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자는 출가자에 비해 하열한가
박경준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장)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장.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석사·박사학위 취득. 논문제목으로는 「원시불교의 사회·경제사상 연구(1992)」 현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논문으로는 「불교적 관점에서 본 자연」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불교적 접근」 「민중불교 운동의 흥기와 이념」 「불교사상으로 본 사회적 실천」 「생산과 소비에 대한 불교의 기본입장」 「동남아시아의 불교 수용과 전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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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서구문명은 진보와 성장의 기치 아래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안으로는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고 밖으로는 자연환경 파괴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불교에서 찾고자 이미 오래 전부터 노력해오고 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깊이 인식하여 지구와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교 교단이 내용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여법하게 기능하고 정비되어야 한다. 특히 불교 교단은 이른바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되는 바,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가 각각의 역할과 본분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한국의 불교 교단은 사부대중이 각각의 역할을 비교적 적절히 분담함으로써 그 역동성은 어느 불교국가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재가자들은 교단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교단의 주변인 또는 객체로서 겉도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에 재가자들은 자신들을 출가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폄하하여,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 스스로 노력하기보다는 출가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며 기복불교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출가자 또한 재가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줄어들고 참다운 수행정진에 나태해질 수 있다. 그리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붓다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인 ‘승가’ 본연의 정체성이 퇴색되고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재가자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출가자에 비해 어떤 위상과 입장에 서 있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불교의 재가자는 일반적으로 우바새(upsaka, 信男)와 우바이(upsik, 信女)를 일컫는다. 그런데 우파사카(upsaka)와 우파시카(upsik)는 원래 ‘가까이 앉다’·‘존경하다’·‘섬기다’라는 의미의 우파사티(upsati)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재가자는 출가자를 가까이서 섬기고 존경해야 한다는 기본입장을 잘 말해 준다. 한 초기 경전에 따르면, 재가자는 출가자를 대함에 있어 첫째, 자애로운 행동으로 대하고, 둘째, 다정한 말로 대하고, 셋째,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고, 넷째,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며, 다섯째,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은 초기불교교단에서 출가자에게는 일체의 노동과 생산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따라서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은 대부분 재가신자나 일반인들의 보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출가자는 재가자를 위해, 첫째, 악(惡)을 행하지 않게 하고, 둘째, 선을 행하도록 타이르며, 셋째, 선심(善心)으로써 신자를 사랑하고, 넷째, 아직 듣지 못한 것은 들려주고, 다섯째, 이미 들은 것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여섯째, 생천(生天)의 도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1)
한마디로 초기불교교단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긴밀한 이원구조(二元構造)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한다.
재가자와 출가자는 서로 의지하여 올바른 진리와 위없는 안락에 도달한다. 출가자는 재가자로부터 옷과 생활필수품과 침구, 약품을 얻는다. 또한 재가자는 깨달음에 도달한 성자들의 성스러운 지혜의 힘에 의해 이 세상에서 법을 실행하며 하늘의 세계를 누리고 바라는 것을 얻어 기뻐한다.2)
이러한 가르침의 내용을 잘 음미해 보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궁극적 목표는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역할이 나누어져 있을 뿐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해 가는 데 있어 물질적 재화뿐만 아니라 정신적 양식도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바라드바자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당신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으십시오” 라고 했을 때,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라고 하면서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부끄러움은 괭이자루, 의지는 잡아매는 줄, 생각은 내 호미날과 작대기입니다”라고 한 부처님의 대답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바라드바자 바라문에게는 부처님이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부처님은 자신이 마음 밭을 경작하여 정신적 양식을 생산하는 농부와 다른 바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출가자에게, 재가자로부터 물질적 식량을 얻는 대신 그들에게 정신적 양식을 제공하라고[法施] 가르치는 것이다. 반면에 본능과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기 쉽고 무반성적 일상에 함몰하기 쉬운 재가자들은 정신적 양식을 제공해 주는 출가수행자들에게 공양하고[財施]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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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계에 비추어 본다면, 재가자들은 결국 현실생활을 위한 노동 생산과 자기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 초기경전에 보면 신심 깊은 재가자들은 6재일에 팔관재계를 지키고 집 근처의 수도원을 찾아 부처님이나 스님들께 법문을 들으며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수다원과(예류과 : 성인의 세계의 첫 단계)를 성취하였다는 기록은 경전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더 나아가 아나함과(불환과 : 성인 세계의 세번째 단계)를 성취한 범마(梵摩)에 관한 기록3)이라든가 각카타, 니카타, 카알리카, 카알라카타, 리사바사로, 우바사로, 리색타(이하 생략) 등이 오하분결(五下分結)을 끊고 아나함이 되어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났다는 등의 기록도4)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은 『증일아함』에서, 우바새들 가운데 지혜 제일인 질다(質多, Citta) 장자, 신묘한 덕이 뛰어난 건제아람, 외도를 항복받는 굴다 장자, 깊은 법을 잘 설명하는 우파굴 장자, 늘 앉아 참선하는 하타카 알라바카, 이론으로 이길 수 없는 비구(毘) 바라문, 게송을 잘 짓는 우팔리 장자 등을 거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5)
