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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 19. 수행자가 마음에 새겨야 할 좌우명 [信心銘]

slowdream 2007. 9. 14. 23:15
 

* 수행자가 마음에 새겨야 할 좌우명 [信心銘]


 完全한 道 自體의 體得은 어려울 게 없나니(至道無難)

 다만 分別 選擇을 피하면 된다.(唯嫌揀擇)

 우리가 愛憎에서 벗어날 때(但莫憎愛)

 道는 밝은 대낮처럼 뚜렷하니라(洞然明白)


 禪門 不朽의 名著로 꼽히는 僧瓚祖師의 著述인 [信心銘]의 첫구절이다. 僧瓚의 ‘至道無難 唯嫌揀擇’은 6祖 慧能이 다시 한 번 강調한 선리(禪理)의 基本이고 趙州종심禪師(778~897)에 이르러 趙州의 話頭 ‘至道無難’ 으로 굳어졌다.


 글의 形式은 4言絶句 韻文體로 총 1백46구, 5백84자다. 정각(正覺)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一切의 對立心과 差別心, 是非得失의 亡靈된 境界를 完全히 여의고 一切 平等과 자재(自在)에 머물 것을 說하고 있다. 즉 有와 無, 大와 小는 각각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며, 中國의 傳統的 思惟體系에 基盤을 둔 ‘萬物一切思想’이다. 文章은 미움(憎)과 사랑(愛), 취함(取)과 버림(捨) 등 반대말을 對稱시켜 중생들이 日常에서 쓰는 분별상(分別相)을 確然히 드러내 보인다. 禪學的으로는 이러한 相對的인 槪念들을 변견(邊見), 對立되는 相對的 用語를 나란히 놓는 語法이나 筆法을 대대법(對對法)이라 한다.


 [信心銘]이 이와 같은 對對法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核心內容은 禪的 깨달음의 入門이며 終着点인 思量分別心의 打破를 통해 善, 惡의 어느 쪽도 取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無心이다. 有와 無가 平等一如인 境地는 바로 祖師들이 누누이 强調하는 심인(心印)이며 禪門法의 要點이기도 하다. 僧瓚祖師의 [信心銘]은 絶對無位를 說破한 永嘉玄覺禪師(675~713)의 증도가(證道歌), 自身을 비워 對象과 渾然一體가 되는 회호(回互)의 原理를 說破한 石頭希遷禪師(700-791)의 [참동계(參同契)] 등과 함께 오늘에까지 禪僧들이 龜鑑으로 삼는 必讀書다.


 [信心銘]의 신심(信心)은 秋毫의 疑心도 없이 徹底하게 믿는 마음, 즉 信仰心(Beliving-in)을 뜻하고 명(銘)은 쇠나 돌에 새긴 글귀를 말한다. 그러니까 信心銘이란 修行僧이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글이다. 後日 話頭가 된 [信心銘]의 ‘至道無難 唯嫌揀擇’이 說破하고 있는 內容을 잠시 살펴보자.


 道는 언제나 그저 道일 뿐이다. 道는 어렵다, 쉽다를 떠나 있으며 늘 밝고 한결같다. 다만 중생들이 이러한 道의 本質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分明한 道의 存在를 보지 못하는 原因은 바로 헤아리고 따지는 ‘思量分別心’ 이라는 妄念 때문이다. 밝은 太陽과도 같은 道는 絶對 平等性을 本質로 하기 때문에 모든 衆生의 마음속에 똑같이 들어 있다. 이를 일러 ‘一切衆生 悉有佛性’ 이라 한다.


 다만 取捨選擇의 分別心이라는 구름이 이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自己의 本來마음, 佛性, 眞如當體, 自性을 보지 못한다. 本來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眞心이라는 道는 揀擇하는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 本性대로 自由自在할 수 있다. 至極한 道가 다만 揀擇을 꺼리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道의 본질인 絶對 自由를 妨害하는 根本 原因이 思量分別心을 따르는 揀擇에 있기 때문이다.


 禪佛敎는 1천5백 년 전부터 이처럼 凡과 聖, 有와 無로 分別하는 二分法的인 思惟體系를 革罷하고자 하는 ‘意識革命’을 소리높이 부르짖었다. 善이 目標하는 깨침이라는 것도 事物을 對立的 槪念으로 區分하는 分別心의 打破다. 生과 死, 幸福과 不幸, 好와 不好로 取捨 選擇하는 데서 人間의 모든 葛藤은 시작된다. 分別心을 없애는 데는 葛藤과 對立을 克復하는 게 修行이고 깨침이다. 그러나 人類는 오늘날까지도 헬레니즘(그리스문명)의 二分法的인 思惟體系를 合理主義라 信奉한다. 禪은 事物의 實體를 把握하려면 凡과 聖을 하나로 보는 兩極的 對立의 克復이 반드시 前提되어야 한다고 본다.


