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유신론과 현대 한국불교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등이 있다.
1. 서언
《조선불교유신론》(이하 《유신론》으로 약칭함)은 만해 한용운의 불교개혁정신을 대표하는 저술일 뿐만 아니라,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더욱이 《유신론》에서 제기한 파격적인 불교의 개혁 및 유신의 내용은 근대 한국불교의 각 분야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유신론》에서 지적한 파격의 내용은 당시 기존 불교의 관행과 질서를 강력히 비판하였기에 당시에도 적지 않은 찬반 양론이 팽팽하였다.
한용운은 그가 1910년에 집필하고, 1913년에 간행한 《유신론》에서의 주장을 평생 동안 일관하여 주장하고, 일부 내용은 더욱 보강하여 입론을 세련화시켰다.1)1)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은 한용운이 《불교》 88호(1931.10)에 기고한 〈조선불교의 개혁안〉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용운의 대중불교, 민중불교 건설을 위한 그의 세부적인 입론은 전보삼이 관련 기고문을 정리하여 펴낸 《만해 한용운 산문집―푸른 산빛을 깨치고》(민족사, 1992)의 제3장 대중불교건설의 주제인 불교개신, 현 제도 타파, 민중포교건설은 포교법, 조선불교의 통일, 조선불교의 해외발전, 교단의 권위, 교정연구회의 창립, 조선불교 통제안, 역경의 급무, 주지선거 등에서 찾아 볼수 있다.
그리고 한용운을 따르던 불교청년들은 한용운의 불교개혁정신을 체득하고, 이를 불교의 현장에 실천하려고 부단한 경주를 하였다고 보인다. 그리하여 한용운과 불교청년들은 불교개혁을 주창함과 동시에 불교의 독립운동에도 매진하여, 외형적으로는 한용운의 개혁의 논리가 일제하 불교계의 주된 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신론》이 발간되었을 당시부터 한용운의 논리는 불교계 내부에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이는 당시 불교계가 보수적이었던 측면, 서양문명의 수용에 안일하고 급변하는 사회 변동에 따라가기에 급급하였던 불교계의 체질 등으로 인하여 한용운의 논리는 불교의 현장에 철저하게 구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용운 논리가 거부되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일제의 식민통치의 첨병으로 한국에 건너온 일본불교로 인해 한국 전통불교의 훼손, 변질이라는 흐름이었다.
요컨대 《유신론》의 핵심 주장인 승려 결혼이 일본불교의 대명사로 지칭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 수호를 항일불교로 이해한 청정 비구들의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한용운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산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제하 다수의 비구 승려들은 ‘결혼’을 택하였지만, 한용운이 《유신론》에서 주장한 여타의 주장은 폭넓게 수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 고찰은 이러한 전제를 유의하면서 한용운이 《유신론》에서 제기한 각 분야의 주장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현대 한국불교사에 접목시켜 보자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한용운의 《유신론》을 다시 읽어 보면, 대부분의 주장이 현재 불교계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적을 왕왕 들어왔다.
이는 불교계의 현실이 90년 전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유신론》의 지적이 시대를 초월할 정도의 보편성을 띤 불교개혁의 지침임을 말하는 것인지는 애매하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지난 90년간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90년 이전의 한국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도 유사하다는 것에도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해의 《유신론》이 아직도 현대 한국불교에 유효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우선 현대 한국불교에 대한 불만족성을 말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90년 전의 불교계의 현실과 현대 불교계의 현실의 본질이라는 면에서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양과 질적인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지만 그 흐름과 고뇌라는 면에서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추후 더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는 만해 개혁론의 철저성을 수긍하면서도 만해가 지적한 개혁의 이면에 깔려 있는 당시 불교 현실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하다. 이는 당시 불교사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만해의 논리에 대한 평가는 단언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요컨대 당시 현실에 대한 이해 없이 만해의 지적에 쉽게 동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 시기의 연구의 부진, 자료의 부족이라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연구나 자료가 부진한 여건하에서 만해의 비판 이면에 숨어 있는 불교의 현실과 모순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불교사 연구에 대한 한계를 유의하면 일단은 만해의 《유신론》에서 지적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러한 접근은 만해의 개혁론을 현대 한국불교와 연계시켜 현대 한국불교를 살피는 관점에서도 동일하다. 즉 현대 한국불교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해명, 이해는 기하지 않고 단순히 만해의 지적만을 참고하는 것은 모순된 자세라 하겠다.
본 고찰은 《조선불교유신론》과 현대 한국불교와의 이런 상관성을 기초로 하여 《유신론》에서 제기한 불교 개혁의 논리를 요약, 정리하고 그것을 현대 한국불교의 분석에 활용해 보자는 것이다. 요컨대 만해의 관점, 즉 《유신론》에 나타난 안목으로써 현대 한국불교를2) 살피려는 것이다. 만해의 그 관점은 기본적으로 불교계에 대한 처절한 비판, 냉철한 분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2) 현대 한국불교의 대상은 주로 조계종을 중심으로 서술할 예정이다.
즉 유신을 위한 파괴를 서슴지 않을 정도의 처절함이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만해의 주장이 아직도 유효한지, 즉 만해 불교개혁론을 계승할 것인지에 대하여 가늠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만해의 관점으로 현대 한국불교를 분석하는 것이 현대불교 이해에 활용할 하나의 관점이지, 이 관점을 절대적인 유일의 잣대로 볼 수는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3) 현대 한국불교의 분야는 수행, 교육, 포교, 사원위치, 종단구조, 승려의 인권과 결혼으로 대별하였다. 이는 《유신론》에서 제기한 내용을 정리하여 포괄한 것이다. 그런데 《유신론》에서 제기한 사원의 불상 및 탱화, 의식(의례)의 문제는 필자가 정리할 수 없는 한계로 인해 제외하였다.
