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을 잘라 바치고 법을 구한다.(斷臂求法)
- 소림사 입설정(立雪亭). 初祖達磨와 2祖慧加
묻는다 : 제 마음이 平安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제발 제 마음을 安定시켜 주십시요
답한다 : 어디 자네 마음이란 걸 내놓아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鎭靜시켜줌세.
묻는다 : (한참 동안의 沈黙이 흐른 뒤) 오랫동안 마음이란 걸 찾아보았으나 發見할 수가 없었습니다.
답한다 : 내 이미 자네 마음에 平安를 주었네.
初祖 達磨와 2조 慧加의 禪問答이다. 이 問答을 話頭로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한다. ‘정문입설도(程門立雪圖)’는 宋나라 이후 東洋畵의 畵題로 많은 畵家들이 즐겨 그려오는 그림이다. 北宋의 거유(巨儒) 정이천(程伊川, 통칭 정자)과 그의 제자에 얽힌 ‘정문입설(程門立雪)’이라는 古事가 있다.
達磨와 慧加의 禪問答인 ‘安心法問’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자
우선 이 話頭는 禪宗史에 엄청난 意味를 갖는 새로운 두 가지 기원(紀元)을 이룩했다. 하나는 스승이 제자를 認可하고 法을 咐囑해 法脈을 이어가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등(傳燈)이라는 傳統이다. 達磨가 慧加에게 法을 부촉한 것이 最初의 ‘傳燈’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實體的 存在를 否定함으로써 禪學의 典型的 ‘不定法(일명 卽非의 論理)’을 誕生시킨 母體가 되었다. 또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安心法問의 심요(心要)는 훗날 마조 때부터 本格化한 ‘심지법문(心地法門)’의 母體가 되었다. 慧加가 한사코 찾아내 安定시키려 한 마음은 本來의 참된 마음이 아니고 思惟라는 造作에 의해 생겨난 이른바 妄想, 妄念이다.
眞心은 恒常 平和롭다. 따라서 眞心에는 不安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眞心은 思惟의 主體다. 그러나 그 主體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고, 또 그것에 관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면 眞心이라는 主體는 이미 對象化되어 버리고 만다. 이처럼 對象的 客體가 되어버린 마음은 眞心이 아니다. 達磨가 말하고자 하는 心要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가 ‘벌써 鎭靜되었다’고 말한 對象은 慧加가 그러한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眞心’을 가리킨다. 그것은 언제나 평화롭기 때문에 진정시키고 말고 할 것이 없이 恒常 古謠하고 安定되어 있다. 말하자면 眞心에는 ‘鎭靜’이라든가 ‘安心’이라든가 하는 것이 필요없다. 그 본질이 ‘鎭靜’이고 ‘安心’이기 때문이다.
達磨는 慧加가 잘못 對象化하고 있는 마음의 本體를 깨우쳐주기 위해 그 마음이란 것을 내보이라고 요구했다. 達磨는 慧加가 말하는 마음이 한낱 幻想에 지니지 않는 對象化된 마음이라는 것을 스스로 發見하도록 하기 위해 그 같은 要求를 한 것이다. 慧加는 ‘마음을 끝내 發見할 수 없다’고 不定法을 통해 告白한다. 이 不定法은 ‘예’와 ‘아니오’를 구분하는 單純 不定이 아니다. ‘萬物은 한 뿌리[萬物一體]’라는 그것과 不定의 分別이 없는 ’絶對肯定‘을 얻기 위한 通路이다. 論理學에서도 不定의 不定은 肯定이 된다.
마음이란 없다. 그러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나 實在하는 絶對肯定性을 갖게 된다. 이렇게 絶對肯定에 到達하기 위한 不定法을 日本의 世界的인 禪學者 스즈키 다이세스는 ‘즉비의 논리(卽非論理)’라는 이름을 붙여 하나의 禪學用語로 定立했다. 卽非란 金剛經에 나오는 “반야는 반야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다[第一破羅密 卽非第一波羅密 是第一波羅密]”라는 論法을 말한다.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는 A다라는 논리다. 卽刻的인 無限否定을 통해 到達하는 絶對肯定이다. 무(無)이기 때문에 有라는 老莊의 存在論도 같은 脈絡이다.
