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청허 휴정 / 옛절을 지나며

slowdream 2007. 10. 10. 12:10
 

고사(古寺)를 지나면서



꽃은 지는데 스님은 절문을 닫아 건 지 오래고

봄을 찾아온 나그네는 돌아갈 줄 모른다.

바람이 불어 둥지에 앉은 학의 그림자를 흔들고

구름은 흘러들어 좌선하는 스님의 옷깃을 적신다.



花落僧長閉 春尋客不歸 風搖巢鶴影 雲濕坐禪衣

화락승장폐 춘심객불귀 풍요소학영 운습좌선의


- 청허휴정(淸虛休靜)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이 옛 절을 지나면서[過古寺] 읊은 시다. 아마 혼자 만행을 하다가 오래되어 돌보는 사람도 없는 폐사에 가까운 절에 머물면서 지은 것 같다. 조선 중엽 배불정책으로 스님들이 떠난 퇴락한 절이 많았으리라. 청허 스님은 세상 인연 다 끊고 오로지 외롭게 수행에만 몰두하여, 세상의 정도 인간적인 일체 상념도 다 떨어져 나간 바람같이 물같이 자연과 하나가 된 심경에 이른 듯하다.


  여기에 절 문을 닫아 건 사람도 청허 스님 자신이고, 돌아갈 줄 모르는 나그네도 청허 스님 자신이며, 좌선하는 중도 청허 스님 자신이다. 선인(禪人)으로서 선경에 이르러 선심을 그린 선천 선지의 모습이다.


  늦은 봄인가보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꽃들은 하염없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스스로 봄을 찾아 나섰다가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는 그냥 그 곳에 눌러앉아 돌아갈 생각을 잊고 있다. 갈 곳도 없고 갈 필요도 없다. 마음이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았다. 작은 바람결에 둥지 위에 앉은 학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선심이 얼마나 적정한 곳에 이르렀으면 이럴 수 있는가. 구름이 스쳐간 중의 누더기에 습기가 살짝 배어 있는 것을 느낀다. 보살은 삼매에 들었을 때 설산에 앉아 코끼리 떼가 항하강을 건너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③[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