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출가와 재가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시론

slowdream 2007. 9. 24. 07:25
 


출가와 재가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시론


홍사성(본지주간)



이 논문은 한국불교연구원이 주최한 제18회 불교학술회의(주제:미래 불교의 向方, 2000. 12. 1)에서 발표된 것임.


홍사성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불교신문 편집부장·불교TV 제작국장 역임. 현재 불교방송 방송본부장. 역저서로 《불교입문》 《세계의 불교》 《동남아불교사》 《근본불교 이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등이 있다.



1. 문제의 소재


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순치(脣齒)와 같다. 출가가 치아라면 재가는 입술이다. 치아는 입술이 없으면 보호받을 수 없으며 반대로 입술은 치아가 없으면 의지할 데가 없다. 출가와 재가는 초기불교 이래 현재까지 이렇듯 철저히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한국불교에서도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이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양자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변함이 없더라도 한국불교라는 특수성이 반영된 현상은 불가피하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불교의 출가와 재가의 관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 특이한 현상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최근 100년 사이에 재가불교가 출가불교를 능가하는 성장과 발전을 보여준 점이다. 우선 재가불교의 질적인 성장을 살펴보면 경이로울 정도다. 불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학문적 성과를 내고 있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출가자보다 재가자가 더 많다. 신행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천박한 수준의 기복주의가 대부분인 점이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근래 들어 교양대학과 불교강좌의 활성화로 인한 지성불교의 개화는 종래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족하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출가불교의 지도 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던 신행활동을 독자적으로 해나가고 있는 사실이다. 이미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대원회나 한국불교연구원, 그리고 동산불교대학이나 지방의 각종 신행단체 등장이 그 좋은 예다. 출가불교의 지원 없이 재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신행활동은 날이 갈수록 영역을 확대하고 깊이를 더해 가는 추세다.


이는 한국 재가불교의 앞날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될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관찰과 분석을 요하는 부분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면 이제 한국의 재가불교는 하나의 독자적 ‘세력’으로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할 만하다. 물론 아직은 제도적인 면에서나 실제에 있어서 미흡한 면이 없지 않으나 영향력과 발언권이 증대됐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1960년 이후 많은 재가불교 지도자들이 ‘사부대중공동체론’을 내세우며 공개 비공개의 자리에서 교단운영의 적극참여를 요구해온 점, 또 1998년 종단분규 이후 ‘불교 바로 세우기 재가연대’ 같은 도발적인 명칭의 단체가 교단 안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점 등은 재가불교의 활동이 전통적 의미의 신행활동 수준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과 활동의 배경에는 사부대중이란 출가와 재가가 수직적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평등적 관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불교교단사에서 재가불교는 언제나 출가불교에 종속되거나 교단 구성의 주변적 인자(因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놀라운 변화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출가교단의 입장은 매우 착잡한 것 같다.


겉으로는 재가연대와 같은 단체의 활동에 대해 우호적인 것 같지만 속내까지 그러한지는 의문이다. 상상을 비약한다면 출가불교는 재가불교의 성장에 대해 적지 않은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재가불교가 출가불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자체가 출가불교의 도덕성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출가불교가 전통적으로 누려온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게 되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어 보인다. 사부대중공동체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출가불교는 공개적인 언급은 자제하지만 재가자가 출가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재가자의 요구를 묵살하려고 한다. 불교교단은 전통적으로 출가 중심이었으며 재가는 주변적 종속적 위치라는 것이 출가불교의 인식이다. 출가불교가 재가불교에 대해 여전히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를 갖는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현재 한국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미묘한 긴장감마저 감지되고 있다.


출가는 재가를 ‘건방진 생각을 가진 무리’로 간주하고, 재가는 출가가 ‘부도덕하고 무능한 집단’이라는 대립구도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자칫 서로 불편해지거나 갈등할 소지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공개적인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대 한국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위상과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해나가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불교의 교단구조와 출가·재가의 관계


1) 불교 교단의 성립과 구조

현대 한국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교단구조와 성립과정, 부처님 재세(在世)시대 이래 불교교단이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부처님 재세시에 이루어진 최초의 교단구성과 성립과정은 이후 불교교단의 운영의 중요한 기초가 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불교교단’이라고 할 경우 이는 곧 모든 불교도 즉 출가수행자와 재가신자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서다. 출가수행자와 재가신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명칭으로는 사중(四衆) 또는 사부중(四部衆) 사부지중(四部之衆)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는 말이 있다.1) 1) 사부대중 외에 7부중이라는 말도 있다. 여기에는 출가하여 20세가 넘지 않은 미성년자인 남성수행자 사미와 여성수행자 사미니, 비구니계를 받기 이전에 임신 유무를 판별하기 위해 예비기간을 갖는 식차마나가 포함된다. 사미나 사미니는 별도의 상가를 구성하지 못하며 모두 비구 비구니 상가에 소속된다.


사중이란 출가한 20세 이상의 남성수행자인 비구와 여성수행자인 비구니, 그리고 재가의 남성신자인 우바새와 여성신자인 우바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사부대중으로 부른 예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 나타난다.2)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종단의 기본법인 종헌에서 ‘본종은 승려(비구 비구니)와 신도(우바새 우바이)로서 구성한다’고3) 한 것은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교단의 개념을 규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잡아함에는 사부중 또는 사부대중이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사부대중이란 말이 나오는 곳은 증일아함이나 중아함 등인데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爾乃有信無猶豫 四部之衆發道意……’(증일아함 제1권 서품, 권1), ‘……謂四部衆 來詣我所而請法’(중아함 제8권 《시자경》), ‘卽向香積禮佛舍利 時四部衆及 上諸天同時俱禮……’(장아함 제4권 《유행경》) 3) 조계종 종헌 제8조(조계종 법령집 18쪽).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정밀한 해석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 경전에서 사부대중이라고 할 때 그것은 4개의 성격을 갖는 제자들을 뜻하는 것이지 그 전체에 대한 명칭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중의 중(衆)은 paris.ad (parisa?를 번역한 말로 개개인의 불교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부처님도 사부대중 전체를 묶어서 불교교단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불교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신분별로 분류해서 부를 때 사부대중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뿐이다. 사부대중 모두를 묶어서 불교교단의 구성요건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부처님 재세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시기적으로는 아마도 대승불교의 성립과 그 이후의 일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 문제는 별도로 고찰할 기회를 갖기로 한다.


