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선사들의 죽음과 열반

slowdream 2007. 10. 31. 01:16
 


선사들의 죽음과 열반


김영욱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선사들의 죽음과 열반


선사들은 죽는 바로 그 순간을 삶의 한 형식으로 수용할 뿐 죽음에 대한 추상적 관념이나 그것을 극복하는 고답적 이야기는 늘어놓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뼈를 두드려 골수를 뽑아내고 간직해 두었던 비장의 한 수를 내밀지만 매일 쓰던 낡은 보자기에 담아 전하는 까닭에 그 진가가 알려지지 않고 묻히는 경우도 많다. 본분만 단촐하게 흉금에 두고 살았던 이들의 검소한 죽음에 있어 초월과 신비 따위는 한갓 사치품에 불과하다. 때로는 사람들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발가벗겨 본분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씌운 포장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겉포장을 뜯어 선사들의 죽음을 엿보고자 한다.


1. 이한수


선사들은 매일 죽음 앞에 선다. 어느 순간이나 그들의 목적은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장대 끝의 경계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는 대상은 그것을 가리키는 부호로 통일된다. 죽음은 극복해야 할 과제도 아니고 삶의 마지막 현장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상을 그리는 또 하나의 사건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을 마무리하는 찰나에도 그들은 늘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등위법장(鄧尉法藏 1573~1635)이 입적의 기미를 보이자 시자가 물었다.

“육신이 사라진 다음의 일은 어떤 것입니까?”

“상위의 쥐가 남은 약을 훔쳐먹고, 벽에 걸린 등불 하나는 옛날부터 입던 옷을 비추겠지.”

대중이 모두 슬퍼하고 있는데, 시자가 다시 물으려 하자 법장은 손을 들며 “휘장을 내려라!” 하고는 단잠을 자다가 한밤에 이르러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눈을 감았다.


임자가 떠난 뒤 병든 몸을 다스리던 약은 쥐의 먹이가 되고, 오래 전부터 걸치다가 언제나처럼 걸어 둔 승복만이 무심하게 등불의 조명을 받을 것이다. 그의 사후에는 극락이나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묘연하고, 일상을 영위하던 그 자리의 연속된 장면만 눈감은 주인 앞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마지막 법문과 함께 평상시 잠자리에 드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내일 또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하루의 막을 내리며 잠자리에 들듯이 태연하게 영면에 들었다.


이미 완결된 진실을 눈앞에 두고 있는 선사들에게 그 찰나를 넘어서는 미래나 더 이상적으로 묘사해 낼 그림은 없다. 걸음마다 밟히는 토막토막의 순간에 더 이상 추구하거나 덧붙일 수 없는 실현된 화두가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이 그것이다. 그래서 “공안을 온전히 실현하려면 다만 눈앞에 있는 본분의 가풍에 뿌리를 둘 일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시도는 하지 마라”고 한다. 운봉문열(雲峯文悅 998~1062)이 임종게로써 그 뜻을 드러낸다.


세상에 머문 지 66년이요,

중노릇 한 지 59년이로다.

도반들이 귀착되는 뜻을 묻는다면,

코는 처음부터 아래로 향해 달렸다고 말하리라.


문열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평범하고 싱겁기 짝이 없는 사실로써 마지막 착수를 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이는 선어(禪語)로서 묘미를 더불어 가진다. 꼬끝이 이마 위로 향해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자명성은 더 이상의 말과 생각을 달 수 없기에 분별의 길로 그것을 끌어들일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본분의 화두는 이 뜻을 넘어서는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죽는 순간까지 다른 생각은 추호도 끼워넣지 않는 면모는 화두 일념으로 몰아붙이는 일상의 정진력이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지 않고서는 연출될 수 없다. ‘코는 아래로 향해 달렸다’라는 짧은 한 마디가 마지막 호흡이 매달려 있는 백척간두의 진실인 것이다.


만봉시울(萬峰時蔚 1303~1381)이 문열의 뜻과 유사한 유언을 남긴다.


79년 동안 한결같이 근거없는 말만 해왔노라.

매달려 있던 낭떠러지에서 잡은 손을 놓아도,

밝은 해는 하늘에 걸려 있으리라.


