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세계와 생활 세계
초청강연· 조성택
정리· 임동숙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 세계가 둘이 아니라고 한다면 수행하여 부처가 되는 일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반대로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 세계가 둘이라고 한다면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 색(色)과 공(空)이 불이(不二)라고 한 법문은 모두 거짓말이 되고 만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불교평론> 조성택 주간(고려대 교수ㆍ철학)은 2006년 2월 4일 서울 우리함께회관에 위치한 우리는선우 법당에서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 세계’를 주제로 한 강연을 통해 이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준말인 ‘불이(不二)’의 남용을 비판하고, 참된 불이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이번 강연은 불자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자신의 가치관과 신행행태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다음은 강연 내용이다.
한국불교의 신행 모델은 정토회와 우리는선우
저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신행 모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두 단체에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토회이고 하나는 ‘우리는선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선우’에서 불러주셨을 때 정말 흔쾌히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제가 좀 바쁘지만 흔쾌히 하겠다고 한 이유가, 저로서는 이 초청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신행단체에 빚진 마음을, 또 무언가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 자리가 저한테도 많은 공부가 되는 동시에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깨달음 세계와 생활세계’입니다. 사실 강연의 중심은 생활세계가 될 것입니다. 생활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조금 전 ‘선우 결사문’을 읽어 보니 누누이 설명을 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선우가 지향하는 불교, 불교의 생활 속에서의 실천, 일상화 등은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생활세계와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버마스의 철학적 개념과 같은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단지 저는 생활세계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불교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이해해야 되느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 종교환경의 특징은 다원적인 삶
제가 생각하는 생활세계란 뭐냐. 예를 들어 우리는 부처님 탄생설화라든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자마자 일곱 발짝 내디디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대해 해석이 구구합니다. 그리고 타 종교에서도 상당히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생활세계의 측면에서 이해할 때, 이는 바로 ‘인간주의의 선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 당시는 브라흐만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인간의 길흉화복, 이런 것들이 신으로부터 오고 나의 운명, 나의 갈 길이라는 것도 나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부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고대종교의 일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인도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전인류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그 말씀은 “나의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내 행위에 대한 과보,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윤리적 의식이 있다”는 인간주의의 선언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생활세계 속에서의 불교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불교의 가장 기초교리라 할 수 있는 삼법인(三法印), 즉 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 혹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든지 불자들의 기도 등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진제ㆍ속제라든지 세간ㆍ출세간, 재가ㆍ출가, 부처님 세계와 중생세계, 번뇌와 열반 등 이런 구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제가 더 보태서 뭐하겠습니까? 단순한 나눔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틀이 중요합니다. 그 틀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음양(陰陽)이라고 하는 이치에 대해서 말할 경우에 거기에는 음양이란 것들을 대입시키지 않았을 때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고, 의미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굳이, 저런 구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를 하나 던져보고 그것을 생각해보고자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세계라는 범주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현대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현대는 불교가 발생하고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와 다른 종교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다원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만 나가면 다른 곳에 가면 불교를 신봉하지 않는 타종교인들을 만납니다. 또 직업적으로는 금융인이면 금융인으로서의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불교인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전문직, 혹은 타종교인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항상 곤혹스럽게 여깁니다.
내가 불교인으로서 법당 밖에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가는 과정과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들이 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제 개인적인, 실존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또한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로,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세계가 구분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구분이 되지 않는 이유는 소위, 대승불교의 전매특허인 불이법(不二法) 때문입니다. 불이(不二)는 사실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준말인데, 불이법이 너무 남용되지 않고 있나 생각됩니다.
우선 불교에서 가장 기본으로 얘기하는 삼법인 중에 무상(無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무상이란 것을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로 이해하고, 불교만의 고유의 사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생활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상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화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이 무상이라는 것을 불교인들이 적용하는 것을 보면 어떤 일이 안 되었을 때, 체념하기 위한 자기최면으로 “아! 무상하다, 의미 없다, 헛되다”는 의미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상이라는 것이 불교 고유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 고유의 관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상이라는 것을 생활세계에서 보자면, 변화를 보는 관점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는 그야말로 진리입니다. 불교만의 진리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지금 현대에 무신론자로서 과학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면 불교만의 고유의 무상에 대한 관점은 뭐냐? 변화를 보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유를 발효시키면 요구르트로, 치즈로, 혹은 버터로 변합니다. 이 변화를 보는 관점에는 부처님이 오시기 이전에 두 가지 관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든, 치즈가 되든, 버터가 되든, 여기에 우유라고 하는 본질은 변치 않고 유지된다, 즉 ‘우유성(milkness)’이라고 하는 그 본질적인 것들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개 기독교라든지 서양의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에서 사물을 보는 관점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상적인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본질은 유지된다’라고 하는 관점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상론(常論)이라 했습니다.
