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非風非幡]
- 광주 광효사(광효사), 慧能祖師 수계도량
6조 慧能이 5조사에서 弘忍祖師로부터 衣鉢을 傳授받은 후 後繼者 다툼으로 15년 동안 산 속에 숨어살던 逃避生活을 끝내고 676년 광주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렀다. 마침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 學人이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자 다른 한 學人은 “아니다, 깃발이 움직인다”며 論爭을 벌이는데 그치질 않았다. 이때 慧能이 나서서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오직 당신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 뿐이오”라고 말해주었다.
온 대중이 慧能의 말에 感歎했다. 上席에 앉아 있던 주지 인종법사가 直接 自己 앞으로 불러 問答을 해보고는 能行者의 簡明한 禪理에 역시 感服했다. 인종법사는 즉각 “오래 전부터 황매의 衣鉢과 法이 南方으로 갔다는 말을 들어 왔는데 行者가 바로 그 5조의 後繼者가 아니냐”고 물었다. 能行者는 “부끄럽습니다”라는 對答으로 自信이 六祖임을 밝혔다. 이에 인종법사는 예로 가르침을 청했다.
묻는다 : 黃梅의 咐囑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답한다 : 가르쳐준 것이 따로 없고 오직 自性을 보는 것만 말했고 禪定이니 解脫이니 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묻는다 : 어째서 禪定과 解脫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답한다 : 그러면 두 가지 法이 돼 佛法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佛法은 원래 두 가지 法이 아닙니다 [不二法].
慧能은 이어 ‘涅槃經’의 佛性 불이문(不二門)을 引用해 不二法을 가르쳤다. 즉 佛性은 단상(斷常)이 없고 善과 惡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바로 不二法이다. 여기서도 慧能은 ‘涅槃經’을 引用, 그가 본래 이 經典에 깊이 穿鑿(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慧能行者는 인종법사에게 아직도 自信이 正式으로 비구계를 못 받았음을 밝혔다. 인종이 즉시 受戒儀式을 갖추어 能行者에게 비구계를 내리고 스승으로 모셨다. 인종법사(627-713)가 慧能祖師에게 비구계를 준 수계의식을 ‘백사갈마(白四羯磨)’라 한다. 白四羯磨란 대중을 향해 한 차례 告白하고 그 告白이 옳고 그른지를 세 차례 물어 決定하는 受戒儀式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非常識的인 逆轉의 드라마와 시쳇말로 기막힌 ‘能力主義’를 보게 된다. 계를 주는 사람은 스승이고 받는 사람은 제자라는 건 절집의 傳統的 慣行이다. 그런데 慧能이 이미 제자의 예를 갖추어 받든 제자(인종법사)로부터 비구계를 받다니, 또 스승의 立場으로서 계를 준 인종법사가 계를 받은 제자(慧能)의 제자가 되다니........
이런 逆轉의 드라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쨌든 법성사 住持 인종법사는 이날 이후 慧能行者의 제자가 됐다. 콩가루 집안 같아 보이기도 한다. 선생님이 하루 아침에 자기가 가르친 제자의 제자로 逆轉된 셈이다. 映畵, 또는 小說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 같지만 禪宗은 本來가 이런 逆轉과 革命性을 그 本質로 한다. 소위 흔히 말하는 ‘能力主義’라고나 할까. 그러나 慧能行者는 이미 15년전 五祖로부터 祖師자리를 물려받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각하면 順序가 뒤바뀐 게 아니라 事必歸正이고 本軌道를 찾은 것일 뿐이다. 어쨌든 광효사는 이래서 六祖의 수계도량이 됐다. 慧能祖師는 여기서 인종법사의 청으로 한동안 首座들에게 說法을 하다가 다음해인 677년 조계남화선사로 옮겨, 方丈으로 着座했다. 祖溪 남화선사(當時 寶林寺)는 慧能이 661년 黃梅 五祖師에서 처음 南下해 일시 머물던 곳. 여기서 慧能은 衣鉢을 빼았아 가려는 一黨의 襲擊을 받고 가까스로 脫出, 산속에서 15년간을 숨어 지냈다. 따라서 남화사는 慧能과 이미 한 차례 因緣을 맺었던 절이다.
