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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 13. 죽통 안의 죽(桶里粥)

slowdream 2007. 9. 14. 23:10
 

*죽통 안의 죽(桶里粥)

 -남전산 남전사(南泉寺), 南天普願禪師


 묻는다 : 이 통 안에 들어 있는 게 뭐냐?

 답한다 : 이 늙은이, 주둥아리 달고서 엉뚱한 질문을 하는구먼!

 (질문을 던졌던 馬祖禪師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난다.)


 남전보원(南泉普願 : 748~843)이 馬祖道一禪師 門下에서 供養主를 하던 시절 어느날 아침 죽을 分配하다가 스승 馬祖와 주고받은 禪問答이다. 話頭로는 ‘통리죽(桶裏粥)’이라 한다.


 南泉寺 踏査에는 두 가지 점 때문에 기대에 부풀었다. 첫째는 우리나라 新羅末 高麗初 9산禪門의 9개 禪宗 寺刹 중 江原道 사자산 흥령사를 開山한 도윤(道允)禪師가 入唐해 法脈을 이어온 因緣이다. 둘째는 馬祖의 3대 제자 중 한 사람이며 ‘天下趙州’로 一世를 風味한 趙州從諗禪師의 사가(師家)라는 점이다. 이는 趙州禪風의 根源이 바로 南泉禪師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죽통 속의 죽‘이라는 話頭에서 우선 느끼는 强烈한 印象의 하나는 南泉의 言辭가 거칠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世俗的 道德觀으로는 `거친' 정도를 넘어 不敬스럽고, 悖倫的이기까지 하다. 馬趙는 南泉의 스승이다. 그것도 당시 天下 선지식(禪知識 : 學德과 法力이 높은 禪師)을 代表하는 名聲을 지닌 馬祖大師가 아닌가! 또한 馬祖는 오늘의 동아시아 禪宗 主流因 祖師禪(일명 마조선, 흥주종, 강서선)의 創始者이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禪佛敎 巨木 中의 巨木이고, 1천2백 년 동안 동아시아를 風味해온 祖師禪 家風을 確立시킨 禪杖이다.


 그러나 스승 馬祖는 弟子 南泉의 無禮한 말투에 조금도 화를 내거나 責望하지 않고 내심 흐뭇해 하면서 아무 말 없이 물러난다. 禪이 자리하는 空間이란 이렇다. 禪은 구질구질한 道德 規範이나 禮儀凡節 같은 人間의 과구(窠口 : 형식)를 과감히 부수고 어떠한 얽매임도 없는 絶對自由를 指向한다. 전혀 外皮的인 形式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직 마음과 마음이 통할수 있는 心印을 찍을 수만 있으면 된다. ‘죽통속의 죽’이라.


 馬祖인들 죽통에 들어있는 게 죽인 줄 어찌 모르겠는가. 馬祖는 단지 이 물음을 통해 南泉이 本來의 마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를 떠보려는 것이었다. 만약 도력(道力 : 깨침의 깊이)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 물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틀림없이 그 물음이 무슨 陷穽이라도 있는가 싶어서, 또는 무슨 엄청난 哲學的 意味라도 있는가 해서 엉뚱한 생각을 해보고 어떤 對答을 해야 할지 온갖 窮理를 짜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생각을 하든 모두 마음속 妄想일 뿐이다. 禪은 이런 妄想을 전혀 無價値하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힐란한다.


 南泉은 물음 같지도 않은 물음에 전혀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죽통의 죽’이라는, 實在하는 現存의 眞理를 戱弄해 심지(心地)를 테스트하려는 質問者를 攻擊해 버린다. ‘뭐라고 죽통에 죽이 있지 뭐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흐트러트리려고 그런 質問을 하지만 나에게는 어림없는 수작이다.’ 南泉의 對答에 들어있는 뉘앙스다. 南泉이 搖之不動으로 간직하고 있는 일심(一心)이야말로 人間存在의 밑바탕이며 天下 宇宙 根源이다.


 馬祖 같은 大禪知識이 이를 看破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마음과 마음의 契合이 이루어지는 心印의 순간이다. 南泉의 한마디가 사부 馬祖의 말문을 막아버린 이 사건은 南泉의 동학(同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후로는 馬祖 門下의 어느 누구도 南泉과 겨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南泉은 현 하남성 성도인 정주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다. 어려서 出家, 馬祖를 찾기 전에 이미 계를 받았고 [凌駕經] [華嚴經]등 大乘經典을 깊이 참구했다. 강서성 홍주 개원사(현 남창 우민사)馬祖 門下에서 見性한 후 당 헌종 정원11년 안휘성 지주(현 귀지)로 내려가 南泉山 南泉寺를 開山하고 30년 동안 한번도 下山하지 않았다.