1) 수행
한용운이 《유신론》에서 불교 수행의 문제로 제기한 것은 참선과 염불당의 폐지이다. 우선 참선의 문제부터 접근해 보자. 한용운은 참선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 당시 불교계의 참선하는 부류들이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이는 부처의 가르침이 구세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의 가르침임을 실천하지 않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찰은 선실(禪室)이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선을 일으키는 본의에 있지 아니하고 선실로 절의 명예의 도구를 삼기도(寺刹榮譽之具) 하고, 선실로 이익을 낚는 도구로 삼는다(射利之具)고 하였다. 이에 선객의 총수 10명 중 진정한 선객은 1명에 불과하고,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2명이요, 어리석고 게으른 데다가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7명이나 된다고 질타하였다. 선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아래의 글에서 더욱 치열하게 제기된다.
이같이 조선의 참선은 겨우 명목만 유지하는 참선일 따름이다. 이를 더욱 요약해 말한다면 선실은 營利의 産兒요, 禪客은 쌀로 사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감히 선객의 모두를 이 부류에 포함시키려고는 하지 않지만, 십중팔구는 불행히도 내 말이 적중함을 부정할 길이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의심하는가. 시험삼아 오늘의 선실에서 일조에 그 식량을 다 없앤다고 하면, 그 선객의 수효가 전날에 비해 감소됨이 없겠는가. 여러분은 부디 스스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
요컨대 한용운은 당시 참선이 명목뿐이기에 선실은 영리에서, 선객은 호구지책의 목적에서 유지된다고 보았다. 이 같은 지적은 참선 수행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이다. 이에 한용운은 참선의 본질을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적폐(積弊)를 일소하고 올바른 규제를 세우자고 주장하였는 바,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나온다.
참선을 새롭게 뜯어 고친다 할 때 그 방법은 무엇인가. 조선 각 寺의 선실의 재산을 합쳐서 우선 한, 두 개의 큰 규모의 禪學館을 마땅한 곳에 세울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선의 이치에 밝은 사람 몇 명을 초청하여 스승을 삼아야 한다. 참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僧俗을 가리지 않고 다 수용하되 모집할 때에 일정한 방법으로 시험을 과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선을 닦는 데 있어서는 다 일정한 시간적 통제가 있어서 산만에 흐르지 못하게 해야 하며, 다달이 혹은 청강을 하기도 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하여, 한편으로는 참선의 정도를 시험하고, 한편으로는 각자의 지식을 교환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당한 시일이 지나 크게 얻는 바가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저서를 내어서 세상에 공표함으로써 중생들을 인식상의 정신과 규제에 있어서 어찌 법도가 서지 않겠는가.
참선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우선 여러 사찰이 공동으로 선학관(禪學館)을 세우자는 것이다. 그리고 선지식을 초빙하여 수행하고, 참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승속을 구별치 말 것이며, 입방시에는 시험을 보고, 참선을 하는 도중에 청강·토론·시험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그밖에는 깨달음에 다달은 경우는 그 결과를 저서로써 세상에 공표하자는 주장도 하였다. 한용운은 이러한 대안을 채택하면 참선의 법도가 설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방에 들어갈 형편이 못 되면4) 각 사찰에 참선 모임을 만들어 수행 풍토를 조성하자고 하였다. 4) 사찰의 행정, 보직을 맡은 승려를 위한 제안이다.
한용운이 《유신론》에서 제기한 이러한 참선의 분석은 당시 선원에서의 수행을 강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할 것은 당시 선방의 제반 현실을 모르는 상황하에서 무조건 《유신론》의 분석과 주장에 수긍할 수만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살필 것은 현재의 선방 수행이 만해가 지적한 것과 같이 비판을 받을 정도의 상황인지를 주목하자.
현재 조계종단의 경우 하안거, 동안거에 선방에서 수행을 하는 승려는 수천 명에 달한다고 보도되고 있다. 그리고 그 수행자들은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하여 선방에 입방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의 만해의 지적은 현재의 불교계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그 수행자들의 참선의 철저성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성질이다. 다만 선원에서의 양식을 자급자족하는 형태로 전환할 경우에도 지금처럼 수천의 수행자가 입방할지는 모르는 것이다. 간혹 안거가 종료된 이후 해제비를 받아 여행을 간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일부 있어 왔음은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만해가 참선의 활성화를 위해 대안으로 제기한 것은 공동으로 설립한 선학관과 선방 수행의 운영의 다각화이다. 선학관은 일제하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존립·운영하고 있는 선학원은 만해 지적에 부합한 경우이다. 그러나 일제하의 선학관과 현재의 선학원은 큰 차별성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만해가 제시한 선지식의 초빙, 승속 구별없이 수용, 청강 및 토론 등은 현재까지 적용된 경우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선지식의 초빙은 기본적으로 명안종사가 부족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것인데 작금에도 조실, 방장으로 지칭하는 선지식이 상주하는 선방이 있지만 실제로 조실, 방장을 초빙하여 수행하는 선방은 매우 적다. 최근에는 선 수행을 지도할 눈 밝은 명안종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한편 21세기 접어들면서 수행자는 점점 증가하고 있지만, 수행을 하여 깨달았으며 그리하여 그를 인가받았다는 소리는 거의 사라지고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정황은 질적인 수행, 철저한 깨달음은 점점 희소해지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만해는 깨달음을 공표하고 그 내용을 대중화하자는 것인데 20세기 불교에서는 그래도 깨달았다는 큰스님이 있었고, 그 결과로 깨달음의 오도송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최근 30년 전후부터는(정화운동 완료 이후) 깨달음에 달하였다는 스님들을 들은 바가 없으니 그를 공표할 처지도 못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컨대 만해가 지적한 참선에 있어서 질적인 문제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해의 관점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관점에서 현재의 수행풍토는 일정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최근 논란을 빚은 간화선의 문제, 유용성 그리고 수행풍토의 조성 등은 바로 이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유신론》에서 수행의 문제로 거론한 것은 염불당의 폐지이다. 이 염불당의 폐지는 《유신론》의 파격성에서도 가장 과격하다. 《유신론》에서 제기하는 염불당의 문제는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보편적으로 행하였던 염불은 왕생 정토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면서 이는 부처의 교리상에서 불가함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는 불교의 근본인 인과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러면 만해가 말하는 참된 염불은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마음을 念하여 나도 이것을 배우고, 부처님의 행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행해서 비록 一語, 一默, 一靜, 一動이라도 염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 眞假와 權實을 가려 내가 참으로 이것을 소유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念佛인 것이다.
