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자기철학을 하는 몇 안 되는 국내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형효 교수가 8월 31일 20여 년간 몸담았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직(철학종교연구)을 정년퇴임했다. 김 교수는 ‘데리다의 해체철학’ 등 무려 18종에 달하는 저서에서 보여준 왕성한 연구 활동과 동서고금의 철학을 넘나드는 철학함의 자유로움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온 인물. 퇴임을 기념해 한국학중앙연구원측이 마련한 8월 26일 강연회에서 김 교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 자리에서 김 교수는 ‘해체적 사유와 구성적 사유’ ‘소유론적(존재자적) 사유와 존재론적 사유’라는 철학소(哲學素)로 철학사를 읽어내는 자신의 독법을 소개하며, 앞으로 철학은 해체적 사유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불교야말로 해체적 사유의 전형이며, 철학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형효 교수의 퇴임강연 전문을 소개한다
1. 개념의 철학과 소유주의의 사상
철학은 인간과 그 인간이 사는 세상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Platon)에서부터 시작된 철학이 세상을 존재자적인 학문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그 세상을 잘못 읽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존재자적인 학문이 철학이라면, 그의 철학은 이제 철학이 아니고 ‘미래적 사유’(das kunftige Denken= fu ture thinking)로 불리기를 바랬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das Ende der Philosophie=the end of philosophy)이다. 재래의 존재자적인 형이상학(die ontische Metaphysik=ontic metaphysics)으로서의 철학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과학이 그것을 이었기에 그런 철학을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것은 과학이 탈각해서 버린 허물을 아직도 뒤집어 쓰고 발버둥치는 서글픈 형상에 비유된다 하겠다. 하이데거가 파괴하려고 했던 존재자적 철학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형이상학적 자아의 의식학, 그리고 자아의 의식이 표상하는 대상을 존재자적으로 명사화해서 보는 인식론을 뜻한다. 둘째로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여기서 중세적 신중심주의와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 신은 인간의 개념을 상승시킨 인격의 신성화에 다름 아니므로 하이데거는 저 두 가지를 차이나게 읽지 않았다. 자아의 형이상학과 대상의 인식론, 그리고 인간중심주의의 도덕학은 다 존재자적 철학의 삼원체제라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적인 철학에서 존재론적 사유(das ontologische Denken=ontological thinking)의 복귀를 주장했다. 복귀는 플라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사유로 되돌아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적 사유와 재래 철학과의 본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존재자(das Seiende=being)는 명사로 개념화되는 실체와 같은 것이지만, 존재(das Sein=Being)는 명사화가 불가능한 동사적 사건(Ereignis=event)의 뜻을 함의하고 있다. 즉 존재는 생멸의 부단한 사건을 지시하므로 하이데거는 그것을 자동사적 의미를 지니는 뜻으로 독일어로 ‘Seyn’이라고 표시하기도 하였다.
존재자는 의식이 개념화할 수 있기에 자의식이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있는 인식의 영역에 해당한다. 개념은 자의식이 관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소유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개념화가 안 되는 부단한 흐름으로서의 존재론적 현존은 없어지는 부재의 사라짐을 안고 있다. 모든 존재는 내면적으로 부단히 변화하며 외면적으로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서 태어나지 않는다. 존재는 일의성으로 정의되지 않고 이중성을 운명적으로 안고 있다. 흑판이라는 존재는 문자를 쓰고 지우기 위하여 존재하고, 분필의 존재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문자를 쓰고 지우는 사이에서 그 흑판은 서서히 낡아지고, 분필과 지우개가 없으면 그 흑판도 생기지 않았으리라. 내면적 이중성이나 외면적 이중성이나 다 같은 구조다. 하이데거는 이런 이중성(Zwiefaltigkeit= duplicity)을 차이(Unterschied=difference)가 나는 두 가지가 서로 상대방에게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는 뜻에서 차연(差延, Unter-Schied=differance)이라고 불렀다.
差-延은 差-異와 延-期(또는 延-長)라는 두 개의 다른 의미가 하나로 묶여 공존하고 있어서 의미의 초점이 선명하지 않다. 일종의 반(反)개념으로서 명석판명한 개념이 아니다. 이 차연의 용어는 프랑스의 데리다(J. Derrida)에 의하여 ‘la differance=differance’라는 조어로 더 보급되었으나, 하이데거가 데리다보다 더 앞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차연의 용어는 이미 원효(元曉)의 불교적 사유에서 불이이불이(不一而不二)나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의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억지춘향 격으로 견강부회하려는 것이 아니다. 차연의 사유방식이 이미 고대 철학사의 여명기에 동서의 울타리 없이 공통적으로 세상의 이법을 읽는 방식으로 발견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데리다가 이미 이것을 직시했다. 하이데거가 소크라테스(Sokrates) 이전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존재론과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생성론을 이율배반적으로 읽지 않고, ‘존재 즉 생성’의 이중성으로 보려는 시도도 역시 차연의 다른 이름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런 단편적인 지적은 벌써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념 철학과 차연 철학의 차이가 존재해 왔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데리다가 이미 그런 철학사의 두 갈래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개념철학과 차연철학의 두갈래는 하이데거적으로는 ‘존재자의 철학(Philosophie des Seienden=philosophy of beings)/존재의 사유(Denken des Seins=thinking of Being)’로, 프랑스의 20세기의 가톨릭 사상가인 마르셀(G. Marcel)의 철학용어로는 ‘소유론(la pensee de l’avoir=thought of having)/존재론(la pensee de l’etre=thought of being)’으로, 데리다의 분류에 따라 ‘말중심주의(le logocentrisme=logocentrism) / 문자학(표지학)(la grammatologie=gram- matology)’으로, 불교철학의 용어로는 ‘自我의 알음알이/無我의 지혜’로, 老子의 도가적 용어로서는 ‘能爲/無爲’로 각각 나누어진다 하겠다.
여기서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해도 조금도 개의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단지 이 글의 성격적 위상을 미리 추상적으로 도표화하기 위한 안내표지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나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철학사적으로 전자와 후자의 계열은 용어상의 표현적 차이를 넘어서 내용상으로 서로서로 뭉쳐진다 하겠다.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먼저 지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삼라만상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들을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보고 있는가? 이것이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다. 이런 삼라만상의 이해방식과 보는 방식이 앞에서 거론된 ‘개념철학/차연철학’의 구분을 낳았다.
개념철학에 따르면 삼라만상은 자아의 의식 앞에 나타난 대상이고, 나는 그 대상을 알지 못하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개념적으로 그것을 장악하고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자아는 주관이고, 대상은 나의 주관 앞에 선 문제(le probleme=problem)로서의 객관이 된다. ‘문제’는 마르셀 철학의 중요개념인데, 그냥 단순한 어휘로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은 단독 명사로 분류되어야 하고, 고유한 뜻을 품고 있어야 한다. 즉 철학적으로 실체와 자기 고유성이 의미론상으로 설정된다. 은연중에 개념철학은 자아의식을 중심으로 삼고 삼라만상의 현상을 내 앞에 판단하기 위하여 내세운다. 이것이 ‘문제’의 개념이다. 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곧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소유의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마르셀이 ‘문제’를 해결하는 판단철학과 소유론과의 사이에 하나의 깊은 유대가 암암리에 맺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탁견이다. 개념철학은 현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현상을 非我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현상을 단독적인 존재자로서, 명석판명한 명사로서 의식이 규정한다. 명사로서 작명이 안 된 대상은 아직 자아의 의식에 정리가 안된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게 된다. 명사가 실체적인 존재방식의 완성으로서의 自家性인 자기 고유성의 정립으로 고착된다. 이것이 지식의 정의다. 명사로서의 현상은 개념이고, 그것은 곧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자에 다름 아니다. 존재자는 삼라만상을 개별적 고유성으로 보는 방식과 같다. 그리고 그 개별적 고유성은 형이상과 형이하로 분류된다.
