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재가불교를 위한 제언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우리는 선우’ 이사장.1975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ㆍ박사 학위 취득, 83년부터 건국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 논문으로는 「맹자의 수양론-호연지기 양성론을 중심으로」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론」 「조선철학사의 사실성 문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 등이 있다. 현재는 불교계 재가불교단체인 ‘우리는선우’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재가불교가 있을 수 있는가?
불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산 혜연 스님의 발원문에는 “이 세상의 명과 복은 길이 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지혜 날로 날로 늘어나서…”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 말고도 이 발원문에는 곳곳에 재가불자들은 현생에서는 그저 명과 복을 빌고 오는 세상에 동진출가하여 불법을 닦자는 식의 말들이 등장한다.
만약 이러한 발원문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면 재가불자들은 현생에선 불법을 닦을 수도 없고 또 필요도 없다.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복을 받고, 그 복덕으로 내성에 좋은 곳에 태어나 진정한 불법을 닦아야 옳다. 그리고 또 만약 이러한 전제들이 옳다면 재가불교라는 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불법 자체의 근본에는 들어갈 길이 없는 재가불자들이 무슨 불교를 논한단 말인가? 그저 스님들의 지도에 따라 좋은 일 많이 하면 될 것이니, 어려울 것도 없고 또 고민할 필요도 별로 없다.
문제는 그런 틀 속에서는 결코 재가자들은 불교의 주체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인간이지만 출가자와 재가자는 수직적으로 상하관계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 재가자들은 이 생에서는 불법을 닦을 희망이 별로 없고, 내생에 한 단계 승화된 존재로 다시 태어나 출가하여 수행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현실의 출가자들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 한 단계 높은 존재로 태어났다고 인정하는 것이요, 당연히 그러한 진화를 거치지 못한 재가자들은 한 차원 낮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출가를 찬양하는 여러 불교 전적들에는 이러한 투의 이야기가 많고, 재가자들도 출가자에 대한 존경을 보내면서 암암리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만약 이러한 것이 불교적으로 올바른 견해라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본다면 이렇게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재가와 출가를 구별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지 않다. 재자자로서 훌륭하게 수행하여 높은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도 많고, 유마거사와 같이 출ㆍ재가를 넘어서 대승의 깊은 뜻을 선양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재가자도 있다. 이러한 예들을 보더라도 출가와 재가를 상하관계의 두 층으로 나누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인 측면을 조명할 필요도 없이 “내생에 출가하여…” 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업이란 바로 버릇이다. 내생으로 미루는 버릇이 들면 어쩔 것인가? 내생에 다시 태어나서는 전생에 미루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미루는 버릇만 남을 것인가? 아마도 버릇이 남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영원히 미루는 업이 축적되어 갈 것이요, 결국 부처 종자를 끊은 일이 되지 않겠는가?
당당하게 지금의 여기에서 불법을 추구해야 한다. “내생에 좋은 조건을 만나서… ” 하는 방식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출가라는 것이 불법을 실현하기 위한, 성불을 위한 필수적인 단계라는 생각은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어떤 모습으로 있더라도 불법 궁극의 이상을 항상 지향하는 자세를 가질 때 그 불자는 불법의 주체로 바르게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가자와 재가자는 수직적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평등관계에 놓여져 있다는 방식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출가를 한다면?
혹 이렇게 출가중과 재가중을 수평적 관계에 놓는 방식이 출가중에 대한 존경을 없애거나 희석시키는, 출가중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손한 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신분에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 해서, 그들을 우리보다 근본적으로 상위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하는 역할, 그들이 그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 바치는 자기희생, 그러한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혜택들을 생각하여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나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상당한 포기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결과로 인류에게 큰 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대한 존경은 그들이 많은 욕망을 포기하고 학문연구에 바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 결과가 인류에 주는 혜택 때문이다.