 話頭 ‘桶裏粥’에서 보다시피 南泉의 선기(禪機)는 거칠고 激烈하다. 원래 祖師禪은 그 本色이 過激하다. 南泉의 과성은 師父인 馬祖의 家風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特徵的인 남전 家風은 秀才들에게 흔히 있는 날카로운 機智다.


 南泉山을 찾아가는 踏査의 旅程에서 떠울려본 남전의 운수납자(雲水衲子)시절 逸話는 원상(圓相 : ○) 이야기다. 흔히 話頭로는 ‘남전일원상(南泉一圓相)‘ 이라 하는데 現在의 韓國 圓佛敎가 一圓相을 法身佛로 모시고 있어 전혀 낮설지가 않다. 圓과 관련한 說話는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南泉의 一圓相 얘기는 아주 재치있고 멋진 한소식을 전해준다.


남전의 일원상(南泉一圓相)


南泉普願, 歸宗智常, 마곡보철등 馬祖門下의 首座 3명이 南陽慧忠國師를 參拜하기 위해 어느날 함께 길을 떠났다. 길을 가던 도중 南泉이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南泉은 앉은 채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고는 다른 두 道伴에게 ‘말해보라, 그러면 가겠다“고 말했다. 歸宗이 圓相 안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마곡은 圓相안에 앉아 있는 歸宗에게 허리를 조금 굽혀 절을 했다. 두 道伴의 이러한 擧動을 보고서 南泉은 ”너희들이 그렇다면 慧忠國師한테 가지 않겠다“고 했다. 歸宗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졌다. 結論은 세 사람 모두 가던 길을 되돌아 왔다.


 南泉 ‘一圓像’이라는 話頭의 內容이다. 장난기가 넘친다. 어린애들 떼거리 같은 이 장난 속에 번득이는 閃光이야말로 禪이 追究하는 높고 높은 境地다. 禪에서의 圓相은 絶對世界, 佛性, 本體自性을 象徵한다. 다시 말해 完全無缺한 自身, 또는 부처를 形象化한 것이 圓相이다.


歸宗이 圓相 안으로 들어가 주저앉은 行爲는 나밖엔 絶對世界도, 부처도 없다는 自身의 絶對性을 드러내보인 소식이다. 즉 歸宗 자신이 바로 부처라는 애기다. 馬祖가 누누이 强調한, 마음 그대로가 부처(卽心卽佛)이고 衆生이 바로 부처라는 自己 絶對性을 表現한 行動 言語다.


 마곡은 이와 같은 歸宗의 見性소식을 즉각 지음(知音)하고 圓相 안에 앉아있는 ‘歸宗이라는 부처(歸宗佛)’ 에게 절을 함으로서 장난기 넘치는 閃光을 번뜩였다. 마곡은 “어, 그래 歸宗佛이 나타나셨구먼! 그러면 禮佛을 해야지” 하고 절을 한 것이다. 南泉도 두 道伴이 이처럼 道를 통한 걸 보고는 굳이 慧忠國師를 慘聞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도중 回歸하자고 한 것이다. 세 사람 모두가 척척 들어맞는 知音의 名手들이고 그 見性의 境地가 맑디맑은 가을철 계곡물 같다.


 後代 禪師들은 세 사람이 저 옛날 흰 원숭이를 쏘아 맞힌 礎나라 명사수 양전기의 활솜씨 같은 높은 境地였다는 讚辭를 아끼지 않았다. 數學에서는 0=0이고 1+1=2다. 禪도 이와 같은 數理哲學을 肯定한다. 그러나 禪은 0=2, 1+1=3이라는 데도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0은 무한대이며, 無限은 곧 0이기 때문에 0=2를 부정하지 않는다. 즉 0이라는 ‘無限’은 우리 人間의 範圍를 超越하는 것이기에 非理性的일 수밖에 없다.


 또 禪은 幾何學的인 圓의 가운데에 단 하나의 中心과 그 둘레에 圓周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中心도 圓周도 없는 圓이 存在한다는 것을 認定한다. 이른바 ‘圓融無涯’라는 것이다. 禪의 圓은 中心의 數가 無限한 圓이다. 따라서 이 圓은 중심이 없기 때문에 모든 곳에 中心이 있을 수 있다. 幾何學的인 圓은 中心에서 圓周까지 그은 모든 반지름의 길이가 같다. 禪의 圓도 이와 같은 반지름 原理에 따라 無限한 中心에서의 반지름들이 無限한 길이를 갖는다. 엄청난 얘기다. 한마디로 人間의 無限 價値를 認定하는 絶對肯定이다.


