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제가 금우선사를 찾아갔다(臨濟到金牛)
臨濟가 어느날 金牛禪師를 찾아갔다. 金牛는 臨濟가 오는 것을 보고는 拄杖子를 가로 뉘어 막고서 문에 걸터앉았다. 臨濟는 손으로 拄杖子를 세 번 두드리고 난 후 방으로 들어가 上席에 앉았다. 金牛가 방으로 들어와 臨濟에게 말했다.
“주인과 손님의 만남에는 禮儀가 있는 법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無禮한가”
臨濟가 말하였다
“老和尙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金牛가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려 하자 臨濟가 그대로 후려쳤다. 金牛가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臨濟는 다시 한 번 더 후려쳤다. 金牛가 말하였다.
“오늘은 내게 이득이 없구나!”
훗날 潙山靈祐禪師가 仰山慧寂에게 물었다.
“이 두 큰스님 중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
仰山이 말했다.
“이긴 자는 철저히 이겼고, 진 자는 철저하게 졌습니다.”
진주 金牛禪師와 臨濟가 거량한 ‘臨濟到金牛’라는 話頭내용이다.
禪은 全體性, 自發性, 無條件性을 높은 價値로 認定하고 追求한다. 仰山의 對答이 외치는 結論은 간단하다. 이기고 진 것이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 다 禪이 높은 價値로 認定하는 無條件性(勝敗의 執着을 버림)과 全體性을 指向하는 沒入의 境地에 差異가 없다는 것이다. 結局은 無勝負다. 世俗이 말하는 形式的인 勝敗란 禪에선 一考의 價値도 없다. 禪은 삶을, 人生을 크게 苦悶하지 않는다. 하나의 旅程으로 볼 뿐이다.
금우화상의 밥통(金牛飯桶)
禪은 밥먹는 것을 人間이 自然의 攝理에 따르는 가장 確實한 眞理의 하나로 본다. 6조 慧能 以後의 禪宗은 平常의 日常事를 모두 佛法의 作用으로 認定, 世間을 떠난 깨달음을 排擊한다. 慧能祖師의 ‘무상송(無相頌)’은 이렇게 읊조린다.
佛法은 本來가 世間속에 있나니 世間을 떠나지 않고 깨달아야한다.(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世間을 떠나 보리를 찾는 것은 마치 토끼에서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離世채 菩이 시尙如求兎角)
성스러운 것이란 없다.(廓然無聖)
소림사 달마동(達磨洞) 達磨大師
묻는다 : 내가 卽位한 이래 많은 절을 짓고, 많은 經典을 寫經하고, 수많은 僧侶에게 供養을 해왔소. 이 모든 것들이 얼마만큼의 功德이 되겠소?
답한다 : 전혀 功德이 되지 않습니다.(無功德) 이러한 것들은 인천(人天) 속에서의 조그만 行爲이고 과보(果報)가 겨우 새어나오는 옹달샘에 불과합니다. 형체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그것들은 그냥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림자란 存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實在)하는 게 아니지요.
묻는다 : 그러면 진정한 功德이란 어떤 거요?
답한다 : 진정한 功德은 淸淨한 智慧를 把握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智慧의 本質은 말이 없고 공적(空寂)한 것입니다. 이런 功德은 俗世의 方法으로는 追求할 수 없습니다.
묻는다 :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 중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답한다 : 아무 성스러울 것도 없는[廓然無聖] 커다란 공(空)입니다.
묻는다 : 그러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요?
답한다 : 모르겠습니다.[不識]
信心이 敦篤해 佛心天子라는 평을 듣던 양나라 무제(464-549)와 동아시아 仙佛敎의 創始者인 초조(初祖) 보리달마의 問答이다 梁武帝가 묻고 達磨가 대답했다. 이 禪問答을 話頭로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 한다. 우선 이 문답은 歷史的 실제성보다는 동아시아 禪思想의 人格化를 위해 後代에 만들어진 傳說的 性格을 갖고 있다는 점을 有意할 必要가 있다. 歷史와 宗敎는 언제나 나름의 正統性을 갖기 위해 神話와 傳說을 꾸며낸다. 실제로 神話와 傳說이 없는 歷史나 宗敎는 無味乾燥하고 재미도 없다.
達磨는 서천(西天:인도불교) 28대 祖師고 동토(東土:중국선불교 )初代 祖師다. 達磨가 무제의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 밝힌 禪思想은 無功德, 廓然無聖, 不識으로 요약할 수 있다. 無功德은 흔히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어떠한 布施나 功德을 했다 하더라도 執着하거나 내세우지 말고 깨끗이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상(相)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執着하는 것은 올바른 佛法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涅槃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고[不住涅槃], 깨달음을 얻었다는 생각조차도 버리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야 禪思想의 본령인 절대공(絶對空)에 到達할 수 있다. 깨달음, 涅槃, 解脫까지도 완전히 버리는 無所有만이 진정한 解脫이다.
내가 善行을 했거니 하는 생각을 가지면 유루복(有漏福)이고, 善行을 하고서도 이를 마음에 남겨두지 않으면 무루복(無常性)의 功德인 것이다. 無漏福이란 煩惱를 모두 떨쳐버리고 涅槃으로 나아가는 福, 즉 성도(聖道), 출세간도(出世間道)를 말한다. 이러한 福은 계, 정, 혜라는 무루인(無漏因)을 통한 깨달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有漏福은 煩惱를 더욱 增加시키는 福을 말한다.