부처님이 자신이 이끄는 교단을 지칭한 말은 상가(僧伽, sam?ha)다. 상가는 고대 인도사회에서 공화적 정치결사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가나(gan.a)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상공인들이 주축이 되는 일종의 조합과 같은 단체를 뜻한다. 그러니까 상가 또는 가나는 일종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용어인 셈이다. 부처님이 자신의 교단을 상가라고 한 것은 그 집단이 수행을 통한 해탈을 목표로 하는 수행 공동체라는 의미에서였다.


불교에서 최초의 원시적 형태의 수행 공동체가 성립한 계기는 ‘초전법륜(初轉法輪)’에 의해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은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이르러 콘단냐 등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했다. 설법을 들은 수행자들은 차례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에 귀의함으로써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불교교단사는 이를 ‘삼보의 성립’이라고 한다.


삼보란 진리를 깨달은 스승(佛寶), 스승이 깨달은 진리(法寶), 스승을 따르는 수행자(僧寶)로서 불교의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는 교주와 교리와 교단을 말한다. 이 중 승보는 출가 공동체인 상가를 말한다. 이 공동체가 곧 불교교단이다. 여기에는 재가가 포함되지 않는다. 율장에 따르면 부처님은 녹야원으로 향하는 도중 두 사람의 상인을 만나 설법을 하자 이들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귀의하고 우바새가 되었다.4) 4) 한글대장경 《사분율》 31권 수계건도.


하지만 이들은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삼보의 하나인 삼보를 성립시키지 못했다. 불교 상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건이다. 즉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한 수행자로서 동일한 규율에 승복하며, 어떤 형태로든 규제 가능한 범위인 결계(結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입단은 자유의지에 의하며, 성원은 서로가 평등하며, 의사결정은 전원합의에 의하도록 되어 있다. 불교교단의 일원이 되려는 사람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한 입단식을 가졌다.


하나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설법을 들은 후 교단원이 되는 것인데 이들은 비교적 간단한 절차를 밟았다. 즉 부처님으로부터 “어서 오라. 착한 비구여(善來比丘).”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입단이 승인됐다.5) 또 하나는 외지에서 부처님을 친견하지 못하고 출가하는 경우다. 5) 한글대장경 《사분율》 32권 수계건도.


이때는 삼귀의(三歸依)를 다짐받고 출가를 허락했다. 나중에는 출가의식이 보다 엄격해져서 세 사람의 스승(三師: 傳戒·�磨·敎授)과 일곱 사람의 증명자(七證) 앞에서 서약을 해야 했다.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에 비해 재가자는 공동의 생활을 하지 않으며 공동 규율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 출가중은 개인적인 금계(戒, s沖la)와 공동의 규율(律, vinaya)을 모두 지켜야 하지만 재가중은 계만 수지하고 율의 적용은 받지 않는다.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고 규제의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재가자도 공동체 생활을 하고 율장의 규제를 받는다면 교단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가자는 기본적으로 세속에서 결혼을 한 신분이므로 출가자와 동일한 계율를 지킬 수 없다. 따라서 재가자는 출가하여 공동생활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별도의 재가 공동체를 구성해서 교단을 성립시키지 않는 한 불교교단의 구성원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이 초기불교 이래 불교교단이 가져온 상가의 개념이다


2) 출가-재가의 역할과 상관관계

대개의 종교는 제도화 과정에서 그 종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그룹과 이들의 지도를 받는 추종자 그룹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역사가 오래되고 제도가 정비된 종교일수록 지도자와 추종자를 더욱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불교의 경우 지도자 그룹과 추종자 그룹의 분화는 교단 구성 초기부터 있어 왔다.


부처님의 제자를 크게 네 가지 부류로 나누고, 이를 다시 신분과 역할에 따라 출가이부중(出家二部衆)과 재가이부중(在家二部衆)으로 구분하는 것은 바로 지도자 그룹과 추종자 그룹의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즉 출가하여 전문으로 수행하는 비구·비구니가 지도자 그룹이고, 세속에 살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바새·우바이가 추종자 그룹에 해당한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출가중을 이루는 비구(比丘, bhiks.u)는 걸식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재가신자의 공양과 보시로 생활하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비구니(比丘尼, bhiks.un.沖)는 그 여성형이다. 이들은 세속을 떠나 전문적인 수행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처님을 대신해 재가중을 지도하는 역할이 부여됐다. 출가중의 역할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진리의 상속자’로서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시대에는 부처님을 대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율장은 초전법륜이 끝나자 “이 세상에는 이제 6명의 아라한이 있다. 다섯 제자와 부처님이 그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6) 이는 부처님의 제자인 비구는 단순히 ‘제자’가 아니라 부처님과 함께 공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阿羅漢) 즉 부처님과 동격인 존재라는 뜻이다. 6) 한글대장경 《사분율》 32권 수계건도. 율장은 이후 제자가 늘어날 때마다 그 숫자를 늘려 ‘61명의 아라한’ ‘1백1명의 아라한’이라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에는 재가자도 있지만 그들은 교법을 전지(傳持)해가는 존재가 아니다. 교법의 등불은 출가중에 의해 상속되어 왔다. 그래서 부처님도 “가사 입은 자(출가자)를 찬탄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는 것이다. 가사 입은 자를 헐뜯는 것은 나를 헐뜯는 것”7)이라고 했다. 7) 《증일아함경》 제5권 〈壹入道品〉.


