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너를 묶어 놓았더냐[誰縛汝]
천주산 3조사(三祖寺). 3조 승찬조사
묻는다 : 청하옵건데 解脫法門으로 이 몸의 束縛을 풀어 주시옵소서.
답한다 : 누가 너를 묶어놓았는가?
묻는다 : 저를 묶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답한다 : 그렇다면 너는 이미 한껏 自由롭다. 그런데 어찌해서 解脫을 求하고 있단 말이냐.
禪宗 제3대 祖師 僧瓚(?-606)에게 수 문제 개황12년(592) 어느 날 한 沙彌가 찾아와 讖文한 禪門答이다. 話頭로는 ‘수박여(誰縛汝)’라 한다. 讖文한 12세 소년 사미는 후일 제4대 조사(祖師) 道信(580-651)이다. 祖師란 한마디로 理想的인 人格을 말한다. 中國 禪佛敎는 唐 中期 以後 理想的인 人格을 가리키는 從來의 如來, 菩薩이라는 用語 대신에 祖師, 부처라는 表現을 즐겨 使用했다. ‘臨濟錄’은 “現在의 마음이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을 살아 있는 祖師라고 부른다”고 說明하고 있다.
現實 속에 實存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平凡한 每日每日의 生活方式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日常속에 살아 있는 마음이 바로 참된 祖師이며, 참된 부처이며, 가장 具體的인 人間 本質이다. 祖師는 어떠한 것에도 依支하는 일이 없는 眞理의 具顯者다.
臨濟義玄禪師(?-866)의 祖師論은 主體的인 人格者로 要約할 수 있다. 어떠한 것에도 依支하는 바 없는 祖師(道人)는 자유로운 現實의 主體임과 동시에 一切의 內外的 條件을 거부하는 가장 嚴格한 부정(否定)에서 살아가는 人格者다. 祖師는 가장 사사로운 個人主義者이며 同時에 가장 主體的인 人間의 價値가 그 本質이다.
이는 老莊의 道德觀이 强調하는 ‘진인(眞人)’과 一脈 相通한다. 老莊의 人間觀은 虛無라는 대도(大道)로부터 생겨나는 自然의 화생(化生)이 곧 人間存在의 根源이라고 본다. 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이며 중당(中唐)의 大儒學者인 한유(768-824)는 이와 같은 老莊의 人間觀에 基礎한 道德觀을 “自身의 內部에 充足하며 外部의 支配를 받지 않는 것이 덕(德)이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도(道)”라고 풀이했다.
儒家는 傳統的으로 공(公)의 立場을 重視, 사사롭고 個人主義的인 祖師나 眞人을 批判해 왔다. 禪佛敎가 理想的인 人格을 簡明 適切하게 表現한 ‘祖師’라는 말은 급기야 中國禪宗을 ‘祖師禪’이라는 用語로 特徵지으면서 印度禪, 석가모니선보다 優位라는 自負心까지 內心에 깔고 있는 洞亞細亞 禪佛敎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부처와 同格者, 또는 부처 이상의 人格者를 象徵하는 ‘祖師’라는 稱號는 公式的으론 初祖 達磨부터 6조 慧能까지 6명에게만 주어졌지만 [조당집] [傳燈錄] 등의 禪宗語錄에 話頭를 남긴 唐. 宋代 禪師들도 통상 祖師라 稱한다.
말하자면 祖師級 禪師들인 셈이다. 祖師라는 稱號가 後代에 使用 禁止된 것은 禪宗 初期엔 거물급 禪師가 드물었지만 나중에는 祖師級 禪師들이 수없이 排出돼 어떤 한 사람을 法脈 傳乘者로 指定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난형난제(難兄難弟)였기 때문이었다.
서주 환공산(晥公山).