話頭 비풍비번(非風非幡)은 한마디로 심지법문이다. 森羅萬象은 모두가 우리 마음이 움직여 만들어내는 象이다. 결코 그 萬象의 본바탕 自體가 우리 눈에 보이는 模樣과 一致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우리 마음이 그렇다는 생각을 일으켜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이다. 諸法의 根源인 일심(一心)을 깨닫는 것이 見性이며 심지법문의 要諦다. 敎學的으로 말하면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다.
묻는다 : 날씨가 추운가, 사람이 추운가?
답한다 : 모든 사람이 그 속에 있습니다.
潙山靈祐禪師가 묻고 제자 仰山惠寂이 答한 禪問答이다. 역시 ‘風幡問答’과 같은 論理構造다. 춥고 더운 것은 人間의 意識作用에 따라 느껴진다. 自然現像의 흐름인 氣候라는 것은 스스로가 춥고 덥다는 槪念을 設定해 놓고 있지 않다. 公然스레 사람들이 溫度計를 만들어 재면서 춥다, 덥다를 分別할 뿐이다.
남산(南山)에 구름 일자 북산(北山)에 비 오는 것도 비가 꼭 北山이라는 곳에 내리겠다는 意志나 意識作用을 일으킨 바 없이 宇宙 攝理의 흐름을 따라 내렸을 뿐이다. 仰山의 對答은 人間이 意識作用을 일으켜 춥다, 덥다를 分別하고 있으나 本來의 우리 人間은 한난(寒暖) 分別이 없는 自然現像 속에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自然의 立場에서 보면 우리 人間 스스로가 마음을 움직여 意識作用을 일으켜 춥다느니, 덥다느니 요란을 떨고 있을 뿐이다. 禪은 이와 같은 分別心을 ‘妄念’ ‘妄想’이라 한다.
馬祖道一禪師의 스승 南嶽懷讓禪師(677-744)는 馬祖가 跏趺坐를 틀고 앉아 온종일 꼼짝도 않고 參禪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수레가 움직이지 않으면 수레바퀴를 때려야 하는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하는가? 그대는 坐禪을 배우는가, 부처를 배우는가?”
南嶽은 이어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坐禪은 앉는 데 있지 않고 부처는 일정한 形象이 없는 것이다. 머무를 곳이 없는 법(法)에 대해 取하고 버리려는 생각을 내지 말라.”
馬祖는 이 한 마디에 크게 깨쳐 캄캄한 無明의 世界로부터 밝고 밝은 頓悟의 世界로 뛰쳐 나왔다. 지금까지 列擧한 慧能祖師의 風幡問答, 南嶽과 馬祖 부자(父子), 潙山과 仰山 父子의 問答은 經典上으론 ‘대승기신론’의 “法이란 衆生心이며, 이 마음이 一切 世間과 出世間을 包攝하고 있다”는 說法과 같은 脈絡이다. ‘華嚴經’은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한마디로 明快하게 說破하고 있다.
‘열자(列子)’ <皇帝編>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몸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발이 어디를 밝고 있는가도 모르게 되었다.
마치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는 落葉처럼.
그럼 묻노니 바람이 나를 타고 흐르는가, 내가 바람을 타고 흐르는가.“
列子가 말하는 無我의 境地는 精神이 道에 沒入해 道와 내가 完全한 合一을 이룬 大神秘(?)의 段階다. 이는 卽興的인 怳惚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렇게 道와의 合一 狀態를 繼續 維持하는 것이 바로 解脫이다.
列子는 <주목왕편>에서 “만일 人間이 깨어 있을 때는 不幸하고, 꿈속에서는 幸福하다면 어느 쪽을 진짜라고 해야 하나”라는 물음을 던진다.
또 그는 어느날 제자와 함께 길을 가다가 길가의 骸骨을 가리키며 말한다.
“나와 저 사람은 生死를 달리하고 있지만 道에 立脚해서 말한다면 둘 다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고 해야 한다.”
列子의 이야기는 모두가 生과 死, 바람과 깃발, 現實과 理想을 區分하는 2분법적인 分別心을 버리고 오직 ‘無心’의 境地에 들어야 즐거운 人生, 幸福한 人生을 살수 있다는 哲理를 說破한다. 禪도 똑같은 脈絡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莊子도 역시 마찬가지다.
‘莊子’ <人間世編>은 마음을 다스리는 法으로 ‘심제(心濟)를 提示한다.
