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훈 시인의 작가 열전] 소설가 신경숙
“깊은 슬픔의 강 지나야 그 물결 위에 기쁨이 새겨져요”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그는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내가 누군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기를.’
그는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른다.
급하게 자기 규정하지 말고, 많은 것을 만나고 사랑하기를.’
‘오늘이…, 신경숙을 만나는 날이지’라고 되뇌면서 창문을 여니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야기들이 잠시 멈추었다 떨어진다. 꽤 오랜 시간 그를 알고 지냈는데, 뭘 물어보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하얗게 쌓인다. 지금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하얀 노트를 펼쳤다. 그동안 그의 연재소설 ‘푸른 눈물’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소설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잠언들을 적어두곤 했다.
‘모든 이름 속에는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성품이 숨어 살고 있다.’
‘세상의 물이 모두 바다로 밀려들어온다 해도 바다는 넘치는 법이 없다.’
‘다른 사람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은 흠이 아니라 매력이다.’
‘인생이든 상황이든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히려 변화가 찾아온다.’
‘사랑 때문에 슬픔에 빠져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이별은 눈으로 전해진다.’
‘오래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나에 맞게 변화시키려 해선 안 된다.’
‘이름은 그 존재의 숨결이다.’
이 글귀에서 눈길이 멈춘다. 노트는 흰 눈 위에 찍혀 있는 발자국 같은 글씨들로 어지러웠다. 노트를 덮었다. 창을 바라보면서 되도록 멀리 있는 것들을 보았다. 이런 시간에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름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름이 그 존재의 숨결이라니.
이름은 그 존재의 숨결.
신경숙은 그동안 어쩌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숨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숨결의 들고남에 울고 웃고 외롭고 괴로웠다.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나 한 시간 정도 머물다가, 그 옆 건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쪽에서 보는 풍경이 더 좋기 때문이다. 눈이 내려 평창동 산비탈의 위태로운 집들은 나를 향해 걸어오다 멈춘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눈이 그치니, 집들이 좀더 가까이 있으려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 같았다.
둘이 마주 앉아 차를 주문했다. 오랜만이었지만 거리감이 없다. 그는 소설처럼 가깝게 있다. 우선 근황이 궁금했다. 이제 신년이니 자연스럽게 지난해 일로 말 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지난해에 두 편의 연재 글을 썼다. 신문 연재소설과 문예 월간지의 연재였다. ‘현대문학’ 연재는 한국과 일본에 동시에 발표되는 편지글이다. 일본 작가와 한국 작가가 서로 편지를 써서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소담한 글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이 일본에서 나왔을 때,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 나라의 기자가 물었다. 일본에 오셨는데 여기에서 뭘 하고 싶으냐고. 그는 지금 당장은 그렇고 나중에 일본 작가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이런 사연으로 일본 문학의 독보적인 작가인 쓰시마 유코씨와 편지를 주고받는 연재를 하게 됐다. 편지는 양국의 작가가 문학, 여성, 삶과 같은 주제를 아우르는 내용이다. 두 사람의 편지글엔 서로 다른 처지의 여자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체취가 묻어 있을 것이다.
쓰시마 유코씨는 일본 문단에서 우리로 치면 박완서 선생 정도 되는 분이다. 그와 신경숙이 주고받는 편지글은 지난해 3월부터 한국의 ‘현대문학’과 일본의 ‘쓰바루’지에 동시 연재되고 있다. 지난해는 이 편지글과 ‘푸른 눈물’을 쓰면서 지냈다. 올해 상반기에 두 권의 책이 단행본으로 출판될 것이다. 정확한 출간 시기는 모르지만 어쩌면 독자는 신경숙의 책을 한꺼번에 두 권이나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일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일절 딴일을 못하는 성격이라 그는 아주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이제 책이 출간되면 바빠질 그를 미리 만나는 자리라서인지 신이 났다. 눈은 계속 내린다.
조선 궁녀와 프랑스대사의 사랑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재소설 얘기를 한다. 벌써 167회를 넘어서고 있다. 이제 원고지 200매 정도만 쓰면 연재가 끝날 것이다. ‘벌써’라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시작할 때만 해도 아득했는데, 벌써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어요. 시간은 참으로 모든 것을 품고 사라지는 것 같아서…. 소설이라는 것이 온전히 작가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요. 처음에는 작가가 인물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쓰는 것 같은데, 쓰면 쓸수록 작가가 주인공의 인생에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지점이 있어요. 소설 속의 인물에 생명이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리진이 사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그저 쓰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는 작가가 아니라 기자가 되어 있는 것일까. 리진은 이미 소설 속 공간에서 걸어나왔다. 리진은 필자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연재소설을 읽는 동안 그런 경험을 했다. 그래서 이미 많은 독자의 마음속에 ‘푸른 눈물’의 리진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출간돼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억지로 되는 건 없어요. 소설은, 아니 모든 작품에는 그것만의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쓸 당시의 상황에도 영향을 받고, 출간되고 나서의 여러 가지 사회적 기류랄까 뭐 그런 영향도 있고요. 베스트셀러…. 베스트셀러는 독자가 원하는 것을 써야 한다고들 하는데, 전 독자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혹시나 안다고 해도 거기에 맞추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제가 진실로 쓰고 싶은 것을, 쓰는 동안 정성을 다하는 거예요.”