현상에 대한 형이하적 장악은 경제실리적 소유법과 통하고, 형이상적 장악은 도덕명분적 소유법을 도입한다. 즉 형이하적 문제는 사회생활에서 경제실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라는 진리의 길을 부르고, 형이상적 문제는 인간사회의 정신적 갈등과 소외의 문제와 직결되는데 도덕명분적으로 ‘정의’라는 진리의 길을 요청한다. 편리(便利)와 정의(正義), 이 두 가지가 재래의 개념 철학의 영역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진리의 대명사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진리는 다 현상을 의식의 문제와 대상으로 여겼던 소유론적 사고방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경제실리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물질적으로 장악하여 편리를 제공하려는 인간이성의 지능적 측면과 연계되어 있고, 도덕명분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정신적으로 장악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적 측면과 유관하다. 그래서 다 소유주의적 존재자의 철학이라고 우리가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다 개념상의 문제를 야기하는 불편과 부정의를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지능과 의지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철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자아의 판단하는 의식을 중심에 두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상의 문제를 경제실리적으로 그리고 도덕명분적으로 해결하려는 소유적 진리관이다. 경제실리적 편리의 진리를 가치로 여기는 자아의 판단은 쉽게 이기배타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이해관계에 사람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이익을 쟁취하는 자연적 본능의 소리에 쉽게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장수의 이익은 얼음장수의 손해와 같이 가기 때문에 두 직업의 사람들이 서로 이익에서 충돌한다. 경제실리주의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닌다. 경제실리주의도 인류의 보편적 편리를 위한 보편주의의 성향을 지니기도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 보편주의적 시각도 인간중심주의적인 이익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자연적 존재자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배타의 구조를 떠난 것은 아니겠다.
그렇다면 도덕명분주의가 설파하는 정의의 진리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우는 것 아닌가? 도덕명분주의는 선의지의 사회적 실현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강력한 보편주의의 명분을 띠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선의지가 무엇인가? 모든 이가 동의하는 그런 선의지가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도덕적 선의지를 설파한 유가의 공자를 통하여 역설적으로 보편적 선의지의 실재가 선명하게 설정될 수 없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공자가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서 말하였다. ‘인을 좋아하되(好仁)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愚)이 되고, 안다는 것을 좋아하되(好知)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큰 소리만 탕탕치는 허풍(蕩)이 되고, 신의를 좋아하되(好信)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나와 남을 해치게(賊) 되고, 곧기를 좋아하되(好直)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가혹하리만큼 여유가 없고(絞), 용기를 좋아하되(好勇)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고(亂), 굳세기를 좋아하되(好剛)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광기(狂)가 된다.’ 이것을 유명한 공자의 ‘육언폐단(六言六蔽)’이라고 부른다.
공자는 여기서 모든 가치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학문의 공부를 통하여 그 폐단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도덕적 선의지가 학문적 공부의 성취를 통하여 자신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공자에 비하여 노자는 전혀 다른 사상을 펼친다. 말하자면 노자는 도덕적 선의지가 이미 그 자체 어둠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회임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의 공부와 이성의 판단을 통하여 그 어둠이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이미 불선을, 그리고 덕은 악덕의 어둠을 자신의 이면에 감추고 있는 것이 이 우주의 도(道)의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의 2장에 나오는 말이다. ‘천하가 다 미(美)를 미라고 여기면 그것은 악(惡)이고, 선(善)을 선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불선(不善)이다. 고로 유무(有無)가 상생하고, 난이(難易)가 상성하고, 장단(長短)이 상형하고, 고하(高下)가 상경하고, 음성(音聲)이 상화하고, 전후(前後)가 상수한다.’ 27장은 더 직설적이다. ‘고로 선인은 불선인의 스승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이다.(故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 노자는 선의지가 순진하게 자기 뜻대로 세상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선의 어둠이 무의지적으로 생기하여 선의지적 도덕명분주의를 퇴색시킨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의지가 비록 도덕명분주의의 이념에 의하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려 하나, 그런 능위적 작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려니와, 또 세상이 그렇게 선의지에 의하여 소유되지 않음을 노자는 갈파하였다. 그동안 인류는 이런 선의지의 능위(能爲)로 세상을 새로 만들려는 그런 의지의 도덕학과 형이상학을 수 없이 펼쳤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구악이 일소되면 거기에 반드시 신악이 등장하여 선의지에 의한 세상의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제 인류는 이런 낭만적 이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명분주의의 실천철학도 자아의 관점에 따라 다른 차이를 노정하게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선이 보편적으로 만인에 의하여 동의되지 않고 반드시 반대의견에 부딪치면서 사회적 이견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것이 사회적 투쟁의 변증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는 선은 타자에 의하여 그 선의 이면에 깃들어 있는 불선의 요소로 인지되어 내가 주장하는 선에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 도덕명분주의는 결국 불교의 유식학적인 용어인 의사식(意思食)의 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의사식은 자기의 의사를 진리로 확신하여 타인의 의사와 싸워 그 타인의 의사를 먹어치우려는 승리의 집념을 말한다. 경제실리주의가 식욕의 단식(段食)과 성욕의 촉식(觸食)을 위주로 삼는다면, 도덕명분주의는 의사식(意思食)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겠다.
2. 소유론적 의식철학과 논리적 의식일반의 허구성
소유주의는 자의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철학적 자의식일수록 그 자의식은 보편적이라고 명명된다. 왜냐하면 이기적 자아의 얼굴을 수정 없이 내미는 철학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실리적 자아나 도덕명분적 자아나 다 보편적 논리의 기치를 한시라도 놓아 본 적이 없다. 경제과학적 지식이나 도덕실천적 의지는 모두 의식일반(consciousness in general)의 성역을 신주 모시듯 한다.
의식일반은 보편적 가치를 낳는 기반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는 개인적 심리적 호오(好惡)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의지나 선의지가 있다는 신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개념철학은 그동안 논리적 의식일반이 개인적 심리적 호오의 편파심을 넘어선 가치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허구적이다.
자아의 의식은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띄우면서 사회적으로 장식을 해나가지만, 다급하게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아가 위기를 당하면 자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생존의 본능과 하나가 된다. 도덕명분적인 선의지로 사회적 공동선을 말하던 사람이 자신의 본능적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는 대뜸 이기적 작태로 돌변한다. 도덕명분주의가 아무리 反본능적 사회적 공동선을 설교하더라도 개인적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의 이기적 생존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디 개인적 이기주의의 모판을 실질적으로 향유하고 있으면서 철학적으로는 인류의 공동 이익과 편리, 경제적 부의 증진에 기여하는 소유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확실한 소유론의 철학이다. 그런데 그 소유론이 인류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한다고 이기주의의 틀을 벗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국가간 빈부의 격차가 부국의 이기주의에 기인한다는 소론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도 부자계급의 무한 탐욕에 기인한다는 사회정의론의 주장이 전혀 허구로서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경제실리주의의 소유론이 결과적으로 범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기주의를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한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사냥하기 위하여 인간이외의 중생을 순전히 인간 이익의 도구로 희생시켜도 좋다는 발상을 정당화시켜 준다. 과학기술주의의 의식일반이 이렇게 경제실리주의의 이기심으로 이어진다.