禪佛敎 各種 옛 文獻들에 나오는 有名한 山이다. 現在는 이름이 바뀌어 안휘성 안경시 잠산현의 천주산이다. 初期 禪佛敎의 僧瓚祖師, 숭혜선사 등이 主席했고 後代에는 雲門宗, 臨濟宗 禪師들이 行化를 편 곳이다. 隣近의 사공산, 투자산도 역시 禪佛敎 聖地다. 3祖師는 僧瓚祖師 도량이고 現在 所屬宗派는 臨濟宗이다. 그의 話頭로는 ‘誰縛汝’가 가장 有名하고 著述로는 禪佛敎 名著의 하나로 꼽히는 [신심명(信心銘)]이 있다. ‘誰縛汝’ 라는 話頭는 인간 解放을 외친 僧瓚祖師의 獅子吼다. 물론 석가모니도 生老病死를 뛰어넘는 人間解放을 佛敎의 出發點이며 終着點으로 提示했다.
3祖 僧瓚이 道信沙彌에게 說破한 심지법문(心地法門) ‘誰縛汝’는 이와 같이 석가모니의 人間解放을 다시 한 번 强調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僧瓚의 人間 解放은 達磨로부터 시작된 자기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이며 매일 매일 日常生活속에 眞理가 內在한다는 ‘平常心이 곧 道(平常心是道)’임을 各自가 體得하도록 가르치는 祖師禪의 心地法門이라는 점에서 敎學佛敎의 번쇄한 敎理體系와는 次元을 달리한다. 心地法門이란 衆生의 본심(平常心)을 萬物을 生成시키는 土地에 比喩한 가르침이다. 심지(心地)란 말은 이미 [능가경] [범망경]등에서 널리 쓰였고 다른 經典에서는 심전(心田)이라고도 한다.
解脫을 구하는 道信의 물음에 대한 僧瓚祖師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人間 存在의 밑바탕인 자성(自性)은 本來 束縛된 일이 없다는 存在의 絶對 自由論이다. 自性(마음, 佛性)은 元來가 淸淨하고 絶對 자유로운 本質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空然히 생각을 일으켜 束縛당하고 있다는 妄想을 하고, 그래서 스스로 不自由스럽다는 굴레를 뒤집어 쓴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어떠한 것에도 束縛된 적이 없다. 따라서 새삼 絶對自由라는 解脫을 구할 必要조차 없다. 自性 그대로가 解脫이요, 涅槃이요, 부처이기 때문이다. 自性을 따라 卽刻 行하고 一切의 分別心을 없애 平等도, 差別도 없으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解脫이다. 이른바 達磨로부터 내려온 ‘안심법문(安心法門)’ 이다.
이와 같은 安心法問은 初祖 達磨, 2祖 慧加, 3祖 僧瓚, 4祖 道信까지 4代祖師에 걸쳐 똑같은 포맷으로 强調된 初期 禪宗의 심요(心要)다. 후대에 내려와서는 6祖 慧能의 孫子 上座인 石頭希遷禪師(700-791)와 馬祖道一의 법제자인 大珠慧海禪師에게도 같은 내용의 禪問答이 있다.
石頭는 한 중이 “어떤 것이 解脫이냐”고 묻자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는가(誰縛汝)” 라고 反問했다. 馬祖도 “어찌해야 진정한 解脫을 이룰 수 있느냐”는 한 學人의 참문에 “너는 본래 束縛當한 일이 없으니 解脫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일깨워줬다.
<禪語錄 名句>
불법재세간(佛法在世間) (불법은 본래 세간에 있나니)
불리세간각(不離世間覺) (세간을 떠나지 않고 깨쳐야 한다)
리세구보제(離世求菩提) (세간을 떠나 보리를 구함은)
흡여관토각(恰如觀兎角) (마치 토끼의 뿔을 찾는 것과 같다)
벽비에 새겨진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 6조 慧能의 ‘무상송(無相頌)’이다. 성계(聖界)와 俗界 , 佛法과 世俗法의 一致를 통해 地上에서 極樂의 살림을 꾸려가는 生活佛敎, 實踐佛敎를 强調한 慧能祖師의 法問이다. 慧能의 원래 法語는 ’佛法은 本來가 世間에 있다(佛法元在世間)‘ 뿐이었으나 後代에 살을 붙여 이와 같은 偈頌의 形態로 다듬은 것이다.