 禪은 이 宇宙를 둘레가 없는 圓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 覺者가 이 둘레 없는 圓의 中心이다. 곧 나라는 存在가 宇宙이며 만유(萬有)의 中心이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곧 萬物의 創造者라는 이야기다.  ‘나’라는 存在가 손을 虛空에 들어올리는 순간 거기에 空間이 存在하고, 時間이 脈搏을 치면서 흐른다. 이것이 바로 人間 關係다. 모든 論理法則과 形而上學은 時間과 空間을 만들어내는 내 손의 實在를 確認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西洋人들은 必要를  充足시키기 위해 둥근 것을 正方形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게 合理고, 開發이고, 文明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東洋人들은 圓形에 人爲的 造作을 가해 네모꼴로 만들기보다는 正方形과 같은 것으로 보아 넘기는 認識의 轉換을 통해 必要한 正方形의 欲求를 滿足시킨다. 원상(○)=사각형(□)이라는 호환작용(互換作用)이 바로 禪의 基本 認識論이다.


 禪에서도 圓은 둥글고 正方形은 그대로 正方形임을 認定한다. 결코 幾何學的인 論理를 否定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正方形은 둥글고, 둥근 圓이 正方形이 되기도 하는 또 하나의 相互 交換的 原理를 가지고 있다. 圓은 圓으로만 固定되어 있지 않고 正方形으로 될 수도 있어야 자유롭다, 다시 말해 圓은 圓이 아닐 때 그 行動半徑이 넓어진다.

 이 原理를 人間에 適用하면 人間은 人間이 아닐 때에만 자유롭다. 즉 自信을 否定하고 全體에 沒入했을 때 가장 자유롭다. 明白한 矛盾이다. 그러나 이 明白한 矛盾 없이는 絶對自由와 慈悲를 言及할 資格이 없다. 人間은 스스로 정해놓은 道德律․倫理規範에 얽매였을 때보다는 소나 말이 돼 한가로이 풀을 뜯고, 平原을 달릴 때 더 自由롭다.


 또 나환자의 고름을 빨았다는 聖者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人間이 흔히 말하는 ‘定常’을 벗어나 人間이 아니었을 때 더 感動的인 慈悲行이 나타나지 않던가. 나환자의 고름을 빨았다는 것은 常識線에서 볼수 있는 人間의 行爲는 아니다. 그러나 그 人間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나 崇高한 慈悲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人間은 宇宙로부터 결코 分離될 수가 없다. 그러나 論理는 이러한 分離(인간소외)가 根絶될 수 있다고 한다. 線은 이와 같은 論理를 人間이 자신의 公利的 活動을 合理化하기 위해 만들어낸 利己的 産物로 본다. 그래서 圓과 正方形, ‘예’와 ‘아니오’의 二分法的인 區分을 否定하고 固着的인 分別을 反對한다.


 禪은 이처럼 正確한 區分없는 모호한 狀態, 圓融無碍한 絶對自由, 混沌을 生命의 本質로 본다. 다시 말해 한층 더 높은 次元의 世界로 올라가 圓과 正方形을 하나로 綜合하는 ‘統一’을 實現하는 것이다. 禪은 결코 삶을 일종의 形而上學的 遊戱로 取扱하지 않는다.

모든 禪問答은 이러한 觀點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 南泉의 스승인 馬祖道一禪師에게도 圓相을 主題로 한 禪話가 많다.

 (慧忠國師의 법제자로 馬祖와는 방계 師兄師弟간인 탐원응진이 行脚에서 돌아와 馬祖 앞에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 절을 올리고 서 있었다)


 묻는다 : 자네 부처가 되고 싶은 모양이군.

 답한다 : 저는 지금 눈을 비빌 수가 없습니다.

 묻는다 : 자네한테는 못 당하겠는걸

 답한다 : (다시는 어떤 시늉도 못한다)


 馬祖가 묻고 탐원이 답한 ‘마조날목(馬祖捏目)’ 이라는 話頭내용이다. 동그라미(圓相)는 眞如, 法身, 實像을 象徵한다.  馬祖의 물음에 대한 탐원의 대답인 “눈을 비빌 수가 없다”는 말 속에는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 내가 바로 부처인데 부처를 對象化해놓고 그것을 구하려 하는 어리석음쯤이야 이미 벗어난 것이라는 애기다. 馬祖는 탐원의 대답이 ‘그런대로 휼륭하다(자네한테는 못 당하겠는걸!)’고 認定한다. 그러나 1백점을 준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탐원이 아무 시늉도 못했다는 데에는 탐원의 對答이 1백점 짜리 模範答案은 아직 못 된다는 약간의 批判이 內包돼 있다.