다른 한편, 이 변화를 보는 관점에는 각각은 독립적인 발생이지 연관성이 없다, 우연히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기도 하고 버터가 되기도 하고 치즈가 되기도 할 뿐이다, 하나의 변화 속에서는 독립적인,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서 발생할 뿐 그 자체에 어떠한 인과적 관계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즉 여기에서는 우유라는 본질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이렇게 들어서 그렇지 실은, A라고 하는 사람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10년 전의 A라는 사람과 현재의 A와 10년 후의 A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그냥 독립적으로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었을 뿐, 아무런 ‘인과적 관계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단멸론(斷滅論)이라 하였습니다.
불교에서 단상(斷常)의 중도(中道)라 했을 때는 단과 상의 어중간한 입장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 당시 가능한 여러 가지의 견해가 아닌 새로운 제 3의 길이 중도입니다. 그러면 단과 상으로 보던 그 당시 모든 사물을 보는 관점은 단멸론 아니면 상론입니다. 지금까지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상론에 의한 세계관입니다. 지금의 ‘나’이든 10년 전의 ‘나’였든 ‘영혼은 변치 않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상론적인 입장인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에서 세계와 인간을 보는 관점이기도 하고, 서양철학이 인간을 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불교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무상은 불교의 전매특허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상론이든 단멸론이든 무상은 기본적으로 전제됩니다. 새로울 게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무상에 대해 불교적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근거는, 무상을 연기(緣起)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는 데는 우유를 인(因)으로 하고, 여기에 효모라든지 적정 온도라든지 이런 것들을 연(緣)으로 해서 요구르트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이 무아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흔히 “무아이기 때문에 나라는 것, 10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라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다만 10년 전의 ‘나’가 변치 않는 영혼이라든지, 변치 않는 ‘조성택 X’라는 식으로 무언가가 끊임없이 유지되면서 현상적인 모습만 달리했다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들 불교학자들조차도 무아란 것을 설명하면서 “10년 전의 나와 그냥 이름만 같을 뿐, 실은 다른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그렇게 쉽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세포는 3개월만 있으면 다 바뀐다, 지금 10년전의 세포와 지금의 세포는 이름만 조성택이라는 것으로 연결될 뿐이지 실은 다른 인간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적 관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단멸론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적 관점이 뭐냐? A에서 B로 변화할 때, A를 인(因)으로 하고, 예를 들어 교육이라든가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요건들에 의해서 B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인과 연으로 해서 발생한다는 것이 연기입니다. 그래서 연기에 의해서 사물을 보는 게 결국 무상이란 것입니다. 생활세계 속에서 무상에 대한 이해에는, 물론 대단한 종교적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깨달음의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구체적 경험이기도 하지만, 생활세계 속에서 타종교와 의사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무상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있어야 됩니다.
‘현재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 고성제(苦聖諦)
무상한 것은 고이고 고인 것은 무아다, 이러는데 사실 여러분 설득이 되세요?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은 고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서의 이야기이고, 생활세계 속에서의 이야기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왜 그런가? 저는 나름대로 불교의 역사적 발생이라든지 철학적인 바탕으로 해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고(苦)는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부처님께서 사문유관(四門遊觀)해서 인생의 고가, 삶의 고가 무언지 궁금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해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불교의 신화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또 깨달음의 세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생활세계 속에서의 이야기는 붓다의 출가는 그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고 있던 상황 가운데 일부분이었습니다.
