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사가 서쪽으로 온 뜻[祖師西來意]
묻는다 : 무엇이 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답한다 : 흰 원숭이 새끼 안고 푸른 산봉우리 아래서 왔다갔다하고 벌과 나비는 푸르른 꽃술사이에서 꽃을 쪼아 먹는다.
앞의 禪問答에 이어 繼續되는 중과 숭혜선사의 禪問答이다. 이 問答에서도 숭혜는 천주산의 情景을 들어 禪理를 象徵的으로 說破하고 있다.
‘祖師西來意’ 라는 물음은 中國 禪佛敎의 黃金期인 당대(唐代) 禪門答의 全形句다. 그 意味는 동아시아 禪佛敎의 創始者인 達磨가 印度로부터 中國에 와서 펼치려 한 佛法의 根本精神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禪問答은 이 하나의 話頭를 둘러싸고 展開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禪問答도, 法問도 終局的으로는 ‘祖師西來意’ 에 歸着한다. 禪語錄들에 가장 많이 나오는 거량(擧揚)의 主題이기도 하다. ‘부처란 무엇인가’ ‘무엇이 根本인가’라고 묻기도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2백30가지나 나와 있다는 통계가 있다. 물론 똑같거나 비슷한 內用은 整理해 分類한 게 이 정도니까 語錄에 登場하는 頻度數대로 集計하면 더 많을 것이다.
‘西來意’의 서(西)자는 문자 그대로는 達磨가 온 方位上의 西域(印度)을 뜻한다. 그러나 서쪽은 옛날부터 永遠, 不滅 등을 뜻하는 象徵性을 갖고 있다. 西偏으로의 落照는 다음날 다시 해가 뜨는 永續性을 약속하는 不滅의 關門이다. 古代 이집트 神話가 이와 같은 서쪽의 永遠性을 잘 보여주는 예의 하나다. 世界的 觀光名所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을 보라. 하나같이 나일강 西偏에 위치, 죽은 자의 永遠不滅을 念願하고 있다.
‘祖師西來意’ 問答 始原은 南嶽懷讓禪師(677-744)가 行脚時節 탄연과 함께 5조 弘印禪師의 法師인 숭산혜안선사(582-709)를 찾아가 물은 게 그 始原이다. 중의 물음에 대한 숭산선사의 답은 ‘祖師西來意’가 뜻하는 바는 聖스러운 究極의 깨달음인데 그러한 깨달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世俗現實 안에 있다는 얘기다.
佛法은 生命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一切의 宇宙萬有에 두루 存在하고 있어 佛法眞理가 없는 곳이 없다. 그러니까 산봉우리 아래서 새끼를 데리고 노는 ‘흰 원숭이’ (마음의 본바탕을 象徵)와 꽃밭에서 ‘꿀을 따먹는 벌과 나비’(妙用을 象徵)가 있는 이 천주산 風景이 곧 佛法의 具體的 表現이며 可視的인 佛性의 肉化라는 것이다. 基督敎的인 表現을 빌리자면 천주산의 아름다운 風光이 바로 하느님의 攝理를 具體的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지금도 천주산에는 그 흰 원숭이가 옛날처럼 살고 있는지...... 確認할 길이 없었다.
숭혜선사의 ‘백원포자.....’는 後日 호남성 협산 영천선원의 협산산회선사(805-881)에게 한 중이 ‘협산의 境界’를 묻자 “원포자귀 청장리 조함화락 벽암전(猿抱子歸靑嶂裏 鳥啣花落碧巖前)‘ 이라고 對答, ’협산경계(夾山境界)‘라는 有名한 話頭를 남겼다. 말하자면 ’협산경계‘라는 話頭의 母胎는 이미 1백여 년 앞서 숭혜선사에게서 胚胎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禪林에서는 협산선회선사를 숭혜의 單純한 ‘剽竊’이나 ‘模倣’으로 보지 않는다. 오직 同等한 見性의 境地일 뿐이다. 중은 숭혜선사에게 이런 물음도 던졌다.