 탐원이 圓相을 그리고 그 안에 선 것은 天下宇宙의 主人公, 진아(眞我)인 나의 主體性이 곧 부처라는 象徵性을 갖는다. 탐원이 한 곳에 서 있지 말고 원 안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녔더라면 더 멋진 答辯이 됐을 텐데........

 

 馬祖가 편지를 써서 한 중 편에 경산법흠화상에게 보냈다. 하나의 원상(圓相)이 그려져 있는 편지였다. 경산은 편지를 뜯어보고는 붓을 들어 圓相 한 가운데 점 하나를 찍었다. 후일 어떤 중이 慧忠國師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였더니 慧忠國師는 “경산법흠만한 사람이 馬祖한테 속아넘어가다니....... ”라고 말했다.


 ‘서중 일원상(書中一圓相)’이라는 話頭 내용이다.

경산법흠선사는 4조 도신-우두법융-지암-혜방-강령법지-우두지위-학림현소-경산법흠으로 이어지는 우두종의 巨物禪杖이다. 당시의 行脚僧들은 馬祖, 石頭, 경산 사이를 번갈아 往來하며 참문했다. 즉 이 세 사람은 당시의 天下 禪林을 代表하는 선지식이요, 禪杖들이었다. 경산법흠은 현 절강성 여항현 장낙진 경산에 있는 경산선사(經山禪師 : 일명만수선사, 능인선사, 향운선사, 승천선원)의 開山祖다. 경산사는 宋代에는 대혜종고, 무준사범선사 등 臨濟宗의 巨木들이 主席했던 禪宗 名刹이기도 하다.


 원래 圓相은 南陽慧忠國師가 最初로 開發, 선리(禪理)를 說破하는데 活用했다. 그가 開發, 活用한 圓相은 자그마치 97종(일설에는 1백27종)이나 됐다고 한다. 慧忠의 圓相은 그의 제자 탐원응진을 거쳐 潙仰宗 開山祖의 한 사람인 仰山慧寂禪師(807-883)에게로 傳授돼 ‘앙산문풍(仰山門風)’으로 굳어져 그 이름을 떨쳤다.


 즉 圓相의 活用은 潙仰宗의 特徵的인 ‘가풍(家風)’이었고 “仰山의 제자인 오관순지선사가 圓相을 빌려 깨침이 늦어지는 病弊를 說明했다”고 記述하고 있다. 潙仰宗의 圓相活用은 순지선사에 이르러 꽃을 피웠는데, 순지는 바로 新羅 스님이었다. 어쨌든 圓相을 빌려 佛法, 眞如를 說破한 潙仰宗의 家風은 당시에도 新羅僧 순지가 꽃피웠고 오늘에는 韓國 圓佛敎가 佛像대신 法身佛로 法堂에 일원상(一圓相)을 모시는 因緣으로까지 이어진 게 아닐는지.....


 경산이 馬祖가 보낸 편지의 圓相에 점을 찍은 것도 慧忠國師가 개발한 圓相 活用法의 하나였음엔 틀림없다. 그러나 慧忠國師의 97종 圓相 活用法이 現在 전해지고 있지 않아 무엇을 뜻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忠國師가 경산의 圓相內 着点에 대해 평한 바가 어떤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宋나라때 禪學書인 [조정사원](祖庭寺苑 : 1108년 發刊한 話頭解說集)은 “圓相을 그리는 것은 南陽慧忠國師가 시작해 國師가 제자 탐원에게 傳授했고 또 仰山에게 傳하도록 當付했다. 탐원은 慧忠國師로부터 이어받은 95종의 圓相을 仰山에게 전했고, 그래서 지금은 潙仰宗의 家風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어느 날 한 중이 馬祖를 親見하러 왔다. 馬祖는 그 중에게 圓相을 그려보이면서 말했다.


 설두가 말하는 후려침은 중의 逆攻속에 들어 있는 알음알이의 ‘分別心 否定’을 철저히 撲殺내버리기 위한 일응 激勵의 방(棒)이다. 이런 때의 몽둥이질은 妄心이 일기 전의 마음 본바탕으로 돌아가라는 慈悲로운 忠告이기도 하다.