붓다는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무언가 현재 우리한테 주어진 여러 가지 삶의 이해 외에 다른 것이 없을까 하고 추구해 나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대개 우리가 삶을 선택하는 것은, 현재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어느 곳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붓다가 발견했다는 법은 그 당시 없던 그런 법이었습니다. 없다지만 물론 연기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그런 것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어떤 건데, 제가 지금 고라고 하는 것들을 생활세계 속에서도 고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인들은 흔히 염세적이다, 불교인들 스스로도 “아하 고다!”라고 하는데 그 정도의 고는 타종교인들도 다 겪고 사는 고입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고를 이야기합니까? 사고(四苦), 팔고(八苦)를 이야기합니다. “생ㆍ로ㆍ병ㆍ사가 고다”라고 할 때 생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생이 왜 고입니까?” 라고 스님들께 여쭈어보면, “생이 있어서 죽음이 있으니 생이 고지!” 그러시는데 사실 설득력 있는 답변은 아닙니다. 사고, 팔고는 기본적으로 붓다가 깨닫고 난 뒤에 자기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아! 그것들이 하나의 고의 과정이었다”는 통찰력이었던 것이지 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고성제(苦聖諦)라고 하는 진리는 깨닫고 나서 설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라는 의미는 삶이 고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행복을 잘 모르는 겁니다. 행복해지지 않은 사람은 행복을 모릅니다. 저는 가끔 미국 친구들에게 “Are you happy?”라고 물어 보곤 합니다. 정말 우리는 행복하다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어떤 절대적 행복을 맛본 사람이 아니라면 행복을 모릅니다. 그러면 이 현실은 무언가 개선될 여지가 있는 것, 그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 그게 고성제의 생활세계에서의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ㆍ팔고에서 생ㆍ로ㆍ병ㆍ사가 고라는 것, 사실은 우리가 이야기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그것도 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느끼는 고예요. 미국에서 카운슬러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급적으로 헤어지지 않고 사는 법을 카운슬링해 줍니다. 노ㆍ병ㆍ사가 고라지만, 죽음을 늦추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의사들이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붓다가 그런 것들을 제공해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것은 경전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설명형으로 제시해 주는 것뿐이지,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의미까지 그것으로 구성한다면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 가지고 싶은데 가지지 못하는 고통, 이것도 누구든지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연봉을 더 받는 법, 좋은 직장 다니는 법 등 가지고 싶은 것을 돈 주고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로부터의 해방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고ㆍ팔고가 부처님의 고라고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국은 우리의 현재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라는 것은 단지 나의 상태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하면 우리 사회가 점점 나아질 것이라든지, 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보다 다른 해결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것으로 이해해야만, 생활세계에 대한 고성제의 제대로 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팔고 중에서 마지막 하나, 오음성고(五陰盛苦)라는 부분은 불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고라고 생각합니다. 오음성고가 뭐냐, 다들 아시겠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오온이 나라고 하는데서 오는 집착, 그 집착하는데서 오는 고, 그 고를 오음성고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가장 의미가 있는 고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특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후에 무아를 설명할 때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붓다, 인간과 사물 해체주의적 방식으로 관찰”
“무상한 것은 고이며, 고인 것은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불교인들이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이점은 불교학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무아에 대한 이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생활세계 속에서 무아란 것이 무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인들이 무아라고 하니까 나의 정체성, 이런 것을 이야기하면, 불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계속 경험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부정해야 된다고 하니까, 그걸 생각하는 것은 마치 잘못된 것처럼 받아들이는, 그런 분위기나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차적으로 설명의 방식을 위해서 무아는 일단 저는 깨달음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교리적인 측면에서 봐도 무아는 깨달음의 필요충분 조건입니다. 따라서 무아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비로소 체득될 수 있는 것이지, 지금 이 깨닫지 못한 수행의 단계에서 무아를 체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기본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정신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심ㆍ신(心ㆍ身)으로 나누기도 하고, 영ㆍ육(靈ㆍ肉)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도 결국은 따지고 보면 심신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다만 불교에서는 이 심(心)이라는 부분을 좀더 세분화해서 수ㆍ상ㆍ행ㆍ식(受ㆍ想ㆍ行ㆍ識)으로 나눴습니다. 그런데 대개 인간에 대한 분석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불교개론서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인간을 분석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나를 해체해 본 겁니다. 요즘 말하는 소위 ‘Deconstruction’입니다. 해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제가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가장 첨단적인, 최근의 철학적 경향이 해체주의인데, 저는 인간을 바라보고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서 해체주의적 방식을 택한 최초의 철학자가 바로 붓다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무위법(無爲法), 유위법(有爲法)을 말합니다. 