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존재는 그림자와 같다.
-소림사 초조암(初祖庵) 達磨大師
묻는다 : 男子 그대로가 男子가 아니고, 女子 그대로가 女子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한다 : 이법(理法)의 立場에서 보면 男女의 性別은 전혀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性을 나누어놓았을 뿐 男女의 모습에 대한 구별을 超越했기 때문이다. 색정(色情)에 眩惑된 사람은 이 原理를 모르고 함부로 男女의 모습을 妄想하지만 그것은 眩惑속의 男女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아무런 內容도 없다 ‘諸法無行經’에는 이를 가리켜 “一切存在가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다”라고 했다.
達磨와 한 제자의 問答이다. 達磨가 說破하고 있는 內容의 核心은 男女 分別이란 理法대로 相對를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환영(幻影)이며 妄想이라는 것이다. 肉體的 構造와 情緖등의 ‘現象界’로는 분명히 男子와 女子의 區別이 있다. 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世俗 現實이다. 그래서 達磨도 男女의 分別을 不定하는 前提로 ‘이법(理法)’을 明示했다. 理法이란 現象界 뒤에 숨어 있는 本體界를 꿰뚫어보는 智慧다. ‘그림자’에 불과한 森羅萬象의 現象界를 만들어내는 本體界의 本性은 공(空), 무상(無常), 무작(無作), 무생(無生), 무소유(無所有)다.
本體 自體가 空이라면 本體의 그림자인 現象界야 더 말해 무었하겠는가. 空의 空이라고나 할까. 이것이 意味하는 바는 修行者의 現實 生活은 이같은 空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現實 生活속의 修行者 像은 이처럼 모든 分別心을 뛰어넘은 絶對空에 位置해야 한다.
가령 꿈속에서 色慾을 느껴 男女 성애(性愛)의 즐거움을 만끽하더라도 거기에 실제로 女性은 없다. 지계(持戒)와 파계(破戒)라는 것도 꿈속의 일과 같다. 실제로 持戒도 破戒도 없어야 道人이요 解脫이다. 이것이 達磨가 마지막으로 說破한 “一切 存在가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知諸法如幻化]”이다.
禪思想은 여기서부터 ‘만물일여(萬物一如)‘ ’만물일체(萬物一體)’思想을 說破했다. 萬物一如 思想은 達磨나 佛敎의 것이기 이전에 이미 中國固有의 傳統思想이었으며 老子와 莊者도 거듭 强調한 바 있다. 萬物은 뿌리로 돌아가면 하나이다. 男과 女, 生과 死, 持戒와 破戒도 根源的 本質에서는 하나이다. 그 ‘하나’라는 本體는 공(空). 영(零)이다.
達磨가 引用한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은 ‘貪慾이 그대로 涅槃’이라고 說破하고 있다. 煩惱와 보리, 貪慾과 涅槃도 根源으로 돌아가면 하나라는 이야기다. “유마경”이라는 大乘經典도 똑같은 論理를 展開했다.
이 問答을 話頭로는 ‘즉남비남(卽男非男)’ 이라고도 한다. 간단한 問答 같지만 그 속에는 후일 禪思想의 重要한 기둥을 이루는 공관사상(空觀思想), 萬物一切思想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직 問答의 形式은 敎學的 說法의 家風이며 經典에 依支해 깨우침을 얻으려는 ‘자교오종(藉敎悟宗)’의 段階다.
達磨의 禪思想은 1908년 돈황에서 발굴된 “약변대승입도사행론(略辨大乘入道四行論)”에 잘 要約되어 있다. 통칭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으로 불리는 이 책은 그의 제자 담림이 서(序)를 붙여 記述한 것으로 達磨의 說法을 담은 가장 오래된 唯一한 文獻이다. 통상 “達磨語錄” 이라고도 한다.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이외의 記錄들은 後代의 創作이라고 보아야 한다.
