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측천무후도 감탄한 고승
-숭산회선사(회선사. 숭산혜안선사)
中國 歷史上 唯一한 女皇帝이며 한때 비구니이기도 했던 測天武后(624-705)가 숭산혜안선사를 宮內로 招致했다. 혜안(일명 노안, 대안, 도안, 582-709)은 入內하자마자 沐浴湯으로 案內되었다. 혜안의 沐浴은 단순한 沐浴이 아니라 부구식(浮구識 : 生死란 물거품처럼 덧없음)을 試驗당하는 다소 짓궂은 것이었다. 測天武后는 혜안선사로 하여금 아름다운 宮女들이 알몸으로 탕 주위에 빙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벌거벗고 沐浴을 하게 했다. 혜안은 泰然하게 물에 들어가 沐浴을 했다. 性的衝動을 느끼는 氣色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 光景을 엿보던 武后는 “물에 들어가는 위대한 사람을 본다[入水見長人]”며 거듭 感歎했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 [諸惡莫作 衆善奉行]
8만4천 법문이라는 張皇한 敎說도 결국 최종 歸着点은 조과선사가 말한 ‘제악막작 중선봉행’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원래 禪佛敎는 그 胎動 背景부터가 實踐佛敎이고, 生活佛敎이고, 民衆佛敎이다. 禪은 實踐이 따르지 않는 지해(知解)의 敎理 理解나 佛敎 知識을 단호히 排擊한다. 人間의 勇敢性은 무외(無畏)로부터 생겨난다. 두려움이 없으려면 무사(無事)해야 한다. ‘나’라는 虛像의 存在에게 발목이 묶여 慾心을 내고 사사로운 利害에 執着하면 결코 無畏의 境地에 이를 수 없다. 禪宗의 심요(心要:마음의 핵심)란 이처럼 簡單 明瞭하다.
백거이가 皇帝의 부름을 받고 皇宮에 들어가기에 앞서 경조 흥선사의 유관선사를 참문했다.
묻는다 : 禪師라 하시면서 어찌 敎宗의 說法을 하십니까?
답한다 : 보리가 몸에 덮이면 戒律이요, 입으로 말하면 說法이요, 마음으로 행하면 參禪이지, 作用함에는 각각 셋이지만 그 이치는 하나다. 비유하건대 강(江), 회(淮), 한(漢)이 곳에 따라 그 강 이름은 다르나 물의 性品은 같은 것처럼 戒律이 곧 法이요, 法이 參禪과 다르지 않다. 그러하거늘 어찌 虛妄한 分別을 일으키는가.
묻는다 : 分別이 없다면 어떻게 마음을 닦습니까?
답한다 : 마음은 본래 損傷된 바가 없거늘 수리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 더러움과 깨끗함 모두를 생각하지 말라.
묻는다 : 더러움이야 생각하지 않아야겠지만, 깨끗함이야 어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답한다 : 사람의 눈동자에는 한 물건도 머무를 수 없나니, 금 부스러기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사람의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는 것과 같다.
묻는다 : 닦지도 않고 생각도 없으면 범부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답한다 : 범부는 무명(無明)이요, 이승은 執着이니 두 가지 병을 떠나야 참 修行이 된다. 참 修行이란 부지런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아야 하나니, 부지런하면 執着이 되고 잊으면 無明에 빠진다. 이것이 마음의 요긴함이다.(*무기와 망념, 즉 안팎으로 집착하지 말 것. 헤아리지 말라, 안다고 하면 망념이요, 모른다고 하면 무기이니라.)
홍선유관선사는 이 問答을 통해 백거이에게 ‘道란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다’라는 도불용수론(道不用修論)과 禪思想의 核心인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의 포기를 가르치고 있다.
馬祖 이후의 祖師禪은 修行 不必要論을 제기, 禪宗에 또 하나의 革命을 일으켰다. 흥선은 馬祖의 ‘道不用修論’을 繼承, 그의 忠實한 제자다운 面貌를 보여 주고 있다. 道란 마음의 본래 淸靜性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南嶽懷讓-馬祖道一로 이어지는 祖師禪의 ‘道不用修論‘ 이다. 마음의 本質은 本來가 깨끗하고, 智慧롭고, 善하다. 오직 이러한 마음의 淸靜性만 더럽히지 않으면 마음의 作用을 따라 行하는 모든 行爲가 道이고, 佛法의 체현(體現)이다. 이른바 ‘佛性의 全體作用說’이다.
問題는 범(凡)과 성(聖), 貴와 淺 등을 구분하는 分別心으로 世上일을 取捨選擇하는 데 있다. 禪은 모든 것이 根本으로 돌아가면 한 뿌리라는 ‘萬物一切思想’에 立脚, 生死, 善惡, 長短 등의 區分을 虛妄한 妄想으로 置簿해 버린다. 分別로부터 생겨나는 差別心과 取捨選擇을 떨어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의 뿌리는 하나, 즉 공(空)이라는 萬物一切의 ‘絶對平等觀’에 서야만 한다. 깨달은 자는 絶對 平等이 現像係(俗世)에서 두두만물의 差別像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꺼이 收用하지만 그 根源을 알고 있기 때문에 執着하질 않는다.
