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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 17. 일상생활이 곧 진리다(平常心是道)

slowdream 2007. 9. 14. 23:13
 

* 일상생활이 곧 진리다(平常心是道)


 묻는다 : 道란 어떤 것입니까?

 답한다 : 平常心이 바로 道다.

 묻는다 : 道에 이를 수는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 疑心하면 곧 어긋난다.


 南泉普願禪師와 趙州從諗上座의 禪問答이다. 禪語錄들은 흔히 泥線問答을 ‘평사심시도(平常心是道)’ 라는 話頭가 생겨난 기연(機緣)으로 記錄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日常生活이 곧 眞理라는 ‘平常心是道’를 最初로 說破한 사람은 南泉의 스승인 馬祖道一禪師다.


“道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더러움에 물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고 죽는다는 생각을 念頭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을 더러움에 물든다고 하는 것이다. 단번에 道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平素의 마음이 바로 道이니라.”


 ‘平常心是道’를 說破한 馬祖의 上堂法語다. 南泉과 趙州 父子는 馬祖禪의 이와 같은 平常心是道를 가장 충실히 繼承, 發展시킨 馬祖의 後繼者들이다. 祖師禪의 核心思想인 平常心是道는 日常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이 모두 선정(禪定)에 들어 있어 ‘편안한 상태(Well-being)’를 維持하는 人間의 日常生活 모두를 道의 展開로 보려는 思想이다.


 平常心이란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일상생활을 이끄는 소박한 마음을 말한다. 日常生活의 根源에는 졸리면 잠을 자는, 전혀 인위(人爲)가 끼어들지 않은 純粹한 마음이 作用하고 있는 것이다. 졸릴 때 억지로 잠을 안 자는 건 自然의 攝理에 대한 拒逆이요, ‘拷問行爲’다.


 平常心은 안한무사(安閑無事), 응연접물(應緣接物), 수기응변(隨機應變) 등의 意味를 含蓄하고 있다. 즉 現實로부터 逃避하거나 隱遁하지 않고 因緣 따라 業報를 堪耐하면서 淸淨한 自性으로부터 發動하는 意識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마음이 곧 平常心이다. 밥 먹고 잠자는 平常心은 매일매일 使用하기 때문에 잊어버리거나 녹슬지도 않고 짐짓 꾸며대는 虛飾이 필요 없다. 나날의 生活에 最善을 다하는 眞實된 평소의 마음이야말로 모든 道의 源泉이며,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 할 때의 ‘卽心'이다.


 馬祖의 ‘平常心是道’는 從來의 複雜하고 難解한 佛敎敎理體系를 매일매일 展開되고 있는 平凡한 日常사로 解放시켰고, 觀念的인 敎學佛敎를 生活佛敎, 實踐佛敎로 轉換시킨 佛敎의 일대 ‘宗敎改革’이었다. 平常心이 곧 道라는 禪思想은 祖師禪의 알파이며 오메가인 심지법문(心地法問)의 延長線上에 位置하는 우뚝한 봉우리다.


 道란 무엇인가를 물은 趙州의 물음에 대한 南泉의 對答은 너무나도 싱겁다. 그러나 그 意味는 深藏하다. 南泉의 對答은 깨침을 體驗한 禪師의 普遍的인 道가 日常生活 속의 心身을 通해 恒常 새롭게 高揚되고 있음을 직지(直指)하고 있다. 깨달은 道人의 生活이라고 해서 凡夫의 生活과 다른 건 아니다.


 佛法에서는 원래 凡夫와 聖人의 差異를 認定하지 않는다. 이른바 범성일여(凡聖一如)다. 凡夫와 聖人의 생활은 外見上으론 언제나 똑같다. 다만 道人은 凡夫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도 마음이 對象에 의해 물들지 않고 本來의 淸淨性을 喪失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道人의 삶을 흔히 道法을 버리지 않고 凡夫의 일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凡夫의 生活은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平常心을 維持하는 聖人과는 달리 色을 접하면 마음이 色情에 물들고 만다. 極限的으로 强姦, 性醜行 같은 汚染의 색깔로까지 나타난다. 누구나 平常心을 가지고 있다는 側面에서는 凡聖一如지만 그것을 維持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凡夫와 聖人이 區分된다.