禪宗 1조 達磨를 前後한 동토(東土) 禪佛敎는 3祖 僧瓚을 거쳐 4祖 道信에 이르면 經典에 依支해 깨침을 얻는 자교오종(藉敎悟宗)의 初期 禪風을 버리고 佛敎의 世俗化라는 宗敎改革을 斷行, 이렇게 生活佛敎化한다.
죄를 참하다(僧璨懺罪)
묻는다 : 몸에 풍질(風疾 :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風疾을 앓게 된 저의 罪를 깨끗이 씻어 주십시오.
답한다 : 네가 懺悔하고자 하는 罪를 어디 한번 내놔 보아라.
묻는다 : (얼마후) 罪를 찾아보았지만 發見할 수가 없습니다.
답한다 : 자, 이제 너의 罪는 赦免이 됐다.
僧瓚이 북제(北齊) 문선제 천보2년(551) 낙양 향산사로 2祖 慧加를 찾아가 참문한 禪問答이다. 당시 僧瓚의 나이는 40세였고 나병을 앓고 있는 患者였다. 僧瓚은 자신의 風疾이 罪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罪를 懺悔, 용서받음으로써 病을 낫고자 한 것이다.
‘僧瓚斬罪’ 라는 話頭의 포맷도 初祖 達磨, 2祖 慧加 3祖 僧瓚, 4祖 道信,의 禪問答과 똑같은 心地法問 構造다. 達磨와 慧加의 問答을 보자.
묻는다 : 제 마음이 不安합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安定시켜 주십시요.
답한다 : 어디 그 마음이라는 걸 내놓아 보아라. 그러면 내 그것을 진정시켜 주마.
묻는다 : (한참 후) 마음이라는 걸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답한다 : 자, 그러면 내 이미 너의 마음에 平和를 주었다.
2祖 慧加와 僧瓚의 禪問答 ‘僧瓚懺罪’나 3祖 僧瓚과 4祖 道信의 禪問答 ‘수박여(誰縛汝)’도 위 禪問答과 똑같은 脈絡이다. 慧加의 ‘不安’이 僧瓚에게서는 ‘罪’로 道信에게서는 ‘束縛’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答은 한결같이 不安, 束縛, 罪意識 등 人間의 모든 意識作用의 밑바탕은 마음이라고 直指한다.
식(識)이란 知性에 의해 支配받고 있는 意識的인 마음의 干涉을 말한다. 그러니까 모든 公利的인 意識을 버린 純粹한 淸淨性과 虛空처럼 텅 비어 있는 空寂함이 元來 마음의 본바탕이고 本來面目이며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는 얘기다. 罪意識이나 束縛感은 이미 本來面目의 마음을 한번 움직여 그렇다는 생각을 일으킨 데서 비롯된 것이지 마음 본바탕에는 罪, 束縛, 不安이라는 게 아예 存在하지도, 存在할 수도 없다. 흔히 말하는 本地風光이란 마음의 靈妙한 作用, 자기의 本來 모습(本來面目)을 뜻한다. 다시 한 물건도 얻을 게 없는 그러한 마음자리를 本地風光이라 한다.(更無一物可得 乃是本地風光)
‘僧瓚懺罪’ 禪問答은 이렇게 이어진다. 慧加가 “너의 罪는 이미 赦免됐다”고 對答한 후 중이 될 것을 권하자 僧瓚은 “지금 和尙을 뵙고 중에 대해서는 알았습니다만은 부처와 佛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慧加는 “罪를 懺悔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킨 너의 마음이 곧 부처고, 佛法이다. 부처와 佛法이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니라”라고 가르쳐 주었다.