도덕명분주의의 反이기심과 反본능론이 경제실리론의 이기심과 과학기술론의 인간중심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덕명분론의 정의론과 의(義) 사상이 이기적 이익을 탐욕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심리를 성공적으로 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에 역설적인 공자의 육언육폐(六言六蔽)를 음미했다. 모든 도덕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야누스적 얼굴의 이중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정의의 의(義)가 필연적으로 그 가치를 추종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남과 자기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게 되는 ‘賊’과, 가치에의 굳센 신념이 무의지적으로 낳는 경직된 정신적 ‘교’살(‘絞’殺)의 분위기와, 의(義)의 실천이 초래하는 ‘난폭한(亂)’ 심리와 정의감이 수반하는 ‘광(狂)적’인 ‘추상의 정신(l’esprit d’abstraction=spirit of abs- traction))’등이 일어나게 된다. ‘추상의 정신’은 마르셀의 철학이 설파한 가르침이다. 그는 《인간적인 것을 거슬리는 인간들(Les hommes contre l’humain)》에서 추상 명사로 불리워지는 도덕적 정신의 가치가 종종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들을 고려하지 않고 공허한 구호로 둔갑하여 정신을 단세포화시키는 결과를 ‘추상의 정신’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 구호에 현혹되면 인간의 정신은 격정적 광기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다. 도덕명분론이 본의 아니게 독선과 위선으로 흐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의지의 확신적 신념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 확신의 의지가 없으면 새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새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는 부지불식간에 고집으로 변한다. 그 고집이 유식학에서 말하는 의사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우리가 앞에서 보았다.
신념의 고집은 마치 경제실리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이기심과 역설적으로 닮았다. 자기 것이 옳고 타인의 것이 그르다는 판단이 그런 고집을 낳는다. 이것은 이기적 개인의 호오 감정과 무엇이 다를까? 이기적 개인의 호오감정은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배의지도 관계한다. 진리의지와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융(C.G. Jung)의 통찰을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논리적 보편성과 그 주장의 무의식에는 심리적 호오의 경향이 깊이 숨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심리가 논리보다 앞선다고 그는 보았다. 이 말은 자아의 의식이 모든 생각의 흐름에 동반하고 있는 한에서 인간의 생각은 아상(我相)과 아애(我愛)와 아견(我見)의 편파적인 틀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지성은 부분적(partial)이고, 자아의 의지는 편파적(partial)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늘 타인들의 것과 부딪치고 장애를 일으킨다. 융의 소견은 우리로 하여금 불교적 유식학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유식학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은 무시이래로 아상·아견·아애 등이 형성하는 아치(我癡)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과 유사하다.
인간은 사회생활의 업을 통하여 늘 이기적 아상중심적 본능을 키워 왔었다. 사회생활은 곧 언어생활인데, 언어생활은 늘 사회적으로 남으로부터 인정과 승인을 받으려는 그런 욕망의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헤겔(Hegel)은 이 사회적 인정의 욕망을 잘 읽었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가 통찰하였다. 부모나 주위로부터 말을 배움에서 인간은 부모와 주위로부터 사회적인 인정을 겨냥하는 아상의 욕망을 무의식의 종자로 갖게 된다. 이것이 불생불멸인 제8식인 무의식(un-conscious)의 아알라야식(laya vijnana)에 저장되고 업종자가 되면서, 이것이 다시 제7식인 마나스식(manas vijnana)에 전식(轉識)되고, 이 마나스식이 제6식인 모든 의식의 활동에 前의식(pre-conscious)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상(心象)이 된다.
이 아상중심의 심상이 의식의 표상 활동에 그림자처럼 동반하기에 어떤 의식의 표상도 아중심의 심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래서 그가 세상의 삼라만상을 표상해도 늘 이기적 소유의식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봐도 인간은 그에게 무의식으로 형성된 아상중심의 욕망의 ‘체(sieve)’를 벗어나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의 체’라고 언어학자 트루베츠꼬이(Troubetskoy)는 말했다. 그래서 아무리 이성적 대화를 통하여 사회적 의사소통의 이상적 담론을 추구하려 해도 그것은 이상주의자의 꿈꾸는 낭만이지 실제로 그런 이성에 의한 이상적 일치의 사회는 도래하지 않는다. 저런 하버마스(Habermas)의 소견은 실현되지 않는 이성적 계몽주의자의 꿈이고 낭만일 뿐이다.
의식의 이성은 무의식의 아상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형성해 놓은 언어적 체를 통하여 타인의 대화를 듣기 때문에 그 체에 걸리는 것은 무의식의 심상이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만인은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것을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자인 라깡(J. Lacan)이 이미 밝혔고, 라깡에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가 그의 《이정표(Wegmarken)》에서 세상은 ‘마음에 속하는(daseinsgehorig)’ 것으로서 ‘매번마다 마음(현존재)이 작성하는 것의 전체(die jeweilige Ganzheit des Umwillen eines Daseins)’를 세상이라 묘사했다. 이 말은 각자의 마음의 관심의 수준만큼 세상이 형성된다는 것이겠다.
하이데거의 말은 하버마스의 계몽적 이성주의를 희롱한다. 따라서 의식의 이성이 아무리 공정성을 주장하고 불편부당을 역설해도, 그 이성은 자의식의 보편성이라는 명분 아래에 늘 아만과 아애와 아견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아애가 아집(我執)을 키운다면, 아견은 법집(法執)을 낳는다. 아집과 법집은 늘 사회적 명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찾는다. 개념의 철학이 자의식의 철학과 함께 간다는 것을 우리가 성찰했다.
그리고 자의식의 논리적 보편성의 명분도 기실 아상이라는 심리적 중심을 장식하기 위한 꾸밈과 같다는 것도 우리가 보았다. 경제실리주의가 이기주의에 축을 박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도덕명분주의도 反이기주의적 선의지의 명분을 떠난 것이 아닌 한에서, 모든 도덕주의의 철학도 我相의 영향 아래에 감추어진 아애와 아견의 아집과 법집을 굳세게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명분주의도 경제실리주의에 못지 않게 소유론의 철학, 존재자의 개념론이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사회생활의 이기적 본능의 치료를 도덕명분주의에 맡기는 것은 별로 실효성이 없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사회생활에서 인간들의 소유론적 이기적 본능의 이기배타적 욕망을 치유하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덕명분주의의 가치론에 맡겨 도덕적 세상을 창출해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인류가 쏟아 부어 넣은 노력에 비하여 그 결과가 허망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능의 자연적인 이기심에 바탕하여 마음의 자발적인 흐름의 성향과 일치하는 대목을 지녔지만, 도덕명분주의는 마음의 자연적 이기심의 성향을 거슬리는 방향으로 역진하는 운동을 요구함으로써 무위적 마음의 흐름을 존종하지 않는 강력한 당위의 의지로 무장할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흐름을 좋아하지 능위적인 작용을 가하여 마음이 자연성의 생리와 어긋나는 어떤 역추진을 달가와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자연적인 마음의 기호에 따라 사회생활하기를 좋아한다.