다음은 ‘확연무성(廓然無聖)’ 이다. 佛法의 核心은 크게 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重要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게 마음을 비우고 어떤 것에도 執着하지 않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범(凡)과 성(聖), 貴賤을 구분하는 分別心을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하얀 캔버스로 남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 人生이 그렇다. 지금 以後의 삶을 위하여는 마음을 비워놓아야 또다른 내일의 삶이 자리할 수 있다. 이것이 ‘廓然無聖’이다.
양무제는 佛法의 核心이 무엇이냐는 質問을 통해 “우리 모두가 善惡의 分別 속에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라고 世俗 現實을 드러내 보인다. 이에 대한 達摩의 대답 ‘廓然無聖’은 善과 惡을 區分하는 二分法的인 分別心을 버리고 저 善惡이 한 뿌리인 根源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쳐준 한 소식인 것이다.
善惡의 分別을 뛰어넘었다는 達摩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다그치는 양무제의 마지막 물음에는 아직도 俗氣가 철철 흘러 넘친다. 達摩는 한마디로 모른다고 내뱉는다. 그 超越의 眞理, 佛法의 道理를 말로는 說明할 수 없다는 宣言이다. 老子는 일찍이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得意而忘言]’라고 했다. ‘無功德’ ‘廓然無聖’을 통해 그처럼 친절히 가르쳐주었건만 양 무제는 아직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俗人으로, 凡夫로 머물러 있다. 이쯤이면 화가 나서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佛法 또는 眞理란 모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 廣域에 속하는 宇宙의 攝理는 人間의 意識으론 理解할 수 없다. 그저 감지(感知)할 뿐이다. 俗談에 ‘모르는 것이 약이다’ 란 말이 있다. 佛法이나 廣大無邊한 眞理를 理論化하고 槪念化하는 꾀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妄想’이요 ‘煩惱’가 된다.
인도의 선자(禪子) 라즈니쉬(1931-1990)는 達磨의 마지막 대답 ‘모른다[不識]’을 人類 歷史上 가장 偉大한 對答이라고 激讚했다. ‘불식(不識)’은 言語道斷의 깨우침에 의해서만 可能한 眞理當體의 體得을 强調하는 禪家의 慣用語다. 不識은 現在의 어떤 것과도 絶對 交涉될 수 없는 眞理에 대한 認識이다.
馬祖禪師의 제자 大珠慧海는 저서 ‘頓悟入道要文’에서 “나는 禪을 잘 모르며 내게는 줄 가르침도 없다”고 했다. 實存 哲學者 하이데거는 “광역(廣域)이나 懷域(회역 : 眞如, 自性, 佛法, 佛性)은 우리가 原則的으로 理解할 수 없다”고 喝破했다.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沈黙해야 한다”고 說破, 眞如當體에 대한 言說的 說明의 限界性을 밝혔다.
達磨는 양무제와 對話를 해보고 나서 도저히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못 된다고 確信했다. 壁을 바라보는 벽관(壁觀)은 흔히 말하는 묵조선(黙照禪)이다. 壁이 갖는 象徵性은 앞이 꽉 막혀 妄想이 더이상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壁觀은 沈黙이다. 沈黙은 金이다. 壁을 바라봄으로서 一切 煩惱의 限界를 깨닫고 마음을 비워 本來의 마음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黙照禪이요, 壁關이다.
達磨가 實存 人物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南印度의 王子였는지는 確實치가 않다. 어쨌던 그는 마하가섭으로부터 시작된 印度善의 28대 祖師였고 中國에 온 最初의 印度 禪僧이었다. 그가 中國에 온 것은 서기 520년에서 525년 사이로 推定된다.
元來 坐禪의 ‘좌(坐)’는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念不起], 외적인 善惡 區別의 염(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禪)’은 自己 本性을 깨닫는 것, 내적인 自性의 省察을 뜻한다. 그러니까 坐禪이란 일어난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종의 對症療法이다. 흩어진 마음을 制御하는 기술이고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病에 대한 投藥을 하는 것이 곧 坐禪이다.
이것이 바로 北宗禪을 批判, 南宗禪 天下를 이룩한 1등 功臣 荷澤神會禪師(670-762)가 그의 有名한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리達磨南宗定是非論)’에서 밝힌 坐禪의 정의이다. 達磨의 壁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壁은 見物生心으로부터 일어나는 객진(客塵)이라는 煩惱와 人爲的인 作爲性을 가리키는 위망(僞妄)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을 象徵한다. 外部로부터 불어닥치는 風塵을 막아주는 家屋의 壁도 이같은 遮斷의 역할을 한다.
達磨의 壁觀은 모든 煩惱와 妄想이 들어갈 수 없는 內面的인 마음의 緊張과 統一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聖과 俗, 나와 너라는 一切의 相對的 分別과 對立이 없어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한 本來마음의 世界가 펼쳐진다. 內外의 모든 因緣을 끊고 內心에 근심이 없어져 마음이 障壁과 같이 本來 그대로의 平溫한 安心狀態가 바로 壁觀이 指向하는 目標다. 한마디로 壁觀이란 安心이다. 禪學은 이러한 흔들임이 없는 不道의 마음을 본래심(本來心),또는 心不起, 염불기(念不起)라 한다. 壁觀은 安心 狀態에 들어가는 實踐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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