둘째는 진리를 가르치는 설법자로서의 역할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성취한 뒤 얼마 안 되어 제자가 60여 명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도의 사명을 부촉했다. “나와 그대들은 인천(人天)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이제 그대들은 이웃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전도여행을 시작하라.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며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은 설법을 하라. 나도 우루벨라 병장촌으로 가리라.”8) 8) 전도선언은 잡아함 39권 《승삭경》, 《불본행집경》 〈교화병장품〉, 《사분율》 32권 등에 나온다. 자료에 따라 표현은 조금씩 다르나 내용은 동일하다.


이 전도부촉은 바로 ‘출가비구’에게 내려진 교화와 설법의 명령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초기경전에는 출가비구가 부처님을 대리하여 설법도 하고 상담도 하며 괴로움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장면이 보인다. 잡아함의 《부루나경》은 푼나가 남인도로 전도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부처님과의 대화를 기록한 경전이고 《급고독경》은 병든 급고독장자를 아난다와 사리풋다가 차례로 찾아가 위로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셋째는 복전(福田)으로서의 역할이다.


출가비구는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재가자의 공양으로 생활하는 수행자다. 걸식은 기능적 측면에서 보면 공양을 올리는 사람 즉 재가자가 선행과 보시의 공덕을 짓도록 하는 행위다. 선행을 하고 싶어도 선행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면 그 대상자로서 수행자는 가장 훌륭한 복전이다.


중아함 6권 《교화병장경》에는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큰 공덕을 얻는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수행자가 바로 복전인 까닭이다. 이에 비해 재가중인 우바새(優婆塞, upasika)나 우바이(優婆夷, upasika)는 근사남 근사녀(近事男 近事女)란 번역어에서 보듯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가까이서 모시고 봉사하는 것이 가장 주된 역할이다. 물론 이들도 진리를 깨닫고 해탈을 추구한다는 목적의 측면에서는 출가중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세속에 살면서 전문적이고 적극적인 수행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출가자와 같은 전문적인 수행보다는 최선의 도덕적 생활과 보시를 통한 공덕주의가 강조되었다. 일종의 세속적 수행법이라 할 수 있는 이 가르침은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 불린다. 부처님은 최초의 재가신자인 야사 장자 부부를 비롯한 수많은 재가신자에게 차제설법을 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재가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9) 9) 재가자의 역할에 관해서는 김호성이 교수불자연합회가 주최한 ‘사부대중 관계정립 세미나’(2000. 5. 20)에서 발표한 〈우바새 우바이에 대한 인식의 변천사〉에서 잘 정리해놓고 있다.


첫째는 교단의 외호자로서의 역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불교시대에 건립된 많은 정사들은 모두 재가자의 보시와 기증에 의한 것이었다. 왕사성의 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헌납한 것이며 기원정사는 급고독 장자와 기타 태자가 지어서 기증한 것이다. 베살리의 암라원은 유녀 암바팔리가, 녹자모강당은 녹자모가 기진(寄進)한 정사다. 이들이 기증한 정사는 초기불교시대의 수행과 전도의 거점이 되었다. 경전은 여러 곳에서 이들의 보시를 격려하고 찬양하고 있다.


의복과 약을 보시하거나 수행자들이 걸식을 나오면 공양을 올리는 것도 재가자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율장의 〈의약건도〉나 〈의복건도〉는 재가자들의 보시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규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는 장례절차를 관장하기도 했다. 만약 재가자들의 이 같은 보시와 공양,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불교교단은 번성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재가자는 비록 승가의 구성원이 아니지만 교단 운영의 불가결한 후원자 또는 중요한 협력자였던 것이다. 둘째는 교화의 대상자라는 점이다. 부처님에게 있어 교화의 대상자 또는 설법의 대상자는 1차적으로 비구승가였다. 대개의 경전은 출가자를 설법의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재가자 대상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이는 경전의 결집자가 출가중이기 때문이지 재가자를 소홀하게 여겼기 때문은 아니다. 교화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재가자들의 비중이 높았다. 한편 재가자는 승가의 도덕적 청정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감시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만년의 부처님이 육군비구(六群比丘)의 말썽에 실망하여 코삼비를 떠나자 재가불자들은 더 이상 승가에 공양하거나 합장하기를 거부한 일이 있다.10)10) 최봉수 역, ‘분열과 다툼’, 《마하박가》 3권,(시공사, 1998) 290∼308쪽 참조.


계율 제정의 배경에는 재가자의 도덕적 감시를 염두에 둔 것도 있다. 이는 재가자가 일방으로는 교화의 대상이지만 일방으로는 승가에 대한 도덕적 감시자 역할을 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증거들이다. 셋째는 진리의 실천자로서의 모습이다. 재가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차제설법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수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비록 재가의 신분이나 가르침대로 수행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증일아함경》 3권 〈청신사품〉에는 40명의 우바새가 법의 증득자, 또는 훌륭한 수행자로 거명되고 있다. 또 〈청신녀품〉에는 30명의 우바이가 진리를 증득했거나 지혜가 뛰어나 존재로 거명되고 있다.11) 이러한 사실은 재가자가 비록 세속이라는 비수행적 환경에 처해 있지만 본인의 노력과 열성만 있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예라 할 것이다. 11) 한글대장경 《증일아함경》 53∼57쪽.


초기불교시대의 출가와 재가는 이렇듯 상호 보완적이며 상호 존중관계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양 받는 자와 공양하는 자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가졌다. 반면 종교적 측면에서는 설법하는 자와 설법을 듣는 자라는 불가분리의 관계였다. 또한 진리적 측면에서는 법의 상속자와 외호자로서 상호보완의 관계였다.


정리해서 말하면 수행과 설법과 같은 종교행위에서는 출가중이 지도자, 재가중이 추종자의 위치에 있다. 하지만 진리를 전파하고 교단을 외호하는 데는 재가중이 보다 중심적이고 출가중은 피보호적 입장에 섰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불교에서 출가중은 사람의 뼈와 같다면 재가중은 살과 같은 존재였다. 여기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는 희론(戱論)이 될 뿐이다.