묻는다 : 천주산에서 道를 배우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답한다 : 홀로 천 개의 봉우리 꼭대기를 걸으며, 구곡천에서 즐겁게 노닌다.(獨步千峰頂 優遊九曲泉)
숭혜의 對答은 맨 첫 번째 ‘주부산, 경옥봉’을 되풀이한 것으로 볼수 있다. 천주산인(숭혜선사, 佛法의 眞理)은 위로는 저 높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있고 아래로는 구곡천에서 노닐고 있다. 참으로 깨친 사람은 出世間의 佛法 眞理를 體得했다고 해서 世俗을 떠나 隱遁하거나 逃避하지 않는다. 眞理의 體得은 日常生活을 이끄는 平常心속에 녹아들어 世俗風俗을 결코 피하지 않는 處世를 통해 可視化돼야 한다.
천주산의 絶境은 오히려 숭혜선사의 禪問答 속에서 더욱 더 그 묘경(妙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숭혜선사의 천주산과 오늘에 實在하는 천주산을 하나로 묶어 感想하면서 그 絶境에 거듭 感歎을 連發했다.
투자산 암자의 비밀[投子山主]
-투자산 투자도량(投子道場). 투자대동선사
묻는다 : 投子山 토굴의 주인 아닌가?
답한다 : 용돈이나 좀 주게!
(投子는 市場으로 갔고 趙州는 혼자 投子의 토굴로 올라갔다. 저녁때가 되자 投子가 市場에서 기름을 한 병 사들고 왔다.)
묻는다 : 投子의 名聲이 높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건만 내 눈엔 기름장수 늙은이만 보이는구려.
답한다 : 자네는 기름장수만 보았지 投子는 보질 못하는군.
묻는다 : 어떤 것이 진짜 투자인가?
답한다 : (投子가 기름병을 쳐들고) 기름이요 기름!
투자대동선사(819-914)가 市場엘 가려고 산을 내려가다가 행각중 投子山으로 찾아오는 趙州從諗禪師(778-897)를 만났다. 길에서 만나 나눈 初面의 인사부터가 한가락씩 하는 禪杖들 답게 팽팽한 對決의 禪問答이다. 두 사람의 법거량(法擧揚)은 저녁이 되어 投子의 土窟에서 계속 이어졌다.
원래 서주(현 잠산)의 投子山은 환공산(천주산), 사공산과 함께 唐初, 中期 巨物禪師들이 主席한 禪宗 名山이다. 投子山은 산이 깊고 험하기로 이름나 있다. 잠산에서 안휘성 성도 합비로 가는 도중에 있는데 천주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투자산에 선찰(禪刹)을 처음 開山하고 禪法을 傳播한 사람은 투자대동선사다.
投子山을 바라보며 ‘投子山主’ 話頭를 떠올려 상상 속에서 산봉우리를 덮은 구름위로 올라가 봤다. 우선 趙州가 길거리에서 投子를 만나자 던진 물음은 ‘投子’ 당신은 한소식한 道人이고 운수납자들을 見性으로 이끌어주는 스승 아닌가? 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용돈이나 좀 주게나!”
趙州의 물음을 無視하는듯한 투자의 對答이다. 그러나 禪에서는 質問의 無視는 크나큰 '尊敬‘을 나타낸다. 禪은 이처럼 世俗의 言語가 거꾸로 뒤집히는 顚倒의 의미를 갖는 特異한 象徵體系의 世界다. 투자의 對答속에 含蓄된 의미는 대충 이렇게 要約해볼 수 있다. “趙州, 당신은 한소식한 禪師이니 對答이 필요없다. 오히려 내가 투자산 庵主임을 밝히는 對答은 당신에 대한 冒瀆이 될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당신 앞에 서 있는 이 投子의 現存과 에너지의 장(場)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의 법안(法眼)이 나를 알아볼 수 없을 때만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당신을 冒瀆하는 일이다. 나는 趙州처럼 한소식했다는 偉大한 禪師를 冒瀆할 생각이 없다. 내가 당신을 알아보듯이 당신도 이 投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않았는가. 나는 아주 가난한 禪師다.”
投子는 ‘내가 投子요’라는 對答 대신 草幕에서 헐벗은 채 살고 있는 自身의 가난함을 보여준다. “투자의 靈魂에 대해서는 神經쓰지 말고 먹고 살기가 어려운 처지이니 用錢이나 좀 주게! 지금 이 순간 내게 필요한 것은 돈이네.”
투자산 草幕의 주인 投子大同은 偉大한 靈魂의 所有者였지만 物質的으로는 가장 가난한 禪師였다. 그는 사람이 좀처럼 갈 엄두도 못내는 험한 산중에서 살았다. 그는 行動도 괴팍해 제자들이 배겨나질 못했다. 그래도 趙州는 그를 만나러 갔고 그는 자신의 物質的 가난을 “용돈이나 좀 달라”는 한마디로 赤裸裸하게 보여줬다.
