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불교계가 집단 아상에 빠져 있다

slowdream 2007. 10. 15. 01:28
 

불교계가 집단 아상에 빠져 있다



한형조

(한국정신문화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



세상에 그저 주는 돈은 없다. 절간의 법당에 신도들이 시주하는 돈도 분명히 하자면, 부처님의 보호와 가피에 대한 고마움, 점심 공양에 대한 밥값, 사찰의 아늑하고 신성한 공간에 대한 경외, 그리고 앞으로 내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번성,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안정과 평화에 대한 기대 등이 복합되어 있는 돈이다. 그러니, 결코 공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스님이나 절간은 이 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신도들의 이 기대는 명확히 이행해야할 약속이라기보다 불확정적 기대에 가까우므로 사찰이나 스님들이 이에 대해 분명한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법적 책임이 없을수록 이 돈을 조심해서 신중하게 써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


그래서 절집에서는 “시주 무서운 줄 알라”는 말이 오랜 격언으로 내려온다. 쌀 한 알을 흘린 상좌를 하루 종일 벌을 세우고, 배추 잎 하나 놓쳤다고 노승이 산에서 마을까지 시내를 따라 헉헉대며 내려오던 이야기를 수 없이 들어 왔다. 그만큼 시주를 무섭고 두려워하라는 경계였다.


시주를 받을 때는, 이 돈은 받아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 쓰면 법다울까를 자세하고 심각하게 따져야 한다.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수행이다. 그저 주는 것이라고 흑백 혼탁을 가리지 않고 받고, 받았으니 내 것이라고 함부로 쓴다면 그건 부처님의 간절한 뜻에 크게 어긋난다. 그 주고 받음에는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과 번쩍이는 창칼처럼 삼엄한 규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마군이가 갈마들어 수행자들을 타락시킬 것이다.


두어 달 전 처와 함께 강남의 한 선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법당으로 들어가던 중에 보살네들 몇이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내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서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사안은 다들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전직 공정거래위원장이 재임시 SK사에 특정 사찰에 시주를 하라고 권했고, 그래서 시주를 했는데, 그 정재(淨財)를 지금 검찰이 뇌물공여죄로 조사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세속의 잣대로 초세간을 범하는 법난이며, 이 폭거를 불자들이 힘을 모아 제지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나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조사를 받으라 하지요. 문제가 없다면 풀려나지 않겠습니까.” 다들 군소리 없이 서명하고 법당으로 들어가는 분위기에 이 난데 없는 거절은 대중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어 그냥 법당 안으로 들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같은 절집 식구라는 것을 떠나서 생각해 보자. 어떤 기독교 단체라고 상정해도 좋다. 그럴 경우에도 그 ‘시주 권유’에 대해 다들 문제없다고 생각할까? 물론, 누구라도 시주를 권유할 수 있다. 권유를 받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 두면 그뿐이니까…….


그러나 여기 권력이나 이해관계가 개입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공정거래위원장이라는 직책은 시장의 경제질서를 바로잡는 포도청장에 해당한다.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기관은 기업 간의 부당 내부 거래를 조사할 수 있고, 비리가 발견되면 수천 억대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이 사실 자체만 해도 그는 어떤 기업이나 기업인에게 시주나 기부를 운위할 수 없다.


정상 상태에서도 그것은 권유 이상의 강제의 의미를 띨 것인데, SK사는 더구나 당시 기업결합 과정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었고, 결과에 따라서는 수백 억대의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주무 기관의 수장이 권하는 시주가 강제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SK사의 회장이나 직접 권유를 받은 구조조정본부장은 불교 신자도 아니고, 더구나 시주를 한 절간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는데, 시주를 권한다고 순수한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로 10억을 쾌척했다면, 이걸 도대체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시주는 그동안 한국불교를 지켜온 원동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엄격한 규율이 있어야 한다. 공짜 돈만큼 위태로운 것이 없고, 그것만큼 타락하기 쉬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해당 사찰은 처음 시주 돈의 성격 자체를 묻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부처님도 발우에 떨어진 음식의 주인이 누군지는 물론, 음식의 종류와 질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언젠가는 문둥이의 손가락을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스님들의 직업병이 위장장애였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강제나 반대급부 등의 세속적 계기가 개재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면밀히 그런 계기의 틈입을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것을 가리고 선택하는데 철저하려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 해당 사찰은 그 돈이 순수한 시주가 아니었고, 문제가 되는 탁재(濁財)임을 알았다면, 두말 없이 돌려주어야 했다. 재판부의 판결이 있기 이전이라도 의심만 산다 해도 서둘러 돌려주는 것이 마땅했다. 이미 썼다면, 나중에 마련해서 갚겠다거나, 최소한도, 말 그대로, 시주한 셈 쳐 달라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그것이 절간이 살고 불교가 사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불교계 전체가 이 사태를 엉뚱하게 끌고 갔다. 검찰의 활동을 독단이며,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심리를 받던 전 공정위원장이 스님과 신도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불교계 전체가 그를 불교를 지키다가 핍박받는 순교자처럼 대접하는 것은 상식밖의 대처이다.