이처럼 만해가 주장하는 참다운 염불은 부처의 근본사상, 불교정신을 생각(궁리, 체득)하여 이를 실제 삶의 현실에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의 사상은 누구나 행할 수 있다는 보편성을 인정하지만, 그 실제의 실천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부처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는 논지이다.
즉 부처의 가르침을 행함에 있어 방편이라는 차원은 필요하지만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는 지적인 것이다. 만해가 강조한 염불당의 폐지는 거짓 염불을 할 바에는 차라리 염불당을 폐지하자는 것이지, 염불당을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만해 스스로도 “참다운 염불이 아님을 두려워하여 이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된 염불의 모임을 겨냥한 발언일 뿐이라고” 개진한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불교에서의 염불 혹은 염불당은 완전히 필요없고, 없애야 하는 것인가? 필자의 주장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현재 한국불교에서의 염불은 그 기반이 상당하며, 염불 신앙으로 신앙공동체를 지향하는 사찰 및 신행 단체가 적지 않다. 설령 없애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여도 그렇게 처리될 수도 없다. 최근에는 참선, 간화선 위주의 수행에 회의를 느낀 신도들이 오히려 염불 신앙으로 회귀하는 경향도 있다고 보인다.
때문에 현재 한국불교에서 보편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염불 신앙을 일단은 긍정하고 《유신론》에서 제기한 참다운 염불 신앙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면 그 참다운 신앙의 구체성은 무엇인가? 이 구체성은 뚜렷히 검증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신앙공동체의 스님, 법사들이 보다 철저하게 불교적인 관점하에서 그 수행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이에 《유신론》에서 제기된 염불당 폐지는 현대 불교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염불당 폐지는 단순하게 수용하면 수긍할 수 있으되, 만해의 깊은 뜻을 헤아리면 오히려 염불당의 활성화로 유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개화기 불교계에서 거짓 염불이 매우 보편화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불교계 현실에 토착화, 보편화된 전통을 살리고, 동시에 불교의 근본에서 그 궤도 수정을 해준다면 오히려 불교 대중화에 기여할 것이 아닌가 한다.
2) 교육
한용운이 교육에서 말하는 것은 주로 승려의 교육 문제이었다. 즉 한용운은 교육이 보급되면 문명이 발달하고, 그 반대로 교육이 보급되지 못하면 문명은 쇠해진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즉 문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그 배움에 있어서는 지혜(자본), 사상의 자유(법칙), 진리(목적)의 세 요소가 절대 긴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당시 승려들은 이 중에서도 사상의 자유(비판정신)가 가장 결핍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승려 교육의 특색인 연구와 논강도 그 당위와 실제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질타하였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한용운은 승려교육의 급선무를 보통학, 사범학, 외국유학으로 대별하였다. 보통학(보조 과학, 기초 학문)은 생존경쟁 시대의 필수적인 배움으로서, 전문학의 기초 학문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당시 승려 학인들은 보통학 보기를 원수같이 하는 형편으로 지적하였다. 이 지적을 현대 한국불교에 적용하면 현재는 고교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추어야 입산, 출가가 가능하기에 만해의 이 지적을 현재에는 적용하기에는 일부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강원, 중앙승가대, 동국대 등의 각급 학교에서도 교양 및 보통교육을 교육시키며 언론의 발달로 승려로서 보통교육이 완전 무지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와 연관된 각급 학교의 교육과목을 보면 아직도 만해가 지적한 단계까지 도달하였다고 보기에는 일부 난점이 있다.
다음으로는 사범학(師範學, 지도자 양성)을 강조하였다. 한용운은 사범학의 내용을 자연(自然) 사범과 인사(人事) 사범으로 나누었는 바, 이를 현대적인 용어로 전환시키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의 승가교육에 적용하여 보면 만해가 강조한 것과 같은 자연과학, 인문과학은 교육과목으로 매우 소홀하게 다루어진다고 보여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의 불교계에서는 사회의식 혹은 불교계 밖의 현실에 대한 관심, 보편적인 인간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측면이다. 한용운은 《유신론》에서 우선 사범학교를 세워, 15∼40세 승려 중에서 재덕이 있는 자를 가려서 배우게 하고 그 과정에서 보통학, 사범학, 불교학을 가감, 조화시켜 가르치자는 주장을 하였다.
여기에서 나온 사범학교는 근대적 학교의 외형을 갖추고, 개화기 당시 사찰에서 설립한 소학교(보통학교)의 교사 양성을 기하며, 나아가서는 승려의 자질 향상을 함께 도모하자는 차원에서 나온 대안이다. 현재 조계종단의 경우 동국대, 중앙승가대가 있고, 지방승가대(강원)도 자생하고 있어 만해가 지적한 사범학교는 굳이 설립할 필요는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는 논란이 제기된다.
다만 만해가 지적한 방향에서의 교육 과목은 추가, 조율될 수 있을 것이지만 만해의 주장은 승려 지도자 양성의 필요성을 환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만약 만해의 주장에 의거하면 현재 불교계는 승려 지도자 혹은 승려의 교사 양성만을 위한 학교는 부재하다고 보아야 한다. 만해의 논리에 의해 사범학교를 설립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여도 승려들을 교육시키는 일관된 제도의 수립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에는 속세의 제도, 시스템에 의거한 승려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곳도 있고, 전통의 형식을 띠는 곳도 있지만 그 외형도 통일적인 기준은 부재하다. 요컨대 승가 나름의 특성을 지닌 제도화가 절실하다.