삶의 마지막 순간, 백척간두에서 몸을 던져도 그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중천에 해가 걸린 따분한 일상의 오후 풍경과 다르지 않다. 이것일 뿐, 여타의 것들은 그 여백을 메우기 위하여 마음 대로 조작한 말에 불과하다. 이들의 최후는 혜심(慧諶 1178~1234)이 “만 길 낭떠러지에서 몸을 내던져도 이전 그대로 변함없는 그 사람일뿐이다”라고 한 소식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심오한 죽음의 철학 따위는 보이지 않으며, 삶의 종결점에서 보통 일어나는 슬픔이나 한탄 그리고 두려움과 같은 정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무미건조한 죽음 한복판에는 본분의 급소에 꽂히는 짤막하지만 예리한 비수가 숨어 있다. 원오극근(園悟克勤 1063~1125)이 선사로서의 본분에 대하여 “지금 당장 자신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알아차리고, 만 길 낭떠러지에서 잡은 손을 놓아 몸을 던지고 더 이상 되돌아 보지 않듯이 하라”고 한 지침은 이들이 임종을 당하여 남긴 말과 통한다.


납자는 일상의 주변에 널린 낱낱의 상황에서 몸을 던질 만 길 낭떠러지를 발견하며, 알 수 없는 미래에 죽음의 심연과 마주치기 위하여 특별한 준비는 하지 않는다. 생사를 관통하는 일관된 원리를 선사들은 다름 아닌 임종게에 담아 삶이라는 바둑판에 최후의 결정적인 한 수로 착점한다. 이 마지막 노랫가락에 따라 깊고 깊은 잠으로 빠져들며 토해 내는 선사상의 백미가 다름 아닌 임종게인 것이다.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거늘 부질없이 분별하며,

피부를 얻었다느니 골수를 얻었다느니 한가롭게 헤아리네.

떠나기에 앞서 모든 대중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이미 문 밖 모든 봉우리에는 석양이 깃들었구나.


법천불혜(法泉佛慧)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읊어낸 것은 평소의 사고방식과 어긋남이 없다. 그는 어느날 “내가 가는 길을 알고자 한다면, 문 앞의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를 보아라! 자신의 발밑에 본래의 뜻이 펼쳐져 있어 쓸데없이 분별할 일이 없거늘 나그네들이 이렇게 무엇인가 찾으려 떠나는 것은 어쩌지 못하노라. 멀리 떠나지 말고 급히 되돌아 보라! 누대에 안개가 흩어지고 종이 울리는 곳을”이라 했던 법문의 취지와 들어맞는다.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이 “가만히 다람쥐 울음 소리나 들어 보아라” 하고 은근히 죽음에 직면한 자신을 알린 것도 같은 형식이다. 그들은 죽음 저 편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죽는 순간 그 주변의 풍경을 누리고 있을 뿐이었다.


멸옹문례(滅翁文禮1167~1250)가 입적을 맞아 시자에게 말했다.

“누가 나에게 무봉탑(無縫塔)을 만들어주겠느냐?”

“탑의 모양을 말씀해 보시죠.”

“있는 힘을 다해 보아도 모양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무봉탑은 이음새가 없이 한 덩어리의 돌로 조성한 통짜의 탑이다. 선사들의 탑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지만 여기에도 선적인 상징이 없지 않다. 꿰매거나 터진 틈이 전혀 없는 것을 무봉이라 한다. 머리카락 한 올도 들어갈 여지가 없는 특성이 생사의 전과정을 통하여 선사들이 추구하는 본분 화두의 모습을 닮았다. 어떻게 해 보아도 모양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 말은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는 무봉의 화두가 가지는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본분의 결정적 한 수만 노리는 이들에 있어서 삶의 끝자락이라고 하여 특별한 의미나 감상은 없다. 죽음에서 자유로웠던 경지를 보여주기보다는 생전의 할 일을 그대로 지키면서 맞이하는 종말을 보면 죽음의 찰나 자체는 한가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2. 올가미 치기


죽음이 시현되는 현장에서 선사들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기 위한 올가미를 그 어디엔가 감추어 둔다. 그것은 생각으로 더듬어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틀어막아 조이고 또 조여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궁지로 몰아붙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 방법으로 벼랑 끝에 서게 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라는 올가미인 것이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찾아오는 학인들을 향해 무수하게 방(榜)을 휘둘렀던 덕산(德山 782~865)이 입적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가 물었다.


“병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야, 아야~”


스승의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임종의 순간에 제자는 위로의 말 대신 독침으로 자극하여 마지막 한 방의 맛을 보려 했다. 덕산은 평소에 내리치던 주장자의 강렬한 매와는 달리 “아야~” 하고 허약한 신음 소리를 냈다. 지켜보던 모든 대중들의 기대가 순간적으로 혼돈으로 뒤바뀌며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채 할 말을 잃어 버리자 덕산은 자식을 기르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그들의 눈높이로 내려와 입적하기 직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허공을 더듬고 메아리를 좇으며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구나.