3. 출가-재가의 위상변화 과정


1) 출가-재가의 기본적인 관계

초기불교시대 이래 불교교단을 구성하는 핵심은 어디까지나 출가중이었음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다.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출가자였고 그 교단인 상가 역시 출가비구와 비구니를 중심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후대의 변화된 현상을 예로 들어 불교교단을 ‘사부대중의 공동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지나친 자의적 확대해석이다. 불교교단이 왜 출가자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적 입장과 종교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불교의 교단적 성격은 교리와 종교환경이 배태한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교리적인 면을 살펴보면 불교는 세속적 삶을 무지와 욕망에 의해 고통을 재생시키는 윤회의 질곡으로 파악한다. 불교의 목적은 이러한 현실의 삶을 직시하고 초극함으로써 해탈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불교의 종교적 목적이 열반에 있다는 것은 곧 세속적 욕망의 포기 또는 극복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물론 불교도의 생활방식이 재가냐 출가냐가 열반과 해탈을 결정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재속의 신자라 해도 얼마든지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깨달음의 삶’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번뇌를 끊고 욕망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출가를 단행하고 전문적인 수행이 강조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적 환경적 배경으로는 불교가 인도라는 조건에서 발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도의 바라문교도들은 일생을 범행기(梵行記)·가주기(家住期)·임서기(林棲期)·유행기(遊行期) 등 4기로 나누어 생활했다.


이 전통은 인도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흥종교 수행자들도 여기에 준하는 생활을 했다. 부처님도 이 전통에 따라 출가했으며, 자신의 교단도 출가자 중심으로 구성했다. 출가의 전통이 없는 중국이나 한국사회는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출가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 그리고 이 전통은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확대되고 있는 오늘에도 여전하다.


2) 인도불교에서 출가 재가의 위상변화

그러나 이렇게 출가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불교사 전체가 그렇게 전개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출가주의적 교리해석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또 승원제도의 정착과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전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교단운영 방식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교리적인 변화는 대승불교의 흥기에 의해 일어났다.


대승불교는 출가불교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대중 구제를 소홀히 하는 데 대한 반성으로 시작되었다. 출가불교는 부처님이 입멸한 뒤 교리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번쇄한 이론만을 강조하자 재가자들은 불탑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새로운 종교운동을 뒷받침할 경전도 제작되었다. 이 경전들은 출가비구를 성문승(聲聞乘)으로 규정하고 대승불교운동의 주체인 법사 또는 보살승에 미치지 못하는 하열지배(下劣之輩)로 매도했다.12) 12) 소승에 대한 공격은 《법화경》이 특히 심하다. 〈방편품〉에는 증상만에 빠진 성문제자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장면이 나오기까지 한다. 한글대장경 《법화경》 24쪽 참조.


특히 《유마경》 《승만경》은 종래의 설법 주체인 부처님과 출가중을 제외하고 과감하게 거사와 왕비를 설주(說主)로 등장시켰다. 《유마경》에서 부처님의 상족(上足)제자들은 차례로 유마거사와의 법담에서 망신을 당하고 지혜제일 사리불은 천녀(天女)에게 혼이 난다. 《화엄경》의 경우는 젊은 구도자 선재동자의 스승으로 수많은 재가자가 등장한다. 선재가 찾아다닌 53선지식 가운데 비구·비구니는 겨우 7명인데 비해 우바새·우바이는 23명이나 된다.13) 13) 전해주, 〈입법계품 여성 선지식에 대한 고찰〉 《한국불교학》 23집(1997), pp.327∼330.


대승불교에서 재가자의 전면 등장은 교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불교의 수행은 바른 명상을 통한 바른 지혜의 획득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라면 출가냐 재가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는 그 조건이 유리하다는 것뿐이지 그 자체가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대승불교 사상가들은 이러한 각성을 바탕으로 출가불교의 형식성과 허위성을 비판했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교단적 변화는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돼 일어났다.


불교교단은 부처님 재세시부터 재가신자의 보시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출가자의 생산노동은 계율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소유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출가자의 소유 문제는 욕망의 억제라는 수행의 목적과도 관계가 있다. 출가자의 경제적 소유가 확대되면 필연적으로 타락이 초래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러나 이 같은 경제적 소유제한은 승원제도의 정착과 사회경제적 변화에 의해 무너져갔다.


출가자의 금전소지 등 10개항의 경제적 문제가 쟁점이 돼 율장을 다시 정리한 제2차 베살리 결집은 당시의 사정을 짐작케 하는 사건이었다. 율장정신에 배치된 경제적 소유를 비롯한 계율 문제가 느슨해짐으로 해서 출가중의 재가중에 대한 도덕적 권위도 조금씩 박약해져 갔다.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바로 계율의 엄정성에도 있다고 할 때 이 문제는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출가중의 위상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대승불교 시대가 열리면서부터다. 불탑을 중심으로 한 재가법사의 출현은 ‘법(法)’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왔던 출가중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됐다. 특히 대승불교의 새로운 종교지도자인 보살들은 불탑에 공양된 탑물(塔物)을 경제적 바탕으로 삼아 ‘보살가나’ 즉 재가교단을 형성했다.14) 14) 보살가나 성립 문제에 대해서는 塚本啓祥의 논문 〈대승의 교단〉(정승석 역, 《대승불교개설》, pp.255∼285) 참조.