우바새뿐만 아니라 우바이의 경우도 성인의 경지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코삼비의 고시타 동산에 계실 때, 코삼비의 우전왕이 정원에 나와 있는 동안 내전이 불에 타 사마바티 왕비를 비롯한 5백 명의 여인이 숨졌다. 비구스님들은 부처님께 그 여인들의 사후에 관해 질문하였는데,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예류에 도달한 우바이도 있고, 일래(一來)에 도달한 이도 있으며, 불환이었던 우바이도 있다”라고 대답한다.6)
부처님은 역시 『증일아함』에서, 우바이들 가운데 처음으로 도를 깨달은 난타바라, 지혜 제일의 구수다라, 언제나 좌선하기를 좋아하는 수비야, 설법을 잘 하는 앙갈사, 외도를 항복받는 바수타, 여러 가지로 의론하는 바라타, 항상 욕됨을 참는 무우(無憂), 남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시리(尸利) 부인 등의 우바이를 언급하고 있다.7)
그리고 재가신자로서 이러한 성위(聖位)에 오른 사람들의 위덕은 출가자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부처님은 『잡아함』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하나마여, 만일 우바새로서 이런 열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바라문 대중, 크샤트리야 대중, 장자 대중, 사문 대중들이 다 그에게 모일 것이요, 그 대중 가운데서 위엄과 덕이 환히 빛날 것이다. 마치 태양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에도 그 위엄과 덕이 밝게 빛나는 것처럼, 우바새로서 열여섯 가지 법을 성취한 사람도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에도 그 위엄과 덕이 밝게 빛날 것이다.8)
그러나 우리는 초기경전을 통해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바새 수다원’·‘우바새 사다함’·‘우바새 아나함’ 등의 표현은 볼 수 있는데, ‘우바새 아라한’이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9) 이것은 우바새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까지는 될 수 있지만, 소승불교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점들에 의거하여 출가자는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지만, 재가자는 불환과(아나함)까지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불교 교학의 전통이다.10)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의 이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그것은 아마도 모든 세속사(世俗事)를 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는 출가자에 비해, 재가자는 자신의 의식주 생활은 물론 가정을 챙기고 사회생활에 힘쓰다 보면 실제로 자신의 마음 밭(心田)을 경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것은 교단의 기강과 위계질서를 위해 의도적이고도 방편으로 마련한 제도적 규정에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번째 관점에서 본다면, 재가자에게도 사실상 아라한과의 성취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북도파(北道派, Uttarpthaka) 같은 부파에서는 속인(俗人)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1)
매우 드문 예이지만, 재가자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경우도 『법구경』의 주석서에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법구경』 제142송 「산타티 장관 이야기」에 나온다. 이에 의하면, 춤추고 노래하는 한 여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산타티 장관이 부처님을 찾아가, 부처님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고 그대는 여인에 대해 집착해 왔으나 이제 그대는 마땅히 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대는 미래에 다시는 그런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그대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욕망과 색욕은 조용히 가라앉게 되고, 그러면 그대는 가만히 그대의 마음을 관찰하게 되어 마침내 열반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듣는다. 이 설법을 들은 장관은 즉시 아라한과를 성취했다는 요지의 내용이다.12)
<4>
출가수행자에게만 인정되던 아라한과의 성취가 위와 같이 재가신자에게도 인정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라한의 개념이 좀더 인간적인 성격으로 변하는(大天의 五事說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것도 그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교의 평등사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였고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고타마(Gautama) 법전에 의하면, 노예계급인 수드라가 성스러운 베다의 독송을 도청하다 발각되면 귀에 뜨거운 쇳물이나 나무의 진을 채워 넣는 벌을 받아야 했다. 만약 수드라가 베다를 독송하다 발각되면 그의 혀는 잘려지고, 베다를 외우다 발각되면 그의 몸은 두 동강이가 나야 했다.
그 정도로 계급 차별이 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요 태어나면서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면서 계급 차별의 부당함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하여 불교교단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것을 바다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강, 아수나강, 아치라바티강, 사라부강, 마히강과 같은 대하(大河)가 바다에 흘러들면 이전의 강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사성(四姓 :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도 여래가 가르친 법과 율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種姓)을 버리고 똑같이 석가세존의 아들, 즉 석자(釋子)라 불린다.13)
이처럼 사성의 평등은 물론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여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불교를, 오노신조(大野信三)는 ‘혁명적 평등주의’라고 규정한다.