꿈에서 깨면 그러한 노력이 틀렸다는 것을 알 것이니,

결국은 어떤 할 일이 남아 있겠는가!


이는 인간 세상의 노력이 덧없음을 한탄한 말이 아니다. 자신이 시행한 방에 대단하고 은밀한 진실이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좇아다니던 무수한 학인들이 이번에는 ‘아야’ 하는 소리에서 다시 눈알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캐어 내려 했다.


덕산은 여전히 미궁을 헤매고 있는 학인들을 보고 더는 참을 수 없어 아낌없이 자신의 속을 풀어놓은 것이다. 방이 되었건 신음 소리가 되었건 그것은 덕산이 학인들을 점검하기 위하여 설정한 임시가교에 불과했지만 학인들은 천착(穿鑿)하는 습관을 답습하며 방에서 진실을 입증하려는 헛된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더듬어 잡으려 했던 것이다. 덕산의 방은 그런 착각을 잡아들일 목적으로 쳐 놓은 올가미와 같다. 덕산이 죽음의 문턱에서 내질렀던 신음은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아니라 평소에 써먹던 방의 대체물이었던 것이다.


천복지일(薦福知一)은 덕산의 ‘아야’라는 응답에 대신하여 “감기가 들어 콧물이 흐른다”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간명한 덕산의 올가미에 또 하나의 덫을 놓은 것이다. 병들지 않는 사람이 감기가 든다는 역설의 논리나 병과 건강의 분별을 초월했다거나 하는 등의 생각으로 이 말의 숨은 뜻을 풀어헤쳐 보려는 시도는 닳아빠진 입질에 놀아나는 종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원오극근(圓悟克勤)이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은 집착하여 눌러앉을 보금자리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뜻이 분명한 법을 가지고 남의 집 자식들을 묶어 두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은 이들의 의중과 일치한다. 눌러앉을 수 있는 보금자리도 아니고 묶어 두려는 의도도 없지만 스스로 현혹되어 발목을 잡힐 뿐이다.


덕산의 반전은 천황도오(天皇道悟)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항상 ‘쾌활하다, 쾌활해!’라고 외치면서 학인들을 점검했던 도오가 입적하기 직전에는 ‘괴롭다’라고 돌연 말을 뒤집었다. 그는 병상에서 임종을 기다리며 “괴롭다, 괴로워! 원주야, 나에게 술을 먹여 다오. 고기를 먹여 다오! 염라대왕이 나를 잡으러 왔다”라고 부르짖었다. 원주가 “스님께서는 한 평생을 쾌활하다고 외치시다가 지금은 어째서 괴롭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도오가 대답했다. “말해 보라! 그 때의 내가 옳은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옳은가?” 원주는 아무 대답도 못했고, 도오는 목침을 밀어 치우고 입적을 알렸다.


앞뒤로 도오가 분명하게 구분지은 말들은 달고 쓴맛을 분명하게 나눈 듯이 보인다. 그러나 도오가 쾌활하다고 외쳤을 때 그는 쾌활 속에 없었다. 그 소리를 내뱉는 순간 도오는 벌써 그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미 옛날에 날아가 버린 ‘쾌활한’ 화살의 뜻을 낚아채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도오는 마지막으로 ‘괴로운’ 한 발을 더 쏜 것이다.


육긍대부(陸亘大夫)는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의 대표적인 재가 제자였다. 남전이 입적했을 때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육긍을 보고 원주가 나무라듯이 물었다.

“대부는 어째서 스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곡을 하지 않소?”

“원주가 도에 들어맞는 말을 하면 곡을 하리다.”

원주는 할 말을 잃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스승의 죽음을 대하고도 육긍은 고인이 평상시에 늘 자신의 목을 조이던 화두에만 의식이 쏠려 있다. 원주는 남전의 법문이라곤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어설프게 육긍에게 덤벼들었다가 역습을 당하고 깃발을 내릴 수밖에 없는 초라한 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표정한 육긍의 태도를 보고 어떻게 점검해야 했을까?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은 자신이 원주였다면 애초에 육긍을 향해 “곡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합당합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라고 했다. 제자들이 고양이를 서로 제 것이라 다투는 광경을 보고 남전이 “제대로 말을 하면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라고 했을 때, 아무도 응답하지 못하자 고양이를 두 토막을 내었던 생전의 기백을 장경이 재현해 보인 것이다.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은 육긍이 원주의 말을 되받아 친 것과는 달리 자신이라면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로 응했을 것이라고 했다. 곡을 해야 마땅하다는 원주의 은근한 강요를 설두가 그대로 수긍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도둑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도둑을 쫓고, 도둑의 창을 가로채어 도둑을 공격하는 선사들의 잘 알려진 수법이다. 원주가 흡족해 할 곡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원주에게 되돌려 그를 붙들어맬 올가미를 쳐놓은 것이다. 이러한 설두의 의중을 훔칠 수 있는 도둑이 아니라면 그가 파 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빠지고 말 것이다.