다음으로 지적한 것은 외국유학이다. 만해는 외국에 유학하여 불교의 교리 및 역사를 공부하고 그를 한국불교 발전에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만해가 주장한 또 하나의 내용은 불교학 이외의 여타 종교의 연혁, 현황, 역사 등을 배워 불교의 미흡한 부분을 보충하자는 내용이다.
필자가 보기에 일제하의 일본, 독일 등지에 유학을 한 대상자들의 공부 분야를 보면 불교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에 그 지나침도 있어 각 사찰에서는 그를 불교로 한정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로 불교학에만 집중되어 있고, 여타 종교와 학문을 연구하는 경우는 희소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이 같은 승려 교육에 대한 만해의 지적은 주로 보통학, 사범학으로 나타났지만 그 초점은 사회의식, 보편적인 인간문제에 관한 내용이다. 오히려 만해는 승려의 불교학에 대한 제반문제를 거의 언급치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승려의 불교학 전반에 대한 모순은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만해는 승려 및 사찰의 사회의식이 낙후된 현실을 개탄하였기에 그에 연계된 분야만 집중 분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만해는 교육의 시급성을 강조하면서 불교계의 노후하고, 부패하고, 완고 비열한 무리가 새로운 교육을 저지하고, 구습을 고수할 뿐 새로운 진전이 없다고 하였다. 지금은 이러한 무지한 그룹은 없을 것인 바, 다만 조계종단 내에서 기초적인 교육기관인 행자수련원의 설립, 승려재교육 프로그램의 도입, 21세기를 내다보는 교육 내용에 대한 정비 등등이라도 조속히 완결짓는 것이 긴급한 과제일 것이다.
3) 포교
《유신론》에서 제기한 포교 문제는 기본적으로 경쟁, 우승열패, 약육강식이라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는 사회진화론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한용운은 당시 불교의 기반과 세력이 미약한 것을 세력이 부진한 탓에서 찾았다.
조선불교가 유린된 원인은 세력이 부진한 탓이며, 세력의 부진은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가르침이란 종교의 의무의 線과 세력의 선이 함께 나아가는 원천이다. 다른 외국 종교로서 조선에 들어온 것들은 하나도 끊임없이 힘쓰지 않음이 없는 실정이니, 누구든 종교의 의무가 스스로 이렇지 않다고 하랴. 본래부터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 불교의 세력의 부진은 불교가 포교되지 않은 것으로 단언하였다. 그리고 포교는 종교의 의무임을 강조하였다. 포교와 교세는 동전의 앞뒤와 같은 성질임을 지적하고, 승려의 낙후성, 신도들이 소수의 여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 등이 포교의 나약성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한용운은 포교를 하기 위한 기본자세로 열성, 인내, 자애를 중요하게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포교는 불교의 흥망과 승려의 생존을 담보하는 지름길로 보았으며, 포교의 방법으로 연설, 신문·잡지에 기고, 역경, 자선사업 등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서는 이런 방법이 전무하였다고 개탄하였다.
포교의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혹은 연설로 포교하고, 혹은 신문 잡지를 통해 포교하고, 혹은 경을 번역하여 널리 유포시켜 포교하고, 혹은 자선사업을 일으켜 포교하기도 하여 백방으로 가르침을 소개해 그 어느 하나가 결여될까 걱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조선의 불교는 이런 기도가 전무한 형편이다.
그러나 한용운이 지적하고 강조한 포교는 일제치하에서는 다양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포교당이 건설되었으며, 수많은 불교잡지가 간행되고, 다양한 역경이 전개되었다. 다만 개신교의 활동과 비교할 경우 미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는 포교의 질적, 양적인 팽창과 발전은 엄청난 것이었다.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 〈불교신문〉을 비롯한 수많은 불교계 신문, 불교잡지, 사찰에서 나온 발간물, 각처에서 자생적으로 진행되는 법회 등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현대 한국불교에서 유의할 것은 포교의 원칙, 정신, 방법 등에 대한 이론적인 재정립과 현대 산업사회 및 그 변동에 걸맞은 포교 전략의 수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종단 사태 및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의 행태로 인해 포교 현장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나아가서는 포교를 일선에서 담당하는 포교사 양성 시스템을 전면 보완해야 할 것이다. 현재에는 승려들이 포교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포교사의 활동도 증대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법사가 부족하여 포교 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한 경청이 요망된다. 포교사들은 승려 신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분과 활동의 거점을 보장받지도 못하고 있다. 요컨대 현행의 포교사 운영에 대한 대대적인 재검토와 제도 개선이 요망된다.
4) 사원 위치
한용운은 불교 세력이 미약한 원인을 찾음에 있어 승려의 사상, 의식이 속세의 사람들과 다름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원인을 사찰이 궁벽한 위치에 있으므로 나타난 네 가지의 요소, 거기에서 비롯된 사업상 부진을 여섯 요소로 정리하여 단언하였다.
이제 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사원의 위치가 궁벽함으로써 진보사상이 없다, 모험적인 사상이 없다, 구세의 사상이 없다, 경쟁하는 사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업상 구체적으로는 교육, 포교, 교섭, 통신, 단체활동, 재정에서도 불리하여, 부진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이를 극복할 구체적인 안으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러면 사찰의 위치를 고칠 수 있겠는가. 세 가지 방책이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산속에 있는 사찰 중 오직 기념할 만한 몇 곳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한결같이 모두 철거한 다음 새로 각 郡, 각 港口의 도회지에 세운다면 이는 上策일 것이다. 그리고 그 크고 아름다운 사찰은 남기고, 작은 것과 크고 황폐한 것은 철거하여 큰 도회지에 옮겨 지으면 이는 中策이 될 것이다. 또 다만 암자만을 폐지하여 본사에 합하고 한 道 혹은 몇 개의 郡에 있는 사찰들이 합동하여 요지에 한 출장소를 두어 포교, 교육 등의 일을 처리할 경우, 이것은 下策이다. 그리고 이밖의 것은 방책도 아닌 것이 된다.