또한 일천제(斷善根: 모든 선의 뿌리가 잘려나간 사악한 존재) 문제와 관련한 『대승열반경』의 입장 변화도 불교의 평등사상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열반경』은 초반부에서는 일천제의 ‘무불성(無佛性)’을 주장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일천제의 ‘유불성(有佛性)’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일천제 성불(成佛)의 기치를 든 『열반경』은 여래상주(如來常住)와 실유불성(悉有佛性 :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음) 사상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함으로써 불교의 종교적 의의를 심화시키고 독특한 구제관을 확립시켜 나간다. 아무튼 연기법을 참다운 진리로 삼는 불교는 다르마(dhaa, 法)의 보편성에 의거하여 사성평등과 남녀평등, 나아가 일체중생실유불성까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그 인연이 성숙하면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출가자와 재가자의 깨달음의 능력을 구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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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출가자와 재가자의 깨달음의 능력에 관한 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는 불타와 전륜성왕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n)은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통해 바로 이 세상에 이상국가를 실현한다는, 범세계적 제왕(Universal Emperor)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회에서, 귀족 가문 출신의 젊은이에게는 두 가지 이상이 있었다. 하나는 전륜성왕이 되어 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수행자가 되어 위대한 성자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전기에서도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하면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불타가 될 것이고 출가하지 않으면 전륜왕이 될 것이다’는 예언의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불타와 전륜성왕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구제자의 양면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불타는 정신적 구제자를 대변하고 전륜왕은 세간적 구제자를 대변한다. 이 두 구제자는 항상 수레의 두 바퀴처럼 불가분의 짝을 이루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전륜왕은 불타의 이상을 세속사회에 실현하는 불타의 대행자라고 할 수 있다. 전륜성왕이 부처님처럼 32상(相)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유방식을 출가자와 재가자의 문제에 적용시킨다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능력을 그리 쉽게 차별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식과 사상적 전통은 마침내 『유마경』이나 『승만경』 같은 대승경전 속에 계승된다.
『유마경』은 풍요롭고 활기찬 인도의 상업도시 바이샬리를 무대로 유마힐 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희곡적 형식의 대승경전이다. 주인공 유마힐은 특히 대부호로서 세속적 복락에 탐닉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어떤 제자들보다도 수행력이 수승한 인물이다. 그의 법력은 사리불, 목건련, 가섭, 수보리, 부루나, 아나율 같은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문병(問病)마저 꺼려할 정도로 높았다.
그는 비록 재가자이지만 사문의 청정한 율행(律行)을 지키고, 가정을 갖고 살고 있으나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고, 처자(妻子)가 있지만 항상 범행(梵行)을 닦고, 먹고 마시지만 그러한 즐거움보다는 선(禪)의 기쁨을 더 좋아하고, 노름판 같은 데를 가더라도 그곳의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승만경』 역시 그 주인공이 우바이, 즉 재가여성이다. 승만 부인은 부처님 전에 열 가지 서원을 일으키고, 다시 세 가지 큰 원을 세우면서 그것을 충실히 지킬 것을 다짐한다. “몸과 생명과 재산을 던져서라도 바른 진리를 지키겠다”고 하는 승만부인의 염원은 출가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러한 경전들은 기존의 출가중심적 · 형식주의적 · 현학적 부파불교교단에 대한 안티-테제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이 경전의 내용을 일반화하거나 절대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경전은 출가와 재가를 계급화한다거나 불교를 초월주의 또는 출세간주의화 하려는 데 대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요컨대, 모든 대승경전이 보살의 인간상을 통해 출가와 재가의 벽을 허물고 있지만, 특히 『유마경』과 『승만경』은 재가자로서도 스스로가 근행정진한다면 깨달음의 세계에 능히 이를 수 있고 성자의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출가자와 재가자는 깨달음의 길에 있어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재가자가 출가자에 비해 하열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끝으로 한 가지 첨언하자면, 불교의 발전은 불교 교단의 원형인 ‘출가-재가’의 이원구조를 적절하고도 창조적으로 살려나갈 때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대승불교가 출가자와 재가자의 벽을 허물고, 출가주의와 형식주의를 극복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가 쇠퇴하고 멸망하는 데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는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승불교에는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불법의 수행과 홍포에 전념하는 밀도 높은 출가교단이 없어서 결국은 불교의 쇠퇴를 초래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정신은 출가와 재가의 관계에 있어서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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