설당도행(雪堂道行 1089~1151)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도둑들의 속을 두 손에 받쳐 유품으로 남겼다. “안다는 것은 자신의 본심을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라고들 한다. 이렇게 본심과 본성을 분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선종의 커다란 병이다.” 말문이 막히기만 하면 본심이다 본성이다 얼버무리고 달아나 안주하는 소굴을 쳐부순 것이다.


그러나 전략에 능한 선사들은 타성적인 이 비상구를 알고서 의도적으로 그것을 역이용한다. 그들에게 있어 본심과 같은 탈출구는 애초에 없었으며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을 궁색한 지경으로 몰아붙여 사로잡기 위한 올가미만 있을 뿐이다. 설당이 자신의 말을 다시 풀었다. “물렁한 진흙 안에 가시가 숨어 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사들이 제시한 물렁하고 익숙한 언어의 틀에 기댄 채 논리를 짜내다가는 그 숨은 가시에 찔린다. 이처럼 전략적인 언어를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마치고 몸을 씻은 뒤 좌탈한 설당의 간절한 뜻에 반조해 보면 선종의 병과 약이 동시에 드러날 것이다.


덕산의 신음이나 도오의 괴롭다는 외침 그리고 육긍의 냉정함 속에도 그러한 가시가 박혀 있다. 이 수법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면 그들이 죽음에서 보여주는 선사로서의 특징은 매몰되고, 의례적인 다비식 뒤에 사리 몇 과를 남기는 최후를 목격하고 감탄하는 것에 그치게 될 것이다. 영롱한 저 물체가 귀하기는 귀하다. 그러나 이들이 쏘아붙이는 마지막 화살은 그런 생쥐를 맞추는 도구로서는 낭비일 뿐이다.


운거도응(雲居道膺 ?~902) 문하의 어떤 학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사리가 수습되자 도응이 그것을 손에 들고 말했다. “설령 열 말의 사리를 남겼다 손치더라도 살아 생전에 화두 한 구절 타파한 소식을 전한 것만은 못하다” 선사의 본분에 반조해 볼 때 죽은 뒤 세상에 남겨야 하는 진짜 사리는 바로 그것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돌아볼 가치도 없는 헛것이다. 선가에서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끓는 물에 떨어진 방게처럼 손발을 버둥거리며 괴로워 할 것이라고 전하는 말은 이렇게 할 일을 마치지 못한 선사들에게 주는 경책이다.



3. 별난 죽음


입적한 뒤 웅이산(熊耳山)에서 매장으로 장례를 치렀던 달마대사는 관에 짚신 한 짝을 남기고 나머지 한 짝은 손에 들고 인도로 떠났다. 달마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나 민간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그러한 류의 전설에 따른다. 선종사가들은 죽은 다음 자신의 시체를 사라지게 하는 도교풍 시해선(屍解仙)의 이미지로 달마의 최후를 서술하여 그런 일반의 요청에 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분을 추구하는 납자들에게 달마의 신통한 행적은 냉소 속에 무의미화 되고, 하나의 화두로 변신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주어진다.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 ~1104)은 “공연히 어깨에 매고 맨발로 걸어가니, 자신의 짚신은 언제나 신어 볼까?”라고 비꼬아 부활의 신화에서 광채를 빼앗았다. 동산혜공(東山慧空 1096~1158)은 달마가 다시 한번 사람들을 속였다고 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관문으로 전환시키고 달마를 다시 선종의 조사로 되돌렸다. 응암담화(應庵曇華 1103~1163)는 달마의 9년 면벽이 후손들을 망쳐 놓았다면, 짚신 한 짝을 들고 인도로 돌아간 것은 부처님을 아둔하게 만든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면벽도 부활도 선사들에게 달마가 사후에 남긴 것은 본분의 지표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고 선택한 시간에 입적하는 선사들이 전등사서에는 무수히 등장한다. 임제종 황룡파의 화산덕보(禾山德普 1025~1091)는 살아 있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자리에 앉아 문인들로부터 죽은 자에게 올리는 절과 음식을 모두 받고 난 다음 “내일 맑은 하늘에 눈이 내리면 가겠다”라하고는 때가 되자 편히 앉아 향을 사르고 입적했다.