그것을 자꾸만 대단히 어려운 개념으로만 생각들 하시는 것 같습니다. 본래 있는 것과, 만들어진 것 두 부류로 나뉩니다. 본래 있는 것은 무위법이라 하고, 만들어진 것은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본래 있는 게 뭐냐,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생멸의 변화를 겪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열반이라든지 허공, 그 외에 나머지 것들은 모두 다 만들어진 것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계는 본래 있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것입니까? 만들어진 것입니다. 햄버거는? 본래 있는 것은 양파와 마요네즈와 고기와 빵입니다. 그것을 어떠한 조건들에 의해서 뭉쳐놓으니까 우리는 햄버거라 부릅니다. 햄버거를 해체하면 빵, 양파, 마요네즈, 고기 등이 하나씩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나’라는 것을 해체해 보니까,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라는 것으로 구성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요소들에 의해서 ‘사람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구나’ 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개념입니다. 그렇게 해체를 해놓고 나니까, 우선 가장 단순하게 나눈 게 심신, 더 나아가니까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됩니다. 햄버거는 양파와 마요네즈, 빵, 고기 외에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까? 그걸 그냥 뭉쳐 놓으니까 햄버거가 된 거지, 그 햄버거란 것들을 유지시켜 주고 계속 햄버거란 정체성을 만들어 줄만한 그 어떤 것이 있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분석적 생각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 명상의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도달한 결론이라는 겁니다. 보통의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은 연역법이든 귀납법이든 하나의 추론의 형식을 따라서 가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적으로 체득한 경험인 것입니다. 그것을 체득하지 못한 입장에서 거꾸로 추론해가면서 이해하려니까 거기에 오해들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존재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곧 존재’다
우리가 주로 실수하고 있는 부분이 색(色)이라는 부분인데, 색이라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眼ㆍ耳ㆍ鼻ㆍ舌ㆍ身), 즉 물질적인 것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텍스트에서는 색은 물질적인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해체한 붓다의 오온(五蘊)에 있어서 색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라든지 물질로 된 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작용’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학계에서도 대단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인간의 육체적 존재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혹은 경험을 해체한 것입니다.
지금 제가 ‘존재’와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존재가 우리는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햄버거적인 어떤 것’이 햄버거를 만들었다고 하는 그 ‘햄버거적인 어떤 것’이 없듯이,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존재가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반드시 상정되어야만 합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경험이 곧 나’입니다. 그것을 선사들이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는 놈이 도둑놈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드린 말씀을 이해하고 나서 그 말을 들으면 그 말의 다른 의미차원이 생기는데, 단순히 그냥 들으면 이야기가 전달이 잘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존재와 경험을 나누고 있지 않습니다.
대개 근대철학의 시작을 데카르트의 철학이라 생각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존재가가 있고 존재자의 경험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말 자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꽃을 본다, 냄새를 맡는다, 맛을 본다, 무엇을 만진다, 길을 걷는다 등의 얘기를 합니다. I am looking at… I am running… I am washing 등등 실재로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Looking is me… Running is me… Washing is me 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오온이 하나의 가합이 되었을 때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이라고 합니다. 그 경험이 곧 존재라는 것입니다. 존재가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습관대로 “내가 무엇을 본다.” 라고 할 때,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것이 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불교의 『구사론(俱舍論)』이라든지 아비달마(阿毗達磨) 주석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행위는 있되 행위자는 없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업은 어디 갔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행함은 있고 행한 자는 없다.”는 말을 가지고 불교에서 “업과 윤회는 무아설과 모순된다”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철저히 잘못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행위는 있되 행위자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나는 무엇을 본다”라고 할 때, 그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나다”는 것이죠. 그래서 선사들이 “밥먹을 때 밥만 먹고, 똥눌 땐 똥만 누라” 하는 이 얘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차원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뭐냐면 바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는 경험, 그것이 곧 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이고, 무아에 대한 생활세계에서의 이해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때, 불교는 다른 철학체계나 다른 종교체계와 의사소통이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그게 안 되고 그냥 ‘무아’인데 라고만 하면, ‘아(我)’를 창조하고 있는 모든 철학체계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 없다고 하는 것이 깨달음의 영역에서는 좋습니다. 하지만 생활세계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무아’는 곧 ‘다아(多我)’입니다. 현상적으로 계속 나라고 하는 것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생겼다고 없어지고 하는 ‘다아’를 상정해야만 생활세계 속에서의 무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함의도 없이 그냥 ‘무아는 곧 다아’라고 이야기하고 나면, 제가 불교를 모르는 사람으로 굉장히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근데 사실은 제가 상정하고 있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 충분한 여러 가지 학문적, 철학적 고찰들이 이루어진 다음에, “무아는 다아”라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 알 수 없다’ 인정해야 화쟁(和諍) 가능