이 중에서 한용운은 상책은 민지(民智)의 정도가 문약하기에 실행에 문제가 있고, 중책은 행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기에 어렵고, 하책은 관련 사찰 전체가 일치만 하면 가능하나 그 일치할 수 있는 기간을 기다리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에 그는 각 방책이 각기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에 차라리 모든 승려가 모두 영웅호걸이 되어 상책을 즉시 시행해도 남음이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는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지만, 노력을 안 하면 하나도 이룰 것이 없다는 소신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같은 한용운의 주장은 지금까지 근·현대불교 100여 년간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기존 사찰과 암자를 폐지하지 않았고, 일개 사찰 혹은 본사급 사찰들이 도회지에 사찰 혹은 포교당(소)을 내어 포교 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기존 사찰을 폐지한다는 것은 한용운의 주장처럼 간단치는 않다. 이는 불교재산 망실, 그 재산의 처리 문제, 공권력과의 관련, 지원을 하였던 보시자· 후원자· 신도들의 납득도 쉬운 것은 아니다. 한용운의 주장은 승려들의 의식과 사업에 불리를 끼치는 사찰의 위치를 근원적으로 변동시키자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를 더욱 유의해 보면 현대불교의 승려 및 사업 추진에 사찰의 위치가 궁벽하여 일부 영향을 받은 것은 있다고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만해가 주장한 요인의 근원이 사찰의 위치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만해의 주장은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민중화, 불교의 세력화를 기하기 위한 발상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 한국불교에서도 사찰이 산중에 있음으로 인한 긍정성도 적지 않다.
예컨대 수행 환경, 문화재 보호, 재가자들의 휴식처 제공 등을 참고할 수 있다. 과거 조선 후기, 개항기의 불교를 우리는 산중불교라 하지, 현대불교를 산중불교라고는 전혀 생각치 않는다. 사찰이 산속에 있다고 하여 산중불교인 것이 아니고, 산중에서만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교통, 통신 등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하여 도회지와 사찰의 연계는 불편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해가 사원의 위치를 변혁시키자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도회지 중심의 불교, 승려 의식의 철저성을 지키자는 방안의 하나로 수용하면 될 것이다. 오히려 요즈음은 승려들의 도회지에만 머무르는 행태가 보편화되었다는 저간의 지적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도회지에 머무르면서 대중불교, 민중불교 구현에 전념하면 이 같은 지적은 없었을 것이다. 최근 승려들이 도회지에서의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승려의 세속화, 세력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요즈음 세태에서는 승려들이 더욱더 산중의 사찰에 가서 수행에 전념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주장도 나온다.
때문에 이제부터는 기존 사찰의 용도를 재검토하고, 도회지에 있는 사찰 및 포교당의 성격과 기능, 산중사찰과 도회지 사찰과의 연계 문제 등등을 근원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일 것이다. 산중사찰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불교에서 대중과 민중을 찾아다니는 불교로 전환해야 함은 당연하다. 대중의 고민을 듣고, 그를 해결해 주고, 간혹은 산중사찰로 안내·수행케 하여 산업사회에서의 노정된 고뇌를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5) 종단 운영
한용운이 《유신론》에서 종단 운영과 연관된 문제로 거론한 것은 사원의 통할, 승려의 단체, 사원의 주지 선거법이다.
만해는 사찰들을 당연히 통할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바, 이는 지휘와 통할을 통해 불교를 살려야 한다는 것에서 나왔다. 구체적 방법으로는 혼합(混合)통할과 구분(區分)통할로 나누었다. 혼합통할은 불교 전체를 한 통할권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 방안의 장점은 사람과 재물이 한 곳으로 집중되기에 일을 처리하는 데에 유리하다,
일을 할 때 전부가 일치하기 쉬워서 피차에 넘치고 부족한 차이가 없다, 대립이 없으므로 피차에 알력의 폐단이 없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구분통할의 장점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서로 간에 질투 혹은 경쟁이 나타나 이 요인이 진보성에 효과를 기할 수 있다, 피차에 견제하고 꺼리는 요인으로 마음대로 정하는 나쁜 폐단을 차단할 수 있으며, 회의· 교섭이 비교적 간편하고 쉬울 수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혼합통할의 장점은 구분통할의 단점이 될 수 있고, 구분통할의 장점은 반대로 혼합통할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전제하에서 만해는 혼합통할을 마땅히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제반 여건으로 인해 혼합통할을 시행할 여건이 미진함을 개진하였다.
이에 만해는 구분통할을 하게 되면, 불교계를 갈라 놓아서 점차 분열하는 정황이 될 것을 염려하였다. 마침내 만해는 두 방안의 장단점, 현실적인 여건을 분석하고도 뚜렷한 방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찰통합에 연관하여 현대불교를 살피면 우선 1941년 4월 조계종의 성립과 등장으로부터는 혼합통할의 노선으로 나갔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불교를 거치고, 1954년부터 노골화된 비구승, 대처승 간의 갈등양상을 나타낸 이른바 정화운동을 거치면서 점차 구분통할의 방향, 즉 종단 분열의 양상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현재에는 무려 60여 개의 종단이 분립하는 정황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60여 개의 종단이 이념과 성향이 종단을 나눌 정도로 분명하고 그에 걸맞은 종지와 종풍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구심이 제기된다. 이권 쟁탈, 권력 지향이라는 구도에서 나온 측면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살필 것은 한용운이 제기한 구분통할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그 구분이 지역을 나누는 구분인지, 아니면 이념과 성향이 달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인지가 약간은 애매하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지역성을 전제로 한 구분으로 이해된다. 이는 요즈음에 보편화된 개념인 지방중심, 지방자치제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본산중심의 행정과 흡사하다.