재가자가 그 신분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교단의 구성원이 됐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불교교단에 재가이부중도 포함된다는 관념이 생긴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3) 동북아불교에서 출가 재가의 위상변화

중국불교의 교단적 상황은 이미 인도에서 정착된 승원제도를 그대로 도입하는 한편 중국적 특성에 맞도록 제도의 일부를 수정 또는 보완하는 쪽으로 전개됐다. 하안거만 실시하던 인도와는 달리 풍토적 특성을 반영한 동안거의 실시, 선종의 청규 제정과 총림제 실시에 따른 생산노동의 정당화, 장원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사찰조영과 사원경제의 확대 등이 이루어졌다. 특히 종파불교의 확립과 이에 따른 제도종교화의 길은 사찰운영방식에도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원주(院主)니 감원(監院)이니 하는 비출가적 직제는 출가자의 사찰재산 관리가 당연하다는 전제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제도불교의 출가승려는 수행자 직분 외에 재가불자의 복을 빌어주는 사제적(司祭的) 성격이 부가되었다. 물론 이런 성격은 이미 인도 대승불교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중국에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중국불교의 제도종교로의 발전은 긍정적 의미에서는 포교영역의 확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오늘날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한 데는 제도종교로서의 조직력과 사원경제의 확충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에서 본다면 출가불교의 세속화를 부추기고 승려를 타락시킨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불교 역사에서 사원경제의 비대화와 그에 따른 세속화의 경향은 필연적인 결과로 출가와 재가의 관계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무엇보다도 재가자의 몫이었던 사원경제의 관리 문제를 출가자가 담당함으로써 전통적인 역할분담이 무너졌다. 또 이로 인해 출가자의 타락이 심화되고 재가자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민간에서는 ‘승려가 돈을 보면 경전도 판다(和尙見錢經也賣)’ ‘지옥 문전에는 승려만 있다(地獄門前僧徒多)’라는 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15) 15) 권기종 역, 野上俊靜 외, 《중국불교사》, 동국대 출판부, 1985, p.252.


중국불교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세속의 왕권과 마찰을 빚으면서 출가불교의 권위가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문제는 인도불교에서도 그 흔적이 보이지만 인도의 경우는 특이한 종교적 환경 때문에 그 강도는 약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왕권의 권위가 매우 강조된 국가였다. 외래 종교인 불교는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다.


이 세상에서 천자(天子)가 가장 높다는 주장에 대해 불교는 부처님은 진리의 왕(法王)이며, 따라서 출가자는 왕에게 예배할 수 없다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미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던 출가불교의 저항이 얼마만큼 효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동북아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위상이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 결정적 변수였다.


비슷한 사정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경우 중국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그 제도까지 그대로 수용했다. 중국불교의 장점과 함께 약점도 고스란히 수용한 것이다. 특히 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일대에 걸쳐 사원이 봉건영주적 역할을 한 것은 불교의 세속화를 결정적으로 앞당겼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일어난 배불운동은 유교 윤리에 반하는 출가주의, 그리고 사원경제의 비대화에서 초래된 세속화와 타락의 인과응보가 그 이유였다.


불교사 전체를 놓고 보면 출가중의 타락과 세속화는 불교 자체의 흥망성쇠와 직결됐다. ‘승경법경(僧輕法輕)’이란 말처럼 출가중이 타락할 때 불교는 쇠락을 면치 못했다. 한 가지 흥미있는 현상은 출가중이 역사적으로 제 구실을 못할 때 재가불교가 발전했다는 점이다. 인도불교에서 흥기한 대승불교는 출가불교가 형해화(形骸化)하자 재가자에 의해 일어난 불교부흥운동이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가불교는 출가교단이 더 이상의 발전을 보이지 못하거나 타락적 현상을 보일 때 기승했다. 특히 청말(淸末) 이후에 출가 중심의 제도불교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자 재가거사에 의해 불교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좋은 예다. 현대 한국불교의 상황도 인도나 중국의 그것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 한국의 출가불교는 조선왕조 치하에서의 압제와 일제에 의한 식민불교 정책으로 인해 세속화와 타락의 길을 걸었다.


1954년부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화운동이 전개됐지만 운동과정의 문제점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1980년대 이후 수없이 반복된 종권분쟁은 왜곡된 정화운동의 산물이었다. 이에 신물을 느낀 재가불교는 신랄한 비판과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출가불교의 타락을 재가자가 바로잡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관계정립의 필요성과 방향


1) 현대 한국 재가불교의 상황

한국불교의 재가신자 수는 통계에 따라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략 1천만 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16) 16)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9년 현재 우리 나라 15세 이상 인구 중 종교를 가진 사람의 비율은 53.6%이며 종교별로는 불교가 26.3% 기독교가 18.6%, 천주교가 7.0% 순이다.(1999년 사회통계조사보고서(통계청, 2000. 8), p.229.)


일부에서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불교신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찰의 신도등록카드가 이중삼중으로 된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또 실제적 영향력이나 위상도 타종교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타종교와의 비교가 아니라 불교 자체의 기준으로 본다면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재가불자가 정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현대와 같은 높은 수준을 보여준 예는 일찍이 없었다.


신라가 한국불교의 황금기를 구가했다고 하지만 재가불교의 수준만을 놓고 본다면 현대보다 찬란했다는 정황을 찾기가 어렵다. 현대 한국의 재가불교가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 월등한 수준인가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입증한다.


첫째는 교리 이해 수준의 놀라운 향상이다. 한국불교는 해방 이전만 하더라도 정기법회와 같은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신도교육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교신도의 신앙내용은 초하루, 보름 또는 초파일과 같은 명절에 절에 가서 불공을 하고 소원을 비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많은 불교전설은 어떤 사람이 절에 가서 기도를 했더니 소원이 성취되더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큰스님을 만나 수행을 해서 도를 이루었다는 얘기를 찾아보기 힘들다.17) 17) 최정희가 쓴 《한국불교전설 99》(우리출판사, 1981)는 우리 나라 사찰과 지명에 얽힌 전설 99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중 수행과 관련된 설화는 10여 편에 불과하다.


또 우리 나라 고승 197명의 생애를 기록한 《동사열전》을 보면 고승들이 스님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보이나18) 재가자를 위해 법석을 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재가자를 대상으로 한 설법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기록 자체가 희소하다는 것은 이 분야를 얼마나 소홀하게 생각했느냐를 짐작케 해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상황은 매우 달라졌다.18) 梵海 撰, 《東師列傳》 제2권 月渚宗師傳, “每擧揭宗風 座下聽衆 常不下數百人 法席之盛……” 제3권 喚醒宗師傳 “橫說竪說 毫分縷析 浩然若江河之決 衆開豁然開悟 由是四方緇徒 靡然雲集……”


한국불교는 최근 100여 년 사이 사찰마다 법회를 개설하고 대중을 상대로 설법을 하는 정기법회를 정착시켰다. 도심에 포교당이 건립된 것은 일제 때의 일로 정기법회의 모형은 서양에서 전래된 기독교에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정기법회제도의 도입은 한국의 재가불교가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많은 불교신자들은 맹목적인 불교 신앙 대신 정법에 눈을 뜨고 실천수행에 나서게 된 것이다.