“雜念을 없애고 마음을 統一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더 나아가서는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氣)로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밖에서 들어온 것에 맞추어 깨달을 뿐이지만 氣는 空虛하여 무엇이나 다 받아들인다. 참된 道는 오직 空虛속에 모인다. 이 空虛가 곧 心濟인 것이다.”
禪이란 바로 莊子가 말한 ‘心濟’를 익히는 공부다. 우리는 無形의 空氣, 저 虛空 속의 空氣를 지극히 고마운 存在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空氣가 없으면 人間의 生命은 存在하지 못한다. 그러나 空氣를 얼마나 無價値한 것으로 여겨 왔는가. 아직까지 空氣는 돈을 내지 않고 使用하는 공짜다. 이제야 大氣汚染의 深刻性을 깨닫기 시작했다. 現代文明의 終末을 재촉한 것이 바로 이 大氣 汚染 아닌가.
기(氣)가 바로 道다. 요사이 氣空이니, 氣哲學이니 해서 기승을 부리고 돈벌이에 많이 活用하고 있다. 그 옛날부터 莊子, 列子, 禪佛敎가 거듭 强調해온 그 氣가 오늘에 되살아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人類文明의 새로운 틀은 ‘氣’라는 나무를 가지고 짤 수밖에 없다는 絶叫가 아닐는지.
광동성 광주 法聖寺는 六祖 慧能의 수계도량이다. 六祖가 出家 度量인 黃梅 5祖師에 이어 두 번째 因緣을 맺은 度量이다. (실은 慧能이 五祖寺에서 南下해 먼저 祖溪 남화선사에 잠깐 있었다). 또 傳說上으론 達磨가 뱃길로 中國에 도착, 제일 먼저 찾아간 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광효사에는 達磨 關聯 遺蹟도 있다.
자성을 떠나지 않음이 공덕이다.[不離自性是功]
-소관 대감사(大鑑寺) 혜능조사 설법도량
“안으로 마음을 겸손히 하고 낮추는 것이 공(功)이요, 밖으로 禮를 行함이 덕(德)이다. 자성(自性)이 萬法을 세우는 것이 功이요, 마음이 온갖 妄想을 떠나는 것이 德이다. 또 自性을 떠나지 않음이 功이고, 自性을 對象에 適用해 使用하되 물들지 않음이 德이다. 만약 功德法身을 찾으려 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참 功德임을 알라.”
六祖 慧能의 有名한 功德 法身論이다. 이 法問은 광주 법성사 說法을 마치고 소주(현 소관시)자사 위(韋) 사군의 청으로 大法寺(現 大鑑寺)에서 說한 上堂法語 중의 한 토막이다. 우선 六祖 檀經이 만들어진 重要 背景의 하나가 된 大鑑寺 說法까지 六祖의 行裝을 보자. 그는 法聖寺(현 광효사)에서 676년 削髮 수계 후 주지 인종법사의 祖室 추대를 받아 한동안 광효사 學人들에게 선조의 심법(心法)을 說했다. 다음해가 되자 위사자가 그의 說法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大鑑寺로 모셔 官僚들과 僧侶, 信徒가 함께 法問을 들었다. 저 有名한 ‘六祖 檀經’은 元來 大鑑寺 說法을 中心으로 編纂됐다.
따라서 大鑑寺는 慧能祖師의 ‘說法도량’이다. 大鑑寺 說法을 계기로 36년간 六祖의 本格的인 行化가 祖溪 남화선사에서 펼쳐졌다. 물론 첫 上堂說法은 광효사에서 이미 했다. 광효사 法問은 이를테면 석가모니가 깨달은 후 最初로 綠野園에서 說法한 초전법륜(初轉法輪)에 該當한다. 大鑑寺 法問은 六祖의 法力을 對內外的으로 確認받는 重要한 법석(法席)이기도 했다. 六祖는 大鑑寺 法會를 成功的으로 마친 후 祖溪 남화선사로 돌아가 荒廢해진 절을 重建하고 頓悟의 禪理를 널리 펼쳤다.