그렇다면 현대 불교계의 분열과 분파는 만해가 우려한 상황보다 더욱 악화된 것이 아닐까? 물론 일부 종단의 경우에는 종지와 종풍이 분명하고 여타 종단과의 운영의 차별성이 나타나는 종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종단의 정체성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일 것이다. 바로 이런 요인으로 만해도 사찰 통할의 대책을 강구치 못한 것으로도 보인다.
다음으로 우리가 검토할 과제는 사원의 주지 선거법이다. 《유신론》에서는 이를 사원 주직(住職) 선거법이라 하였는데 주직은 사찰의 서무를 통치하는 직책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사찰의 성쇠는 주지(주직)에게 달려 있다고 보았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주지의 선출을 윤회(輪回)주직, 의뢰(依賴)주직, 무단(武斷)주직의 방법으로 행하였다고 보았다.
윤회주직은 나이나 법랍 등에 의해 순서대로 하였는데 이는 큰 사찰에서 행하였다. 의뢰주직은 관리, 토호, 세력가에 뇌물을 주고 사찰의 주지를 구하는 경우이다. 무단주직은 독자적 힘으로 주직에 취임하는 것을 칭하는데 완력과 폭력으로, 즉 약육강식의 방법으로 행하는 것인데 산중사찰에서 행하여졌다고 한다.
이 중 의뢰주직과 무단주직은 정상적인 행태가 아니기에 이러한 사찰은 부정, 부패의 길로 가는 것은 명약관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요인은 승려의 법규가 없는 것에서 나온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지제도에 대한 사찰간의 통일성 및 연계성이 없고, 주지의 봉급이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큰 사찰은 비교적 안정되고, 일정한 틀이 있어 손댈 재물도 없고 봉급도 없기에 누구라도 주지를 기피하였다는 분석이다. 이에 서로 양보하고, 밀어내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에 한용운은 이상과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것을 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절의 大小와 사무의 분량을 고려하여 각기 월급을 정하고, 또 선거법은 투표의 3분의 2로써 당선시키기로 하고, 외로운 암자나 절은 관할하는 절에서 스스로 역시 투표를 행하면 하나하나 모두가 적절한 사람이 뽑혀 유감없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해도 반드시 그 절에서는 비교적 나은 사람이 선택될 것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을 회고할 때 그 득실이 어떻겠는가?
라고 제시하였다. 요컨대 주지의 선거제도를 주장한 것이다. 만해가 《유신론》을 서술할 당시의 모순된 정황은 선거제도로써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하에 접어들면서 사찰령 체제하에 나온 사법에서는 주지의 선거제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친일적, 강고한 승려들이 주지에 선출되었고 주지 임기를 마친 승려들은 또 다시 출마하기 위한 다양한 방책을 강구하였다.
이에 총독부에 의지하거나,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부정부패가 나타났으며, 사찰내의 분열화 현상이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해방 이후 현대 불교계에도 지속되었다. 최근에는 관권에 의지하는 현상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으나 문중, 문도 간의 힘겨루기 양상, 지지를 얻기 위한 금권선거의 양상도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평가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총무원장 및 주지의 선거제도 자체를 비판하는 경우도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만해가 제시한 주지직의 선거제는 일부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성과를 가져 왔으나 그에 반한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하였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추후에는 선거제를 유지하면서도 그 모순을 타개할 보완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승려의 단체에 관한 문제이다. 불교의 개혁과 유신을 기하기 위해선 승려의 단결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만해는 강조하였다. 이에 만해는 다수인의 단결에는 외형적인 단결과 정신적인 단결이 있다고 구분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집단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정신적인 단결이 부재함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일 추진에 큰 장애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 장애는 시기, 의심, 배척, 분열, 방관 등이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되는 대상이 방관자라는 것이 만해의 주장이다. 이에 그는 그 방관자를 여섯으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그는 혼돈파(混沌派: 무식자, 당시 승려 10분의 9를 차지), 위아파(爲我派: 무사안일주의, 보신주의), 명호파(嗚呼派: 탄식하고 통곡하는 무리), 소매파(笑罵派: 비웃고, 욕설을 하는 자), 포기파(暴棄派: 타인에게 의지만 하는 자), 대시파(待時派: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전혀 일을 하지 않는 자, 위선자) 등이다.