達磨의 末後句 “네 마음을 찾을 수 없다면 (네 妄念의 마음이란 것이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네 마음은 이미 平安해졌다”는 엉뚱한 듯한 이 한마디는 慧加의 潛在해 있던 直觀的 知覺을 일깨웠다. 慧加는 그 直觀을 통해 ‘眞心’이라는 實體를 發見, 깨우침에 到達한다. 眞心이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무심(無心)’ 이다. 善惡, 凡聖, 高低, 長短을 二分法的으로 區分하는 固定化된 觀念的 思惟世界를 떠나서 一切의 分別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無心이다.
그냥 단순히 分別心이 없는 것이 아니다. 分別에 立脚해서 分別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分別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善惡의 區分과 執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같은 ‘無心’에는 이미 透徹(透彻)한 ‘지성(知性)’이 潛在(潜在)해 있다는 前提를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마음의 본바탕은 오직 깨끗하고, 正義롭고, 平和로울 뿐이다. 이러한 마음 바탕을 維持하는데는 徹底(彻底)한 知性的 認識과 判斷이 늘 밑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禪은 마음을 흔히 虛空에 比喩(比喻)한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包容하는 虚空의 本質이 곧 마음의 本性이며 特徵이라는 것이다.
慧加가 達摩에게 ‘마음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한 告白은 깨우침의 외마디소리다. 慧加의 ‘불가득(不可得)’이라는 對答은 現像界에서 物件을 손에 쥐거나 찾는 次元이 아니다. 마음은 흔히 우리가 日常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쇼핑을 하는 것과 같은 可視的, 形相的 發見이 不可能하다. 따라서 慧加의 對答은 ‘不可得한 것’ 그 自體가 마음이라는 깨달음의 表現이다. 達摩(达磨)는 그의 對答이 現象界의 ‘不可得’ 次元이었다면 絶對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즉 ‘네 마음은 이미 平安해졌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達摩(达磨)의 ‘安心法問’은 4조 道信에게까지 이어진다. 2조 慧加와 3조 僧瓚의 問答, 傳燈(传灯)도 똑같은 구도다.
묻는다 : 저의 罪를 깨끗이 씻어 주십시오.
답한다 : 懺悔(忏悔)할 죄를 어디 한번 내놓아보아라.
묻는다 : 죄를 찾아 보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답한다 : 자, 이제 자네의 죄를 사(赦)했네.
40이 넘은 僧瓚이 慧加를 찾아가 거량한 禪問答이다. 僧瓚祖師는 당시 나병환자였다. 자신의 병이 罪業 때문이라고 믿는 僧瓚은 그 罪를 참회를 통해 용서받음으로서 병을 고치고자 했다. 慧加와 僧瓚의 問答에서는 達磨와 慧加의 問答에 나오는 ‘마음’이 ‘罪’로 바뀌었을 뿐이다.
3조 僧瓚과 4조 道信의 問答도 역시 같은 構造이다.
묻는다 : 慈悲(慈悲)를 베푸시어 束縛(束缚)으로부터 벗어나 解脫(解脱)에 이르는 法問을 주십시오.
답한다 : 누가 너를 束縛했느냐?
묻는다 : 아무도 저를 結縛하지 않았습니다.
답한다 : 그렇다면 무슨 解脫을 구하는가. 束縛이 없다면 이미 解脫한 것이다.
僧瓚 祖師(祖师)와 道信 祖師의 問答에서는 ‘마음’ ‘罪’가 ‘束縛’으로 바뀌었다. 마음이 온갖 생각으로 束縛되어 있으면 凡夫이고 煩惱妄想의 삶이다. 煩惱妄想이라는 마음의 拘束을 풀면 그게 바로 解脫이다. 初祖達磨에서부터 4조 道信에 이르는 佛法의 要諦는 한결같이 ‘심법(心法)’을 전하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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