六祖가 大鑑寺 說法에서 喝破한 功德論은 達磨가 梁武帝와 問答하며 武帝가 많은 절을 짓고 塔을 세운 건 조그만 인천(人天)의 功德은 되지만 根本的인 佛法道理에는 턱도 없는 헛된 짓이라고 힐난한 것과 같은 脈絡이다. 達磨의 힐난은 물론 절을 짓고 塔을 세우는 佛事 自體를 否定한 건 아니다. 그런 佛事를 하는데 돈을 施主했다고 해서 그 反對 給付로 自身에게 福德이 돌아온다고 믿는 通俗的인 功德信仰을 批判한 것이다. 모든 物質的, 精神的 報施는 施主를 끝낸 그 瞬間 以後로는 깨끗이 잊고 자신이 베푼 데 대한 어떤 상(相)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報施를 해놓고 부처님이 自身에게 어떠한 陰德을 反對給付로 내려주리라는 功利主義的인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報施가 아니다. 禪宗은 陰德을 내려줄 타자(他者)로서의 부처의 自體를 부정한다. 내가 곧 부처이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의 當體인데 福을 내려줄 부처가 어디에 따로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오늘날에도 만연되고 있는 功德信仰의 뿌리는 깊다. 이미 석가모니 死後 佛像을 만들고, 塔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佛像 造成과 塔婆 藝術 속에 돈을 내 塔을 세우면 福을 짓는다느니 부처님 加被를 입는다느니 하는 通俗的인 功德信仰이 자리잡고 말았다.
佛敎歷史에 汚點을 남긴 功德信仰의 弊害는 일일이 列擧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不幸히도 그와 같은 功德信仰이 오늘에 더욱 騎乘을 부리고 있다. 淸靜無垢한 本來의 마음자리로 돌아가 解脫이라는 絶對自由를 누리고자 하는 禪宗의 信仰目標에서는 塔을 세워 福을 얻으려는 利己的인 功德信仰 따위야말로 一考에 가치도 없는 마른 똥막대기고 休紙조각이다.
慧能祖師는 1천3백년 전 참된 功德이란 어떤 것인지를 明快하게 提示했다. 그리고 그의 說法 속에는 빗나간 功德信仰을 날카롭게 批判하는 匕首가 들어 있다. 우선 謙遜을 强調한 法問의 앞부분은 유가(儒家)의 倫理와도 一致한다. 孔子는 德의 基本 要件이 謙遜임을 거듭 强調했다. 그리고 儒敎 倫理에서는 禮儀를 行함이 바로 德의 實現이고 實踐이다.
慧能祖師는 禪家의 功德을 淸靜한 自性으로 萬象을 收用하고, 妄念을 털어버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순간도 自性의 淸靜性이 흔들리거나 속진(俗塵)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옛날 初等學敎 同窓生을 만났을 때 ‘저놈 나쁜놈’이었다는 先入觀이나 또는 ‘저 친구 옛날에 사고뭉치였고 공부도 지지리 못했다’는 과거의 상(相)을 가지고 대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白紙의 마음 狀態로 새롭게 그 同窓生을 맞아주어야 한다.
물론 六祖가 大鑑寺 法問에서 밝힌 功德은 物質的 報施로 구하는 福德과는 本質的으로 다르다. 그러나 現實 속의 佛敎信仰 風土는 이를 混同하고 있고 오히려 福德 一邊倒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福德이라는 것을 別途로 認定한 것도 아니다. 원래 禪佛敎는 華麗한 佛像 造成이나 雄壯한 塔을 세우는 佛事를 拒否한다. 禪宗 寺刹은 큰 佛像을 모시는 佛殿(大雄殿)을 別途로 두지 않고 法堂(說法堂, 參禪房) 한가운데 조그만 佛像을 하나 奉安한다. 이는 佛法을 傳하는 전등(傳燈)을 重視하기 때문이다. 現在는 中國 禪宗 寺刹들도 모두 大雄殿을 두고 집채만큼 큰 佛像을 奉安, 아침저녁 禮佛을 한다. 이는 南宋 以後 특히 元, 靑代에 禪宗 本來의 面貌가 變質된 것이다.
“六祖의 大鑑寺 說法 淸涼 法音이 千年을 거슬러 世俗의 헛된 꿈을 覺醒시키고 있다. (大梵淸音溯遺韻越千年猶以洪鍾醒世夢)” 와 “六祖檀經 의 讀誦이 禪林의 瑞氣를 永遠히 保存하고 있다(鑑明靜意誦壇經數十券 永留瑞氣護禪林)”라고 쓴 柱聯이 對聯하고 있다.
