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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와 돈오를 넘어 새 정체성 만들기

slowdream 2007. 9. 23. 03:44
 

간화와 돈오를 넘어 새 정체성 만들기



한형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한형조

서울대 철학과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전한국학부 교수. 저역서로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화엄의 사상》 《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등이 있다.


이 글은 간화선 중심의 한국 불교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불교와 선(禪)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자는 취지의 글이다. 나는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에서 선의 전통과 화두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기술한 바 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그 책부터 일별하기를 권한다. 그 가운데 특히, ‘책을 묶으며’에서 제시한 장문의 몇 논설들(20, 22, 29, 31, 32장)은 다음에 전개하는 논지의 토대이다. �이 논문은 〈불교신문〉이 주최한 ‘간화선 대토론회’(2000년 10월 24일)에서 발표된 것임.



1. 불교의 도구적 실용주의


불교는 실용주의에 철저하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진리나 유일한 방법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불교는 도그마일 수 없다. 불교의 어법은 “무엇은 무엇이다.”가 아니고, “네가 무엇 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유용할 것이다.”의 형식을 취한다. 이 상대적 도구적 ‘언설(言說)’관이 종교적 종파적 갈등을 막으면서 불교를 유연하게 혁신시켜 온 힘이다.


가르침으로서의 불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므로――절집의 화법으로 말하면, 그것은 ‘방편(方便)’이지 ‘구경(究竟)’이 아니므로――불교는 결국 자신의 언설마저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런 종교는 다시 없을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열반의 시에서 “나를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라고 했고, 선의 전통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과격한 신성모독을 제창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힘이야말로 불교의 창조력의 근원이다.


1) 불교의 약상자에는 수많은 약이 있다


불교의 궁극적 관심은 윤회를 떠나 열반에 이르는 데 있다. 그렇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은 단일하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불교는 구원이라는 관심의 궁극성과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곳에 이르는 다양한 ‘근기(根機)’의 현실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구체적 현실성’에 입각한 ‘특정하게 유효한 방법’들은 다양하고 또 상황적이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역사는 그 ‘방편’들의 발전과 재해석의 역사이다. 그와 더불어 불교의 약상자에는 수많은 약이 보태졌고, 불교는 점점 더 유능한 의사가 되어 갔다.


그러나 2,600년을 지내오면서 그 수많은 약과 노하우들 가운데 어떤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잊혀지거나 폐기되었고, 어떤 것은 발전되고 혁신되었으며, 어떤 것은 새로운 처방으로 창안되었다. 불교가 다른 지역에 전파될 때 이 약상자는 더욱 급격하게 요동치고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되었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불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시아는 물론 세계로 전파되는 생명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2) 선(禪)은 불교의 혁신적인 처방전 가운데 하나이다


선은 중국이라는 이질적 문화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불교의 처방전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불교의 역사에 있어 너무나 파격적이고 급진적이어서 인도 불교의 전통에서는 이를 도무지 불교의 이름으로 인정해야 하느냐는 의혹이 제기됨직한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자연적이고 현실 중시적 사고가 인도의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접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학자적 해석이고, 방편론적 관점에서 선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제창되는 ‘교학(敎學)의 부정’에 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근원적 틈을 ‘이론을 폐기하고 오직 실천만’을 통해서 메워 보려는 종교 운동이었다. 선은 더 이상 불교의 형이상학적 모델이나 심리학적 분석에 시간을 쪼개지 않고, 단도직입적 훈련을 강화시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을 표명했다.


선은 이처럼 ‘이론적 교학의 발전’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유일한 배경은 아니다. 선은 당대(唐代) 불교의 ‘비대해진 경제력’ ‘관료화된 제도’ ‘의타(依他) 불교의 번성’ 등을 근원적으로 반성하고 초기의 불교정신을 회복시키려는 종교혁신운동이었다.



2. 선(禪)의 이론과 실천


1) 선은 3학 가운데 지혜와 계율의 전통을 버리고, 선정에 집중했다


불교는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 세 가지 길, ①계(戒:계율), ②정(定:선정) ③혜(慧:지혜)를 제시했다. 그러나 선은 불교가 ‘지혜의 이름으로’ 발전시킨 고원한 형이상학이나 심원한 심리분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무명 속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지혜’를 버리고, ‘계율’을 밀치며, 오직 ‘선정’에 집중했다. 선은 붓다의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에서 아비달마의 세계 분석, 중관(中觀)의 진리 변증과 유식(唯識)의 정신분석이라는 불교사의 장관을 ‘한가한 잡담’으로 돌린 것이다.