재가불교의 불교공부가 눈에 띄게 성장세를 보인 것은 1962년 조계종의 통합종단 출범 이후부터였다. 종단은 불교현대화를 위해 포교·역경·교육을 3대 과제로 정하고 종단이 종비생 제도 실시, 포교사 양성 등으로 포교인력을 배출하고 군에까지 법사를 파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재가불자들은 불교의 정법을 이해하는 ‘새로운 불자’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1985년 이후부터 시작된 교양대학 붐은 재가불자 교육의 전기였다.


2000년 8월 현재 조계종 포교원에 등록된 전국의 크고 작은 교양대학 수는 58개에 이르고 여기에서는 매년 1만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다.19)19) ‘교양대학 실태조사 보고’, 월간 《법회와 설법》 2000년 8월호, pp.106∼134 참조. 재가대중의 교리 이해 수준 향상은 바른 신행의 정착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전면적 변화를 주도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둘째는 지식인 불자 그룹의 형성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불교계는 지식인 불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과거에도 불교신자 가운데는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그 숫자는 미미한 정도였다. 지식 습득의 수단인 불서출판이 원시적 상태에 있었으므로 지식인들의 불교 접근 통로 자체가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불교계는 출판사업이 활성화되면서 수많은 현대적 불교서적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20) 20) 불교서적 간행추이는 1989년 170종에서 1999년 240종으로 10년간 약 30%의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80년도 이전의 불서출판에 비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비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관한 자료는 윤재승의 〈불교출판의 현황과 과제〉 《출판연구》 11호(1999, 12) 참조.


특히 선진 불교학계의 연구성과를 국내에 소개하는 불교출판사들의 노력에 의해 지식인들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를 높여 나갈 수 있었다. 출판사업의 활성화는 포교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놀라운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지식인들은 불교적 지식의 습득을 하나의 문화적 조류로 인식했고 출가승려에게 독점되었던 불교교리나 지식을 대중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특히 지식인들의 불교 이해와 이에 따른 종교적 귀의는 재가불교운동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 종래까지 재가불교의 지도자 그룹은 명망 있는 재력가나 정치인들로 형성돼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한국불교에는 지식인 그룹이 불교운동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재가불교는 개인의 신앙생활의 차원을 넘어 정토사회 건설을 위한 종교적 사회운동의 성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셋째는 재가단체의 조직화 현상이다. 재가불자들이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때부터다. 조선불교부인회 등의 이름으로 결성된 이 단체들은 주로 전시 일본의 후방을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어용단체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 조직된 신도단체는 종단의 정화운동을 지원하며 신행단체 본래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재가단체의 조직화가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전국신도회·대한불교청년회·대학생불교연합회 등 전국 규모의 재가단체가 건설되면서 한국불교의 재가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재가불교운동에 매우 중요한 인자였다.


전국의 대학별로 조직된 대불련은 매년 수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재가불교운동의 중추세력을 공급하는 파이프라인 구실을 해냈다. 1980년대 이후 수많은 재가단체가 조직되고 불교교단에 일정한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대불련 출신들이 기성재가단체에 가입하거나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는 데 주역을 담당한 공로에 의한 것이다. 불교계의 사회운동 주도세력 역시 대불련 출신 재가불자들이었다.


1980년대의 민중불교운동연합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진보적 출가승려와 결합하여 끊임없이 종단개혁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불교개혁운동에도 앞장섰다. 1994년 종단개혁 이후에는 조계종 중앙집행부의 종무원으로 대거 진입하여 각종 개혁프로그램의 개발과 추진에 나서고 있는 것은 이들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대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넷째는 출가불교의 지도력 상실과 재가법사의 등장이다. 한국의 출가불교는 재가불교의 비약적 성장과는 반대로 20세기 후반을 분쟁과 일탈로 일관했다. 한국의 출가불교는 해방 이후 무려 40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종권분쟁에 휩싸임으로써 스스로 승가의 권위와 도덕성을 추락시켰다.21) 21) 김경호, 〈조계종 종권분쟁 연구〉(《불교평론》 2000년 봄호), pp.332∼366 참조.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저발전은 바로 ‘종권다툼’으로 요약되는 출가불교의 비승가적 분쟁에 원인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세기 동안 출가불교의 타락과 일탈은 한국불교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재가불자들의 각성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재가법사의 등장이다.


특히 정보독점체제의 해체에 따른 교리학습과 연구의 대중화 경향은 더 이상 출가중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는 출가교단이 부족한 포교인력의 확충이라는 명분으로 포교사를 배출한 것도 큰 몫을 했다. 이를 계기로 능력 있고 열렬한 재가중 가운데는 아예 전문적인 법사를 택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출가중의 지도나 간섭을 받지 않는 재가중을 중심으로 한 신행단체가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일종의 운동적 성격을 갖는 이 물결에는 대학에서 불교학을 전공한 교수, 전역한 군법사, 종단에서 배출한 포교사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한국불교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기정사실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불교의 현재적 상황은 마치 2천여 년 전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하던 때와 비슷하다. 초기대승불교시대의 진보적 재가중은 보수적 출가중에 대해 교단의 혁신을 요구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보살가나를 성립시켰다.