출가중과 재가중의 관계, 그리고 출가중에 대한 존경의 문제 등도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볼 수가 있다. 출가라는 것은 다른 여타의 존경받는 특수한 직업에 나가려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희생과 포기를 요구하며, 그들의 그러한 희생과 노력의 결과 또한 다른 어떤 전문가들이 인류에게 주는 혜택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그러한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한 전문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문제에 있어서의 전문가라면 마땅히 최상의 존경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들을 통해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쉽게 배우며, 또 행복한 삶을 이루어 나가는 길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이 많은 욕망을 포기하며 그러한 길에 매진한 값진 희생에, 또 그들이 가져다 준 크나큰 혜택에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사부대중이라는 불법의 공동체 속에서 그들의 특별한 귄위와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재가중이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다. 출가중에 대한 존경은 평등한 관계 속에서 그들이 하는 특별한 역할과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특별한 희생에 대한 존경이다. 그리고 출가중만이 있어서는 세상을 유지할 수가 없고, 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갈 길도 없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모든 사람이 출가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류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올 리도 없겠지만, 만약 온다면 그 때는 인류가 한 단계 승화하여 천상의 어떤 세계처럼 눈만 마주쳐도 임신이 되는 그런 변화가 있을 것인가? 부처님이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지 않다. 그런 점에 재가중은 이 세상을 유지시켜나가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러한 유지 가운데는 출가중에 대한 외호와 지원도 포함된다. 또한 출가중만 가지고서는 좋은 세상의 건설도 힘들다. 어차피 출가중은 초세간적인 성격을 띄게 마련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꾸고 일구어 나가는 것은 재가중의 몫이다.
출가중이 그러한 꿈에 지혜를 빌려줄 수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역시 재가중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출가중과 재가중은 엄연하게 역할의 분담이 있는 것이요, 거칠게 말하면 일종은 분업을 하고 있는 셈이겠다.
올바른 역할분담의 필요성
이렇게 역할 분담의 관점에서 출가중과 재가중의 관계를 본다면, 건강한 재가불교, 나아가 건강한 불교공동체의 성립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 바로 출가중과 재가중이 각각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불교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합리적인 틀을 만들고, 나아가 그들 각각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는 일일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불교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는 스님 절대 우위의 틀 속에서 재가중의 역할과 권리ㆍ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도 출가 승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라면 좀 지나친 표현일까? 부처님은 열반 무렵 자신의 장례를 걱정하는 출가자들에게 “여래의 장례는 신앙심 깊은 재가자들이 여법하게 치러줄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데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다 한다. 그것은 출가자에게나 재가자에게나 매우 엄하게 부촉을 내리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한 부촉의 뜻은 불교 공동체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출가자들이 해야 될 일과 재가자들이 해야 될 일, 그리고 출가자들이 나서서는 안 될 일과 재가자들이 나서서는 안 될 일에 대해 엄하게 따지려는 기풍조차 사라져 버렸다. 몇 해 전에 한 불교연대단체에서 ‘사찰재정투명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사찰의 여건에 따라 그러한 운동이 전혀 안 맞는 그러한 곳도 있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출가중의 심한 거부와 반발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부처님의 부촉에 미루어 본다면 분명히 바른 길인데도 불구하고 진전이 되지 못한 채 좌초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튼 사부대중의 역할에 대해 사부대중 모두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를 바르게 정할 때 비로소 불교 공동체는 공동체답게 설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이 세상에 불세계를 이루어 나가는 공동체로 바로 서는 것이다. 조계종 종단 내부에서도 재가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규정을 정비해가고 있고, 또 출재가 모두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일고 있으니 이러한 흐름을 이어 출가와 재가의 역할분담이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제도적 틀이 하루 빨리 갖추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일들은 재가자들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기 힘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서는 모양새도 좋지 않다. 재가자들이 투쟁을 통해 스님들로부터 빼앗아 내듯이 자신들의 영역과 권리를 찾게 되면 출·재가 모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고, 그 뒤의 불교공동체는 한동안 정상적인 모습을 찾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출가 승단 쪽에서 합리적인 제도와 틀을 만들어 나가고, 거기에 재가자들이 힘을 보태는 모습을 취해야 할 것이다. 출가 승단으로서는 지니고 있던 많은 것들을 잃는 듯한 상실감이 있겠지만, 그동안 출가 승단을 멍들게 하고 불교에 오욕을 주었던 많은 사건들이 따지고 보면 재가중에 맡겨졌어야 할 것이 출가승단에 있었기 때문임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법으로 나가는 길은 정해져 있고, 그 길이 피할 수 없는 길이며 또 가야할 길이라면 빨리 서두는 것이 좋다.