이들을 끌어안고 진리를 찾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은 그 발전단계에서 계율을 상대적으로 경시하고 때로는 부정했다. 선은 ‘자신의 진리관에 의해’ 기존의 격식과 관행을 무시했고, 이것이 우리가 선에서 곧바로 연상하는 고의적인 기행과 파격으로 나타났다. 선은 선정을 남겨 여기에 집중했다. 선이라는 이름이 선정을 말하는 ‘드야나(dhya?a)’의 음사인 것은 바로 그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선가에서 선을 드야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 판단이다. 선은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서의 좌선에서 출발했다. 혹은 선의 중심은 좌선이다.


2) 좌선에서 출발한 선의 정체성 확립:신수의 점수에서 혜능의 돈오에로


좌선에서 시작한 선이 자각적 전통으로 정체성을 얻게 되는 것은 육조 혜능(慧能)에 이르러서이다. 선의 독자적 실천 목표와 방법이 이때 정초된다. 초기에는 선정을 중심으로 한 신수(神秀)의 북종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8세기 이후, 신회(神會)의 노력으로 혜능의 남종이 선의 주류가 되면서 선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신수는 선정의 기본 목표와 방법에 충실한 점수(漸修)를 내세웠고, 혜능은 내적 자각을 통해 궁극적 차원에 일초직입(一超直入)하는 돈오(頓悟)를 창시했다. 돈오는 육조의 선의 중심이 되었다. 이를 혜능의 고제인 남악회양(南嶽懷讓)과 그의 제자인 마조도일(馬祖道一) 사이의 일화에서도 선명히 읽을 수 있다.


마조는 처음 ‘좌선을 통해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남악은 그를 향해,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못 만들듯이 좌선으로는 궁극에 이를 수 없다.”고 질타했다. 놀란 마조가 가르침을 청하자, “진리는 좌선이나 격식에 매이지 않는다.”며, 그런 부자연스런 작법(作法)은 오히려 진리를 질식시키는 행위라고 일갈했다. 이 일화가 ‘선정(드야나)에서 독자적 선’으로, ‘점수에서 돈오로’ 향하는 결정타가 되었다.


3) 돈오의 발전과 화두의 등장


그동안 불교는 돈오를 이념으로 설정했지만, 그에 이르는 방법은 모두 점수에 의존했다. 그런데 혜능 이후 선은 방법까지 ‘돈오’에 의지하게 되었다. 방법으로서의 돈오는 이전의 불교 전통에서 일찍이 실험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렇게 제창된 방법은 워낙 미묘하고 난해하고 까다로웠다. 그것은 일상과 구경(究竟) 사이의 거리를 매우 가깝게 설정한 돈오의 필연적 결과이다.


누가 “저 강물 소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선은 ‘집단적으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발전되었다. 교단을 조직하거나 교설을 체계화하지 않았고, 더구나 일정한 방법적 지침에 대한 합의도 마련되지 않았다. 선의 발전은 오로지 선사들의 개성적 지도력에 맡겨져 있었다.


이것이 선의 영광이면서 또한 쇠퇴를 예비했다. 선은 ‘불립문자’를 기치로 내건 이상, 교리와 방법을 체계화할 수 없었다. 선의 생명이 활발발(活潑潑)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선이 당대(唐代)의 융성을 지나 쇠락의 조짐을 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문자로 기록하고’ ‘경전으로 확정할’ 필요를 다급하게 느꼈다.


《전등록(傳燈錄)》 등 선의 역사서들과, 《벽암록(碧巖錄)》 등 선의 방법론으로서의 ‘화두(話頭)’가 이렇게 출현했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역사의 기록과 화두의 제창은 위기의 시대, 선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지만, 또 달리 보면 선의 정신으로부터의 일탈 혹은 타협이다.



3. 불교와 선, 그리고 화두 사이


화두(話頭)는 선의 전통에서 돈오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화두는 불립문자를 표방한 선의 전통 위에 있으면서도, 한편 그동안 선이 발전시켜 온 다양한 대안적 교설과 수련까지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과 화두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선의 전통은 화두 외에도 다양한 가르침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정돈해 보고 가야겠다. 나는 ‘불교와 선, 그리고 화두와의 관계’를 이렇게 읽는다.