본능은 자연적 마음의 성향이다. 본능적 마음은 이기적인데, 이 이기심이 이기배타적인 길을 가기 때문에 反사회적 작태를 낳는다. 이것이 문제다. 이런 이기심의 반사회적 작태를 교정하기 위하여 도덕명분주의가 등장하여 반사회적 이기심을 당위적으로 숨죽이거나 뿌리 뽑으려 했다. 그러나 능위적 당위성은 자연적 무위성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것을 차연의 철학이 다시 깨달았다.
맹자는 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읽었다. 이것은 맹자의 사유가 참으로 깊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맹자에 의하면 선은 좋은 것이기도 하고 또 의로운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선을 읽은 것이고, 후자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선을 해석했다. 전자의 경향은 양명학으로 흐르는 계기를 주었고, 후자의 것은 주자학을 탄생시켰다. 선을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야만 선이 재미있고 즐겁고, 그러면서 배타적인 反사회성을 낳지도 않으면서 자리이타적인 자연성으로 마음에 이익이 되는 그런 경지로서 사랑을 받게 된다. 도덕성과 예술적 놀이성이 이율배반적이지 않는 그런 마음의 자연성과 자발성을 우리가 보게 된다. 인간은 재미있는 삶을 자연적으로 갈구한다. 재미있지 않으면 인간은 즐겁게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도 도덕생활도 직업생활도 철학공부도 다 재미있어야 한다.
이 재미를 본능과 본성이 다 요구한다. 그러나 본능이 요구하는 재미는 소유론적 재미이나, 본성이 그리워하는 재미는 존재론적 재미다. 본능과 본성은 다 마음의 자연적 자발성의 힘이다. 본능은 아상의 만족을 추구하나, 본성은 아상을 버릴수록 그 기쁨이 더 커진다. 스피노자(B, Spinoza)는 《윤리학(Ethique)》에서 ‘인간은 선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선이라 여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중요한 언명이다. 인간은 좋음을 찾는 마음, 즉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3.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해석
미래적 사유의 본질은 마음이 본능적이며 소유론적 마음의 재미와 좋아하는 기호(嗜好)의 추구에서부터 본성적이며 존재론적 마음의 재미와 좋아하는 기호에로 회심하도록 길을 닦아야 하는데 있다고 본다. 양명학이 자행합일(知行合一)을 말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듯이 아는 것은 행동으로 동시에 이행되어야 한다는 지식과 실천의 당위적 합일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 마음인 양지현성(良知現成)의 상태에서 보면 지행합일은 바로 무위적으로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이 그렇게 즉각 이루어진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겠다. 소유론적 기호에서 존재론적 기호에로 마음을 회심시키는 마음의 길닦기는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유에서 가장 확실하게 정립되어지는 것 같다. 색즉시공은 모든 색상을 띤 현상이 그 본체에서 공성임을 말하고, 공즉시색은 모든 공성이 다 색상을 지닌 현상임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현상(相)과 본성(空)과의 상관성을 입론한 구절이라 하겠다. 감각적으로 가시적인 현상이 다 그 본질에서 공성임을 모르면, 인간은 덧없는 소유적 탐욕의 노예가 되어 존재자적인 색상의 현상을 다 소유하려는 덧없는 몽상을 하게 된다는 것을 첫 구절이 함의하고 있다 하겠다. 즉 존재자로서의 현상을 실체로 간주하여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곧 좋은 것을 먹으려고 하는 식욕의 변형이다. 그 식욕은 지배욕과 권력욕과 지식욕을 다 함의한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이런 소유욕이 허망함을 일깨워주는 것이 색즉시공의 의미라고 여겨진다. 색즉시공의 의미는 소유되지 않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유루법(有漏法)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데 있다. 다 새버리는 것을 끝까지 안으려고 애쓰는 것이 유루법의 헛농사다. 유루법의 헛농사를 짓지 않도록 불교는 몸의 더러움과 감각의 고통스러움과 마음의 무상함과 내 것이 안 되는 만법의 존재방식을 사념처(四念處)로서 바로 보게 한다. 색즉시공은 소유론의 대부정을 일구면서 소유론적 현상(現相)은 결국 환상(幻相)임을 알게 해준다. 만물을 환상으로 보게 하면서 색즉시공은 공즉시색이라는 존재론의 대긍정을 위하여 길을 열어 놓는다.
공즉시색은 모든 만물의 생멸과 존재방식은 무한대의 허공의 ‘무본지본(無本之本)’에서 자동사적으로 솟은 공(空)의 현상임을 알려준다. 이 ‘무본지본’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소》에서 말한 허공의 의미로서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닌(不可得 非不可得)’ 허공의 의미를 일컫는 뜻인데, 이 표현은 하이데거가 무(無, Nichts=nothing)를 탈근거(Ab-grund= groundless ground)로 본 것과 상통한다 하겠다. 말하자면 삼라만성으로서의 두두물물은 다 허공의 법계에서 솟은 공의 시여(施與)와 같고, 공의 보시(布施)에 다름 아니다. 허공의 공에서 어떻게 만물이 생기하고 또 소멸하나?
원효에 의하면 이 무본지본으로서의 허공법계는 일심(一心)의 다른 이름과 같다. 허공법계는 텅 비어 있으나 죽은 공허한 빈 공간이 아니라, 고갈되지 않는 무한대의 원력이 끝없이 넘쳐 흐르는 마음과 같다. 원력은 소유론적 욕망과 같은 이기배타적 탐욕이 아니라, 자신을 증여하여 많은 이타행을 하고 싶어하는 그런 존재론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Es gibt =It gives=There is’라고 언명했다. 저 구절은 ‘있다’라는 부사구이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그것이 준다’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고 읽어야 할 것 같다.
‘그것(Es)’이 무엇인가? 원효식으로 옮기면, ‘그것’은 일심이고, ‘주다(gibt=geben)’는 일심의 원력이 현상화하려는 즉 존재에로 나타나려는 일심의 원기(元氣)를 뜻한다고 여겨진다. 이 일심의 원기를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종용(從容)’(das Sein-lassen=letting-be)의 뜻으로서 읽었는데, 이것은 만물을 만물로서 존재케 하는 탈근거인 無의 힘과 다른 것이 아니겠다.
‘그것’의 삼인칭 대명사를 서산대사가 임종 직전의 선구(禪句)에서도 표현했다. ‘80년 전에는 그것(渠)이 나(我)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그것이도다.’(八十年前 渠是我 八十年後 我是渠) 이 공성의 일심을 서산대사가 ‘그것’이라고 표명한 것은 그 일심이 전혀 인격적 자아의 일인칭이 아니고, 무인격적인 삼인칭으로서 여래의 법에 다름 아님을 뜻한다고 하겠다.
《금강경》에도 여래를 ‘제법여의(諸法如義)’라고 세존은 설파했다. 모든 여래의 법은 자연의 여여한 모습과 같다는 의미겠다. 신(神)을 절대적 인격으로서의 완전한 자아로 보면, 자아가 남아 있는 한에서 그 신은 편파적 아상을 지울 수 없다고 보았기에 14세기 독일의 신비적 신학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는 신을 공(Leere=voidness)과 無로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신을 그는 또 ‘그것’이라고 번역됨직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 ‘그것’으로서의 神은 스스로 만물 속에 자신을 나누어주고 싶은 사랑의 시여에 다름 아니므로 만물 속에 신의 씨앗이 다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그의 창조론이다. 창조는 절대적이고 인격적 존재자가 세상을 무로부터 타동사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무한대의 공성의 원력이 스스로 만물 속으로 다양화되는 것을 일컫는다. 에카르트의 사상은 범신론적인 경향을 띠고 있고, 이것이 불교적 우주관과 아주 닮았다. 공성이 일심의 원력을 나타내므로 그 일심의 원력이 하느님이기도 하고 부처님이기도 하다. 하느님과 부처님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삼인칭의 법이 공성이고, 그것이 또한 일심이다. 그러므로 이 일심은 단지 인간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마음’(le Mental cosmique=cosmic mind)이라고 읽어야 한다. 프랑스의 불교학자인 랭쎈(R. Linssen)이 《禪(Le Zen)》에서 일심을 그렇게 옮겼다. 올바른 통찰이라고 여겨진다. 일심은 자아가 중심을 자리잡고 있는 자아의 마음이 아니다. 일심은 무아의 마음과 같다.