趙州종심선사는 “至極한 道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取捨選擇을 혐오할 뿐이다”라고 설파하였다. 分別心을 일으켜 생(生)만을 選擇, 그에 執着하면 無明이고 괴로운 삶이 된다는 것이다. 趙州 종심선사에게 한 관리가 물었다.
관리 : 단하화상이 목불을 태웠는데 어째서 主旨僧의 눈썹이 빠졌습니까?
조주 : 귀택에서는 누가 날것을 삶아 요리합니까?
관리 : 머슴입니다.
조주 : 그것 참 저 단하화상 같은 좋은 솜씨를 가졌군요.
趙州의 對答은 단하가 목불을 태워 추위를 피한 것이나 머슴이 日常的으로 날 것을 익혀 요리하는 것이나 똑같은 平常心의 발로라는 것이다. 禪家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은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고, 추우면 화롯불 쬐고, 더우면 부채질 한다는 것이다. 平常心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老子는 “어둠이 가장 짙을 때 靈的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玄之又玄 衆妙之門]고 했다. 外的인 불빛이 모두 꺼지면 內的인 불빛이 찬란한 光彩를 나타낸다. 이것이 내면자증(內面自證)의 禪的 깨달음이 갖는 光彩이다.
혜충국사는 山河大地와 草木도 說法을 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話頭를 最初로 說했고 97종(일설엔 127종)의 원상(圓相)을 開發하기도 했다. 圓相은 그의 弟子 탐원응진을 거쳐 위앙종 開山祖인 위산과 앙산禪師에게 전해졌다. 이어 앙산의 법사인 신라 오관산 순지(順之)선사가 이를 전승, 원(○)을 이용해 佛法을 說明하는 圓相活用法을 꽃피웠다.
禪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哲學과 宗敎, 人生이 어우러져 빚어낸 우뚝 솟은 人類思想史의 한 봉우리다. 1천5백 년 동안 韓.中.日 3국을 무대로 꽃피워온 禪思想이 이제 21세기 以後의 새로운 人類文明을 이끌 思想的 주춧돌로, 代案 思想으로 떠오르면서 폭넓게 照明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禪은 최근 世界的 關心을 새삼 모으면서 精神分析學, 스포츠, 經營學, 심성(心性)산업 등 각 분야에서 널리 實用化 되고 있다.
宗敎的으로는 禪佛敎 또는 선종(禪宗), 思想的으로는 禪思想, 學問的으로는 禪學이라 불리는 禪은 다른 思想이나 宗敎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特徵的인 革命性, 實踐性, 日常性, 直觀性, 單純性 등을 갖고 있다.
기존 思惟體系를 단연코 거부하는 동아시아의 조사선(祖師禪)의 革命性은 오늘의 世界的인 ‘改革 붐’에 필요한 破格的인 發想의 轉換을 제공할 수 있는 보고이기도 하다. 中國 禪佛敎는 이미 1천 5백여 년 전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흐르고(橋流水不流)’ ‘산이 물 위로 걸어간다(東山水上行)’ 는 엄청난 發想의 轉換을 드러내 보인바 있다. 말하자면 人間의 旣存 思惟體系를 뒤엎는 일대의 意識 革命이다. 禪은 또 不滿足스러운 現實을 날마다 幸福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方法을 가르켜준다. 禪이 이 地上에서 極樂의 살림을 꾸려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秘法은 簡單 明瞭하다. 바로 ‘마음 씀씀이’다. 禪은 한마디로 마음 공부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이 地上은 極樂이 될 수도, 고해(苦海)가 될 수도 있다.
佛敎의 ‘宗敎革命’ 이었던 中國 禪佛敎는 그 淵源을 印度에 두지만 印度 佛敎와는 전혀 다른 東亞細亞적 佛敎이며 民衆佛敎이고, 生活佛敎이다. 오늘의 韓國佛敎를 대표하는 曹溪宗도 自他가 公認하는 禪宗이다.
다가오는 21世紀 以後의 千年은 文化의 世紀, 哲學의 世紀, 宗敎의 世紀, 精神文明의 르네상스 時代가 되리라고 많은 未來學者들과 世界 知性들은 豫測하고 있다. 西歐 知性들이 現代 物質文明에 死刑宣告를 내린 지는 이미 오래다. 따라서 近.現代 物質文明을 떠받쳐온 基督敎 思想과 二分法적인 合理主義 哲學도 같은 運命일 수밖에 없다.
現代文明의 限界点을 克明하게 드러낸 代表的 事例의 하나가 環境汚染이다. 變化와 改革, 새로운 文明의 展開에는 반드시 그 밑받침이 되는 ‘思想’이 있어야 한다. 이는 누구도 否認할 수 없는 歷史의 法則이다. 時代의 흐름은 物質文明에 대한 反動으로서도 精神文明의 復興이 必然的인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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