1) 불교와 선의 ‘정신’은 일치한다


선은 불립문자를 표방했지만, 불교 전통의 이념과 정신을 공유한다. 그 차이는 번잡하냐 간명하냐, 논리적이냐 직각적이냐, 산문적이냐 경구적이냐의 ‘정도’ 혹은 ‘문체’의 차이일 뿐이다. 선은 불교의 근본정신을 벗어나지 않는다. 초조(初祖) 달마(達磨) 이래 고승들의 수많은 수련지침서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선의 이념과 방법의 개략을 ‘간명하게’ 핵심만 추려 적은 것이다.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은 선 또한 언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실천’ 이전에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문로(門路)의 차제(次第)를 설정했다. 행입(行入) 이전에 이입(理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구체적 실천에 앞서 과연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무엇을 향해, 그리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달마의 《이입사행론》과 황벽(黃蘗)의 《전심법요(傳心法要)》, 그리고 일숙각(一宿覺)의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은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나 원효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과 동일한 계열의 것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가리켜, “수천 년 교학의 발전 단계에서 지나치게 비대한 교학의 전통이 오히려 궁극적 관심에 이르는 길을 막고 있으니 이를 핵심만 간추려 불교의 문법 혹은 설계도를 제시한 책”이라고 말했다.


선은 불교가 교학에서 응축으로 돌아서던 바로 그 진행의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의 ‘암묵적’ 교학은 불교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2) 불교와 선의 차이는 그 목표에 이르는 ‘방법’에 있다


그 방법 가운데 초기의 점수는 이전의 불교 전통과 연속되어 있지만, 후기의 돈오는 이전과는 다른 독창적 혁신이다.


① 연속:선의 교학적 간명화는 직접적 수련에 몰두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그래서 처음 선은 ‘계율’과 ‘지혜’보다 선정을 중시했다. 선의 초기, 점수는 이전의 불교 전통을 충실히 지킨 것이었다. 가령 신수의 게송은 고타마 붓다 이래 호흡법과 명상법, 그리고 구상관(九想觀) 등의 다양한 법식, 그리고 그를 집대성한 《청정도론(淸淨道論)》의 연장선에 있다. 이 점에서도 선은 이전의 불교 전통과 별다른 단절이라고 볼 수 없다.


② 단절:선의 독자성은 ‘돈오의 방법’을 제창한 데 있다. 혜능을 기점으로 돈오를 기축으로 하게 되면서 다양한 수련법이 제시되었다. 이 돈오의 방법은 선장마다 나름의 개성을 보이는데, 그 기본 발상과 토대는 비슷하다. 그것은 ‘무명의 오염된 세계와 열반의 궁극적 세계의 차이’를 일거에 뛰어넘으라고 권한다. 그 전통은 부처와 중생 사이의 거리를 매우 근접시켜 놓았다.


이에 이르기 위해 혜능은 “부모 이전의 네 자신의 얼굴” 즉 자신의 영원한 본성을 즉각 낚아 채라고 권했다. 마조는 “네가 곧 부처다(心卽是佛).”라고 했으며, 임제(臨濟)는 “네 정신과 육체가 바로 절대이다.”라고 말하고, 운문(雲門)은 “부처가 나타나면 몽둥이로 때려라.”라고 일갈했다. 이전까지 불교는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백억 겁에 걸쳐 선근(善根)을 닦고 제업(諸業)을 정화해야 비로소 엿보일까 말까 하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돈오의 선은 이 거리를 일소에 부침으로써 명실상부한 독자적 전통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길은 위태롭다. 지속적이고 가열찬 수련의 의미 자체를 무화시키고 작용시성(作用是性), 인간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낙관론의 비도덕적 위험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내가 간화와 돈오의 방법을 비판하는 근본 취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화두는 돈오의 발전이면서 위축이다