 現代文明의 終末과 함께 21세기 以後의 새로운 文明을 이끌 思想的 發想의 轉換이 切實히 要求되고 있다. 禪佛敎가 이미 6世紀부터 主唱한 一元的 思惟體系야말로 오늘의 時代가 要求하고 있는 革命的 發想의 轉換이 되기에 充分하다. 최근 歐美 先進 各國에서 젠(Zen : 禪)에 대한 關心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思考方式의 轉換이 오늘의 改革, 變化, 構造改編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核心的 要求다.


만고불변의 허공(萬古長空)


 묻는다 : 達磨가 中國에 오기 전에도 中國에 佛法이 있었습니까.

 답한다 : 達磨가 印度에서 中國에 온 일을 먼저 들추지 말고 지금 당장의 일은 무엇인가.

 묻는다 : 저는 모르겠습니다. 청컨대 禪師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답한다 : 萬古에 변함없는 虛空이요, 하루 아침 風月이라(萬古長空 一朝風月)


 우두종 5세 우두지위선사의 法師 천주산 숭혜선사(?-779)와 한 중의 問答이다. 話頭로는 ‘萬古長空’ 이라 한다. 숭혜선사는 俗性이 진(陳)씨고 팽성(현 강소성 서주시) 출신이다. 스승 지위선사 門下를 떠나 서주 환공산(현 안휘성 천주산)으로 들어온 그는 草庵을 짓고 學人들을 제접했다. 우두종의 禪風은 숭혜와 그의 道伴인 우두혜충(683-769)에 이르러 絶頂을 이루었다. 唐 大宗이 천주산 숭혜도량에 편액을 내림으로써 숭혜선사의 명성은 한껏 치솟았고 當代의 거물 禪杖으로 浮上했다. 아쉬운 점은 숭혜도량의 寺刹 이름이 禪宗語錄들에는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묻는다 : 천주산의 경계(境界)는 어떻습니까?

답한다 : 주부산이 높아 해를 보기 어렵고, 옥경봉 앞에서는 사람을 깨치기 쉽도다.

(主簿山高難見日 玉鏡峰前易曉人)


 한 중과 숭혜선사의 禪問答이다. 중의 물음은 숭혜의 家風(禪思想)을 알고 싶다는 얘기다. 숭혜는 詩人들이 즐겨 쓰는 비흥수법(比興手法 : [詩經]에 나오는 6義 중 比와 興을 구사하는 比喩法을 말하는데 비슷한 예를 들어 재미있게 說明하는 것이다)을 使用해 詩的으로 對答하고 있다. 唐, 宋代는 詩人의 時代였다. 따라서 禪僧들도 그러한 社會風潮를 따라 발랄한 詩興을 가지고 있었다.


 주부산과 옥경봉은 천주산 안의 두 산봉우리다. 주부산은 높이 솟아 항상 구름 속에 묻혀 있고 옥경봉은 낮고 平坦하다. 숭혜는 높은 봉우리를 통해 世俗을 떠난 자신의 출세간, 곧 出家를 象徵하고 낮은 봉우리를 통해서는 깨친 후 世間으로 다시 돌아오는 入俗을 象徵하고 있다. 禪佛敎는 출세간법(出世間法)인 佛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不可避하게 世俗을 떠나 山寺로 들어가지만 佛法을 깨쳐 見性을 達成한 後에는 반드시 現實 속 日常生活에서 그 깨친 바를 表現하고 實踐해야 한다고 누누이 强調한다. 端的으로 말해 實踐佛敎다.


 聖을 거쳐서 俗으로 돌아오는 회호(回互)다. 聖과 俗이 둘이 아니라 結局은 하나라는 이와같은 回護의 原理를 다른 말로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한다. 숭혜는 중의 물음에 대한 對答으로 높고 낮은 봉우리가 조화롭게 펼쳐진 천주산의 絶景을 제시했다. 진(眞)과 속(俗)이 서로 어우러진 佛法世界의 승경(勝境)도 마치 이 천주산의 絶境과 똑같다는 얘기다. 眞은 높은 봉우리(주부산), 俗은 낮은 봉우리(옥경봉)로 比喩하고 있다. 禪은 象徵主義的 表現을 즐겨 사용한다. 기왕에 중이 숭혜의 깨친 바 境地를 ‘천주산 景致’ 라는 象徵을 빌려 물었으니 對答도 천주산 絶境으로 해야만 佛敎的 痕迹을 남기지 않는 妙味가 있다.


 중이 이 問答에 이어 다시 참문한 게 序頭에 나온 禪問答이다.

 두 번째 禪問答의 核心 포인트는 숭혜의 ‘萬古長空, 一朝風月’이라는 對答속에 있다.

