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전의 임종(南泉遷化)
묻는다 : 和尙께서 別世하신 뒤에 어디로 가시렵니까?
답한다 : 산 아래 마을 농가의 한 마리 물빛 암소(水牯牛)가 되리라.
묻는다 : 저도 和尙을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답한다 :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한 줄기 풀을 물어오너라.
南泉禪師가 천화(遷化 : 高僧大德의 臨終)할 무렵 禪房 제1좌(首座)와 나눈 問答이다. 話頭로는 ‘南泉遷化’라 한다. 南泉禪師는 南泉山에서 開堂說法을 시작, 사가(師家)의 자리를 굳힌후 제자들에게 늘 “動物이 돼라”고 외쳐댔다. 그리고 法問이나 學人들을 제접(諸接)하는 法去量 때 陽子江 流域에서 흔히 보는 水古牛를 例示해 선리(禪理)를 說破했다.
소는 人間을 위해 말없이 일할 뿐 어떠한 報答도 바라지 않는 무공덕행(無功德行)속에서 스스로 滿足하면서 安樂을 누린다. 사람이 따르지 못하는 훌륭한 生活態度다. 大乘佛敎는 이러한 삶의 자세를 ‘菩薩行’이라 한다. 따라서 소는 佛敎가 누누이 강조하는 ‘보살도(菩薩道)’의 象徵이기도 하다.
다만 소는 짐승이기 때문에 佛法이니, 菩薩 道니 하는 것이 있음을 모를 뿐이다. 그러나 소의 生活態度는 부처나 흉내내는 人間은 물론 어떤 부처보다도 훨씬 높은 次元의 삶이다. 소가 農事일 열심히 했다고 그 功德을 자랑하는 일이 있던가. 아니면 代價를 요구하던가. 전혀 그렇치 않다. 바로 菩薩行, 부처의 삶이 이런 것이다.
南泉은 이와 같은 소의 菩薩行을 열렬히 指向한 禪지식이다. 그는 제자 趙州가 “유(有)를 깨달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하고 묻자 “절 아래 마을 신도집의 물빛소로 태어난다”고 했다. 즉 깨침을 完遂한 見性道人이라면 소처럼 묵묵히 衆生을 위해 일하는 菩薩行을 행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南泉이 자주 引用한 水牯牛 속에는 ‘나 南泉은 水牯牛와 같이 無功德行을 하는 大菩薩’ 이라는 自尊心까지 엿보인다. 話頭로 돌아가보자. 제 1좌의 첫물음에 대한 南泉의 對答은 철저한 菩薩의 비원(悲願)을 말하고 있다. 다음 물음에 대한 ‘한 줄기 풀’은 眞如當體, 佛法, 佛性을 象徵한다. 진정한 菩薩行을 위해서는 眞如를 철견한 깨달음과 佛性(眞理)만을 먹고사는 소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南泉의 道伴이며 馬祖의 3대 제자(百丈, 南泉, 西堂)중 한 사람인 百丈懷海禪師(749-814)는 그의 語錄[百丈錄]에서 다음과 같이 說破했다.
‘부처는 衆生속에 들어가 동류(同類)로 이끌어 주시니, 그들 아귀와 함께 사지 마디마디를 불태우며 般若바라밀을 說하여 放心케 한다. 만일 오로지 聖人의 境地에만 머문다면 무엇을 依支하여 그들에게 가서 말해주겠는가.“
역시 水牯牛 같은 衆生濟度의 菩薩行을 强調한 法問이다. 참으로 깨친 사람은 地獄이나 煉獄, 阿修羅, 衆生속을 마다치 않는다. 거기 뛰어들어 六道輪回하고 저 죄 많은 衆生을 救援해야 한다. 性徹 전 曹溪宗 宗正이 1983년 12월 송광사 方丈 구산선사 다비에 보낸 弔詞에서 “스님은 이제 화살처럼 쏜살같이 地獄에 떨어질 겁니다”라고 했던 것도 이런 意味에서였다. 性徹禪師의 弔詞는 “구산”, 당신같은 큰 法力이라면 地獄으로 어서 내려가 거기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衆生을 구제하시오“라는 애기다. 즉 구산의 높은 도력(道力)을 치켜올린 追悼辭다. 世俗的 識見으로는 죽은 사람에게 어서 地獄으로 가라면 辱이되고 몽둥이질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禪은 이처럼 역유(逆喩)을 통해 禪理를 방광한다.