돈오의 길은 오직 훌륭한 스승의 지도가 인도할 수밖에 없다. 이 방식은 근본적으로 사적(私的)이다. 제자는 자신의 내적 본질의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지평을 확인하기 위해 홀로 고투하고, 스승은 이를 지켜보면서 빗나간 점을 바로잡고, 뒤쳐진 걸음을 재촉하는 역할을 했다. 줄탁지기(啄之機), 이 수련법은 스승의 개성이나 산문의 가풍은 있어도 선의 이름에 걸맞는 보편적 방법론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뛰어난 스승이 없을 때, 그리고 스승에 대한 제자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을 때, 돈오의 수련은 위축되거나 소멸한다. 당말(唐末), 선은 그 쇠퇴기를 맞아 돈오의 방법을 사적 관계에서 공적 관계로, 주관적 방식을 객관적 정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었던 활발발한 거래가, 선이 그렇게 꺼리던 문자로 정착되어 ‘공적(公的)’인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 부른다. 간화선은 일찍이 과거에 있었던 어느 스승과 제자 사이의 역사적 일화를 지금 나의 상황으로 감정이입시켜 수련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개관을 해 본 것은 ‘화두’가 선의 전통 가운데 ‘돈오’의 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선의 전통을 대표하거나 집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화두법은 불교의 약상자에 들어 있는 처방전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유일하고, 가장 뛰어난 수련법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뛰어난 선장(禪匠)의 지도에 따라 화두를 지속적으로 파지(把持)하면 어느 날 우리를 옭죄고 있던 칠통(漆桶)이 부서지고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화두법은 ‘준비를 마친’ ‘최상승의 예외적 근기에게만 유효한 처방’이지, 보통의 학인이나 말법(末法)의 중생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절대적 처방이란 없다. 불교의 모든 언설과 방법은 늘 ‘어떤 것에 대해서’라는 병근(病根)을 전제하고, 또 ‘누가 하느냐’라는 근기(根機)를 고려하는, 방편적 입각을 떠나서는 안 된다. 나는 여기에 아울러 시대와 역사와 상황이라는 조건을 더 보태고자 한다.


4) 화두에는 ‘의미’와 ‘무의미’의 두 차원이 공존한다


이제 방법으로서의 화두를 살펴보기로 하자. 화두에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물음이다. 전통적으로 선가에서는 화두에 의미가 없다고 역설한다. 의미를 확인하거나 부여하는 순간, 화살은 십만팔천 리 서역으로 날아가고, 뒤통수에는 몽둥이 세례가 터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면적 진단이다. 의미의 층위는 흑백의 양단을 갖는 것이 아니고, 아날로그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나는 화두가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주(趙州)의 ‘무(無)’는 확실히 ‘무의미’를 향해 있다. ‘뜰 앞의 잣나무’는 ‘의미’ 쪽에서 읽을 수도 있고, ‘무의미’ 쪽에서 읽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마조(馬祖)의 ‘심즉시불(心卽是佛)’이나 ‘심불시불(心不是佛)’, 그리고 ‘비심비불(非心非佛)’은 분명히 의미 쪽이 두드러진다. 화두에 내포된 의미와 무의미의 층위는 이렇다.


① 의미:전통적으로 이 측면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화두를 ‘해석’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선가의 전통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심즉시불이나 심불시불·비심비불은 불교가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간명한, 그렇지만 파격적인 ‘진술’이다. 이 진술은 돈오, 즉 구원과 일상이 하나이고, 열반과 무명(無明)이 둘이 아니라는 돈오의 진실을 표명하고 있다.(물론 그 ‘경지’를 어떻게 성취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심즉시불이라는 ‘화두’의 ‘의미’라면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이 그 교설은 불교 일반의 그것과 취지를 같이 한다. 즉 심즉시불은 아비달마가 제창하는 세계에 대한 비인격적 인식이나,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반야(般若) 지혜, 그리고 화엄의 법계(法界)에서 원효의 일심(一心)과 지눌의 진심(眞心)을 통관하는 가르침이다.(그러므로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 화두와 선을 알려면 불교 일반의 전통을 알아야 한다!) 화두는 이 점에서 불교 일반의 전통과 선의 간명한 취지와 다른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다고 보기 힘든다. 문제는 화두의 ‘무의미’의 차원이다.