‘六祖檀經’의 說法 도량임을 이 주련(柱聯)에서 선뜻 感知할 수 있었다. 大雄殿 안의 壁面에는 ‘檀經’ 說法 道量답게 慧能祖師의 大鑑寺 上堂說法 全文을 붓글씨로 써서 붙여 놓았다. 宗敎에서 祈福的인 要素가 完全 除去되기는 不可能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께 渴求하는 福德은 虛虛實實이 돼야 한다. 진짜 福德은 自身의 內面을 깊숙이 파고들어 살펴보는 見性의 作業이라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 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葉落歸根]
- 신흥 국은사(國恩寺), 慧能祖師 원적도량
묻는다 : 祖師께서 이제 가시면 언제 돌아오나이까?
답한다 : 잎(葉)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간다. 처음 올 때부터 입[口]이 없었느니라.
慧能祖師가 自身의 臨終을 豫感하고 신주(현 신흥) 국운사로 가기에 앞서 曹溪 남화선사에서 文人들과 나눈 問答이다. 話頭로는 ‘엽락귀근(葉落歸根)’이라 한다. 봄이 되면 새 잎이 돋아나 여름에 茂盛하고 가을 되면 떨어져 겨울동안 눈 속에서 썩어 뿌리로 돌아가 거름이 된다. 잎이 나오는 根本은 뿌리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生存하지 못한다. 따라서 잎의 根源은 뿌리다. 또 뿌리가 새 잎을 돋게 하고 그 잎을 무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름이 필요하다.
그 거름은 잎이 떨어져 썩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뭇잎이 落葉으로 떨어져 썩어서 거름이 된 것은 내년 봄 또다시 새 잎이라는 生命을 誕生시킨다. 나뭇잎은 이처럼 永遠한 生滅의 循環 속에서 영생(永生)하고 있는 것이다. 人間의 生死도 이와 같은 原理다. 사람은 죽어 땅속에 묻혀 썩는다. 마치 여름철 무성했던 잎이 가을 되어 落葉으로 떨어지고 겨울에 썩듯이.
그러나 屍身은 썩어 物質世界를 構成하는 4대 要素인 地,水,火,風으로 변한다. 즉 뼈는 �으로, 살은 물로, 屍身이 썩을 때의 發熱은 화로, 靈魂은 바람으로 변해 人間 肉身을 構成하는 4대 要素를 提供한다. 이와 같은 佛敎的 人間 生命의 循環 原理를 믿을 때 만약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아들, 孫子, 曾孫이라는 새 生命은 태어날 수 없다. 墓地를 예로 들어도 生命의 循環과 輪回는 쉽게 理解할 수 있다. 墓 깊숙히 埋葬된 屍身은 生命이 끊어진 멸(滅)이지만 그 屍身의 생(生)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生命인 雜草가 墓地 위에 茂盛하게 나있지 않은가. 그 雜草들은 아마도 자기 자신들의 生命循環에 따른 거름뿐만이 아니라 屍身이 썩은 거름까지 吸收해 旺盛하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六祖 慧能은 이러한 生命의 循環 論理를 前提로 자신의 죽음을 잎이 落葉돼 떨어진 후 썩어서 뿌리로 돌아가는 ‘葉落歸根’에 比喩했으리라. ‘葉落歸根’에 이어진 “처음 올 때부터 입이 없었느니라[來時無口]”는 禪宗 核心 要旨의 하나인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한다. 이는 人間이 태어나 말을 배워 使用하기 以前은 물론 더 나아가 어머니 뱃속에 嬰兒로 자리잡기 以前의 本來面目에는 言語가 없었음을 뜻한다.
우리는 말을 使用하기 以前의 어린애가 배고프거나 아프면 울음을 통해 알리는 行動言語(Body Language)를 본다. 따라서 人間 存在의 本來面目인 법(法)은 말로 說明하기 以前의 當體일 뿐이다. 그래서 佛敎는 석가모니 當時부터 言語文字로 說明할 法은 한 法도 없다고 喝破했다. 특히 禪宗은 言語文字를 動員한 佛法의 說明을 原初的으로 拒否한다.