그 다음, 우리가 생활세계 속의 불교 이해 중에서 중요한 하나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대개 이 이야기는 그렇죠. 원효 스님의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이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또 인도의 자이나교에서도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장님 여섯 사람이 각자가 만진 코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개 원효 스님이 이 얘기를 할 때도 화쟁(和諍)의 원리로써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코끼리를 만진 장님들은 원효 스님의 입장에서는 코끼리 아닌 다른 걸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 옳다, 코끼리가 아닌 다른 것을 만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체를 다 그린 것도,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 틀렸다, 개시개비(皆是皆非)의 입장을 취합니다. 저는 이것을 깨달음 세계의 영역에서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실재 우리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생활세계에서의 영역은, 좀더 다른 해석이 가능해야만 화쟁이 생활세계 속에서 실현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코끼리가 다리가 네 개이고 코가 길다는 것을 어느 한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인들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면서 화쟁을 시도할 때는, 자기는 코끼리를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아는 걸 전제하고 다른 사람보고 “니네가 장님, 코끼리 만진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재 현실은 뭐냐 하면 우리는 코끼리가 얼마나 큰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라요.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진리가 어떻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화쟁해야 할 현장이 바로 생활세계입니다.
그냥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이야기하면, 결국은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한 단계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재 생활세계라고 하는 현장, 우리가 타종교인들과 대화해야 하고 과학과 이야기해야 하고 전문 직업인으로서 이야기해야 하는 그 생활현장에서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것은 어떤 태도이냐면, 결국 “나는 모른다”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다 알 수 없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게 저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대한 생활세계 속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야만 그때 화쟁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자기의 성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야만 대화가 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은 어떤 신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직 전모를 몰라서 그렇지 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제 이야기에 절대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코끼리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알고 있는 부처님이라는 깨달음의 절대적 경지 하나가 상정되고 있기 때문에, 코끼리 부분을 만졌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생활세계에서는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그것을 인정해야만 화쟁이 가능해지는데, 앞의 화쟁을 가지고 남북통일에도 한다, 양극화 해소에도 한다고 해봐야 말짱 공론(空論)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화쟁과 양극화 해소 등은 불교 집안 내에서만이 아니라,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와 통합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대한 이해도 좀 달라져야 합니다.
철저히 인과(因果)를 믿는 것이 ‘참된 기도’
그 다음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힘들 때 기도를 합니다. 스님들도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또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도 그렇고요. “간절히 빌면 꼭 하나는 들어준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제가 내릴 판단은 아닙니다. 제가 불교를 생활세계 속에서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제가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간절한 기도를 한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대개 그렇습니다. 어려움을 피하고자, 혹은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꼭 하나는 들어준다 하더라”면서 열심히 합니다. 제가 기도해서 받았던 것은 뭐냐 하면, 처음에는 “이 일을 정말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부처님 잘못했습니다,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가, 기도가 어느 정도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에 받겠다.”라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저는 기도의 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대학에 있던 어느 교수님께서 매일 삼천배 이상을 보름 이상 하셨대요. “꼭 하나는 들어준다더라” 하는 그거 믿고 기도를 하셨대요. 그런데 당신은 효험이 하나도 없더래요. 부처님이 버린 자식인가 보다 생각 했었는데, 나중에 칠십이 넘어서 돌이켜 보면, “무효험이 기가 막힌 효험이다.”라는 것이죠. 만일 그때 간절히 원하는 것을 들어줬다면 아마 기도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일만 생기면 기도하고 말이죠. 그런데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철저하게 인과적인 법칙을 믿는다는 겁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것은 내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그런 것이 오히려 불교의 업(業)에 대한 철저한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것들이 그냥 재수 없이 생기거나 운이 좋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가 한 일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 의한 그 결과, 그에 대한 믿음, 그게 불교인이 생활세계 속에서 기도와 업에 대해서 믿는 태도가 아닌가 그런 생각입니다. 그 외에 어디 가서 얼마 빌면 효험이 있다 없다, 그것이 들어지고 안 들어지고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영역의 얘기도 아니고.