② 무의미:돈오는 불이(不二)의 교설이고 방법이며 경지이다. 그 절대는 주객의 분리에 입각한 인식론적 분절을 극히 경계한다. 인식이란 열반의 과정에 개입하여 고통을 산출하는 무명(無明)의 활동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우려는 성향을 갖는다. 선에서 채용하는 ‘역설’이나 파격적 ‘언행’ 등은 바로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과 정동(情動)은 호오(好惡)와 욕망에 의해 생산되고 증폭된다는 뜻에서 선은 때로는 무의미한 언설로, 때로는 역설적 모순으로, 때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때로는 몽둥이나 할(喝)의 직접적 행동으로 그 의식=무명의 ‘준동’을 근원적으로 차단시키려 한다. 화두는 일상의 에너지가 분별(分別, vikalpa)로 전이하여 왜곡되고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설정한 차단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차단이 깊어지면 산란으로 흩어지던 에너지들이 지속적 ‘집중’을 통해 내면의 본질인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직접 조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화두의 무의미한 차원을 강조해 마지않는다.


4. 방법으로서의 화두의 효용에 대하여


1) 화두는 과연 가장 탁월한 수련법인가


나는 여기서 화두의 효용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① 의미의 차원에서:화두는 너무 간략하고 압축적이어서 거의 암호에 가깝다.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의 전적이나 불교 일반의 교리를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나는 화두가 적극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가에서 화두의 ‘무의미’의 차원을 집중적으로 강조한 것은 다음에 보듯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의미’의 차원을 지나치게 경계하여 눌러 놓으면 예기치 않게 불교의 위축과 쇠퇴를 부른다. 그것이 언설의 역설이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하려 한다.


② 무의미의 차원에서:화두는 의식의 분열을 차단하는 유용한 장치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렇지만 화두가 가장 효과적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나는 화두를 들기보다, 차라리 서암(瑞巖)의 화두처럼 차라리 ‘주인공’을 부르는 성성법(惺惺法)을 권하고 싶다. 인간의 대부분의 활동은 대개 ‘무의식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대개의 선사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각성된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 본질과 분열되지 않고 일체가 되며, 그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주적 화해의 무도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의식과 감정, 의지와 욕망의 미세한 흐름까지를 각성하고 제어하는 통제력이 더 긴요하다. ‘자신의 호흡’을 끈기 있게 파지(把持)하는 ‘자각의 훈련’이 지속되면 《대승기신론》이 말하는 거친 오염들이 줄어들고 이윽고 미세한 의지의 충동들이 들여다보일 것이며, 심신은 점점 더 헐거워질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여럿이다.


첫째, 자신이 그 효과를 즉각 알 수 있고, 둘째, 지속적 파지와 더불어 호흡이 안정되고 그와 더불어 내적 본질과의 일체감이 더욱 깊어진다. 이것은 점진적 과정, 즉 기본적으로 점수의 방법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는 이 ‘자각’의 수련은 “삶의 공간, 즉 일상의 일과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을 결정적인 장점으로 제시한다.


바람직한 수련은 그 자체 ‘과정’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화두는 그렇지 않다. 화두를 들 때, 그것은 에너지의 불건전한 전이를 차단시켜, 자신의 불건전한 욕망과 의지, 정감을 순화시키는 일차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효과는 더 이상 진전되기 힘들다. 그 지속적 파지는 일종의 ‘자신감’이라기보다 ‘불안감’과 ‘초조감’으로 다가온다.


왜냐? 화두는 그 자체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 진리를 보겠다는 초조감이 화두에 드는 자신을 늘 열패감에 시달리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무력하게 하기 쉽다. 그 제자리 걸음은 쉬 피로해지고 흔들린다. 화두는 인위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가둔다.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적 삶의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 화두를 들면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농사를 지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상담을 할 수도, 물건을 만들 수도 없다. 이것은 산 속의 소수 예외적 수도승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일이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일정한 직무를 감당해야 할 사람들의 수련법은 아니다. 화두는 그럴 경우 역설적으로 ‘남의 돈을 세는 일’에 그치고 말 수 있다.


2) 화두는 최상승(最上乘)의 근기(根機)에 맡겨야 할 예외적인 수련법이다


지금까지의 지적은 일반적 근기에 해당되는 말이지, 상근기는 화두를 통해 일거에 자신과 세계의 어둠을 뚫고 상승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물론이다. 그 점을 나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상상근기(上上根機)는 극소수의 예외이다.


일찍이 육조 혜능조차 자신의 길은 최상승의 근기에나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다. 보통의 근기는 신수의 길을 따르라고 충고했다. 한국선의 비조 지눌 또한 자신 교학을 통해 ‘소식’을 깨쳤고, 간화결의(看話決疑)를 보편적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인정했다. 이 점을 한국불교는 깊이 새겨야 한다.


