의 南宗禪과 馬祖以後의 祖師禪은 작용즉성론(作用卽成論)을 통해 基督敎의 聖父, 聖子, 聖靈 三位一切說과 恰似한 法身, 保身, 化身의 三位 一切論을 核心思想으로 展開했다.
이는 現在까지도 변함없이 祖師禪에 一貫된 禪思想의 眞髓다. 祖師禪의 ‘全體作用論’은 성선설적(性善說的) 樂觀論의 立場에서 自性의 完全無缺性을 앞세워 倫理의 範疇를 넘어선다. 倫理를 超越, 究極의 絶對自由를 따라 펼치는 素朴한 日常生活의 價値 속에 內在하는 眞理를 說破한 龐居士의 偈頌은 後世에도 널리 인용됐다. 소동파와 함께 自然主義 文學을 代表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創始者이며 唐宋8代가의 한 사람인 북송시인 황정견(1045-1105)은 ‘便紙를 대신해 취암선사에게 부치다’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팔풍(八風)과 더불어 걸어가니, 가는 곳마다 모두 일용(日用)이다’
臨濟宗 황용파 居士이며 황용혜남선사의 法師이기도 했던 황정견의 이 詩句는 龐居士의 ‘運水與搬柴’ 偈頌을 다르게 表現한 것이다. 明代 書禮의 1인자인 동기창(董其昌)은 그의 문집 ‘용대별집’에서 龐居士의 偈頌을 아주 要領있게 解說했다.
“ ‘오직 나 스스로 탈없이 지낼 뿐’ 句節은 臨濟義玄禪師가 후일 上堂法語에서 ‘無位眞人이 寺門으로 出入한다’고 說破한 것과 똑같은 意味를 갖는다. 眞人의 인(人)은 바로 ‘나’를 뜻한다. ”
龐居士의 偈頌은 이처럼 臨濟의 無位眞人으로 이어져 이른바 양지(良智, 般若智慧)를 主體的 立場에서 人格化시킨 ‘진인(眞人)’으로 表出됐다. 다시 말해 佛性이 人間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眞人이다. 그 眞人은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화롯불 쬐는 日常 속의 自性作用을 完遂하며 살고 있는 ‘나’다. 主體的인 '나‘는 언제나 지금(Now), 여기(Here)의 자아(Self)로서 存在한다. 그래서 眞人의 삶은 主體的일 수 있고 眞理의 展開가 된다.
龐溫이 磨祖와 石頭禪師를 처음으로 참문한 것은 785년, 그의 나이 이미 45세 때였다. 그는 馬祖門下에서 2년 동안의 精進을 끝내고 호북성 양번으로 옮겨 양번 교외 녹문사라는 절이 있는 녹문산(鹿門山)에 거처를 정했다. 딸 영조가 竹細工品을 양양 市場에 내다 팔아 生計를 維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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