僧瓚은 佛, 法, 僧 3寶에 대한 問答을 끝내면서 “오늘에야 비로소 罪란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는 게 아니고 마음에 罪意識을 일으키지 않으면 罪가 없음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神光慧加는 僧瓚의 말을 듣고 “아, 참으로 우리 佛門의 寶配로다!”라고 感歎하면서 ‘僧瓚’이라는 法名을 지어 주었다. 2조 慧加의 受戒 法名인 신광(神光 : 一說에는 生母의 胎夢을 따라 지은 俗名이라고도 함)은 마음의 靈妙한 作用, 自己本來의 모습(本來面目)을 나타내는 本地風光의 意味를 담고 있다.
僧瓚은 이와 같은 人間의 本來面目을 더욱 빛낼 만한 보배로운 중[僧寶]이라는 뜻을 담은 法名이다. 僧瓚은 551년 3월 18일 광복사에서 比丘戒를 수계하고 身病도 점차 治癒돼 慧加 밑에서 2년 동안 侍奉을 한 후 袈裟와 밥그릇(발우)을 물려받는 전의부법(傳衣付法)이라는 法脈 繼承節次를 거쳐 2祖 慧加의 後繼者가 됐다. 3祖 僧瓚은 達磨로부터 시작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法度대로 袈裟와 발우를 물려받은 외에도 慧加로부터 이른바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본래부터 마음 땅이 있었기에(本來緣有地)
그 땅에 씨를 심어 꽃이 피다(因地種華生)
본래 종자도 있는 것 아니니 (本來無有種)
꽃도 피어나는 게 아니다. (華亦不當生)
慧加祖師가 僧瓚에게 내린 後繼者 認可 偈頌(詩)이다. 이 傳法偈도 達馬가 慧加에게 내린 傳法偈, 後日 僧瓚이 4祖 道信에게 내리는 傳法偈와 똑같은 脈絡의 心地法問이다. 즉 萬物을 生成시키는 大地에 마음을 比喩, 마음이 곧 모든 現像의 根源이며, 存在의 本바탕임을 說하고 있다.
慧加는 3祖 僧瓚에게 전등(傳燈)한 후 “곧 대國難이 있을 테니 行化를 펼치지 말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라”고 일렀다. 慧加가 豫言한 國亂은 그로부터 23년후 일어난 3무1종의 佛敎法難 중 하나인 북주 무제 건덕3년(574)의 法難이다. 僧瓚祖師는 慧加의 指示를 따라 낙양에서 안휘성 황공산(현 천주산)으로 내려갔다. 至近 거리인 사공산과 환공산을 往來하며 산간 마을에서 布敎活動을 폈다.
깊은 산속에 隱遁, 오직 산촌 마을의 傳法活動만 30년 가까이 하다가 북주 무제의 佛敎彈壓이 끝나고 王朝가 바뀐 수나라 문제 개황10년(590) 천주산 산곡사(現 3祖禪師)에 註釋, 公開的인 傳法活動을 展開하기 시작했다. 3祖 僧瓚은 601년 4祖 道信에게 法脈을 傳하고 603년 광동산 나부산으로 내려가 傳法活動 펼쳤다.
僧瓚의 나부산행은 2祖 慧加가 3祖에게 法脈을 傳乘한 후 업도(현 하북성 임장현)로 가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激烈한 現實回向 行脚을 펼쳤던 것과 같이 제자에게 後繼자리를 물려준 후는 각각 獨立 山門을 開拓하는 것이 禪宗의 傳統이다. 僧瓚은 603년 나부산에서 다시 산곡사로 돌아와 심요(心要)를 전하다가 606년 10월 15일 나무아래서 說法을 마치고 입화(入化)했다. 僧瓚祖師의 行裝을 이처럼 소상히 밝히는 것은 지금까지의 禪宗 史書들이 3祖의 實存自體를 疑問時하고 있고 紀錄이 거의 不在한 狀態이기 때문이다. 現地 踏査에서 [3조사 간개서] 등 各種資料를 모으고 餘他 紀錄들을 뒤져 3조 僧瓚의 行裝을 비록 後代의 創作 일지라도 간추려봄으로써 禪宗史書의 허술한 ‘3祖篇을’ 補充해보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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