達磨 禪思想의 核心인 ‘二入四行論’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眞理에 이르는 方法에는 原理的 方法인 이입(理入)과 實踐的 方法인 행입(行入) 두 가지가 있다. 經典에 依據해 佛敎 大義를 把握하는 것[藉敎悟宗]이 理入이다. 行入의 네 가지 實踐德目은 보원행(報怨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이다.
이입(理入)의 實踐은 모든 衆生이 똑같이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涅槃經”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에 바탕한 佛性平等論을 確信, 面壁坐禪을 통해 作爲를 없애고 寂靜에 드는 解脫을 成就하는 것이다.
行入의 ‘報怨行’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肉體的 苦痛이나 精神的 苦惱가 모두 前生의 죄업[宿殃] 때문이라고 믿고 결코 怨望하거나 辨明하지 않고 달게 甘受하는 것이다. 經典은 ‘괴로움을 당해도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의 意識은 깊이 根本에 통해 있으니까’ 라고 說破한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서 過去에 지은 業에서 생겨난 怨望에 따르는 苦痛을 甘受하면 怨望을 契機로 해서 도(道)에 들어설 수 있다. 報怨行은 過去에 지은 業이라는 빚을 갚는다는 論理構造다. 그래서 禪學에서는 이를 환채사상(還債思想) 또는 상채사상(償債思想)이라고도 한다.
敎學的으로는 因果應報說, 業報思想이다. 現世에 겪는 苦痛을 前生의 숙채(宿債 ; 묵은 빚)를 갚는 일로 생각하라는 이야기다. 前生은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 아득한 공겁(空劫)의 歲月, 祖上 代代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禪宗 제2대 慧加祖師가 산적들에게 왼팔을 잘리고도 그 苦痛을 달게 甘受하며 이겨낸 것은 이러한 還債思想을 實踐한 하나의 事例이다.
둘째 實踐行인 ‘隨緣行’은 變化無雙한 삶의 條件들과 形便에 適應하는 規範이다. 쉽게 말해 現實 收用의 原理이며 世俗 衆生과 더불어 살아가며 삶을 肯定하는 思想的 밑받침이요 知慧다. 敎學的으로 說明하면 諸法無我의 緣起論이다. 어떤한 權力이나 名譽를 얻더라도 現在 그것을 갖고 있으나 緣分이 다하면 다시 無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갖고 조금도 기뻐하거나, 날 뛰지 말아야 한다. 世俗의 成功과 失敗는 모두 因緣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 자체에는 아무런 증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沈黙하는 가운데 眞理에 到達하는 것이 곧 隨緣行이다.
隨緣行은 ‘무심(無心)’의 實踐 倫理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隨緣行에 맡기면 無心이 靜態的인 ‘無意識’에 머물지 않고 慾心 때문에 煩惱를 낳는 行動을 자제하는 積極的인 구실을 한다. 여기서 無心은 비로소 動的인 知慧와 哲學으로 人間行爲의 倫理性과 道德性을 高揚시키는 엔진 役割을 하게 된다.
셋째, ‘無所求行’은 一切 存在는 實體가 없는 空이라 보고 모든 物質的 慾心을 버리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無所有 思想이다. 經典에도 ‘무엇을 바라고 救한다는 것은 모두가 괴로울 뿐이며 오직 아무 것도 救하는 바가 없는 것이 바른 佛法의, 眞理의 實踐임을 强調한 것이 바로 無所求行이다.
넷째, ‘稱法行’은 萬物의 本質은 원래 淸淸하다는 原理를 깨닫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大乘 菩薩行을 행하는 것이다. 萬物의 淸淨性을 있는 그대로의 存在 또는 여여(如如)라 한다. 如如의 法을 살아가는 實踐에는 自己, 相對, 財物이라는 세 가지가 본디부터 空이라는 공관사상(空觀思想)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菩薩行의 6바라밀 實踐은 行하는 바가 없이 行하는 무주(無住), 무상(無相)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達磨의 ‘二入四行論’은 敎學的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러한 初期 습선기(習禪期) 禪宗의 家風은 4조 도신에 이르러서야 頓悟 禪宗의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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