이렇듯이 승려의 단결 양상을 분석한 만해는 당시 승려들이 이중 하나씩을 나누어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몇 가지를 나누어 갖는 경우도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당시 승려는 대부분 방관자라고 질타하였다. 이에 만해는 당시 승려들에게 부모, 부처, 중생의 은혜를 갚아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나아가서는 사은(四恩: 부모, 중생, 국왕, 삼보)의 배반, 교세를 쇠퇴케 방조, 보시로 생존, 중생의 은혜를 갚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한용운은 그를 극복하는 자세를,
일이 잘못된 것은 다시 반복할 수 없으니, 과거를 뉘우치고 미래를 경계함이 가장 옳은 태도일까 한다. 마땅히 큰 목소리로 외치고 마음을 모으며 합쳐서 방관하는 단결을 일하는 경지로 옮기게 하여 國利民福의 일을 기약하고 도모한다면, 우리 부처님의 중생 제도의 정신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아마 전날에 저지른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만해의 주장은 지금 현대 불교계에도 유효한 깨침의 발언이라고 하겠다. 불교계 속언에 “벼룩 서 말은 몰고 갈 수 있어도 중 세 명은 함께 갈 수 없다.”는 말을 간혹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속언의 이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곧 단결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며, 양보와 타협이 불가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수행, 참선을 내세우며 사찰과 종단의 제반 일에 일체 관여치 않으려는 속성 또한 이 범주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해의 주장에서 유의할 바는 단결과 불교 사업의 종착지가 국리민복(國利民福)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현대 불교계의 제반 양상을 살펴보면 불교를 위한, 불교만을 위한 사업은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불교도 위하고, 나라도 위하고, 나라의 국민들을 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지적인 것이다. 물론 불교계 구성원의 뇌리와 불교 행사에는 늘상 국태민안, 호국불교, 민족불교, 중생구제, 민족통일 등이 빠짐없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대의명분과 실제가 얼마나 근접한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 간극이 너무 많이 벌어졌다고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6) 승려의 인권과 결혼
한용운이 《유신론》에서 승려 인권의 회복의 방안으로 제기한 것은 승려 자신이 생산활동에 참여함이었다. 요컨대 승려 인권은 생산에 참여하여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해결할 때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만해는 조선 후기 이래 승려가 압박을 받고, 인간 취급을 제대로 받지 않은 것은 일하지 않고 먹고 입은 것을 하나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는 이를 경제학의 개념으로 분리(分利)로 표현하였다. 수고하지 않고 이익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다. 즉 무위도식(無爲徒食), 도의도식(徒衣徒植)이라 하였거니와 승려생활을 표현하는 기취(欺取)와 걸(乞)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속세의 사람들이 승려들을 노예와 같이 바라본다고 분석하였다. 당시 세계는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세상이기에, 놀면서 의식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망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만해는,
우리들이 길이 전날의 구속을 벗어 던지고 사람 고유의 인권을 회복하고자 할 것 같으면 무엇보다도 스스로 생산하여 自活할 필요가 있는 것이니, 굴욕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누가 능히 조금이나마 능멸할 리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부 승려들이 승려들은 자본이 없고, 방법을 모른다는 자조적인 변명에 대해서는 자본과 방법 이전에 우선 ‘노력(努力)’이 천연의 방법이요, 최초의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승려 자신이 자활하겠다는 의식, 그리고 그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 같은 전제에서 승려들이 생산활동을 할 의지가 있다면, 승려들은 일반 속인보다 유리한 특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찰이 갖고 있는 수많은 산림(山林)을 이용하여 조림사업(과일, 차, 뽕나무, 도토리 등)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승려들은 동일한 사찰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기에 뜻이 통하기가 쉽고, 공동의 사업을 전개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즉 공동경영이 가장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한용운의 주장이 그 이후에 반영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살핀 바로는 일제하에서는 그래도 승려의 노동이 간헐적으로 주장되고 일부에서는 실천에 옮겨지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1970년대 이전까지는 승려 개인 차원에서 개간, 공동노동 등이 실천되었으며, 1970년대 초반에는 조계종단 차원으로 조림사업이 기획되기도 하였다.
이 노동에는 선농불교(禪農佛敎)라는 이념이 개재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 현재의 불교계에서는 승려의 노동이 거의 종말을 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원인은 19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수준이 향상됨과 동시에 그 부대 효과가 사찰 및 불교에도 미치고 있었음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본산급 사찰들의 국립공원 지정, 다수 사찰들의 입장료 수입, 정부로부터 사찰 문화재의 보수를 위한 지원비 수령 등등 다양한 요인이 중첩되고 있다.
그러나 만해가 주장한 승려 노동의 출발점은 승려의 인권이 매우 미약한 것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대안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대 불교에서 승려의 인권이 낮다고 수긍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즉 만해가 주장한 승려 노동의 입지는 사라진 것이다.
간혹 사찰 내에서, 승려교육의 과정에서, 도농공동체 지향 차원에서 운력이 행해지고 있으나 이를 승려의 노동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정황하에서 만해의 주장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응답은 현대 불교가 신도, 국가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기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에서 자연 도출될 것이다. 또한 경제적 완전 자립을 기하지는 못하여도, 최소한 정신적인 각성 차원에서도 승려의 노동, 선농불교는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검토할 것은 승려의 결혼 문제(僧尼 嫁娶與否)이다. 이 문제는 한용운과 《유신론》을 대변할 정도로 가장 첨예하고, 논란이 심한 대상이었다. 우선 《유신론》의 논리를 요약하면, 불교 부흥의 하나의 대안인 승려 가취(嫁娶, 결혼)를 허용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만해는 석가의 방편은 때에 응하고 근기에 따라 교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며, 동시에 계율은 소승의 근기가 천박해서 욕망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대상자들을 위해 정한 일종의 방편으로 보았다.
비록 결혼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행하기가 어렵다 해도, 마땅히 결혼이 불교의 시기와 근기에 이롭다 할 때에는 방편으로 결혼을 행해, 때와 근기에 적응하다가 다시 결혼이 불교의 시대적 상황에 이롭지 않은 때가 온다면, 그 때에 가서 이 방법을 거두어 옛날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경우 누가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즉 만해는 당시 그가 《유신론》을 집필하였을 시기에는 승려의 결혼이 시기와 근기에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승려의 결혼 금지가 세상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를 구체적으로 적시해 보면 윤리에 해롭다(不孝, 無後), 국가에 해롭다(殖民主義), 포교에 해롭다(결혼, 환속, 보존), 풍화(風化: 성욕의 제어, 사찰 내 풍기 문란)에 해롭다고 하였다.
이에 그는,
과연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다고 하면, 승려의 결혼을 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진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라고 해서 부처의 계율을 무시하여 승려 전체를 휘몰아 ?戒를 범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자유에 일임하려는 것뿐이다.
라고 그의 속마음을 간략히 개진하였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유신론》 및 만해의 승려의 결혼 주장을 현대 한국불교와 연결을 시켜 살펴보자. 일제하에서는 만해의 주장대로 실제 승려의 결혼이 거의 자유 방임이었다. 이는 일제의 불교정책으로 인한 방관, 종단 자체의 부재· 부진으로 계율을 수호하고 종단 차원으로 그 대응을 할 형편이 전무하였다. 다만 사법 차원에서 처리하였지만 결혼을 하여도 무방하게 처리되었다.