무아의 마음은 자아의 마음처럼 편파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아주 공정하고 무사심으로 세상을 본다. 노자가 말한 ‘천도무친(天道無親)’(79장)이 그런 무아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겠다. 인간의 마음도 무아의 경지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그 마음이 표출하는 모든 현상은 자성이 스스로 분비하는 즐거움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곧 이타행을 하는 이익의 마음이 된다.
우리가 무아의 경지에서 공부하는 순간의 마음은 무심이지만, 그 순간의 무심은 매우 온유하고 고요해서 흥분된 번뇌의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순간의 마음은 무심지심(無心之心)으로 자리(自利)의 고요가 곧 이타(利他)의 보시로 이어진다. 자리와 이타가 다르지 않다. 자아의 아상은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사회적 이기심과 배타심의 끄달림으로 인하여 번뇌에 시달리고 괴로워하게 된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는 아파하는 자아를 짊어지고 괴로워한다. 무아의 마음은 공성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원력이므로 다함이 없고 고갈되지 않는 무한대의 힘을 정시한다. 그 힘이 원기다. 무아의 일심이 현상으로 나타나려는 존재의 원력은 기쁨의 즐거움을 베풀려는 자비와 다르지 않다.
그 元氣는 베르크손(H. Bergson)이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eatrce)》에서 갈파한 ‘생명의 비약’(l’elan vital=vital spring)과 다른 것이 아니겠다. 소는 뿔이 있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받으려는 생명의 원력이 하도 강렬하여 뿔이 생겼다고 읽어야 하겠다. 이것이 베르크손의 통찰력이다. 마찬가지다. 벚꽃은 장렬하게 산화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함께 피고 함께 휘날린다고 봐야 하리라. 경허스님의 짧은 선시의 한토막이다. ‘문 앞 복사꽃 오얏꽃이 일이 많아서, 만 떨기마다 옛부처의 마음을 붉게 뿜어대누나.’
어찌 생명이 있는 것에만 일심의 공성을 말하겠는가? 노자에게 계곡(谷)과 웅덩이(渾)는 불가의 허공처럼 비어 있으면서도 만물을 다 받아 청탁(淸濁)으로 편가르지 않고, 다 고요히 진정시켜 만물을 다 이롭게 해 주는 그런 ‘화광동진(和光同塵)’(42장)의 상징이다. 화광동진은 빛과 화합하고 먼지와도 동거하는 그런 원효적 ‘화쟁’의 다른 이름이다.
일심은 자신의 마음을 보시하여 세상을 근기 따라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허공의 마음과 같다. 허공의 마음은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이고, 바쁘지 않고 시간이 있고 여유로운 그런 마음의 태도를 뜻한다. 마르셀은 그런 마음의 존재를 ‘점령되어 있지 않음’(la disponibilite=disposability)이라 불렀다. 이 용어는 번역하기 어렵다. 전에는 이 용어를 나는 일본어 번역에 따라 ‘수의성(隨意性)’이라고 옮겼다.
‘수의성’은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의 본성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보다 더 단어 자체의 뜻을 직역하는 의미에서 비어 있고 자유스럽고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영혼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뜻에서 ‘점령되어 있지 않음’이라고 번역했다. 자아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거나 소유의 탐욕에 집착된 영혼은 이미 가득 점령당한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누가, 10:30-37)에 길에서 강도를 만나 반 죽은 사람을 지체 높은 제사장도 못 본 척하고, 같은 이스라엘 동족의 한 부족인 레위인도 역시 지나쳤다. 오직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거의 반 죽은 자를 돌본다.
이 사마리아인의 존재양식이 곧 마르셀이 말하는 ‘점령되어 있지 않는’ 상태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무척 바쁜 사람으로 여유가 없거나 자기 개인적 욕심으로 온갖 신경이 다 채워진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는 여유롭고 분주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지 아니한 비어있고 자유로운 허공적 마음을 지녔다. 이것이 무아다. 의상대사의 〈일승법계도〉의 한 구절이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비의 보배가 허공에 가득 찼는데, 중생들은 각기 그릇 따라 이익을 얻는도다.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은 인연따라 만나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이웃으로서 이익을 주는 마음이다. 이것이 무아의 공심이고 일심이다. 이것이 또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이다.
모든 중생은 이미 공성의 일심을 분여받은 그런 만물이다. 모든 만물은 다 일심의 존재방식인 어떤 성취의 원력을 다 띠고 있다. 이것이 불교를 범신론적 사상으로 읽게 하는 까닭이 된다. 일체 만물이 다 그 존재양식에서 불성을 지닌다. 이것은 또 양명학에서 모든 이가 다 성인이라고 부른 연유와 닮았다. 금의 함량이 많은 금괴나 아주 적은 잡석이나 다 금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금의 순도가 다를 뿐이다. 이래서 ‘만물일체’라고 양명학은 말한다. 무아의 마음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을 도덕적 선악으로 판단하기보다 오히려 모두가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무아의 공심이 더 중요해진다. 이 공심이 존재론적 사유다.
이것은 또 예수님이 갈파한 ‘이웃’의 마음이다. 존재론적 사유는 자아가 중심이 된 소유론적 지능과 의지가 아니다. 존재론적 사유는 일심으로서의 공성을 닮으려는 사유다. 공성을 닮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존재론적 사유는 곧 존재자적인 실체론적 철학으로 미끄러진다. 노자가 有를 無의 욕망으로 보고, 마명(馬鳴, Ashvaghosha)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법신이 색상의 본체이므로 색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본래부터 마음과 색상이 둘이 아니다’(法身是色體故 能現於色. 所謂從本以來 色心不二)라고 언명했다. 이것은 무와 법신의 허공을 본성으로 함유하지 않으면, 유와 색이 필연적으로 소유론적 실체로 전락함을 암시한다.
색즉시공은 색상을 환상으로 보게 하고, 공즉시색은 색상을 실상으로 보게 한다. 모든 색상이 개념적인 일의성을 지닌 존재자적 실체라고 여기고, 색상을 택일적 판단에 의한 취사가 적용되는 대상으로 여기는 한에서, 세상의 모든 색상은 곧 환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색상을 개념적 사고방식과 그 철학에 의하여 가치판단을 행한다. 그래서 가치판단과 개념철학은 같이 간다. ‘진(眞)/위(僞)’의 구분이 인식론의 대본을 이루듯이, ‘선(善)/악(惡)’의 구별은 도덕학의 생명이 된다. 그래서 개념의 형이상학은 전자의 성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후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인식론의 가치가 정립되기 위하여 의식일반의 보편성이 요청되고, 도덕학의 가치가 굳건히 설립되기 위하여 도덕적 자의식의 보편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가치론은 어떤 명분으로 장식되든 기본적으로 의식철학의 판단을 떠나지 않는다. 의식철학은 유식학적으로 마나스식(manas vijnana)과 같은 제7식인 前의식의 심상의 영향을 생리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의식일반이든 보편적 자의식이든 모두 다 마나스식의 아상 아래에 있다. 선이 오직 선으로서만 존립하고 악과 무관한 것인가? 선의 고유성이 악의 고유성처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가? 선이 오로지 선이라고 주장되는 그 순간에 그 선은 이미 악으로 전환되는 역사상의 무수한 사실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디는 인간에게 피부병을 옮기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몸에서 떨어진 죽은 세포를 먹어 치워 방 공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진디는 선인가, 악인가?