3) 최상승의 근기라 하더라도 3학의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최상승의 근기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한다. 육조 혜능이 일자무식이었다는 것은 선의 전승이 지어낸 말이거나 곡해한 말이다. 그 말은 혜능이 불교 교학의 복잡한 언설에 휘둘리지 않고, 그 핵심을 단번에 장악하는 탁월한 이해력의 소유자였다는 말이다. 지나가는 승려가 외우는 《금강경》을 듣고 단번에 마음이 밝아졌다는 《단경(壇經)》의 말을 잘 음미해야 한다.


그 이해력은 물론 문자적 이해의 박식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의 이념과 목표, 그리고 방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선의 역사를 돌아보면, 뛰어난 선사들은 교학에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덕산(德山)·향엄(香嚴)·운문(雲門)·수산(首山)이 있다. 전적을 주의 깊게 뒤져보면 적어도 반 이상이 교학에 정통하거나 깊이 몰두해 본 사람들일 것이다. 선이 불립문자라고 해서 문자와 언설을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자와 언설을 버리면 불교뿐만 아니라 선도 또한 죽는다.


4) 교학을 버리기 위해서도 교학을 거쳐야 한다


《장자》에 이런 비유가 있다.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데는 땅을 밟고 가야 한다. 그런데 발자국 딛는 자리만 필요하니, 나머지 땅은 다 파버리면 그 사람은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냐. 없다. 마찬가지이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단계와 차제(次第)가 필요하다.


선은 교학을 버렸지만, 그것은 ‘교학이 너무 융성하여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버려야 했다. 그 단계를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이 이치는 학생을 지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스승이 오랜 연구를 통해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면 제자는 그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배우면 제자의 성장은 멈춘다. 그는 스승이 갔던 길을 그대로, 아니 스승보다 더 고통스럽게 그 길을 다시 밟아야만 스승을 능가할 수 있다. 선의 불립문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선이 불립문자를 제창하자 곧 이은 세대는 교학으로부터 점점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불교 교학뿐만 아니라 선의 생명력까지 고갈시켰다. 적어도 한 수행자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고, 또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길 가운데,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서산 대사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적은 대로, “부처의 마음(禪)과 부처의 말(敎)은 다르지 않다.” 종밀과 지눌은 화엄의 교학으로 선의 실천을 떠받치려 했고, 서산의 문하는 선의 소의경전으로 《금강경》을 생각하기도 했다. 교와 선은 더 이상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 화두의 ‘의미’의 차원은 화두를 든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두’는 빙산의 끄트머리만 알려줄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E=mc2을 말할 때, 이 정식에 담긴 메시지는 죽을 때까지 이 공식을 안고 있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 나간 이후에 그 이해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화두 또한 그렇다. 무턱대고 앉아 화두를 들고 앉아 칠통이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기다리던 한 소식은 오지 않는다. 온다면 그것은 마군일 것이다.


5. 지금 이 시대의 도전에 응답하는 불교와 선을 위해


절간을 찾을 때 안타까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나는 스님네들이 초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회사원이든 장사꾼이든 개의치 않고, 다만 화두를 붙들고 ‘강의’할 때가 제일 곤혹스럽다.


그러면서 “불교는 본시 없는 것이야. 네 마음이 곧 부처야.”라고 설법하는데,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싶다. 그럼 절간은 왜 있고, 사람들은 왜 이다지 고통스러운가. 나는 우리 불교가 고타마의 실존적 고뇌와 그의 일생을, 그리고 삶의 고통과 그 원인, 그리고 그 해법에 대해 그야말로 ‘근기’에 맞게, 감동적은 아니더라도 재미있게라도 설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올바른 좌선의 방법과 그 효용에 대해, 그리고 서방 정토의 구원에 대해, 그리고 불교 전통의 화려한 교학에 대해 들려주었으면 싶다. 그래야 무지로 고통 받고 있는 말법 중생들이 작은 희망의 불씨에 환희하며, 불법을 향해 발심할 것 아닌가. 병이 달라지면 처방도 달라져야 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다. 불교는 선 이후 1,000년을 새로운 혁신을 통해 거듭나지 못하고 있고, 화두 또한 천 년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불교와 선이 살아 있는 전통으로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 문화와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호시절이 아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적 실천적 전통들과 한 자리에서 그 정당성을 승인받아야 하는 자유경쟁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보다 사태를 어렵게 하는 것은 현대 사회와 그 문화가 궁극적 구원에 대한 종교적 관심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근대는 욕망을 그 자체로 승인하고, 그에 합당한 물질적 제도적 기반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치 하에 발전시켜 왔다. 근대 이후 인간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잊혀졌다. 현대는 인간의 욕망을 규율하거나 심의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정하며, 이들을 충족시켜줄 공리주의적 기제를 확장하는 데 모든 관심과 노력을 맞추었다.