조건과 환경은 다르지만 한국불교의 재가불교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귀결될지는 아직 예단이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로 인해 재가와 출가의 상호관계 재정립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어정쩡한 상태로는 변화된 현실을 반영할 수 없을 뿐더러 불교발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출가-재가의 바람직한 관계 모색

한국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역할과 관계 재정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신도회가 1961년 3월 ‘정화과업 완수와 교단재건안’을 제출하면서부터다. 이 안은 종권을 영도권(領導權)과 운영권(運營權)으로 나누고 영도권은 출가중이, 운영권은 재가중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중앙종회를 상하양원으로 구성하고 출가중은 상원, 재가중은 하원에 소속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22) 22) 상하 양원제는 최초로 대처승을 포섭하기 위해 발의된 것이었다. 즉 출가비구는 상원, 비구가 아닌 대처와 재가중은 하원에 소속시키자는 것이다. 이 안은 나중에 출가중으로 구성되는 상원, 재가중으로 구성되는 하원으로 구성하자는 안으로 발전했다. 이에 대해서는 김광식의 논문 〈전국신도회의 조계종단 혁신개혁안 연구〉(《불교평론》, 2000년 가을호)에 그 전말이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이후 재가중은 기회 있을 때마다 ‘명실상부한 사부대중의 종단’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최근에는 불교교단이 출가중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불자와 중생을 위한 것이라면 재정운영을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돼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23) 23) 김응철, 〈사부대중 참여에 의한 사찰운영방안 모색〉(재가연대 정책심포지움 자료집), pp.33∼44 참조.


재가중의 종단운영 참여 요구의 근거는 조계종 종헌 7조의 ‘종단은 사부대중으로 구성한다’는 규정이다. 종헌의 입법정신에 따른다면 종단운영은 당연히 사부대중이 참여해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위법인 종법은 모두 출가승단의 운영에 관한 것뿐이다. 재가중의 종도로서 권리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으며 종단운영 참여는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종책결정에 재가자의 의견을 반영할 창구가 없다. 재가자는 이 점이 불만이다.24) 24) 배영진, 〈교단혁신과 불교자주화〉(불교혁신과 자주화를 위한 대토론회 자료집), p.27.


그러나 출가중은 이 문제에 대해 적지 않은 거부감을 나타내 왔다. 공개적인 언급은 없지만 출가중은 종단의 개념을 승가공동체로 제한해서 해석하고 있다. 출가중이 재가중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은 재가중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격이 없는데도 출가승단 운영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다. 과거에 제기된 ‘상하원 양원제’나 최근에 제기된 ‘사부대중 공동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분석된다. 출가와 재가의 각기 상반된 입장에 대해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곤란하다. 원칙론적으로 본다면 재가중이 출가승단에 참여해 ‘감 놔라 배 놔라’ 할 근거가 없다.


재가중은 동일 계율을 지키며 통제 가능한 곳에 모여 사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현실론적으로 본다면 종단운영에 재가중이 일정부분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측면이 많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출가중이 세속적 잡무에 시간을 빼앗기기보다는 재가중에 일임하고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의 주장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원칙론과 현실론을 조화시키려는 발상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재가와 출가의 새롭고 바람직한 관계정립은 여기에서부터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불교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 초기교단을 구성할 때의 정신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부처님 당시 초기교단에서 출가중과 재가중의 역할은 전문화 분업화되어 있었다. 즉 출가중은 수행에 전념하고 그 결과를 재가중에게 설법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에 대해 재가중은 성심을 다해 출가교단을 외호하고 공양하는 것이 임무였고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출가와 재가가 선택할 방향은 ‘임무와 역할을 나누되, 협조와 화합의 마당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당위적 결론밖에 없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방안들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25) 25) 출가-재가의 바람직한 관계정립을 위한 논의는 1998년 종단사태 이후 재가중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재가연대는 ‘사찰재정투명화’를 위한 정책심포지움(1999. 6. 24)을 통해 이 문제를 조명했으며, 자주권수호를 위한 범불교서명운동본부의 토론회(1999.11. 13), 미래를 열어가는 사부대중공동체 창립추진위원회의 창립준비토론회(1999. 6), 교수불자연합회의 ‘사부대중 관계정립 과제’ 세미나(2000, 5. 20) 등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다.


첫째, 출가중의 역할을 수행과 교화로 전문화하는 것이다. 출가중은 전통적으로 불교교단의 중심이며 수행과 교화의 사명을 가진 그룹이다.26) 26) 일부에서는 출가중을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또 출가중의 기본적 사명이 수행과 교화에 있으므로 이를 분리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출가중이 재가중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교리적 설명만이 아니라 도덕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부처님이 많은 재가자를 교화할 수 있었던 것은 철학적 이론만을 가르쳐서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감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불법의 적장자이자 부처님의 대리자를 자임하는 출가중은 마땅히 이러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모든 출가중은 대중설법의 자질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회피하거나 나태해서는 안 된다. 출가중이 만약 이런 역할에만 충실한다면 종교적 권위는 물론이고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둘째, 사찰운영과 같은 세속적 업무는 재가중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재가중은 역사적으로 교단을 외호하고 출가중을 공양하는 것이 그 역할이었다. 이것은 초기교단 이래 현재까지 어떤 형태로든 재가중이 해온 일이었다. 다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승원제도의 정착 이후 출가중이 승단과 사찰의 살림을 직접 관장해온 것은 사회환경적 요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불러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재물을 가까이 함으로써 출가중을 세속화시키고 타락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최근 한국불교에서 자주 보이는 출가승단의 분쟁은 잿밥을 위한 싸움이 본질이었다. 이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지금까지 해온 재산관리와 같은 세속적 잡무를 과감하게 재가중에게 환원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종무기관에 재가자가 종무원으로 배치되어 비교적 책임이 덜한 실무적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좋은 모형이다. 일부 사찰이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재가자들이 절살림을 책임지게 하고 스님은 관리감독만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운영위원회 제도를 도입한 일선 사찰의 경우 불자들의 관심과 참여의식도 높고 사찰재정을 안정적 운영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보고27)는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이미 종법으로도 규정28)되어 있는 이 제도는 하루 속히 전면적인 시행이 필요하다. 27) 최연, 〈사부대중 참여에 의한 재정투명화 사례〉(재가연대 정책포럼 자료집), pp.45∼48 참조. 28) 조계종은 1994년 종단개혁 때 전문 7조 부칙 3조의 ‘사찰운영위원회법’을 제정, 모든 사찰이 승려와 신도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를 통해 사찰을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셋째, 재가자의 설법이나 출가자의 의식집전은 불교의 근본정신과 전통에 의해 재정리하는 문제다. 재가법사의 설법문제는 출가중 중심으로 구성된 교단에서는 원칙적으로 적절치 않다. 설법은 출가자의 도덕적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관계의 재정립과 역할을 분담한다는 차원에서도 이 점은 재고돼야 할 것이다.