 禪林에 膾炙돼오는 몽둥이질의 제1인자는 德山宣鑑禪師(782-865)다. 이른바 德山의 몽둥이와 臨濟義顯禪師의 고함소리는 ‘덕산방 임제할(德山棒 臨齊喝)’ 이라는 定型句로 지금까지도 禪宗 家風으로 내려오는 名物 중 名物이다. 馬祖보다는 훨씬 後輩인 德山에게도 ‘馬祖一圓相’과 같은 論法의 禪問答이 있다.


 “너희들은 옳게 말해도 30방을 때리고 틀리게 말해도 30방을 때리겠다.”

 

‘德山방’ 이라는 有名한 話頭를 낳은 德山禪師의 上堂 法語다.

禪師들은 흔히 제자들의 잡생각을 한순간에 伐草하듯 끊어버리기 위해 이처럼 矛盾과 전도(顚倒)의 牙城으로 몰아 넣는다. 德山의 法語나 馬祖의 禪問答은 世俗的 論理로는 전혀 理解되지 않는 語不成說이다. 특히 德山의 경우가 極限的이다. 德山의 法問이 뜻하는 바는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니 오직 森羅萬象의 本質인 공(空)의 한가운데 서 있으라는 공관중도(空觀中道)를 說한 것이다.


 絶對空의 世界에서는 ‘옳다’ ‘그르다‘는 區分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空이 現象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로 具體化됐을 때는 正答과 誤答, 시(是)와 비(非)의 區分을 收用한다. 그렇치만 禪은 이러한 現象界의 分別을 결코 事物의 本體로는 볼 수 없다고 宣言한다.

 다만 一圓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묻는다 : 潙山和尙께서 요즘 무슨 말씀을 합디까?

 답한다 : (중은 자신이 참문했을 때의 얘기를 해주었다)

 묻는다 : 그쪽 門徒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답한다 : 색(色)을 통해 마음을 밝히고 事物을 가지고 佛法의 道理를 내보인다고들 생각 합니다.

 묻는다 : 그게 아닐 겁니다. 제가 편지 한 장을 드릴 테니 潙山和尙께 전하여 주십시오.

 중이 편지를 가져다 潙山에게 올렸다. 편지에는 一圓相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날일자(日)가 써 있었다.


 이는 상시(常侍)벼슬을 하는 완경초거사가 묻고 潙山靈祐禪師(771-853)의 門下에 있는 한 중이 답한 禪話다. 위산이 편지를 보고는 “천리 밖에 나의 心中을 헤아리는 자가 있을 줄을 어찌 알았겠느냐!” 며 感歎했다. 潙山을 모시고 있던 법제자 仰山慧寂이 “비록 그렇긴 해도 그는 俗人일 뿐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潙山이 仰山에게 묻자 仰山은 종이를 꺼내 一圓相을 하나 그리고는 일(日)자를 쓰더니 곧바로 일어나 발로 쓱쓱 문질러 버렸다. 潙山은 크게 웃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묻는다 : 내게 그 물소뿔 부채를 갖다다오.

 답한다 : 그 부채는 망가졌습니다.

 묻는다 : 망가졌다면 그 망가진 몸체(물소뿔)라도 가져오너라.

 답한다 : (시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다.)


 南泉과 道伴이며 馬祖의 사법제자 중 한 사람인 鹽官 濟安禪師(?-842)와 侍子僧 간의 禪問答이다. 話頭로는 염관서선(鹽官犀扇)이라 한다. 이 話頭가 알려지자 당시에 한가닥 하는 禪杖들인 투자대동, 석경상저, 자복여보, 보복종전선사 등이 각기 侍子가 말문이 막힌 마지막 대답을 내놓았다. 그중 자복 여보가 내놓은 대답은 一圓相 안에 소 우(牛)자를 쓴 것이었다.


 왕경초의 一圓相 안의 날 일(日)자와 자복여보화상의 一圓相 안의 소 우(牛)자는 宇宙와 合一을 이룬 絶對 自由人이 圓融無涯한 삶을 展開하는 가운데 세월(日)이 흘러가고, 더위를 식혀줄 부채가 따로 없어도 시원함을 느끼는 한도인(閑道人)을 象徵한다.  仰山이 날일자를 밟아 지워버린 것은 圓相 안에서 사는 사람은 歲月의 흐름조차 따질 필요가 없다는 절대공(絶對空)을 뜻한다.(*절학무위한도인부제망념불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