南泉의 語錄에 登場하는 水牯牛 話頭를 몇 개만 더 살펴보자.
묻는다 : [南泉이 沐浴湯 앞을 지나가다 욕두(浴頭)가 욕탕물을 데우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지금 무엇하고 있는가?
답한다 : 목욕탕물을 데우고 있습니다.
묻는다 : 잊지 말고 水牯牛를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거라.
답한다 : 네.
묻는다 : (밤이되자 浴頭가 방장실로 왔다) 뭣하러 왔느냐?
답한다 : 어서 水牯牛께서 욕실로 드시지요.
묻는다 : 소 고삐를 가지고 왔느냐?
답한다 : (浴頭는 말문이 막혀버린 채 더 이상 對答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趙州가 문안을 드리자 南泉은 조금 전 浴頭와 거량한 얘기를 해주었다. 趙州가 “저라면 할 수 있는 말이 한마디 있는데요” 라고 했다. 南泉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남 전 : 소 고삐를 가지고 왔느냐?
조 주 : (南泉方丈 앞으로 썩 나서더니 다짜고짜로 南泉의 코를 손으로 꽉 쥔 후 끌어 당겼다.)
이 逸話를 話頭로는 ‘수고우 목욕(水牯牛浴)’이라 한다. 浴頭가 南泉을 水牯牛로 간주해 마중하러 간 것까지는 禪問答의 進行이 꽤 괜찮다. 그러나 소 고삐라는 眞如 佛性을 내 보이라는 要求에 말문이 막힌 데서 급기야 禪적인 體驗없이 觀念的으로만 깨달은 척했던 魔脚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趙州의 선기(禪機)는 浴頭의 觀念的 깨침의 虛構性을 단칼에 박살내 버리고 禪의 如如한 面目을 보여준다. 趙州는 <지금, 여기>의 現實을 直視하라는 平常心是道에 철저하다. 고삐는 소를 끌어당기는데 使用하는 것이다. 南泉이라는 水牯牛에게는 現實的인 소고삐는 없다. 왜냐하면 南泉은 사람이지 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는 沐浴을 시키려면 고삐를 당겨줘야 한다. 그렇다면 南泉이라는 水牯牛는 코를 비틀어 끌고 갈 수밖에 없다. 소 고삐가 된 趙州의 ‘손’은 觀念과 사량(思量)을 일으키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禪佛敎의 家風을 멋지게 보여준 快擧다.
南泉이 어느 날 水牯牛 한 마리 끌고 승당(僧堂) 안으로 들어와 堂內를 빙빙 돌았다. 그러자 首座가 水牯牛의 등을 세 번 쳤다. 南泉은 빙빙 돌기를 멈추었다. 이때 옆에 있던 趙州가 풀을 한 단 首座 앞에 갖다놓았다. 首座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당황했다.
‘수고우순당(水牯牛巡堂)’이라는 話頭다. 南泉의 行爲는 “여기 진짜 水牯牛가 있다. 너희 중에 진짜 水牯牛가 됐거나 될 사람이 있으면 어서 나와 보라”는 法問이다. 여기서도 水牯牛는 역시 見性, 부처, 菩薩을 象徵한다.
