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선불교(禪佛敎)

선불교 6. 빈 터의 흰소(露地白牛)

slowdream 2007. 8. 10. 17:32
 

* 빈 터의 흰소(露地白牛)


 묻는다 : 어떤 것이 빈터의 흰 소인가?(如何是露地白牛)

 답한다 : 음 ~ 매, 음 ~ 매

 묻는다 : 자네 벙어리인가?

 답한다 : 자네는 어떠한가?

 묻는다 : 이 짐승아!


 臨濟義玄이 묻고 행산감홍(杏山鑒洪)이 답한 禪問答이다. 語錄에 나오는 白牛, 또는 수고우(水牯牛)등의 소는 “본바탕의 마음(心地)”을 象徵한다. 빈터(露地)는 生死의 火宅을 벗어난 解脫, 白牛는 불도(佛道)를 象徵한다. 그러나 禪에서는 心地가 淸淨한 진인(眞人). 심우(心牛)의 意味를 갖는다. 원래 禪은 마음을 動物의 遺産으로 본다. 思量分別心과 갖은 생각을 일으키는 그 마음을 넘어서지 못하면 眞情한 人間이 아니다.

 馬祖가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했다가 완전히 깨우친 사람은 깨우쳤다는 생각까지도 버리는 비심비불(非心非佛) 이라고 한 것이 바로 마음을 버리는, 마음을 비우는 無心의 境地를 두고 한 말이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非心非佛의 境界라야 動物과 다른 깨우친 사람인 것이다. 無心이 되어야만 過去 動物의 遺産을 超越하고 宇宙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 놓은 ‘마음을 비운 사람‘ 이 된다. 臨濟가 행산에게 ‘이 짐승아!’라고 한 것은 非難이라기보다는 소 울음소리를 낸 건 動物의 마음을 쓰고 있는데 不過하다는 指摘이다.


 禪은 格式이나 慣習, 慣行과 같은 社會的 制約에 얽매이지 않는다. 禪에는 판에 박힌 形式도, 만트라(주문)도 없다. 禪은 犧牲을 强要하지도 않고 반드시 遵守해야 할 巨創한 原則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오직 스스로 길을 發見하는 데 도움이 될 方便을 提供할 뿐이다. 말하자면 1백 퍼센트 自由를 보장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다른 어느 宗敎보다도 깨우친 사람을 많이 排出했다. 逆說的으로 禪의 成功秘訣은 完全한 自由를 보장, 괴짜적인 創造性을 開發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自我發見’이 禪의 核心이다. 過去의 動物的 遺産을 淸算하고 眞情한 人間이 되는 것은 進化論的 發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創造’이다.


 禪家에서는 한 잔의 차(茶)에 無我의 法을 구족(具足)하고 향 한 개비 타는 속에다 全宇宙를 불사른다. 그리고 世上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라는 겨자씨 한 알에다 크나큰 수미산을 집어넣는다. 神奇하거나 異常한 妖術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 한 자락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차 한 잔, 향 한 개비, 겨자씨 한 알의 役割이 달라진다.


 趙州 禪師의 ‘露地白牛’ 를 보자

묻는다 : 빈 터의 흰 소란 무엇입니까?

 답한다 : 달빛 아래서는 흰 색도 필요없다.

 묻는다 : 흰 소는 무엇을 먹습니까?

 답한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씹을 수가 없다.

 묻는다 : 제발 좀 가르쳐주십시오

 답한다 : 늙은 중인 나도 바로 그대로일 뿐이다.


 質問을 한 學人은 趙州가 ‘露地白牛’를 ‘달빛(月光)’에 比喩했는데도 理解하질 못한다. 달빛 아래서는 흰 것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인다. 정말로 마음을 비운 무사(無事)한 道人의 至極한 境界에서는 佛性이니 깨우침이니 하는 것도 다 쓸데없는 無用之物이다. 달빛은 깨우침을 통해 證得한 般若智慧를 象徵한다. 희고 흰 달빛 같은 마음은 아무리 검은 칠을 해놓은 데 비쳐도 本來의 性品대로 흰색이다.

 

趙州는 '露地白牛‘라는 佛性, 眞如, 自性, 般若, 眞人의 正體를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는 한마디로 具體化시켜 가르쳐준다. 眞如는 어떠한 것에도 물들지 않는다. 마지막 對答 ‘나도 바로 그렇다’는 ‘露地白牛’를 더 이상 말로 說明할 수 없으니 너를 잘 살펴보라는 이야기다. 이 말은 나 趙州가 ‘露地白牛’의 境界를 이룬 사람이니 말을 통한 說明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펴 알아차리라는 고불(古佛)로서의 親切을 베푼 것이다.


 禪學的으로 ‘露地白牛’는 涅槃에 證得했다 해도 그 涅槃에조차 執着하거나 머물지 않고 卽刻 버리는, 마음을 비운 공(空)의 世界를 말한다. 이를 부주열반(不住涅槃), 또는 무여열반(無余涅槃)이라 한다.


 百丈과 대안의 ‘露地白牛’ 問答은 趙州나 臨濟보다 時間上으로 한 발 앞선 것이다.

 묻는다 : 부처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은데 좀 가르쳐 주십시오

 답한다 : 흡사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격이구나.

 묻는다 : 안 뒤에는 어떠합니까?

 답한다 :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간 것 같다.

 묻는다 : 처음과 마지막에 어떻게 補任해야 합니까?

 답한다 : 소 먹이는 사람이 채찍을 들고 지켜보며 남의 穀食밭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 같다.


스승 百丈이 弟子인 대안에게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簡明한 禪問答이다. 부처란 자기 자신인데 부처를 客觀的으로 對象化해 놓고 찾는 일은 소에 타고 있으면서 소를 다른 데서 찾으려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 百丈은 眞情한 마음의 本體를 깨우치는 일을 牧牛에게 비유하고 있다. 禪家는 흔히 見性의 過程을 牧牛圖나 심우도(尋牛圖)를 그려 比喩한다. 宋나라 때 곽암(廓菴)선사가 禪家의 마음 깨우침을 牧牛에 比喩해 그린 십우도(十牛圖)가 그 原流다. 그러나 十牛圖는 마음이 곧 부처인 즉심시불(卽心是佛)의 頓悟的 境地 그 自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境地에 이르는 不斷한 努力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