4. 마음의 기호의 이중성인 본능과 본성
불교와 노장사상에서 ‘선/악’은 ‘진/위’와 같은 상관적 타자로서 서로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상관적 대립(pertinent opposition)은 변증법적 투쟁의 관계와 다르다. 왜냐하면 후자는 하나에로 종합해 나가기 위한 투쟁이 필수적이지만, 전자는 이원론의 방치도, 일원론에로의 귀일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이중성을 한 묶음으로 엮는 그런 차연의 사유와 만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비진리는 흔히 생각되는 인식론적 허위가 아니다.
종래의 진리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바깥의 사물과의 일치여부에서 <진/위>가 판가름난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이런 양자택일의 진리개념을 이미 넘어서 있다. 그는 존재의 진리가 현시되는 측면을 진리(Wahrheit=truth)라고 불렀고, 존재의 진리가 은적되는 측면을 非-진리(Un-wahrheit=un-truth)라고 명명했다. 그에게 존재는 명사적 개념이 아니고 자동사적인 무의 현상화로서 무로부터 생기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마치 바다가 바람에 의한 외적 영향으로 흔들리어 파도가 생기는 그런 번뇌가 아니고, 바다가 스스로 금빛 찬란한 존재의 현상을 나타내 보이는 바다의 자기 증여와 같은 파도다.
바다가 무라면, 파도는 그 무의 자기 증여와 같다. 비유컨대 존재의 파도가 다시 무의 바다에로 사라지는 것을 하이데거가 은적(Verborgenheit =concealment)의 ‘非-진리’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재래의 의미와 같은 그런 인식론적 허위로서의 비진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하는 말이겠다.
비진리로서의 은적은 진리로서의 비은적인 현시가 소유론적 존재자의 개념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약과 같다. 《성경》의 〈요한복음〉(16-7)에서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일렀다. 예수님의 은적은 진리의 현전이 소유로 이해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은적은 진리의 현시(revelation)의 조건이다. 은적은 진리가 소유론적 전시(exhibition)의 뜻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한다. 은적이 없는 현시는 오로지 소유를 전시하려는 의미로 읽혀진다. 전시는 존재론적 현시와 달라 소유론적이고, 언젠가는 고갈된다.
무는 죽음으로 상징된다. 꽃이 떨어지고 인간이 죽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은 것은 결국 존재한다는 현상이 소유로서 설명되지 않고 소유의 의지와 탐욕에서 필연적으로 도망가는 자연의 이법을 알려준다. 모든 소유적 기도가 다 허망하게 끝나기에 소유법은 유루법이다. 이런 소유론적 유루법을 하이데거는 마음의 탈존양식(Ek-sistenz)이 ‘집착하는’(insistent) 방식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집착하는 탈존은 곧 아상을 떠나지 않는 자아식의 탈존과 다르지 않다.
은적의 非진리는 소유론적 장악의 기도가 다 허망하다는 것을 알리는 존재론적 사유에의 초대와 같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사유는 무의 허공을 본성으로 하는 무진장한 에너지(氣)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생멸의 현상을 여여하게 보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효나 하이데거가 각각 말한 무의 ‘무본지본’이나 ‘탈근거’에서 솟은 생기로서의 존재는 존재자적인 실체로 둔갑하지 않는다. 유(존재)의 현상은 이미 본질적으로 무의 본성을 함의하고 있기에 ‘유/무’는 ‘생/사’처럼 한 쌍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유는 존재하면서 무를 이면으로 품고 있고, 삶은 살면서 이면으로 죽어간다. 그래서 ‘유/무’와 ‘생/사’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의 차연적 존재방식의 두 얼굴이다. 무의 죽음을 삶의 유와 별개의 실체적 존재자로 보지 않고, 모든 무는 유에의 욕망을 회임하고 있고, 또 유는 무에로의 은적을 필연적으로 안고 살아간다고 읽어야 하겠다. 그래서 생유(生有)는 사무(死無)와 다르나 동시에 그것의 연기(延期)며 연장(延長)이고, 그 역의 방향도 역시 그러하다. ‘유/무’와 ‘생/사’는 개념으로 잡히지 않는 차연(differance)이다. 서로 한 쌍의 상관적 대립의 상호교환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의 이중성도 이원론적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상관적 차이나 대립의 이중성을 뜻하는 차연이 아닌가? ‘미/추’와 ‘성/속’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선악의 차연만 여기서 언급한다. 선은 악의 차연이고 악도 선의 차연이다. 서로가 상관적 대립의 입장을 띠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의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선/악’은 각기 자기 고유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므로 각각 타자의 타자로서 존립하는 타자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선/악’의 이중긍정은 비선비악(非善非惡)의 이정부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선/악’은 각각 자기 것이라고 우길 만한 자가성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산마루의 주름이 산의 양 기슭을 형성하였듯이, 사이의 차이가 ‘선/악’의 이름을 양면성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양면성은 사실상 마음의 양면성에 불과한 것이다. 마음은 욕망이고 그 욕망을 하이데거는 세상에로의 나아감인 ‘탈존’(Ek-sistenz =ec-sistence)이나 ‘관심’(Sorge=concern)이라고 불렀다. 이 관심을 불교적으로 옮기면 반연심(攀緣心)에 해당한다 하겠다. 마음은 자기를 벗어나서 세상에로 향한다. 나아가되 소유론적으로 향하든지 존재론적으로 향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전자의 탈존을 하이데거는 ‘집착’(Insistenz=insistence)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소유론적 자의식의 탈존과 유사하다. 소유론적 탈존이든 존재론적 탈존이든 마음은 탈존의 이중적 방식과 같다.
‘선/악’과 ‘미/추’와 ‘성/속’도 다 저런 이중성의 차연관계로서 이해되어야 하겠다. 악은 마음의 선의 상관적 대대법으로서 또 선도 마음의 악의 상관적 대대법으로서 읽어야 하겠다. 그 선이 그런 악을 이면으로 띠고 있고, 그 악이 그런 선을 또한 이면으로 함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누구나 인간은 스티븐슨(R. Stevenson)의 소설처럼 선량한 의사 지킬(Dr. Jekyll)과 괴물 하이드 씨(Mr. Hyde)로서 존재한다. 지킬과 하이드가 같은 마음의 이중성이다. 인간의 마음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으면 그는 지킬이 되고, 어떤 충동에 흔들려 망상의 파도가 일어나면 그는 하이드가 된다.
앞에서 우리는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보았다. 이 구절은 노자가 세상을 계곡(谷)이나 웅덩이(渾)처럼 봤다는 것을 말한다. 계곡과 웅덩이는 모든 청탁(淸濁)의 물들을 다 수용한다. 이것은 모든 세상의 훼예표폄(毁譽表貶)의 업들을 다 받아드리는 제8식인 아알라야식처럼 세상을 노자가 읽었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세상을 그렇게 그리고, 또 세상이 마음을 그렇게 주형한다. 이것이 유식학이 말하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출현이고,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훈습과 다르지 않다. 마음은 선/악의 종자와 청/탁의 물을 다 지니는 그런 흔적들의 업이다. 선업은 악업이 없이 일어나지 않고 그 반대도 그러하다. 그 세상에 피어난 선업과 악업은 나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선업과 악업의 두 모습의 현행이다. 그 선업과 악업은 동전의 양면처럼 차이 속에서 동거한다.