首座가 소의 등을 세 번 친 것은 “이 水牯牛야 彷徨하지 말라 여기에도 진짜 水牯牛가 있다”는 애기다. 南泉은 이렇게 이해하고 그렇다면 더 이상 水牯牛를 끌고 僧堂을 돌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 行動을 멈추었다. 이때 趙州가 나서서 首座가 南泉이 뜻하는 바를 진짜로 알았는지 試驗을 해본다. 首座는 그만 풀을 한 단 갖다 준 趙州의 테스트에 不合格하고 만다. 首座는 즉각 풀을 먹는 시늉을 했어야 하는데...역시 首座의 見性은 어설픈 것이었음이 탄로나고 말았다. 물론 首座는 趙州의 師兄이고 先輩다. 그러나 禪氣에서는 趙州가 이미 스승 南泉에 匹敵하는 銳利함을 보여 준다.
水牯牛가 登場하는 선화(禪話)는 수없이 많다. 특히 禪宗의 本據地였던 강서성과 호남성 일대는 지금도 논농사가 주산업이고 水牯牛를 農牛로 사용한다. 農家마다 水牯牛가 없는 집이 없다.
묻는다 : 이 水牯牛의 나이가 몇 살이냐?
답한다 : (중이 아무 대답도 못하자 雪峰義存禪師가 77세이니라 하고 스스로 답했다.)
묻는다 : 和尙께서 어찌 水牯牛가 되셨습니까?
답한다 : 무슨 잘못이야 있겠는가!
‘수고우연세(水牯牛年歲)’라는 話頭다. 雪峰禪師(822-908)와 한 중의 問答인데 첫 번째 質問은 雪峰이, 두 번째 質問은 중이 한 것이다. 당시 雪峰禪師의 年歲가 77세였다. 雪峰은 自答을 통해 자신이 菩薩行을 펼치고 있는 實踐佛敎의 役軍(선지식)임을 밝혔다. 미련한 중은 그 말뜻도 모르고 어찌 사람이 소가 될 수 있느냐고 反問한다. 禪에서의 ‘水牯牛’는 사람의 人格을 卑下하거나 賤視하는 侮辱的인 用語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水牯牛 取扱을 받으면 한소식한 道人이고 成佛을 이룩한 각자(覺者)다.
끝으로 ‘위산수고우(潙山水牯牛)라는 話頭 하나만 더 보자
潙山이 물었다. “나는 죽은 뒤 산 밑에 가서 한 마리 물빛소로 태어나 왼쪽 겨드랑이에 ‘潙山의 중 아무개’라고 쓰겠다. 이때 潙山의 중이 水牯牛가 됐다고 해야겠느냐, 아니면 水牯牛가 潙山의 중이 됐다고 해야겠느냐?”
仰山이 앞으로 나가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話頭 ‘潙山의 물소’는 禪林의 걸출한 公案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 뜻하는 바가 다소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後代의 禪師들이 서로 엇갈리는 解析과 평을 내놓고 이 話頭를 둘러싼 論難을 거듭했다. 우선 성급하게 答을 말해 본다면 “潙山의 중이 水牯牛가 됐다”고 해도, “水牯牛가 위산의 중이 됐다”고 해도 모두 다 틀린다. 오직 절대공(絶對空)일 뿐이다.
潙山禪師가 이 話頭를 說할 때는 즉 潙山의 중도, 潙山밑의 물소도 아닌 一切의 상(相)을 여읜 법신(法身)으로서 法輪을 굴린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具體的 形象에 대한 執着을 깨버리고 모든 상의 本體인 공(空)의 世界로 들어설 때에만 可能하다. 이러한 공(空)의 世界를 깨닫지 못하고는 ‘潙山水牯牛’라는 話頭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다.
極端的으로 말한다면 言語文字를 동원한 어떠한 解說도 ‘潙山水牯牛’가 뜻하는 眞如法性, 完全無缺한 本體를 드러낼 수 없다. 이는 마치 산속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흐르는 소리, 고깃배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 노저어 가는 낚싯배의 움직임 등이 맑은 계곡물과 거기서 낚시하는 情景, 낚시 道具 등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기와 계곡물을 손에 잡을 수 없으며 물고기가 그 自體(道의 本體)와는 전혀 關係가 없는 것과 같다.