다만 재가자가 대승불교 흥기시대의 보살가나처럼 별도의 교단을 만든다면 이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재가법사는 설법이 아니라 교리강좌나 강연을 맡기는 것이 순리에 맞다. 지금의 종립대학의 교수들이 교리를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것과 같은 역할은 재가자에게 얼마든지 문호를 열어도 무방하다. 그러자면 우선 교단 안에서 ‘설법’과 ‘강좌’가 어떤 차별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부터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불공이나 예불과 같은 공양의식 집전은 오히려 재가자에게 허락하는 것이 옳다.


불공은 글자 그대로 재가자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이 의식에 출가중이 사제와 같은 존재가 되어 매개하는 것은 교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출가중은 귀의의 대상이 되는 삼보의 하나이지 부처님과 중생을 매개하는 무당(司祭)과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공이나 귀의의식의 집전을 재가자에게 허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부처님이 열반하자 장례절차인 다비의식을 재가자가 주관했던 사실은 의식문제를 논할 때 상고(尙古)할 만한 사례다. 다만 절차나 그 방법은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넷째, 재가중과 출가중이 한자리에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기구를 만드는 방법이 검토되어야 한다. 출가와 재가의 관계나 역할이 교단운영에 관한 한 그 최종결정은 언제나 출가중 쪽에서 하도록 되어 있다. 불법의 상속자인 출가중이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재가의 전문가가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재가중 의견수렴 창구의 제도화를 추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출가교단이 이를 묵살하니까 재가중이 중앙종회와 같은 출가중의 갈마(�磨)결사체에 재가중이 들어가야 한다는 어불성설의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29) 아예 재가자 중심의 교단을 세워야 한다든가 출가교단을 재가중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식의 승가권위를 부정하는 발언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29) 배영진, 전게논문, p.25.


반드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도 재가자의 건설적인 의견 청취를 제도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측면이 더 많다. 부처님 당시 빔비사라 왕이 외도들의 설법의식을 본받아 불교교단도 포살(布薩)제도를 시행하자고 건의하자 이를 채택한 사실은30) 이 문제를 풀어가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가 될 것이다. 30) 최봉수 역, ‘포살의식’, 《마하박가》 2권(시공사, 1998), pp.32∼33. 한편 안거(安居)제도가 생긴 것은 농부들의 불평을 들은 후부터였다. 어느 해 장마철에 물이 넘쳐 길과 논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는데 비구들이 유행을 하면서 논을 밟아 농사를 망치게 됐다. 이로 인해 비난이 일자 우기에는 안거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같은 책, pp.130∼132 참조)


5.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이 글의 목적은 부처님의 2대 제자그룹인 출가중과 재가중이 불교발전을 위해 어떻게 상호협력할 것인가를 추구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출가와 재가는 어떤 관계였으며 역사적으로는 어떤 변화를 거쳤는가를 고찰함으로써 현대 한국불교의 상황 아래서 지향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출가와 재가는 기본적으로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었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승불교의 흥기의 원인에서 보듯이 한때는 교리적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본질은 출가와 재가가 어떻게 더 불교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다. 이러한 취지가 현대라고 해서 달라질 이유는 없다.


여기서 한국불교가 다시 한 번 냉철하게 깨달아야 할 점은 출가와 재가가 협력을 도외시하면 성장과 발전이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전문화·분업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종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행한 것은 불교의 경우 이 문제는 원칙적으로 전혀 우려할 일이 아니다. 초기불교 이래 출가와 재가는 위상과 역할이 매우 분명했다. 출가중은 불교교단의 중심으로서 수행과 교화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가중은 출가중의 지도를 받으며 외호하는 역할이 부여돼 있었다.


이는 출가와 재가의 신분적 한계, 그리고 전문성을 고려한 역할분담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할분담의 원칙을 어떻게 현재적 상황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를 위한 가장 건설적 대안은 우선 상호 이해의 폭을 넓이는 것이다. 우선 재가중은 출가중이 불교교단의 핵심적 존재이며 그 권위는 어떤 경우에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출가중 가운데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더 많은 출가중은 아직도 수행정진과 교화에 전념하고 있다.


불교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박해와 법난을 경험하면서도 정법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은 것은 출가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가중은 우선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출가불교를 비판하려면 과연 재가중은 그만한 도덕적인 수준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반성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자기검증 없이 출가승단을 비난하려 한다면 이는 상호불신만 높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특히 재가불교운동을 지도하는 사람들일수록 이에 대한 자기검증과 반성이 절실하다.


반면 출가중은 재가중이 불교교단을 존재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울타리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점차 넓어지고 있는 심정적 거리를 좁힐 수 있다. 아울러 솔직한 자기반성도 있어야 한다. 과격하게 말하면 지난 세기 동안 출가중이 보여준 모습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실망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출가중의 분쟁이 보기 싫어 절에 나가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대한 자기반성이 없으면 재가중에 대한 출가중의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근거가 없다. 출가와 재가는 이렇게 ‘원칙’과 ‘현실’을 인정하면서 본연의 역할과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이 기본이 지켜지지 않으면 출가와 재가가 반목하게 되고 상호관계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출가와 재가가 각기 어떤 역할과 협력관계를 가져야 할지는 이미 해답이 나와 있다. 다만 현실적 적용을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할지는 양자가 엄정한 자기성찰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과 합의를 도출해 내야 할 것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