그런 이중성을 데리다는 ‘비동시성의 동시성’(la simultaneite des non-simutanes=simultaneity of the non-simultaneous)이라 불렀고, 하이데거는 로고스의 이중성으로서 모음(Sammlung=collection)과 갈라짐(Riß=split)으로 표시했다. 이런 이중성을 원효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나 일심이문지법(一心二門之法)이라 명명했다. 번뇌의 마음이 보리의 마음과 차연의 상관성을 띠고 있고, 번뇌를 모르면 보리의 요구가 일어나지 않고, 보리의 지혜는 무명의 번뇌를 잠재운다. 그래서 노자는 ‘선인은 불선인의 스승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이라고 《도덕경》 27장에서 천명했다.
불선인을 칭찬하는 것으로 저 구절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불선인은 내 마음의 선인의 이면으로 그 불선인의 흔적이 나로 하여금 선인의 길을 가는 자본을 대준다. 이것이 노자의 도고, 이 도는 개념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고, 차연의 사유로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악을 나의 선과 대립적인 변증법적 타자로서 여겨 공격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해서 악이 이 세상에 지워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선의 결의가 있는 곳에 악이 늘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악을 지우려는 선은 새로운 악으로 돌변한다.
마음은 욕망이다. 그 욕망을 소유론적 욕망과 존재론적 욕망으로 대별케 하는 이중성도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는 기호와 같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은 이익을 좋아한다. 선과 불선도 다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의 기호가 갖는 경향의 차이에 기인할 뿐이다. 그 경향의 이중성을 갈라놓게 하는 것이 곧 본능과 본성이다. 본능적 마음은 자아가 소유론적 만족을 취득하기 위하여 바깥에서 타동사적으로 남들과 싸워서 그 이익을 쟁취하려는 이기배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탐욕이라 부르기도 한다.
본성적 마음은 자아가 지워지면서 마음이 스스로 분비하는 기쁨이 솟아나면서 타인들에게 이익을 증여하는 자리이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원력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아의 마음이 자리이타적 욕망을 분비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의 공이나 무가 무한한 존재의 생멸을 용출하고 수용케 하는 그런 종용(letting-be)의 길과 다르지 않으리라. 하이데거의 말처럼 종용의 사유론은 세상을 심판하고 판결하려는 마음의 거부와 다를 것이 없다. 선종의 3조인 승찬대사가 《信心銘》에서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놓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한 사상이 하이데거의 저 종용의 사유와 어찌 다르다고 할 것인가?
소유론적 본능과 존재론적 본성은 같은 마음의 자리에 동거하고 있다. 다만 전자는 이기배타적이고 후자는 자리이타적인 그런 기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마음의 기호의 차이를 짓게 하는 척도가 자아와 무아의 구분이라 본다. 마음이 무아의 무심에 접근하면 할수록 세상의 사실은 차연의 법칙으로 보이고, 자아의 아상이 중심을 이루면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호오를 놓지 않게 된다.
차연의 법칙은 장악의 법칙처럼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대상으로 갈라놓지 않고, 연기법적 얽힘처럼 또는 수사학적 교차배어법(chiasmus)의 상관성인 卍자의 문자학적 교호작용처럼 그렇게 직물짜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세상의 현상을 본다. 이런 세상보기를 불교에서 여여한 사실의 正見이라 말한다. 문자학적(grammatologique=grammatological)이라는 용어를 앞에서 우리가 등장시켰는데, 이제 데리다가 사용한 그 뜻을 우리가 풀이한다.
그것은 도장의 양각과 음각처럼 불일이불이의 그런 상관적 대립을 지니는 현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소리나 말은 개념처럼 일의적으로 흘러가지만, 문자(l’ecriture=writing)나 표지(l’indice=token)는 일의적인 개념이 아니고 두 가지 현상을 동시에 차이나게 하지만 상관적으로 연관시키는 그런 이중성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도장의 음각과 양각의 이중성을 연상하면, 그것이 문자학의 뜻이다. 노자가 《도덕경》 2장에서 설파한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형(長短相形), 고하상경(高下相頃), 음성성화(音聲相和), 전후상수(前後相隨)’ 등이 문자학적 사유인 상관적 대대법(pertinent opposition)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마음도 소유와 존재, 본능과 본성의 문자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마음이 무아의 고요에 머물 때에 마음은 본성의 기호를 나타내고, 마음이 자아를 의식하는 감정의 파도에 휩싸일 때에 마음은 본능의 기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5. 본성과 무아에로 가는 ‘마음의 길닦기’
마음이 본성의 상태에 놓여 있으면, 그 마음은 무심의 경지와 같다. 사심없이 일하기에 매진하는 상태가 바로 일심의 무념상태와 같다. 이것은 어떤 소유적 목적의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일하기의 사상은 본성으로서의 자성이 좋아하는 바를 스스로 실현하려는 자성의 자기 꽃피우기와 다르지 않겠다. 그러므로 자성이 일하는 마음은 어떤 것에 의하여 점령당한 마음의 부자유와 다르다. 본성이 일하는 마음은 자기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일하기가 놀이와 구분되지 않는 재미있는 자기 실현이다.
본성인 자성은 스스로 좋은 것을 구체화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자성은 자의식을 느끼지 않는 공성과 같으므로 그것은 마음의 무념과 무아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무념상태는 멍청한 혼침의 상태가 아니다. 자성의 일하기에 일념으로 마음을 쏟아 부은 상태이기에 무념무상은 성성적적의 상태와 유사하다 하겠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미래적 사유요, 불교가 말하는 의식이 쉬는 사유이겠다. 이 무념무아의 상태만이 가장 무위적 자연성의 상태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능과 본성은 다 마음의 자연적 기호를 따른다.
그러나 본능적 기호는 사회생활에서 타동사적으로 타인들과의 싸움을 통하여 이익을 쟁취하기 때문에 교묘한 지능과 강인한 의지력의 도움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본능의 경제실리적 이익이나 또는 정반대로 反본능의 도덕명분적 정의나 다 능위적 소유주의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능적 기호는 무위적이나 그 실현방식은 대단히 유위적이다. 오직 본성의 존재론적 사유만이 온전히 자연적 무위성을 이루어 나간다. 왜냐하면 본성은 스스로 자동사적으로 마음의 기호에 따른 이익을 분비하여 그것을 타인들에게 저절로 시여해주는 이타행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그것(Es)’의 시여(Gabe)로서 존재를 이해한 것은 자성의 증여와 다르지 않다. 자성은 자아처럼 일인칭의 인격이 아니라, 삼인칭의 우주적 一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겠다. 서산대사가 읊은 ‘그것(渠)’은 자성의 자연성이요, 우주적 마음으로서의 공성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철학의 종말과 함께 등장하는 미래적 사유는 자아의 보편철학에서 무아에로 가는 ‘마음의 길닦기’와 같다고 본다. 하이데거가 사유를 ‘마음의 길닦기’의 뜻으로 번역됨직한 ‘Beweg-ung’이란 조어를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고 깊은 뜻을 함의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길닦기’는 자아에서 무아에로의 길을 닦음이요, 이 길닦음은 의식의 개념철학을 떠나 공성의 거울에 비친 차연의 실상을 정견하게끔 ‘사유장소(Denksort=thinking site)’의 변화를 실행하게 한다. 그래서 그 사유는 자아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사유하는 것이 된다. 무아의 공성이 허무가 아니므로 그 곳에 본성인 자성이 고요히 나타나 자성이 사유하고, 자성이 노래하고, 자성이 말하고, 자성이 부른다.