사실은 제가 아무리 지금 까불고 이야기해도 제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영역이 있다는 것은 항상 남겨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세계 속에서의 그런 부분들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태도,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고 하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행동이 상당히 달라진다는 것을 제가 느끼고 있습니다.
내 행동이라는 것은 결국 신ㆍ구ㆍ의(身ㆍ口ㆍ意) 삼업(三業)입니다, 그 삼업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보면 나쁜 짓을 잘하고도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근데 그게 나한테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서 돌아와서 운전할 때 보면 시민들이 신호 안 넣고 끼어들기를 하는 등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저도 욕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도 팍팍 끼어들기 시작하는데, 거기에 적응이 되면서 “나만 잘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종교인이라면, 기독교인이라면 “내 행위를 하나님이 보고 있다”라고 하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불교인이라면 “내 행위는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는다.”라는 철저한 믿음이 있다면, 남이 보든 안보든 남이 어떻게 하든 안하든 자기 행위는 달라질 수 있다는 거예요.
『아함경(阿含經)』같은 경전에 보면 아주 평범한 얘기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남들이 잘못해도 우리는 잘못하지 말고, 남들은 게을러도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된다”는 등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하시는 게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개판 치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생각 자체도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들처럼 받아들여지는 그런 태도도 오히려 좀 정직하지 못한 태도가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깨달음과 현실 세계는 불일불이(不一不二)
이제,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대략 감을 잡으셨을 줄 압니다. 1980년대에 성철 스님이 종정으로 취임하시면서 내린 법어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80년대라고 하면, 한국 사회가 대단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민족의 진로와 관련하여 긴급한 상황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에 대해서 도올 김용옥 선생님은 “가야산의 돌중”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렇습니다. 성철 스님은 지금 깨달음의 세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활세계 속에다 갖다 놓고 “저 양반은 지금 정신이 있는 양반이냐, 없는 양반이냐?”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잘못되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자유”라든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하고, 예를 들면 황우석 씨에 대해서도 그렇고 전두환 씨에 대해서도 그렇고 용서와 자비의 논리를 이야기하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생활 속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비와 용서가 아닌 책임을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자유라고 할 때는 역사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는 정치적 논리, 경제적 논리, 어떤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논리들이 있고 그것들이 살아야만 되는 것이지,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것으로 자꾸만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또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 걸 가지고, 마치 생활세계에 적용해서 정말 성철 스님은 전두환 씨와 결탁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분들에 대해서 욕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깨달음의 세계를 자꾸 생활세계에 적용해서 이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의 논리가 있고, 자비가 아니라 정의의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돌을 던져야 할 때는 던져야 되는 그러한 엄연한 다른 질서가 있다고 하는 그런 의식이 중요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생활세계에서만 살아갑니다. 무신론자들은, 기독교인들은 두 세계가 딱 절연된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 인간들의 세계, 이렇게 딱 나누어 버립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하는 세계를 갖고 있는 게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일불이는 두 개가 동시에 성립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으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할 때, 색즉공, 공즉색, 왜 두 번 반복해야 됩니까? 반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색(色)이든 수(受)든 상(想)이든 행(行)이든 식(識)이든 모두 공이지만, 공이란 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색과 더불어 있다는 것이 공즉시색으로 연결되는 겁니다. 그것처럼 불일불이는 같이 성립되어야만 하는 얘기로서, 이 세계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그 다음에 같음을 봐야 됩니다.
‘중생과 부처가 같다’라고 하는 불성론(佛性論) 입장에서 늘상 수행도 잘 안하고 개판 치면서 나는 불성을 갖고 있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인데, 번뇌와 열반이 하나인데 라며 스님들은 자주 그러십니다. 그런데 번뇌가 열반이 아니라는 철저한 인식, 나는 부처가 아니라 중생이라고 철저하게 인식한 다음에라야 두 가지가 같다는 의미가 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철저한 분리가 되지 않은 채, “같다”라고 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불이법, 그게 가장 한국불교의 큰 문제이고, 또한 이런 생활세계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점이며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출처 http://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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