만해의 주장과 같이 자유에 일임한 정황이었다. 그렇다면 일제하의 불교가 만해의 논리에 의거 집행되었는가? 아니면 그 결혼의 요인이 일본불교의 모방에서 나온 것인가? 1926년 불교계는 사법 개정을 통하여 결혼한 승려도 주지에 취임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여기에는 일제의 교묘한 불교정책이 개입되었음은 물론이었다.5) 일반적으로 일제하 불교에서는 승려의 결혼으로 인한 모순이 단순히 계율 파괴 이외에도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사찰재산 망실, 행정직 장악을 둘러싼 갈등, 총독부와의 유착, 사찰의 내분 등 그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만해는 일제하에서 이 같은 승려 결혼에서 나온 부정적 모순을 일체 언급치 않았다. 식민지 불교 정책의 비판, 자주불교의 지향, 불교 개혁의 강조는 강렬하게 하면서도 승려의 결혼에 대한 모순은 일체 취급치 않았다. 우리는 일제하 불교가 보편화된 승려의 결혼으로 불교의 발전이 되었다고 보는가? 아니면 더욱 타락하였는가 혹은 민족불교의 전통이 확대 발전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현대 불교도 만해의 주장에 의거한 바와 같이 거의 자유롭게 일임하는 형편이 되었다. 조계종을 비롯한 일부 종단은 결혼을 허용치 않고 있지만 다수의 종단은 그를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허용 종단이 그를 수용한 것이 만해의 논리를 전적으로 수용한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현재 불교에서 승려의 결혼이 용인되는 것은 또 다른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할 점은 결혼을 허용치 않는 종단 내부에서 간혹 제기되는 파계의 문제 처리이다. 그 문제가 우연한 문제이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과 같이 종단 내부에 종법상으로는 독신이지만 실제에는 딸린 식구를 거느린 승려가 있다든가, 은처승을 거느린 경우도 다수라는 우려는 많은 고민을 던져 준다.
요컨대 만해가 주장한 승려 결혼의 문제는 만해가 주장한 바와 같이 불교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는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고려하는 즉 추후 출산 인구의 감소에 따른 출가자의 희박을 염려하여 승려 결혼을 허용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는 지나친 지적이라고 본다.
종교는 우선 해당 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서도 승려 결혼을 허용하면서도 불교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를 이 사회의 구성원, 신도들이 용인하는 현실임도 간과해서도 안 된다. 거듭 말하면 만해의 주장은 완전 수긍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완전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현재 불교계 정서이다. 다만 만해가 주장한 승려결혼의 논리는 대부분 상실되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으로 《조선불교유신론》에 나타난 제반 양상을 요약하여 살피고, 그를 현대 한국불교의 제 문제와 연계하여 현대 한국불교의 분석에 활용하였다. 이제 그 대강을 정리하면서 《유신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대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의미의 제시는 《유신론》을 바라보는 필자의 관점을 정리하여 제시하는 방법을 택하고자 한다.
첫째, 《유신론》을 통하여 《유신론》을 집필하였을 당시의 불교사를 즉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용운이 이를 집필한 것은 기본적으로 한용운이 고려하고 있는 불교 발전에 대한 기대치가 당시 불교계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에서 나온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한용운의 비판, 《유신론》에서 비판받았던 당시 불교 현실을 수용하기 이전에 그 당시 불교사를 복원, 재구성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연구의 미진, 관련 자료의 희박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시의 불교사와 《유신론》에서 비판당하였던 현실을 격리시키거나 아니면 차별화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유신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한용운이 이를 집필하기 이전에 일본에 다녀 온 경험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을 기해야 한다고 본다. 한용운의 입산 출가는 1905년 설도 있고, 1896년 설도 있다. 출가 후 불과 5년 혹은 15년의 경험으로 《유신론》에서 제기한 불교의 현상을 완전한 것 혹은 충분하며 풍부한 정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미약한 이력을 보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의 1908년 일본행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본불교를 접한 강렬한 충격이 《유신론》을 집필할 수 있는 에너지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짧은 이력과 6개월 여의 일본 체재가 《유신론》을 집필할 수 있었던 요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한용운 인생에서 문뜩문뜩 나타난 천재성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유신론》의 분석에서 만해의 일본행은 지나치게 축소, 간과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이에 대한 재검토가 요망된다.
셋째, 《유신론》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불교계 내외에서는 《유신론》에서 지적한 다양한 내용을 승려결혼 문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긍하는 흐름이 암암리에 있어 왔다. 그러나 본고찰에서도 일부 드러나지만 만해의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입론은 이제 90년이라는 간극에서 보이듯 적지 않은 차별성을 갖고 있다. 지난 90년간 한국불교계는 처절한 고통과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리하여 현재는 양적, 질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일부에서는 문제와 모순이 자리잡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신론》의 잣대로만 현대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것은 경계를 기해야 한다고 본다. 90년 전 만해가 《유신론》을 집필한 용기, 정열, 치밀한 판단 등등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역사적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끼친 영향, 한용운 생애에서의 연계 등도 별도로 탐구되어야 한다. 《유신론》을 수긍하기 이전에 현대 한국불교의 제반 양상을 성찰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넷째, 《유신론》의 정신은 재평가되고, 제2의 《유신론》이 나와야 한다. 만해가 《유신론》에서 제기한 비판성, 열정, 총체성은 더욱더 재평가되어야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의 불교를 《유신론》과 같은 잣대로 분석, 평가할 수 있는 제2, 제3의 《유신론》이 집필, 간행되어야 한다. 현대 한국불교의 제반 양상을 총체적으로 정리해낼 수 있는 문화적 전통 수립이 시급하다. 이제 한용운과 같은 투철한 민족지사도 필요하지만, 불교의 각 분야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사명감을 갖고 불교의 발전, 민족불교로의 지향, 보편 타당한 가치 창출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숨은 일꾼이 필요하다고 본다. 부연하자면 《유신론》이 풍기는 처절한 비판정신이 상실되어 가고, 불교의 언론과 공론이 자기 자리를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이 때에 한용운의 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는 이정표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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