‘潙山水牯牛’라는 話頭는 한마디로 법왕신(法王身)을 내보인 것이다. 이 法身은 形象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확인할 수도,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흔히 禪은 이와 같은 法身을 둥근 원상(○)으로 形象化한다. 그러나 이것도 부득이한 表現일 뿐 眞如本體를 1백퍼센트 說明한 건 아니다. 佛家에서는 통상 過去. 現在, 未來世라는 3세(世)를 말한다. 外形相으론 世俗의 時間槪念과 같지만 佛敎에서는 劃을 긋는 區分이 아니라 統合的인 同一性의 時間이다. 潙山禪師가 이 話頭를 說했을 당시는 潙仰宗의 創始者로 潙山 동경사(同慶寺) 方丈이었다. 즉 現世에서는 潙山 同慶寺 方丈이지만 未來世에서는 물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禪은 現世界와 未來世를 別個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기 때문에 ‘潙山의 중 靈祐’나 ‘潙山 아래의 물소’도 별개의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이고 同一하다. 潙山이 說破하고자 하는 것은 그 ‘하나’란 存在의 본바탕인 眞如自性이다. 따라서 同慶寺 방장 潙山과 산밑의 물소는 別個의 存在가 아니고 眞如自性에서 본 ‘하나’다. 그러나 우리는 ‘潙山의 중’이라 하면 물소 이미지가 떠오르고 ‘물소’라 할 때는 그 물소의 前生이 ‘潙山의 중’이었다는 別個의 생각을 하게 됨으로써 엇갈린 解析을 많이 내놓게 된다.
조동종의 운거도웅선사(835-902)는 이 話頭에 대해 평하길 “潙山和尙에겐 다른 이름이 없다”고 했다. ‘潙山의 중’ 이든 ‘물소’든 간에 潙山에게는 오직 潙山의 存在를 받쳐주고 있는 眞如 當體와 圓融無涯한 法身만 存在할 뿐이라는 얘기다. 仰山의 제자인 자복여보선사는 일원상[○]을 그려 潙山의 물음에 答했다. 潙山의 話頭는 法身을 나타낸 것이라는 뜻이다.
파초철화상은 圓相 안에 소우자를[牛] 써 보이면서 “같은 길을 가는 사람만이 알리라”고 했고 파초철선사는 “그때 이런 모양[物․禮]을 만들어 보였어야 했으리라”면서 할 말 다 했고 註釋도 달았으니 깨닫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모두 다 圓相은 法身을, 우(牛)자는 菩薩을, 물(物)과 예(禮)는 本體와 作用이 하나로 統一돼 나타난 現象界의 頭頭物物과 이를 肯定한 앙산의 절(拜)을 각각 象徵한다. 그러나 이 모든 解析은 정확한 답이 될 수 없다. 逆說的이지만 ‘답이 없는 게’ 진짜 답이다. 潙山禪師의 眞如法身은 ‘潙山의 중’이라는 形象도 아니며 ‘물소’라는 形象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름 없는 이름’이 있을 뿐이고 무(無)요, 공(空)일 따름이다.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묘유(妙有)가 있을 뿐이다.
禪은 神이나 靈魂, 無限, 死後의 삶 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日常的인 삶 속에서의 일들을 통해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秘密(事物의 참모습, 眞理)를 열어 보여준다. 禪이 眞理를 파악하는 方法은 歸納的이다. 禪은 우리의 常識을 뒤엎는 전도(顚倒)의 牙城으로 뛰어들어 우리가 全身的, 生物學的으로 살지 결코 論理的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體驗해 깨닫도록 한다.
지금까지 登場한 水牯祐 관련 禪話들도 다 이러한 禪의 本色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潙山靈祐禪師의 水牯牛가 現在,未來의 통시적(通時的) 一體性을 强調한 形而上學的 냄새를 풍길 뿐이다. 元來 佛敎의 過去, 現在, 未來世라는 時間 區分은 世俗的 時間槪念과는 달리 하나로 보는 通時的 統合의 時間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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