그 ‘위대한 약속’의 기치 아래 종교적 영성과 도덕적 수련은 제반 전통적 가치와 더불어 잊혀지고 폐기되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지금 다른 종교와 더불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적나라한 색계(色界)의 도도한 도전 앞에서 불교가 무엇으로 대적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찾아내야 한다.


1) 지금은 화두의 혁신과 선의 재구축이 필요할 때


나는 이 도전 앞에서 화두는 너무 좁고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활로는 ‘일상’과 ‘합리’의 지평 위에서 구축될 것이라고 믿는다. ‘대화’와 ‘설득’을 통하지 않고는 길이 없다. 이 든든한 바탕 위에서 비로소 초월과 불합리의 문을 ‘아주 조금’ 열어 놓아야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께서 그리하셨다. 이것은 불교와 선의 초점을 돈오(頓悟)가 아니라 점수(漸修) 위에 세울 것을 요청한다. 돈오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소식 하자고, 온 청춘을 다 바쳤는데’를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우려하고 경계해야 할 욕심이요 아만이다. 인생의 문제는 몰록 깨달음 한 번으로 끝장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는 없다. 오직 점수만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점오(漸悟)만이 있다. 그리고 그 점오에 정직해야 한다. 정직해야만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나마 전할 수 있고, 그런 공감대 위에서 불교가 이웃을 향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발언할 수 있다.


2) 화두를 넘어 선으로


그러기 위해 나는 화두를 버릴 것을 요청한다. 물론 다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화두는 선의 전통의 객관화이다. 이 객관화된 것을 ‘과감하게’ 해석의 지평 위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선의 발전과 불교의 전통이라는 거시적 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방법으로서의 화두는 최상승의 상상근기의 돈오를 위해 ‘선택으로’ 남겨 두자는 것이다.


① 화두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미약해진 ‘선’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나는 선의 정체성을 ‘좌선에 축을 둔 자신과 일상의 자각’ 위에 세울 것을 요청한다. 선은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고통받고 있는 심신에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효과가 있다. 그 효력은 해외에서까지 널리 인증받고 있다. 그 장점은 또 있다. 그것은 일정한 종교적 도그마의 장애물이 없다. 그것은 유구한 불교 정신인 실용주의적 정신의 산물이다. “네가 네 자신이 지우고 환경이 부추긴 심신의 고통과 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이렇게 해 보라.” 선이 ‘좌선’을 더 정교화시키고, 이에 일상의 지속적 자각을 보태는 체계를 재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 문명의 고통스런 상황을 구원하는 중심으로 승격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의 오랜 전통이 발전시키고 정착시킨 수련의 지침들을 적극 채용해야 한다.


② 다음으로 화두와 돈오의 선이 빠뜨리고 건너뛴 ‘계율’을 다시금 살려야 한다. 계율이 없다면 불교는 없다. 그 필요성은 자기 규율과 사회적 규범이 지도력을 잃은 지금 더욱 절실하다. 선도 초기에는 그 실천적 지향으로 인해 율종의 사원에서 기거했다. 그것이 돈오의 발전과 더불어 희미해진 것이다. 나는 불교의 출가자 중심의 계율을 과감히 현실에 맞게 고쳐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율이 너무 높게 엄격하면 삶이 그에 배반하므로 중도(中道)를 갖추어야 한다. 재가자에게도 계율이 필요한데, 이 둘 사이를 너무 크게 벌려 놓아서도 안 된다.


3) 선에 ‘지혜’를 입히기


③ 마지막으로 ‘지혜’이다. 선이 주창한 불립문자의 깃발을 이제는 내려야 한다. 원효는 진리가 문자와 언설을 떠나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구원이 문자와 언설에 의지하고 있다(依言眞如).”라고 했다. 언어를 떠나면 불교는 생명력을 잃는다. 아니,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언어를 회복하지 못하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이 말은 팔만대장경 자체를 다시금 교과서로 삼자는 말이 아니다.