그러므로 본능의 사유는 자아가 이기적 동기에서 계산하고 사량하는 것이라면, 본성의 사유는 마치 허공에서 모든 존재가 생기하듯이 무아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찬란한 빛의 조명과 같다. 그 사유를 우리는 자아의 소유론적 사유와 다른 존재론적 사유라고 부른다. 그런데 인간의 본능은 다른 동물의 본능과 달라서 본능의 단독적 힘으로 생존해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능은 지능의 도움을 요구한다. 그 순간에 무위적 본능은 유위적인 지능의 간섭을 받는다. 그와 함께 인간은 본능의 무위성을 버리고 계산의 사량적 유위성으로 들어간다.
비록 인간이 지능의 유위적 간섭을 받는 생활양식을 추종하더라도, 지능의 생활은 본능의 무위적 이기심을 모방하기 위한 우회의 전략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무위적 본성의 사유는 무위적 본능의 사유와 전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둘 다 이익을 좋아하는 사유다. 그렇다면 중생의 이기심이 발동하는 그 자리가 바로 여래의 자리심이 일어나는 자리가 아닌가? 지눌은 《원돈성불론》에서 “중생상(衆生相)이 여래상(如來相)이요, 중생어(衆生語)가 곧 여래어(如來語)요, 중생심(衆生心)이 곧 여래심(如來心)”라고 설파했다. 그렇다면 중생의 성격이 곧 여래의 불성의 한 조각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중생의 개성은 사회생활에서 서로 충돌하는 장애요인이 되지만, 그 중생의 개성이 여래성으로 회심하면 그 개성은 다른 개성과 충돌하거나 방해를 일으키지 않고 불심을 원만하게 이루는 원음의 한 요소로서의 일음으로 탈바꿈한다.
중생의 업은 장애가 되어서 중생의 마음에 큰 짐으로 작용하지만, 그 중생의 업정이 회심하여 무아의 마음으로 방향을 되돌리게 되면, 그 업이 오히려 해탈의 경지를 열어놓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업즉장애(業卽障碍)가 업즉해탈(業卽解脫)로 치환한다. 본능의 이기배타적 이익이 본성의 자리이타적 이익으로 치환하면서 인간은 사회생활의 고통과 번뇌를 보리와 열반의 계기로 변환시킨다. 고통의 번뇌가 곧 열반의 보리를 증득케 한다. 본능과 본성이 차연의 이중성이듯이, 번뇌의 업과 열반의 원(願)도 동정의 양면과 같이 이중적이다.
업의 개성은 그가 이기적 행각을 자행하는 악의 축이기도 되지만, 그것은 또한 직업을 통하여 개성의 기호를 자리이타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회생할에서 무수한 직종은 다 자연생활에서의 다양한 품종과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자연이 무수한 품종의 차이를 서로 의타기적인 그물망으로 형성하듯이, 사회도 무수한 직종을 역시 연기법적인 직물짜기의 교직으로 엮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불국토는 사회의 다종한 직업이 자연의 다양한 품종처럼 서로 걸리지 않고 방해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리이타의 공업을 이루어 원융무애하게 회통하는 사회를 의미하지 않겠는가? 직업은 개성의 기호를 펼치는 방편이다. 그 방편은 동시에 마음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본성즉개성(本性卽個性)이 다양하게 구체화되는 도의 ‘길닦기’와 같으리라.
각 직업의 달인이나 명장(virtuoso)은 무아의 무심에서만 가능한 자리(自利)의 성공이고, 그 성공은 사회적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괴로운 이들의 이웃으로서 이타행을 실시한다. 왜냐하면 그 성공은 개인적 탐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래장 씨앗의 사회적 실현을 뜻하기 때문이다. 직업의 달인과 명장은 여래장 씨앗의 꽃핌이다. 그래서 그 성공은 사회적 보살도의 출발이 된다. 소유의 탐욕을 존재의 원력으로 치환시키는 길닦기가 21세기의 사유로서의 제삼의 길이겠다. 이런 길닦기를 또 하나의 새로운 이상주의적 기획투사라고 보면 안 된다. 이상주의적 기획투사는 당위적 이상의 설계도를 사회에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닦기는 이미 그리고 늘 마음 속에 있어 온 자성을 짓눌려 왔던 소유의식, 자아의식, 가치의식을 걷어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길닦기는 경제실리와 도덕명분의 두 대립된 길을 다 융섭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길이라고 여겨진다. 존재론적 사유의 길은 본능과 反본능의 변증법적인 개념의 대립을 다 지양하는 차연의 사유를 펼친다. 그래서 차연의 사유는 세상에서 본능의 소유에 대한 상관적 대대법으로서의 본성의 존재, 이기배타적 이익에 대한 자리이타적 이익, 개성의 업즉장애에 대한 개성의 업즉해탈을 보게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사유는 본능의 소유론과 이기배타론, 그리고 개성의 업장을 다 무시하거나 없애야 한다는 혁명적 투사의 열정을 갖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소유론적 본능에서부터 회심하려는 마음의 전회를 아주 중요시한다. 그래서 존재론은 마음의 길닦기로서의 수행을 미래적 사유와 공부로서 생각한다. 수행이 없이는 마음이 중생의 소유론적 습관으로 다시 미끄러진다.
그 수행이 무아의 길닦기고, 21세기적 사유의 본질이다. 그 사유가 또 무아적 본성의 존재론을 떠나 자아적 의식철학의 고착된 관념에 또 사로잡히면, 마음은 다시 도덕적 존재자의 소유론적 형이상학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무아의 존재론은 이중부정의 길을 이중긍정의 길보다 더 높인다. 차연의 이중긍정은 세상을 여실하게 보게 하는 실상을 가르쳐주면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일깨워 준다.
그러나 이중긍정은 마음으로 하여금 세속제에만 머물게 할 우려가 있다. 무를 배제한 유(존재)가 존재자의 실체로 전락하듯이. 이중부정의 진여제를 안 본 세속제는 죽음의 초탈을 모른다. 그래서 비색비공(非色非空),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선비악(非善非惡)의 이중부정의 마음은 죽음을 동요없이 마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진여제는 죽음을 대자유의 길이라 알려준다. 죽음이 마음으로 하여금 도덕적 사유를 넘어서 존재론적 사유를 생활케 하는 약이 된다. 이중부정의 사유가 무애한 자유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무로서의 공이 색의 체성이라고 보는 사유와 같다. 모든 존재론적 사유는 인간만이 영위하는 사회생활을 자연생활과 유사하게 닮도록 마음의 길을 닦도록 인도하는 사유다. 그러기 위하여 존재론은 인간이 자연을 단순히 감상적,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상생과 상극의 차연으로 정걸하도록 요구한다. 상생과 상극이라는 자연의 상관적 대대법은 ‘생/사’, ‘약/독’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염두에 두는 것과 같다. 사회철학과 자연철학이 분리되면 자연도 황폐화되고, 사회도 지옥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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