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화실의 향기] 통도사 극락선원장 명정 스님
-“밥먹고 잠자고 똥누는 일상… 그 안에 道 있지”-
“차렷, 열중 쉬엇.”
지난 봄 경남 양산 통도사 산내암자인 극락암 원광재를 찾았을 때다. 낡은 모시 장삼 차림의 스님 입에서 벽력 같은 호통이 터져나왔다. 산사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일갈에 일행은 잠깐 얼어붙고 말았다. 스님에게서 묘한 매력과 흡인력이 느껴졌다. 극락암 호국선원장 명정스님(65)이다.
지난 11일 다시 극락암을 찾았다. 병풍처럼 펼쳐진 영축산에 비 갠 저녁의 운무가 그윽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운거산정(雲居山頂)의 풍경 속에 들어앉은 극락암은 국내 최고의 명당터이자 한강 이남 최고의 선원터로 꼽힌다. 수련이 흰꽃을 피운 극락 영지(影池) 위로 아치형 극락교가 그림같다.
극락암은 경봉스님의 ‘성지’다. 경봉스님은 극락암 삼소굴에서 출가 20년만에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장엄한 오도의 소식을 얻었다. 명정스님은 20년 넘게 경봉스님을 곁에서 모셨고, 또 다시 25년을 삼소굴 곁 원광재를 지키며 극락암 경봉 가풍을 이어오고 있다. 경봉스님이 남기고 간 시·서·화 등 유물을 지키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날은 마침 경봉스님의 25주기 기일(음력 5월27일)이었다. 극락호국선원 무량수전에서 추모법회를 끝낸 참이었다. 1982년 은사의 임종이 가까워왔음을 느낀 명정스님이 물었다.
“스님, 가신 뒤에도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
일행이 원광재에 도착했을 때 명정스님은 원광재 뒤뜰에서 대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처음으로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을 쓴 스님이 경봉스님이다. 스님은 한국전쟁 직후 극락선원 소변소에 휴급소(休急所), 대변소에는 해우소라고 써붙였다. 휴급소는 소변을 보고 나서 다른 일을 하듯이 급한 일일수록 쉬어가면서 하라는 뜻, 해우소는 근심 걱정을 말끔히 버리라는 뜻이다. 일행은 웃음을 참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모감주꽃 노랗게 핀 마루 끝에서 스님을 기다렸다.
“여기 멀고 먼 극락까지 뭐하러 왔어?”
스님은 숲에다 소변 본 일이 뭐 대수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일행을 처소인 원광재 끝방으로 안내했다. 방 중앙에는 커다란 찻상이 있고 뒤편에 경봉스님의 ‘至道無難’(지도무난) 글씨가 걸려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려운데 있지 않다’는 ‘신심명’의 구절이다. 한쪽 벽엔 유화풍의 달마도가 걸려 있다. 한때는 지역 화가가 그려준 멧돼지 그림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달마상이나 멧돼지를 떠올릴 만큼 투박하게 생겼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멧돼지 같은 우직함, 달마스님 같은 철저함도 지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야, 개좆 같은 놈들아’밖에 없어. 돈도 안 줄 거면서 귀찮게 하지 말구. 입 닥치고 차나 마셔.”
이것 또한 하나의 선구(禪句)다. 게다가 스님의 입가엔 정겨운 미소가 살짝 묻어있다. 스님은 찻자리에 앉아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우려낸다. 스님은 차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관 가득 녹차를 재운 스님의 차맛은 독할 정도로 쓰다.
“내 얘기 꼭 듣고 싶으면 ‘개여울’ 한번 불러봐.”
스님은 경봉스님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서 온 세 명의 보살들까지 방으로 불러들였다. “큐!” 그는 방송국 프로듀서 흉내를 내가며 계속 노래를 채근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인과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일까. 동행한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의 박희승 차장과 기자가 서로 노래를 미루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짓궂다. 결국 부산 보살들의 가사 도움을 받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 여울에 나와앉아서~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스님은 장삼마저 훌훌 벗어던지고 잿빛 셔츠 바람으로 혼자 신이 났다. 그것은 어쩌면 스님의 원초적 천진함 같았다. 은사 경봉스님이 그랬듯이 대중가요 같은 일상생활 속에서 쉬우면서도 의미 깊은 법문을 들려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쯤에서 잡다한 물음 따위 접어두고 그냥 스님의 살림살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여기 극락암이 ‘못찾겠다 꾀꼬리’ 노래가 만들어진 곳이야.”