六祖의 ‘금강주(金剛註)’는 “聲聞, 연각승(소승)은 사람과 法이 있다는 執着에 빠져 說法할 것이 있다고 하지만 大乘菩薩은 衆生과 法이 모두 공(空)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說法할 것이 없다"고 說明하고 있다. 이어 ”그래서 부처님은 누가 如來께서 말씀하신 法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부처를 誹謗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고 敷衍하고 있다.
六祖는 제자 永嘉玄覺(675-713)과 나눈 問答을 통해 자신의 生死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천태종 지관법에 達通한 절강성 온주(현 영가현)의 중 玄覺이 曹溪 남화사로 내려가 六祖를 參禮하고 나서 祖師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는 拄杖子를 떨치고 앞에 섰다.
묻는다 : 대저 사문(沙門)은 3천 위의(威儀)와 8만 세행(細行)을 갖추어야 하거늘 자네는 왜 그리 건방을 떠는가?
답한다 : 生死의 문제가 너무나도 重大하고 무상(無常)이 아주 빠르게 展開되기 때문입니다.
묻는다 : 어찌해서 生滅이 없음을 體得하여 빠르고 느림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답한다 : 체득(體得)에는 生이 없고 요달(了達)에는 본래 빠르고 느린 時間의 문제가 끼어들지 못합니다.
六祖가 묻고 玄覺이 答한 禪問答이다. 六祖는 玄覺의 마지막 對答에 크게 歡呼하며 “그렇고, 그렇도다”라고 肯定했다. 玄覺은 禮를 갖추어 절을 올리고는 곧장 下直하고 떠났다. 六祖는 그에게 “하룻밤만이라도 쉬어가라”고 간곡히 권했지만 끝내 그냥 가버렸다. 그래서 玄覺禪師에게는 하룻밤 자고 깨쳤다는 뜻의 ‘일숙각(一宿覺)’이라는 別名이 붙었다. 永嘉玄覺은 이렇게 六祖로부터 法을 認可받고 慧能祖師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됐다.
‘一宿覺’은 話頭로도 通用된다. 우선 永嘉玄覺禪師가 參禮하면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돈 것과 拄杖子를 던져버린 것은 무슨 뜻인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흔히 깨침을 이루었다는 禪師들이 自己를 誇示하는 行動言語다. 時計 方向으로 세 번 도는 것은 佛, 法, 僧 3보에 대한 尊敬, 또는 탐, 진, 치의 3악을 모두 멸했음을 象徵한다. ‘현수오계경(賢首五戒經)’은 이를 ‘삼잡(三匝)의 예’라 하여 그 意味를 위와 같이 解說하고 있다.
本論인 問答은 한마디로 本來가 생(生)이라는 것도, 사(死)라는 것도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佛法 眞理는 體驗한다는 일도, 새삼 생겨나는 일도 아니고 깨달음을 이루는 데 빠르고 느리다는 分別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佛法에서 보면 眞如當體의 自性은 生死를 超越한 ‘絶對性’을 本質로 하고 있고 佛法도 自性 안에 本來부터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唐나라 皇帝 중종이 705년 慧能祖師의 名聲이 天下에 자자하자 내시 설간을 曹溪로 派遣, 六祖의 入京을 청했다. 六祖는 중종의 入內 說法 칙소(勅召)를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告辭했다. 그러자 설간이 “그렇다면 長安으로 돌아가 皇帝에게 전해 올릴 祖師의 심요(心要)라도 좀 가르쳐 달라”고 懇請했다.
“道에는 밝음과 어둠이라는 게 없다. 煩惱가 곧 보리이고, 보리가 곧 煩惱다. 本來가 1이 2고, 2가 1이며 東과 西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일 뿐이다.”
설간은 또 “大乘의 불법관(佛法觀)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명(明)이란 무명(無明)과 같은 것이다. 本來의 性品은 둘이 없고 오직 하나일 뿐이다.”
六祖가 설간에게 說한 佛法의 根本은 明과 無明, 보리와 煩惱로 나누는 二分法的 分別을 버리고 모든 것은 하나의 뿌리로부터 나왔다는 ‘유마경’의 불이법(不二法)으로 要約할 수 있다. 바로 무이(無二)의 하나로 統一돼 있는 眞如自性이 存在의 根源이고 실성(實性)이며 佛敎 眞理의 바탕이라는 얘기다. 설간은 六祖의 心要 法問을 듣고 크게 깨쳤다. 長安으로 돌아간 설간은 皇帝께 自初至終을 아뢰고 六祖가 說한 ‘心要’를 전했다.