출가수행과 재가수행은 달라야 한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은 바로 그들 삶의 무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출가자는 본래 전 생애를 수행에 쏟기 위해 출가한 것이다. 재가자는 이와 달리 가정과 사회의 많은 의무관계 속에 놓여 있고, 삶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일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야 한다. “불법을 닦는 일은 내생에…” 하는 식의 말은 따지고 보면 이러한 재가자들의 고단한 삶에서 나온 자포자기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재가자들에게 그 고단한 삶을 사는 와중에 수행까지 하라는 것은 무리일 듯도 싶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불교의 수행에 대한 치우친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온 불교의 기본 수행은 무엇인가? 바로 삼학(三學)과 팔정도(八正道)이다. 삼학의 확장태인 팔정도를 보면 총체적인 삶을 통해서 수행하는 길이지 꼭 참선이라든가 염불 같은 특별한 수행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불자들은 바른 삶의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수행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대부분의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참선이라든가 염불을 통해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치우침이 우선 바로잡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치우침의 큰 원인은 바로 재가불자들의 ‘스님 흉내 내기’이다. 스님들이야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까지도 전혀 하지 않고 모든 시간을 수행에 투자할 수 있는 분들이니 좀 더 몰입된 형태의 수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그것을 재가불자들이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고 무분별하게 흉내 내기를 한 재가불자들의 책임이기도 하고, 무책임하게 자신들 하는 대로 하라고 가르친 출가자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리고 책임소재야 어떻든 그 결과는 재가불자들의 자신감 상실과 자포자기로 귀결된다. “역시 나는 안돼…, 내생에….” 하는 결론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방편설이라 하였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놓여 있는 상황과 여건이 전혀 다르다면 전혀 다른 방편이 있어야만 한다. 전혀 다른 여건에 있는 재가자들이 출가자에게 적합한 방편으로 수행을 한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환한 일이다. 마땅히 재가자들이 놓인 여건과 상황에 맞는 불법수행의 방편이 마련되어야 한다. 출가자는 그러한 재가자들에 맞는 방편을 개발하여, 그것을 그들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고, 출가자들은 무책임하게 자신들과 같은 방편을 따르라고 하고, 재가자들은 또 반성 없이 출가자들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재가불교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지향하는 바가 같기에 전혀 동떨어진 방편이 쓰일 리야 없겠지만, 너무나 큰 환경과 여건의 차이가 너무도 고려되지 않고 같은 수행방편에 함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좌절과 자포자기에 빠져 불교의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내생을 기약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기복적 양상 등 많은 병폐의 근본에는 바로 이렇게 불교의 본질에서 소외된 재가불자의 좌절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삶의 현장이 수행의 장일 수는 없는가?
이러한 잘못된 닦음의 병폐는 삼학과 팔정도의 근본으로 돌아감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삼학과 팔정도는 우리 삶 전체를 통해 닦아 나가는 것이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른 직업을 갖고, 바르게 노력하고…”하는 여덟 가지 가운데 참선이나 위빠사나에 해당하는 것은 몇 가지나 되는가? 많아야 두세 가지이다. 그런데 왜 수행이라 하면 꼭 참선수행, 위빠사나 수행 등만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러면서 재가자들 삶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삶의 현장은 불교 밖으로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가? 불자들 가운데 삶의 하나하나를 부처님 가르침과 연결시키면서, 불교의 정신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는 참으로 드문 것 같다. 물론 다 불교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살아가고는 있겠지만, 가정 윤리나 직업윤리 등에 구체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용하여 상세하고도 곡진하게 주어지는 삶의 원칙들이 부족하다.
그러하기에 실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삶을 이끌어 간다고 보기 어렵다. 삶과 불교가 동떨어져 있고, 또 삶과 수행이 각각 별개의 것으로 놀고 있다. 수행은 언제나 절에 가거나 수련대회 같은데 참여하여 참선이나 기도를 통해 가열차게 하고, 거기서 얻어진 힘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수행력이 떨어지고 기도의 힘이 소진된 것 같으면 다시 집중적인 수행을 해서 힘을 보충한다. 좀 거칠게 말했지만 이렇게 수행력 쌓고 그것을 삶 속에서 소진하고 하는 방식이 불자들에게 일반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쌓고 소진하고 하는 과정 속에서는 쌓여감이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오랜 불교 경력을 가진 분들이 노년에 들어서면 “나는 이제 지쳤어…”하는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삶의 현장이 소진의 장이 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재가자들의 삶에 거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는 삶의 현장을 이렇게 소외시키고야 진정한 불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을 소외시키고 나머지의 시간을 통한 수행으로 괴로움을 벗어나는 불자의 길을 간다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수행 자체에 매달려 정작 생생한 삶은 소외시키는 모습이 불교에 있는 지는 꽤 오래 된 듯하다. 