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목을 자르다(斬猫頂鞋)
南泉禪師가 어느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首座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싸우는 것을 봤다. 南泉은 고양이를 한손에 움켜쥐고 法堂으로 가서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날카로운 칼을 꺼내든 채 兩堂 首座들에게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옳게 이르면 이 고양이를 살려줄 테고 그러지 못하면 고양이 목을 치리라!”
중들은 영문을 몰라 모두 어리둥절한 채 서 있기만 했다. 마침내 南泉은 칼을 들어 내리쳐 고양이를 두 동강 내버렸고 피가 法堂에 낭자했다.
여기까지가 ‘南泉이 고양이 목을 자르다’라는 화두 남전참묘(南泉斬猫)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話頭는 南泉斬猫 이야기를 들은 그의 제자 趙州가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간 ‘조주두대초혜(趙州頭戴草鞋)’라는 禪話까지 連結돼야 完成된다.
趙州는 그날 하필 外出을 해 南泉이 고양이를 두 동강내는 자리에 없었다. 趙州가 저녁에 돌아와 南泉에게 문안을 드리자 南泉은 낮에 고양이 목을 자른 애기를 해주었다. 趙州는 南泉의 애기를 듣자마자 문을 열고 나가 짚신을 머리에 이고 걸어갔다. 이 모습을 본 南泉이 껄껄 웃으면서 “그때 네가 있었더라면 그 고양이는 목숨을 건졌을 텐데!”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조주정혜(趙州頂鞋)’라는 話頭를 낳은 禪話다. 앞의 南泉 話頭와 뒤의 趙州 話頭를 합쳐 ‘참묘정혜(斬猫頂鞋)’라 한다. 南泉은 왜 한 칼에 고양이를 두 동강 내는 激烈한 殺生을 서슴치 않았을까. 우선 殺生 自體가 大乘佛敎의 제1 戒律인 不殺生을 違背한 엄청난 衝擊이다. 그러나 南泉이 고양이 목을 자른 것이 두 패로 나뉘어 다투는 東堂과 西堂 승려들의 꽉막힌 쟁심(爭心)을 斬해버린 것이라면 이런 疑問과 衝擊은 쉽게 풀린다.
西堂은 禪院의 전 주지가 거처하는 요사, 東堂은 다른 절의 전 주지가 와서 머무는 요사를 말한다. 서당은 때론 전 주지 인물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양당의 승려들이 고양이를 놓고 다툰 이유는 고양이의 불성(佛性) 有無 問題였는지, 所有權 다툼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禪的으로는 佛性 有無를 둘러싼 다툼이었다고 보는 것이 그럴 듯하지만 禪語錄의 記錄은 명확치가 않다. 어쨋든 南泉의 한칼은 고양이를 죽이고 사람을 살린 ‘金剛王 寶劍’의 참(斬)이고 하나를 버리고 열을 얻는 衆生制度였다. 고양이는 南泉의 칼에 의해서가 아니라 兩堂 僧侶들의 다툼 때문에 죽었다. 南泉이 ‘말해보라’ 했을 때 首座들은 어떤 것이 고양이를 살리는 方法인지를 밝히는 선리(禪理)를 드러내 보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속념(俗念)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이 막힌 채 아무 對答도 못한다.
南泉이 고양이 목을 자르겠다며 재촉한 ‘말해보라’ 는 學人들이 參禪공부를 하고 참학해서 깨친 바를 내보이라는 要求다. 앵무새처럼 模倣하고 暗記해서 얻은 知識은 결코 自己存在 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 自性의 본분사(本分事)가 될 수 없다. 知識이 곧 智慧가 되는 건 아니다. 智慧는 응당 日常生活의 自性作用에 連結돼 行動으로 나타나야 한다. 兩堂의 學人들은 自性本體를 전혀 깨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온 그들의 參禪도 禮佛도 爭心의 일부분이었을 뿐 自性을 깨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學人들이 知識으로 알고 있는 공(空)은 남전이 제시한 것 같은 緊急한 狀況을 만나면 허깨비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空은 진짜공(眞空)이 아니다. 진짜 空은 自性을 뚫고 나가 自由自在하게 活動할 수 있어야 한다. 南泉이 참하려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學人들의 죽어있는 공(死空)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돼 고양이를 南泉의 ‘殺人劍’은 學人들을 깨우치는 ‘활인검(活人劍)’이 됐고 살활자재(殺活自在)한 大禪丈이 갖는 寶劍의 面貌를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어야 고양이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는가. 그 答은 趙州가 짚신을 머리에 인 데 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趙州丁鞋’에 대한 禪客들의 解說은 다음 세 가지로 要約할 수 있다.