“趙州 당신은 따르는 제자도 많고, 또 이 먼길을 오느라 路資도 좀 가지고 있을 테니 나한테 용돈 몇 푼쯤 주어도 해롭진 않을 걸세.”
投子는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한 건 精神的 價値가 아니라 生存과 直結된 기름을 사야 할 돈이니 돈을 좀 내놓으라고 당당히 要求함으로서 자신의 실존(實存)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인다.
禪은 꽃과 노래, 詩의 宗敎다. 禪佛敎는 삶을 回避하려는 어떤 形體의 妙策도, 要領도 단연코 拒否한다. 오직 매순간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기는 全體的인 삶을 산다. 마치 ‘찰라’라는 짧은 時間들이 모여 ‘黎元’ 이 되듯이 말이다. 瞬間마다에 자기 자신을 全體的으로 沒入시키는 禪적인 삶은 無我地境의 아름다움 그것이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던 피카소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훌륭한 순간은 언제인가?”
파카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의 나는 畵家일뿐 당신이 소문으로 들어온 피카소가 아니오. 더 깊은 순간이 오면 畵家마저 사라지고 다만 그림만 남지요.”
바로 이것이 순간순간 자기를 全體的으로 던져 살고 있는 황홀한 禪적인 삶이다. 一家를 이룬 境地의 舞踊手가 춤을 출 때는 춤추는 자기는 사라지고 오직 춤만 남고, 입신(入神)의 바둑기사가 바둑을 둘 때는 바둑판과 바둑알만 남는다. 다시 말해 全力投球다. 순간의 일들에 자신을 沒入시켜 자기가 하는 일과 자기 자신이 一體가 되면 無我地境이고 全體的인 삶이다.
投子山 움막에서의 투자와 趙州의 問答은 投子가 기름병을 들고 “기름이요, 기름!”이라고 외치면서 絶頂을 이룬다. 밤에 불을 밝히는데 필요한 기름은 人間의 生活 必需品이다. 投子의 외침에 들어 있는 意味를 보자.
“지금 이 瞬間 投子는 없다. 모든 存在의 根源인 공(空)이다. 見性을 한 投子 역시 空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投子라는 人物, 육체는 不在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는 것은 오직 기름병뿐이다.(*기름병도 공이지 않은가?) 아침에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래서 기름 살 돈을 요구했던 것이다. 마을에 내려가 기름을 托鉢해 얻어왔다. 지금 이 순간 밤을 밝힐 기름 이외에 내게는 아무 생각도 없다. 이제 기름이 있다. 투자에 대해 공연스레 무얼 묻고 있단 말인가. 이 순간에는 오직 기름이 있을 뿐이네. 그러나 아침에는 기름조차 없었다네.”
投子와 趙州의 투자산 草幕 問答은 자신을 완전히 비워낸 진공(眞空)을 可視的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達人의 춤꾼은 춤이 絶頂에 달하면 자신이 사라져 存在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던 피카소는 그림이 完成되는 순간에는 사라져버리고 그림만 남는다. 다시 말해 춤과 그림만 남는 순간은 沈黙과 적정(寂靜)만이 存在하는 전적인 공(空)의 時間이다.
投子는 지금 自己自身을 完全히 비워낸 狀態고 그림과 춤 대신 기름병만 있는 선적(禪寂)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다. 투자와 趙州는 두 사람 다 見性道人이기 때문에 불꽃 튀는 對決 속에서도 서로 지음(知音)의 귀가 훤히 뚫려 問答이 멋들어지게 흘러갔다.
두 사람은 ‘投子山主’에 대한 法去量에 이어 밤을 새워가며 問答을 繼續했다.
'***중국선불교 > 선불교(禪佛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불교 22. 태어나고 죽는 것은 너무나도 큰일이다(生死事大) (0) | 2007.09.14 |
---|---|
선불교 21. 크게 죽은 사람의 부활(大死底人) (0) | 2007.09.14 |
선불교 19. 수행자가 마음에 새겨야 할 좌우명 [信心銘] (0) | 2007.09.14 |
선불교 18. 누가 너를 묶어 놓았더냐[誰縛汝] (0) | 2007.09.14 |
선불교 17. 일상생활이 곧 진리다(平常心是道) (0) | 2007.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