다산 정약용은 “불교는 마음 닦는 것은 일로 삼지만, 우리 유학은 일로써 마음을 닦는다”고 불교의 병폐를 공격하며 유학의 뛰어남을 역설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삶의 일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출가중의 수행모습이 그렇게 비쳐졌을 가능성이 있고, 또 그러한 수행을 흉내 내는 재가중의 수행에도 그런 모습이 드러났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본질에 대한 공격이기보다는 현상에 대한 공격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불자들의 수행이 지니는 중대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바로잡을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로써 마음을 닦는다”는 그 한마디이다. 힌두교의 성전인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행위의 요가’를 말하고 있다. 이 또한 의무행위를 함에 있어서 저열한 동기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행위함으로써 본래적인 자아, 또는 신과 합일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나오게 된 동기가 불교와 같은 초세간적인 사상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초세간적인 정신과 현실적인 의무행위를 결합시켜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정약용의 “일로써 마음을 닦는다”는 이야기나 『바가바드 기타』의 ‘행위의 요가’나 현실적인 삶을 바로 수행의 장으로 삼는다는 점을 들어 불교에 대응하거나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는 충분히 귀를 기울일 만한 요소가 있다. 특히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에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재가불자들은 경청해야만 할 것이다. 출가자들이야 애초에 그러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수행에 전 삶을 투자하려는 뜻에서 출가를 한 것이니, 일부러 삶의 현장에 나와 일을 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라 한다면 또한 본말이 전도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삶의 현장을 단순한 소진의 장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재가불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 될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선(禪)이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에도 본래 일상적인 삶과 수행을 함께 추구하는 오랜 전통이 있어왔다. 문제는 출가자들의 행주좌와와 재가자들의 행주좌와의 영역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재가자들은 그 행주좌와의 영역을 가정생활, 사회생활의 전 영역으로 확장시켜야만 한다. 그리하여 일상의 모든 일들을 수행영역으로 삼는, 어찌 보면 출가자들보다 더 엄한 수행의 방편을 세워야 할 것이다.
놓인 상황이 힘든 만큼 더 엄한 수행의 방편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단지 “수행하는 자세로 한다”는 식의 애매한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삼학 팔정도의 정신을 살려 생활의 현장마다 그에 알맞은 행동의 원칙을 세우고[戒], 차분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행위하도록 하며[定], 늘 올바른 견해에 입각하며 항상 성찰하는 자세를 유지하는[慧] 방편들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재가자들끼리 서로의 원칙을 비교하고, 서로 일 가운데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을 교환하여, 우리의 삶 전체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배어들어가는 영역을 넓히고 또 그 깊이를 더해 나가야 한다. 출가자들이 원천의 물을 길어내는 존재라면 재가자들은 그것을 관개하여 비옥한 땅을 가꾸는 존재들이어야 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삶의 모습을 바꾸고 세상의 모습을 바꾸는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재가불자들의 수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는 공허한 불성만을 이야기하고 구체적인 윤리 강령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불교가 동북아에 전래된 이래로 유학 등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단골메뉴였다. 그것은 바로 재가불교가 바로 서지 못하고, 출가자의 모습을 흉내 내는 데 그쳤던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불교는 본래 그렇다는 식으로 안주하지 말고 좀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불교의 새로운 모습은 재가불교가 건강하게 섬으로써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올바른 지향, 서원을 통하여
이렇게 재가불교가 치우친 수행관을 벗어나 삶의 현장을 수행의 장으로 삼는 건강한 모습을 지니기 위해서 또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오욕락의 추구라는 삶의 원동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원동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서원이다. 이 보다 크고 넓은 올바른 목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오히려 불교의 본질을 흐리는 지엽말단적인 구속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의 진리에 눈을 뜨게 되면 자연 자기를 중심으로 하던 욕망은, 너와 나와 세상을 다 함께 이룩해나가는 서원으로 전환된다.
그러한 서원을 올바르게 세우고, 그것이 재가불자들의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나가야 한다는데 그치지 않고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서원들이 서로 공유되고, 또 서로 비교되면서 보다 큰 서원을 형성해 나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서원은 공허하고 아득하여 실현 불가능한 것이어서는 아니 되고, 우리의 가까운 삶 속에서 우러나온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공유되고 교환됨에 의해 보다 크고 먼 서원으로 세워져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또 우리들의 서원이 확고해질 때 불자들의 삶은 자연히 보다 큰 이상을 지향하는 질 높은 삶으로 전환된다.