하나는 南泉, 당신께서 고양이를 참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짚신을 인 것은 곧 고양이를 머리에 인 것으로 고양이를 保護, 殺生하지 않도록 하려는 象徵으로 보는 것이다. 셋째는 발에 신는 천한 짚신을 가장 貴하게 여기는 身體部分인 머리에 임으로써 南泉에게 本體界와 現象界의 眞理가 때로는 거꾸로 바뀔 수도 있다는 ‘전도(顚倒)현상’을 나타내 보였다는 見解다. 이는 성계(聖界)의 眞理가 世俗에서는 眞理가 아닌 것으로 뒤집히고, 또 그 반대로 世俗의 眞理는 聖界에서는 眞理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다.
각기 나름의 일리가 있다. 첫째 見解는 自性을 깨친 사람(趙州)이 自由 自在한 絶對自由를 누리기 때문에 외적인 現像界의 干涉이나 妨害를 받지 않는 게 眞空이라는 뜻이다. 두번째는 고양이의 生命을 보호하는 것이 和尙(南泉)으로서 應當 지켜야 할 行爲였음을 象徵한다. 세번째의 ‘顚倒’는 眞如當體를 철견한 道人의 수기응변(隨機應變)이라는 높은 平價를 받는 禪行爲다. 趙州가 머리에 짚신을 이고 나간 行爲에는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南泉和尙의 칼을 빼았아 당신을 斬하겠다고 달려들었을 것이고 그때 南泉은 살려 달라고 목숨을 求乞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含蓄돼있다.
발에 신는 짚신을 거꾸로 머리에 인 것은 고양이를 베는 대신 거꾸로 南泉을 베겠다는 ‘顚倒’를 宣言한 것이다. 이는 고양이의 佛性 有無 문제 같은 觀念的 遊戱보다는 實存하는 生命體인 고양이를 살리는 일이 더 時急한 일이고 禪적인 行爲라는 衆生제도의 菩薩行이기도 하다. 南泉이 고양이를 죽이고 사람을 살렸다면 趙州는 사람을 죽이고 고양이를 살리는, 거꾸로 뒤집힌 ‘殺活自在’를 演出한 것이다. 見性한 禪師들의 殺活自在는 世俗的인 殺生과는 전혀 다른 象徵性을 갖는 學人들의 깨침을 이끌기 위한 方便이다.
뱀, 지렁이 등을 실제로 두 토막내는 激烈한 殺生이 禪語錄에 적지 않게 나온다.
현사사비가 雪峰 義存禪師(822-908) 문하의 禪房 學人으로 있을 때 얘기다.
어느 날 밭을 일구는 보청(普請 : 僧侶들의 共同作業)중 雪奉이 지나가는 뱀 한 마리를 拄杖子에 꿰어 올리고는 대중들에게 “조심해라! 조심해라!” 한 후 풀 베는 낫으로 두 토막을 내 버렸다. 이 때 현사가 쏜살같이 달려가 雪奉의 拄杖子로 두 토막 난 뱀을 걷어올려 뒤로 던지고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대중들은 모두 놀라 눈만 뜨고 있는데 雪奉이 “俊秀하구나!”라고 激讚했다.
雪奉은 뱀을 들어 올려 유(有)를 보였고 두 토막을 내는 殺生을 통해 有를 부정하는 무(無)를 수시(垂示)했다. 현사가 달려가 뱀 토막을 걷어내 버린 것은 有와 無를 모두 다 否定한, 進一步한 絶對否定이며 有, 無 어느 것에도 執着하지 않는 絶對空의 중도(中道)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래서 雪奉은 賢者의 行爲를 極讚한 것이다. 부처, 見性의 본질은 有, 無의 편에 서지 않는 중도다. 經典과 禪語錄은 거듭해 “부처는 中道다”라고 밝히고 있다.
南泉의 法兄弟인 歸宗智常禪師는 풀을 베다가 뱀 한 마리가 지나가자 낫으로 잘라 두 토막을 냈고, 조동종의 운거도응(835-902)선사는 밭일중 지렁이를 삽으로 두 토막 내었다.
이런 禪問答도 있다.
묻는다 : 지렁이를 두 토막 내면 두 토막 모두 움직이는데 佛性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답한다 :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어떤 境界인가?
묻는다 : 和尙의 말씀은 어느 經典에서 나온 것입니까?
답한다 : 과연 그렇다. 經典에 없는 말은 智慧로운 말이 아니다. [수능엄경]에 ‘6대(識, 허공, 땅, 물, 바람, 불)의 성품이 참되고 圓融해 모두가 如來藏이니 生滅이 없다’ 하였다.
南泉의 법제자인 장사경잠선사가 답하고 한 중이 물은 禪問答이다. 앞의 ‘설봉참사(雪峰斬蛇)’나 ‘歸宗斬蛇’ 話頭와 같은 有.無의 超越. 生死의 解脫을 전하는 한소식이다. 佛性은 토막난 지렁이의 어느 쪽에도 없다. 佛性의 本體와 本質은 오직 무(無)이고, 공(空)일 뿐이기 때문이다. 장사경잠선사가 學人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佛法大義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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