 역시 詩적인 表現으로 宇宙天地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들어 보였다. 萬古不變의 虛空은 本體界를, 하루아침의 바람과 달은 現象界를 각각 比喩한 象徵이다. 萬古長空(本體界) 속에 아침마다 바뀌는 風月(現象界)이 있고, 반대로 每日 변하는 아침(現象界)에도 虛空(本體界)은 뚜렷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聖俗一如, 체용일여(體用一如)다. 禪師들은 이렇게 어려운 禪理도 우리가 늘 接觸하는 自然, 또는 매일의 日常生活을 통해 쉽게 說明해 준다. 깊고 廣闊한 佛家의 體用一如論이 含蓄하고 있는 뜻을 虛空과 風月이라는 可視的인 自然現象을 빌려 明快하게 說破하고 있다.


 ‘萬古長空’이라는 話頭는 佛法이란 全宇宙에 꽉 차 있고 萬古에 길이길이 변함없이 存在해오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達磨가 印度에서 온 곳부터 지금 나누고 있는 對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萬古不變의 虛空 가운데서 일어나고 지는 一朝風月과 같이 天地 本體의 大機大用이라는 얘기다. 숭혜는 大自然의 妙用을 예로 들어 중에게 宇宙의 本源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우선 觀念的이고 知性的인 물음(祖師西來意)을 一擧에 撲殺내는 方法으로 이처럼 高度의 比喩를 含蓄한 象徵的 對答을 한다.


 이래서 禪問答은 엉뚱한 東問西答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의 知性이라는 意識作用에 의해 觀念化된 佛敎 眞理보다는 自己 몸으로 직접 부딪쳐 自己와 永遠한 本體가 한 덩어리가 되는 佛性의 육화(肉化)만이 올바른 禪的 깨달음이다. 따라서 흔히 東問西答으로 치부하는 禪問答 속에는 언제나 이와 같은 徹底한 眞理의 實存的  體得을 呼訴하는 獅子吼가 들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佛法을 깨달아 밝히는 일은 자고로 自己自身의 일이지 達磨가 오고 오지 않고는 전혀 無關한 일이다. 일체 存在의 밑바탕인 청정자심(淸淨自心)을 똑똑히 確認, 자기 運命을 자기 스스로 開拓해 나가는 삶이 禪的 存在方式이다. 達磨나 高僧들은 吉凶을 가려내는 점쟁이도, 占卦를 풀이해주는 解說家도 아니다. 그들은 見性 道人의 한 모델일 뿐이다. 自身의 모든 吉凶은 自己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外部的 對象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禪佛敎는 自己運命의 主人은 自己 自身이라는 것을 强調, 人間의 强忍한 主體性을 일깨워준다. 한마디로 禪佛敎의 모든 가르침은 人間의 自己 主體性 確立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숭혜와 중의 問答은 계속됐다. 중은 이처럼 철저히 가르쳐 주어도 못 깨치고 또다시 “천주산 家風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때때로 無心한 흰 구름이 와서 窓門을 가리고 사립문을 뒤덮으니 (時有白雲來閉戶)

 어떤 風月도 사면 산중에 유동함이 없다. (更無風月四山流)


 숭혜선사는 역시 詩的으로 對答한다. 動的인 면에서 보면 白雲風月은 항상 움직이고 있고 靜的인 면에서 보면 山中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동(動)에서 보느냐, 정(靜)에서 보느냐는 마음에서 생겨난 分別望見일 뿐이다. 眞理에 到達하기 위해서는 動, 不動의 對立的 分別心을 超越해서 두 對立的 矛盾을 克復한 萬物一如의 법안(法眼)으로 世上萬物을 보아야 한다.


 숭혜의 答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천주산 절간의 家風은 이처럼 動도 있고 靜도 있으며 한가한 구름, 밝은 달 등이 동정일여(動靜一如)의 境地에서 自然스럽고 絶妙한 景致를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묻는다 : 죽어간 중은 죽은 뒤 어디로 갔을까요

 답한다 : 잠악봉 높은 봉우리는 푸르디 프르고 서강의 밝은 달은 달빛이 찬란하다.

(潛岳峰高長績翠 舒江明月色光暉)


 숭혜와 중의 繼續되는 問答이다. 잠악봉과 서강도 역시 천주산의 경치다. 숭혜가 說破하고자 하는 禪理는 生과 死란 俗人의 眼中에서 본 區別이며 妄念일 뿐 대화(大化)의 立場에서 보면 生도 없고 死도 없는 무명무암(無明無暗)이라는 生死一如觀이다. 佛敎의 生死觀은 本來가 生은 大化가 모여든 것이고 死는 大化가 元來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본다. 禪은 個體的 生命으로선 生과 멸(滅)이 있지만 大化의 立場에선 生滅이 있을 수 없다는 信念으로 生死를 克復하고 超越한다. 죽음은 오직 宇宙生命의 本源으로 돌아가는 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