나는 이것을 불교계의 집단이기주의로 위태롭게 생각한다. 이렇게 나가다간 앞으로도 불교의 집단적 힘을 빌려 비상식적 행동을 호도하고, 반사회적 행동을 보호받으려는 제2, 제3의 사람들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빌미가 되면, 즉 사안을 불문하고 집단적 이기를 추구하는 종교로 낙인 찍히게 되면, 80년대처럼 억울한 법난이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일어날 때, 불교계는 그 폭거를 함께 막아줄 사회적 동의나 법률적 보호를 받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


언필칭 불교계가 말하는 ‘법답게’란 무엇인가? 법(法)이란 ‘객관성’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인간은 주관적으로, 즉 제 욕심대로 행동하고, 제 편의대로 해석한다. 여기서 생기는 혼란과 갈등이 이웃의 안녕과 전체의 이익을 훼손한다.


불교가 그토록 가르치고자 한 것은 “개인적 편견과 이기적 욕심을 떠나 사물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사태를 공정하게 대처하라”는 한마디로 집약될 수 있다. 아상(我相)이 개인적 욕심과 편견이라면 인상(人相)은 집단적 편견과 대중 동원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상(衆生相)은 그런 사실 자체를 자각도 하지 못하는 중생들의 무지라고 할 수 있다.


사바 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전체의 이익과 질서를 해치지 않으면서 추구하기란 정말 어렵다. 불교는 그 힘든 일을 위해, 그것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무아를 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불교계가 지금 집단 아상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리고, 불교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사회의 건전한 상식이 외치는 소리에 한사코 귀를 막고 있다. 나는 이 사태야 말로 진정 법난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불교를 슬퍼하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다. 아상에 묶여 있으면 결코 실상(實相)을 볼 수 없다. 실상이란 너무나 뻔하게 드러나 있어, 누구든지 눈만 뜨면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지도무난(至道無難), 길은 아주 쉽고 분명한데, 우리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있어 그것을 못 본다. 임금님의 화려한 옷의 소문과 집단최면을 벗고 발가벗은 임금님을 향해 깔깔 웃어댈 눈밝은 어린이는 없는가!


10억의 시주돈의 상(相)이 허망한 줄을 알아야 여래(如來)의 옷자락이 보일 것이다. 나는 불교계가 그 돈을, 병 속에 든 물건을 움켜쥔 원숭이의 손처럼, 한사코 끌어안지 말고, 상식과 법(法)을 위해 무주상(無住相)으로 흩을 것을 권한다. 이미 써버린 돈이라 해당 사찰이 돌려주기 어렵다면 종단에서 변통해줄 수도 있다. 다만, 비리를 종교의 이름으로 변호하는 어리석음은 천만 삼가야 한다.


그런 유혹에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견뎌야 불교가 산다. 불교계가 사무량심의 덕목인 공정성과 합리성을 보여줄 때 얻을 복덕은 허공처럼 한량없고 불가사의하다. 이것은 잃는 것같지만 실은 얻는 길이다. 이것이 무지(無智)한 선택이고 무득(無得)한 일 같지만 진정 역무부득(亦無不得)으로 이끌 역설이다(《반야심경》, 법성 역).


그런 의연한 태도는 공직의 기강을 살리고, 경제 정의를 살리며, 그리하여 사람들의 박수를 일으킬 것이고, 사회 전체로 하여금 불교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확산시킬 것이다. 이 이득은 금방 눈에 안 보이는 것 같지만 깊고 본질적이고 장기적이다. 나는 묻는다. 불교계는 진정 자신의 위용을 내외에 과시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불법(佛法)으로 이끌 그 절호의 기회를 돈 몇 푼으로 망치고 말려는가!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이제 누가 대승(大乘)이라는 불교의 구호를 믿을 것이며, 누가 거기에 마음을 열고 기신(起信)해 줄 것인가! ■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