佛法은 성(聖)과 속(俗)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누누이 强調한다. 또 “佛法은 本來가 世間 속에 있다(佛法元在世間)”고 읊은 慧能의 偈頌 ‘無常頌’은 결코 공연한 觀念的 修辭가 아니다. 偉大한 禪師들은 出家라고 해서 가출자(家出者)들처럼 父母를 헌신짝 버리듯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계(聖界)와 속계(俗界)라는 區別이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俗世가 바로 佛法 眞理의 源泉이며, 實踐의 장(場), 具顯의 場이다. 따라서 진정한 출가(出家)는 俗世를 버리지 않는다. 父母의 因緣도 漆板의 백묵 글씨 지우듯 없애는 게 아니라 다만 그에 執着하지 않을 뿐이다.
六祖는 713년 8월 3일 향년 75세로 이세상의 삶을 끝냈다. 바로 國恩寺에서다. 그는 圓寂에 앞서 自性이 곧 진짜 부처이며[眞佛]이며 法身과 報身, 化身은 本來가 한 몸이라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을 骨子로 한 臨終偈를 남기고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깨닫고 보면 생과 사란 없다[無生無滅]
“너희들은 잘 있으라. 내가 죽은 뒤에 世俗의 정으로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거나, 사람들의 弔問을 받고 喪服을 입거나 하는 일을 絶對 하지 말라. 이렇게 하는 者는 나의 제자가 아니며 또한 正法이 아니니라. 오직 자신의 本心을 알고 자신의 本性을 잘 보면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으며, 生도 死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가는 것도 없느니라.”
六祖 慧能의 遺言이며 死別의 法問이다. 나고 죽는 일에 執着하지 말라는 嚴肅한 가르침이다. 六祖의 死別 法問은 한마디로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얘기다. 萬物의 根源을 하나로 볼 때 生과 死의 區別이란 전혀 無意味하다. 生이나 死가 똑같은 것일진대 生을 기뻐하고 死는 슬퍼하며 싫어할 理由가 없다. 生이 즐겁고 기쁜 것이라면 死도 마땅히 즐겁고 기뻐야 한다. 이래야만 生과 死가 똑같다는 同一性의 論理에 맞아떨어지고 矛盾되지 않는다.
禪은 절대로 永生을 노래하지 않는다. 극락(極樂)도 우는 어린애를 달래는 초콜릿에 불과한 方便으로밖엔 使用하지 않는다. 禪은 極樂이니 永生이니를 設定하지 않고 오직 生死一如, 오매일여(悟寐一如)의 一元論的 萬物一切思想으로 죽음을 克復하려 할 뿐이다. 그래서 落葉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 거름이 되어 또다시 새잎을 틔우는 循環論的 生死의 原理를 따라 죽음을 기꺼이 收用한다. 다시 말해 죽음은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위한 始作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恐怖, 永生에 대한 어리석은 執着 등은 秋風落葉처럼 完全히 떨어져버린다. 이것이 바로 禪이 强調하는 解脫論理다. 이는 原始佛敎 때부터 밝힌 ‘輪回說’에 따른 佛敎의 生死觀이기도 하다.
六祖는 이에 앞서 어느날 제자 荷澤神會(670-762)와 법거량을 했다. 神會는 慧能祖師의 上堂法問이 끝난후 “머무름 없는 것[無住]으로 根本을 삼으니 보는 대로의 것이 主人입니다”라고 했다. 六祖는 “네놈이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느냐”며 拄杖子로 세 번을 내리쳤다. 慧能祖師는 神會의 觀念的인 지해(知解)로서의 ‘無住’를 撲殺내 버린 것이다. 生死 超越의 境地가 그처럼 입으로 나불거린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꾸중이다. 그러나 拄杖子로 때린 것은 그만큼만 해도 見性할 可能性이 있다는 肯定이요, 分發의 促求다. 아예 때릴 價値조차 없는 무지렁이는 때리지도 않는 게 禪林의 家風이다.
따라서 스승의 매질은 제자에게 다시없는 榮光이 된다. 拄杖子로 제자들을 후려갈기는 禪師들의 毆打는 이처럼 六祖에서 最初로 시작돼 後日 德山宣鑑禪師(782-865)의 저 有名한 방(棒)이라는 禪林 家風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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