삼장(三藏)의 바다 가운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며, 어디를 낮추고 어디를 세워야 하는지 재보기 위해서 ‘연구’부터 활성화되어야 한다. 불교 교학 연구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전각을 세우고, 요사채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의 재원 가운데 대체가 ‘연구’를 진작시키고, ‘인력’을 키우는 데 쓰여야 한다. 교학 연구는 훈고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료를 정리하고, 경전을 번역하며, 디지털화하여 제공하는 것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위에 이런 한문이나 산스크리트 팔리 어 원전들이 ‘이해되고’ ‘해석되어’ 자신의 언어로 되새김되어 교통 가능한 현대어로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게 ‘장악된’ 연구만이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장악되어야 취사(取捨)가 정해지고, 새로운 중심의 형성도 가능하다. 여기서 분야는 계율과 선정, 지혜 모두를 포괄한다. 이 해석학적 작업은 현대적 화두에 자연스레 결합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근대 이후 진보의 위대한 약속이 발전시킨 산업화와 개발의 과정에서 잉태된 개인과 사회, 문명의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나는 그 두 축을 인간의 ‘소외’와 생태의 ‘환경’으로 축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그 도저한 정신주의적 전통으로 인한 전근대성으로 근대 이후의 탈근대적 전망과 가장 잘 손잡을 수 있는 자원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는 문명의 어둠을 밝히는 시대적 소임을 자부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불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기획해야 한다.


4)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


선은 태동 초기부터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감당해왔다. 백장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노구라 무리라고 제자들이 호미를 감추자 자신의 원칙에 따라 수저를 들지 않았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그 자립 정신이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선을 소멸로부터 건져 올렸다.


선은 또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구분을 없애 버렸다. 선이야말로 불교의 초세간적 가르침을 일상 속에 구현하는 종교적 혁명을 만들어 간 것이다. 선에 철저하자면 먹물 옷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수행자들이 생활을 통해 자립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한국불교는 산문의 공원 입장료와 신도들의 보시 등 타율적 의존도를 크게 줄여야 한다. 타율적 의존도가 클수록 역설적으로 대중과의 연계가 희미해지고, 정재(淨財) 운영의 효율성이나 투명성도 기하기 어렵다.


살림의 재원은 산중의 물산과 수행 공동체의 울력, 그리고 ‘선의 실천적 수련’을 가르치면서 얻어지는 자립형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구미에서 선 센터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이들 모델을 요즘 말로 벤치마킹해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경계할 것이 있다. 나는 선 센터가 화두를 중심으로 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와 안식, 그리고 보다 활기차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선사들을 찾는다. 궁극의 구원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종교적 수련이 슈퍼마켓처럼 다양하게 실험되고 융합되는 시대이다.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름표를 확인할 수가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여기에 선의 자원은 단연 중심이고, 중심이 될 수 있다. 선 수행에 대해 구미에서 나온 수천 권의 책이 서가를 메우고 있다.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깊이가 없는지 모르나’ 매우 구체적이다. 삶의 절실한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선의 지혜를 빌어 말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이 조류를 선진적이고 진취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 가르침의 중심 목표는 ‘한 소식’이 아니라, 일상의 활동을 의식과 감정의 분열 없이 자각적으로 비약 없이 영위해 나가는 법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앞에서 말한 그 동안 화두와 돈오에 의해 버려지고 방치되어 있었던 불교의 풍부한 전통들을 다시금 빛 속에 불러내어 ‘선의 전통’과 결합시키는 일부터 범불교적으로 진작시켜야 한다.


거기에는 계·정·혜 3학 가운데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그들을 한 용광로에 넣고 담금질하여 새로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번뇌와 망상을 능단(能斷)하고 영혼 깊이의 진정한 평화를 여는 불교의 새로운 정체성을 세워야 한다. 사람들이 불교를 떠나고 있다. 옛적 조사들의 지나간 이야기를, 그것도 ‘의미’를 돈제(頓除)하고 끌어안고 있을 일이 아니라, 황폐하고 궁핍한 이 물신의 시대에 오늘날 불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정 뱉어도 나오지 않는 뜨거운 쇳덩이의 ‘화두’로 가슴에 품어야 한다. 불교를 미래의 대안이라 자부하지 말고, 불교가 대안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