대마초 사건으로 한창 방황중이던 조용필이 극락암 경봉스님을 찾아왔다. “너는 뭐하는 놈인고?” “가수입니다.” “네가 꾀꼬리로구나.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그걸 찾아보란 말이다.” 조용필이 그길로 산을 내려가면서 만든 노래가 바로 ‘못 찾겠다 꾀꼬리’라는 것이다.
경봉스님은 극락암을 찾는 이들에게 자주 이렇게 물었다.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느냐?” 이런 저런 대답들을 하면 또 이렇게 말했다. “대문 밖을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라.” 명정스님이 처음부터 “극락엔 왜 왔느냐”고 물은 것도 같은 문답법일 터였다.
“노장님의 평생 공부가 여기 다 들어있는 거라. 밥 먹고 잠자고 똥 누는 일상에 다 도가 있고, 그것을 잘 알면 거기가 극락이지. 여기 써있는 ‘지도무난’이 그 뜻이야.”
명정스님은 열일곱 살 때 해인사로 출가했다. “고향인 김포에서 해인사 가는 버스를 타고 출가했다”는 것이 출가 사연이다. 당시 해인사 선방에는 법정스님과 일초스님(고은 시인)도 수행을 하고 있었다. 연산이라는 스님이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고?’하며 그에게 애정을 보였다. 그 스님의 권유로 극락암 삼소굴을 찾게 됐다. 경봉스님은 그때 69세였다. 노스님은 무테 안경 너머로 자상한 눈빛을 보내며 손을 어루만졌다.
“나는 공부한 게 없어. 좌복에 앉아 몇 날 며칠 잠도 자지 않고 ‘요거’ 생각만 하고, ‘요거’ 공부만 했어.”
스님은 세속에서 ‘여자’를 속되게 이를 때 쓰는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펴들었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고행의 일화가 수도 없을 만큼 치열하게 수행했다. 폭음 등 파격과 만행의 일화도 많다. 당시 선방에는 개성(스님은 ‘개 같은 성질’이라는 뜻이라고 덧붙였다)이 뚜렷한 스님이 많았다. 지금도 극락암에는 선승들이 깨달음을 향한 하안거(음력 4월15일~7월15일)에 들어있다.
“벼랑으로 뛰어내리겠다는 사자새끼들만 극락암에 방부를 들여. 고양이가 쥐 잡듯 하는 것이 수행이지. 쥐를 노릴 때 잡념이 들면 잡을 수가 없는 이치지.”
어느해 극락암에는 중광스님, 철웅스님, 명환스님 등 기라성 같은 선객들이 정진중이었다. 세간에 걸레스님으로 잘 알려진 중광스님은 곧잘 완력을 썼다. 힘이 장사였던 명정스님이 그를 암자 뒤로 불렀다. 나이가 아홉 살 많은 중광스님에게 심한 욕설로 혼을 냈다.
“중광스님과는 그런 일로 친해져서 자주 어울렸지. 이 원광재를 지을 때도 중광스님이 그려준 학이 큰 도움이 됐어. ‘학 다 날아갔다’고 하면 또 그려줘서 전시회를 열곤 했어.”
명정스님, 이날 먼저 떠난 은사스님과 도반들 생각 때문에 마음이 눅눅해졌다. “안되겠다. 오늘 같은 날 곡차 한 잔 해야겠다.” 젊은 때 안거 끝내고 곡차 한 잔 하는 그 심정이었을까.
이날 청하지도 않았는데 삼소굴에 몸을 눕히는 인연의 ‘특혜’를 입었다. 영축산은 한밤중의 검푸른 먹물을 풀어내고, 깊디 깊은 고요 속에 시간이 멈추었다. “야반삼경에 대문빗장을 만져보거라.” 경봉대선사의 열반송이 삼소굴 종이창에 어른거렸다.
새벽 도량석 소리에 날아갈 듯 가벼운 몸을 일으켰다. 극락암 차가운 약수를 떠마시니 머릿속까지 맑아진다. 법당 오른편 옛 약수터 표지석에는 경봉스님의 ‘물법문’이 새겨져 있다.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주는 물이다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가는 이슬비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
이른 새벽 스님네들이 빗자루를 들고 정성스럽게 극락선방 앞마당을 쓸고 있다. 영축산에서 밤새 쏟아져 내린 솔바람을 마음에 쓸어담고 있는 것처럼.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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