일생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호흡을 잘 알게되어 자연스럽게 일정한 기간 안에서는 죽음의 순간을 조정할 수 있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석상경제(石霜慶諸 807~888) 문하에는 앉아서 입적하는 좌탈(坐脫)과 서서 입적하는 입탈(立脫)이 성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형식은 수행의 깊이를 재는 기준도 아니며 선사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그 종지와도 거의 상관이 없다. 그 알갱이가 빠진다면 그것은 일종의 묘기에 그칠 것이다.


가령 위대한 선수행자들이 법좌에 올라앉아 자신의 입적을 미리 알리고 자유자재로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들은 영원토록 본분의 소식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좌탈과 입탈 등의 기교를 비웃고, 그보다 더 기괴한 묘기를 선보이며 입적한 등은봉(鄧隱峰)의 일화는 선종사에서 보기 드문 기연으로 남아 있다.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제자인 그는 거꾸로 뒤집어져 죽음으로써 좌탈과 입탈을 모두 무색하게 만드는 전무후무한 죽음의 형식을 보인다. 대중들이 다비를 하려 했으나 물구나무를 선 그의 시신은 옮길 수조차 없었고, 모두들 그 도탈(倒脫)을 두고 어찌 할 줄 모르고 다만 먼발치에서 우러러보며 경탄할 뿐이었다.


등은봉의 심중을 뚫어 본 것은 비구니 여동생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 “생전에는 어떤 법도도 따르지 않다가 죽은 다음에는 또 이렇게 사람들을 속이시는군요!”라고 질책하며 손으로 가볍게 밀자 그대로 쓰러졌다. 그녀는 등은봉이 의도적으로 꾸민 도탈의 기행을 선사로서의 트릭으로 간파했고 그것을 인정하기라도 한 듯이 시신은 맥없이 풀어졌다. 그것은 좌탈과 입탈보다 더 큰 신비의 포장을 하고 사람들을 화두의 전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과장된 신비화로 치닫는 곳에서 한 발 더 나간 도탈은 그것을 바라보며 넋이 빠진 망막의 껍질을 벗겨 내기 위한 몸짓이었고, 그 자체가 등은봉이 제기한 화두라는 관문이었다.


소주(蘇州) 화정현(華亭縣)의 강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며 종지를 펼쳤던 덕성(德誠)의 죽음은 집착할 단서를 남기지 않는 모범적 사례를 극적으로 펼쳐 보였다.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에게 “몸을 숨긴 곳에는 종적을 조금도 남기지 말고, 종적이 없는 곳에는 몸을 숨기지 마라”는 가르침을 주고, 협산이 작별 인사를 올린 뒤 떠나며 자꾸 뒤돌아보자 덕성은 “사리여! 사리여!” 하고 불렀다. 협산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뱃사공은 노를 꼿꼿이 세우고 “그대는 나에게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생각하는 구나”라 말한 뒤, 마침내 배를 뒤집어엎고 물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떠났다. 종적을 남기지도 않고 종적이 없는 곳이라고 하여 그곳에 안착하지도 않는 도리를 죽음으로 보여 준 것이다. “한구절에 딱 들어맞는 뜻일지라도 영원토록 나귀를 묶어두는 말뚝에 불과하다”라고 한 그의 진실을 목숨을 던져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


성공묘보(性空妙普 1071~1142)가 이 뱃사공을 흠모하여 화정현에 살면서 입적에 앞서 좌탈과 입탈도 수장된 덕성의 최후만 못하다고 말하고, 쇠피리를 불고 난 다음 파도 속에 몸을 던졌는데 3일 뒤 강가 모래밭에서 결가부좌한 시신이 발견되었다. 덕성의 뒤를 따르고자 했으면서 그가 그토록 지우고자 했던 흔적을 남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말미까지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한 마디 떠오를 법도 하다.


선사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질곡도 해방도 아니기에 그것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별다른 시도를 하지 않으며, 화두를 놓치지 않듯이 죽음의 순간까지 학인을 가르치고 점검하는 등 본분사를 주고받는 지속적인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영위해 왔던 일상의 모든 것은 조각조각 분산된 백척간두였으며, 그것을 지향하는 삶의 양식은 죽는 찰라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오조법연(五祖法演)은 무미건조하게 벼랑에 서서 단지 본분의 ‘이 한 수’에만 의존하고 남의 말을 훔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라는 지침을 일생의 좌표로 삼았다. 그들에게는 죽음도 생사의 질곡을 타파한 이 한 수의 소식을 전할 하나의 기회 이외 다른 것이 아니었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