 平常心이란 佛心, 佛性, 眞如, 自性의 다른 表現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늘 변함없는 平常心이라는 일심(一心)만 더럽히지 않고 본래대로 지키면 부처고, 聖人이고, 道人이다.


南泉의 두 번째 물음에 대한 對答은 平常心是道의 교조화(敎條化)를 警戒하는 가르침이다. 그는 제자들로부터 “平常心是道라 했는데 어째서 馬祖는 ‘부처도 마음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느냐”는 質問을 받고 이렇게 호통쳤다.

 “너희가 만일 부처라면 어찌 이처럼 다시 疑心하는 마음으로 구태여 나에게 물을 수 있느냐. 나는 잠시도 부처였던 적이 없다. 祖師를 보지도 못했다. 너희들이 진정 그따위 말을 하고 싶다면 祖師를 찾아가거라.”


이는 平常心을 날마다의 삶에서 具體的으로 체현(體現)하지 않고 觀念化시켜 敎條的으로 떠받들려는 弊端을 叱咤한 것이다. 우리를 存在케 하는 바탕인 平常心은 그 本質이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불을 가까이 하는 게 俗性이다. 이를 如如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매일매일의 日常生活이다.


묻는다 : 어떤 것이 平常心으로 道에 合致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 茶를 마시고 밥을 먹으니 歲月이 지나고, 山을 보고 물을 보니 마음이 상쾌하다.


 보복종전선사(867-928)의 법제자인 복건성 복주 보자원의 문흠선사와 한 중의 禪問答이다. 문흠선사의 對答은 平常心으로 살아가고 있는 無心道人의 境地를 日常生活을 예로 들어 쉽고 쉽게 보여준다 다반사(茶飯事)와 山水를 보며 느끼는 상쾌함은 우리가 보물단지처럼 내세우는 ‘지성(知性)’ 의 源泉인 無意識이라는 宇宙的 生命을 떠받치고 있는 根源이다. 프로이드의 精神分析學은 이와 같은 無意識에 높은 價値를 附與한다. 말하자면 ‘平常心이 곧 道’라고 할 때의 平常心은 프로이드의 ‘無意識’과 같은 것이다.


 成人이 되면 음식을 먹을 때 幼兒처럼 먹지 않고 食事禮節을 따른다. 먹는다는 行爲에 知性이 混合된다. 이처럼 純粹했던 心性的 行爲들이 知性에 의해 侵害되거나 知性과 混合돼 自己 中心的 理解를 따라 汚染된다. 그러니까 生物學的으로 本能的인 無意識 領域의 모든 行爲들이 食事禮節 같은 訓練된 無意識을 通해 意識的, 知性的 指示를 받는 行動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微笑가 純粹한 微笑가 아니고 그 뒤에 무엇인가를 添附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손님을 誘惑하는 호스티스의 微笑, 사랑을 傳達하는 微笑, 아첨의 微笑 등등......이에 반해 먹고 잠자는 것이 ‘나’라는 單純한 肉體的 形象이 아니라 育體의 深淵에 있는 ‘宇宙的 無意識’의 作用에 의한 것이라면 茶飯事와 山水구경 같은 行爲는 엄청난 價値와 意味를 갖는다.


 新綠이 우거진 여름철, 소나기 한줄기 내린 후의 山川을 바라보면 말로 形容키 어려운 淸凉感을 느낀다. 시골서 幼年時節을 보낸 사람들은 이런 體驗이 많을 것이다. 오늘의 都心公園 숲속에서도 이런 感情을 얼마든지 느껴볼 수 있다. 平常心이란 精神分析學을 빌린다면 知性의 侵害를 받지 않은 本來의 純粹한 無意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平常心은 모든 思考의 感情의 밑바닥 마음이며 宇宙 一切萬法을 構成하는 本體이다.