재가불교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 서원이 바르게 서야 한다. 재가불자는 불교를 통해 현실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 존재들이며, 또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존재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움직임에 바르고 큰 목표가 없다면 어찌 될 것인가? 각각 개인의 안심입명에 머무른 소극적이고 퇴영적인 모습에 머무르게 되고 만다. 우리 현실의 불교에 활력이 부족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현실에 입각한 바르고 큰 목표가 부처님의 지혜에 바탕해 바르게 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늘 사홍서원을 외치지만 그것은 오늘 여기에 사는 나의 서원이 되지 못한다. 아득하고 멀기만 하여 법회 끝나면 바로 부처님 앞에 반납하는 서원일 뿐이다.
재가불교가 힘 있게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문제와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절실한 필요로부터 출발하되, 서로 서로 문제를 공유하고 또 그 해결을 위한 이상을 공유함으로써 함께 지니게 되는 보다 구체적이고 가까운 목표가 필요할 것이다. 사홍서원을 여기 오늘의 서원으로 구체화시켜 바로 우리들의 서원이 되는, 그러한 서원이 세워져야 한다.
좀 더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될 수 있는 추상적 서원에 머물지 않고 각각의 직업과 신분에 따른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서원들이 세워질 필요도 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불교를 통해 자기 삶의 올바른 방향성을 찾도록 할 때 불교가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출가자에게는 별로 해당이 없을 것이지만 재가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재가자들에게 필요한 모습의 불교를 창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가불교가 있어야 하는 근거이고 필요성이 아닐까 싶다.
스님의 발에 절하는 유마거사의 모습 속에
앞에서 한 이야기부터 다시 요약해보자. 출가자와 재가자의 위상을 수평적 관계 속에 있는 역할분담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시각에서 출가중과 재가중의 분계를 분명히 하여야 하며, 그 각각의 권리와 의무도 명확해져야 한다. 재가자의 환경과 여건에 맞는 방편이 개발되고 제시되어야 하며, 그것은 삶의 현장을 수행의 장으로 삼는 그러한 방편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어 나가기 위한 절실하고도 올바른 동기부여를 위해 나의 서원, 그리고 오늘의 서원이 바로 서야 한다. 대략 이러한 이야기기 될 것이다.
매우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이러한 점들이 확립되지 않으면 재가불교를 논한다는 것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선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재가불자들의 제자리 찾기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출가중으로부터 정당하게 양도받아야 할 점도 있고, 올바른 권리에 입각한 재가중들의 튼튼한 조직과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출가중과 함께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논의는 전통적, 인습적으로 권위를 누려오고 있는 출가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평지풍파요, 상당부분 자신들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있는 것으로 비쳐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건장한 재가불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치 못할 일이다. 지금까지 재가불교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출가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출가도 아니고 재가도 아닌 그런 불교였다고 생각한다.
현행의 많은 불교대학 등에서 가르치는 교과 내용을 보더라도 교리공부와 출가자를 본 딴 수행에 대한 안내만 있을 뿐, 불교를 통해 어떻게 삶의 현장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또 우리 삶의 현장이 어떻게 수행의 장이 될 수 있는가를 가르친 곳도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이다. 재가라는 출가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여건에 부합하는 불교의 모습을 창출하지 않으면 출가불교의 아류로서, 결국은 좌절과 포기에 빠져 기복적으로 흐르고 마는 그러한 모습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차피 근본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논의가 결코 출가중에 대한 존경을 감소시키거나, 출가중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오히려 재가불교가 바로 설 때 출가 승단의 모습도 바르게 설 것이요, 참된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유마경』 이라 하면 부처님 십대제자로부터 보살들까지 유마 거사에게 질타를 당하는 경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얼핏 생각하면 유마 거사가 매우 방자한 모습을 보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십대제자와의 만남 매번마다 유마거사가 스님인 그분들의 발에 예배한다. 그 모습 속에 바로 출가와 재가의 이상적 모습이 단편적으로나마 보이지 않을까 싶다. 사부대중 공동체는 출가중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대해 존경을 바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출가인은 모든 욕망 추구를 포기하고 진리와 깨달음의 추구에 삶을 바치는 존재이기에, 그들이 그렇게 바친 희생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을 요익케 하기에 충분히 존경받아야 한다.
재가자들은 그런 그들을 존중하고 받들며, 그들이 길어낸 진리의 샘물로 풍요로운 대지를 일궈 나가는 존재들이다. 혹 불교 밖에서 불교의 출가주의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가만 생각하면 이보다 더 절묘한 역할분담의 체계가 또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 역할 분담 속에 있는 사부대중은 평등한 관계이며, 또 서로 존중하는 관계에 있다. 그 아름다운 화합공동체는 사부대중 각각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건강해 질 수 있다. 이 글은 그러한 건강한 사부대중 공동체를 위해 재가자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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