潙山靈牛禪師(771-853)가 하루는 졸며 앉아 있는데 上座 仰山慧寂이 問安을 드렸다. 潙山은 곧바로 뒤돌아 앉아 壁을 쳐다봤다. 仰山이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다.

 “내가 방금 꿈을 꾸었는데 네가 좀 解夢을 해주려므나.”

仰山은 이내 우물로 가서 물 한 대야를 떠다가 潙山의 얼굴을 씻겨드렸다.

 뒤이어 역시 潙山의 上座인 향엄지한이 問安을 왔다.

 “방금 내가 꿈을 꾸었는데 仰山이 解夢을 해주었다. 너도 내 꿈을 解夢해 보아라”

 향엄은 茶 한잔을 달여다 바쳤다.

 潙山은 두 上座에게 “너희 境地가 智慧 第一의 사리불보다 더 휼륭하구나!”라고 稱讚 했다.


 세 사람은 ‘쩍하면 입맛’이라는 俗談처럼 平常心是道를 멋들어지게 펼쳐 보였다. 두 上座는 스승의 平常心을 讀心術이라도 가진 듯이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 낮잠을 자고 났으면 세수를 하고 잠에서 벗어나게끔 ‘覺醒’을 促求하는 茶를 한잔 마시는 게 日常의 生活方式이다. 禪家에서의 茶는 覺醒 깨침을 象徵한다.


 세 사람은 모두가 이러한 平常心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여기에는 어떠한 꾸밈도 미리 짜놓은 脚本도 없다. 자고나서 洗手하고 茶마시는 日常은 누구에게나 共通된 素朴한 마음일 뿐이다. 仰山과 향엄도 자신들의 日常的 平常心에서 스승이 낮잠을 자고 났다니까 그 뒤의 일을 거들어 주었다.


 好事家들은 이런 아주 自然스러운 일을 신통묘용(神通妙用)이니 이적(異蹟)이니 하고 떠들어댄다. 사람 웃기는 대낮의 잠꼬대다. 이 逸話를 話頭로는 ‘위산일몽(潙山一夢)이라 한다. 平常心이란 별게 아니다. 자고 나면 洗手하고 茶 마시는 마음이다


禪은 곧바로 삶에 다가서고자 한다. 흐르는 그대로의 삶에 意味를 부여하면서 힘있게 살고자 하는 게 禪의 基本的 理念이다. 밭에서 일하던 沙彌僧이 點心供養을 알리는 목어(木魚)소리를 듣자마자 괭이를 놓고 재당(齋堂 : 食堂)으로 달려간다. 이를 본 스승은 빙그레 웃는다. 저 沙彌가 禪을 옳게 實現하고 있구나 라며. 이것이 禪이다.


여기서 오직 필요한 것은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일상성(日常性)의 意味를 바라볼 수 있는 눈(法眼, 一隻眼)을 가지는 것뿐이다. 禪은 生活佛敎로서 이처럼 日常生活에 깊이 穿鑿(천착)한다.


 ‘平常心是道’는 南泉禪의 核心思想이다. 물론 馬祖以後의 禪師들은 하나같이 平常心是道를 설파하는데 一生을 바쳤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南泉과 趙州의 父子는 有別나다. 南泉 - 趙州로 이어지며 一世를 風味한 南泉과 趙州의 家風은 주로 臨濟宗에 많이 배어 있다. 南泉禪은 趙州에서 그 傳乘의 맥이 끊어져 禪宗의 5家 7宗이 分派하는 時代까지 이어지지 못했기에 獨自的인 宗派는 形成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影響은 대단히 컷고 一家를 이룬 禪宗史의 巨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