그는 ‘푸른 눈물’을 연재하는 동안 자신이 복 받은 사람임을 느꼈다고 했다. 재미도 있었고, 담당기자도 작가를 자유롭게 해줬다. 그리고 화가 김동성의 아름다운 삽화도 고마웠다고 한다. 이제 마무리만 잘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됐을까.
2003년 무렵, 평소 알고 지내는 출판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면서 짧은 번역 원고를 보여줬다. 조선의 궁녀 리진과 콜랭의 이야기였다. 조선 근대 개화기의 한 여성이 프랑스대사와 사랑하는 독특한 소재였다.
“처음 리진의 이야기를 읽고 들었을 때, 왠지 작가로서 그녀를 쓰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치밀었어요. 조선시대, 개화기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고, 춤추는 여인의 매혹적인 모습이 너울거리면서 눈앞에 어른거렸죠. 그 시대에 살았던 한 여성을 황홀하게 복원하고 싶었어요.”
황홀하게 복원하고 싶다. 리진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미 그녀는 신경숙의 마음속에 살기 시작했다. 각종 자료를 찾고 콜랭이 살았던 프랑스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현지취재를 했다. 그러는 동안 이 여인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러나 기록이 너무 빈약했다. 달랑 단행본 한 쪽 정도의 기록이 다였다. 그것도 연인이던 콜랭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리진의 이야기는 콜랭의 후임자인 2대 프랑스대사 프랑랭의 기록밖에는 없다.
사진 빼낸 흔적
콜랭은 그녀에 대해 한 줄의 글도,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콜랭의 고향인 투앗에 자신의 유품을 기증한 박물관에서도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자료를 찾으려고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는 실망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콜랭은 많은 것을 남긴 사람이다. 사진에 취미가 있어 사진자료도 많았다. 그러나 그 사진첩에 사랑했다는 여인 리진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런데 간간이 사진을 빼낸 빈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 빈 자리를 응시했다. 빈 자리에 있던 것은 누구의 사진이었을까.
“그 빈 자리를 보면서 누군가 빼내었을 사진의 주인공을 혼자 생각했어요. 어쨌든 콜랭은 대단한 수집가였어요. 중국, 일본, 한국, 그가 머무는 곳마다 그 나라의 문화유산을 컬렉션했죠. 많은 물품을 모았는데, 어쩌면 그는 리진을 조선에서 ‘수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컬렉터로서 콜랭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선의 궁중에 있는 아름다운 한 여인, 서양인의 눈으로 보기에 도자기와 같은 작품처럼 느낀 것일까. 콜랭은 리진과 헤어진 후 프랑스 여인과 결혼한다.
그는 현실적인 정치인이었다. 격동하는 근대기의 조선에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관으로,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그의 행보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여인보다는 한 나라의 외교관으로서의 삶에 더 충실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조선에 머문 기간은 1896년부터 10년간이다.
기록이 없다는 것은, 소설가로서는 어쩌면 상상력의 공간을 더 확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리고 소설을 써내려가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야 만다.
‘리진, 이 여자가 정말로 존재했던 여자일까?’
명성황후도 리진과 같이 살아나고 있었다. 연재를 하던 지난해에는 명성황후에 대한 뉴스가 유독 많았다. 황후에 대한 생각도 많아지고, 그녀가 작가의 마음에 점점 더 살아났다. 리진이 명성황후의 딸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황후를 생각하면 ‘비감’ ‘슬픔’ 이런 감정들이 스며든다고 한다.
“사람 죽이기 싫어요”
이 소설은 역사소설인가.
“글쎄요. 이전에 제가 쓴 소설과는 좀 다르죠. 내 식으로 쓰면서도 나같이 안 쓰려고 한 작품이었다고나 할까. 역사소설은 아니에요. 단지 그 시대를 살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우리 근대 역사의 배경에 등을 기대고 있을 뿐이죠.”
그래서 결말도 사료(史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기록에 따르면 리진은 콜랭과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버림받고 조선에 돌아와 결국 자결한다. 표정이 잠시 어두워지면서, 신경숙은 “소설에서 사람 죽이기 싫다”고 했다. 소설이 사실과 같아야 할 필요가 있나? 그 고민의 근본에는 사람에 대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그의 결 고운 마음이 있다.
“아직도 ‘깊은 슬픔’에서 은서의 죽음이 마음에 걸려요. 그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그녀가 생각나서…. 그래서 리진이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가. 그는 은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잠시 은서가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지내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이 아닌가. 그녀가 안 죽었으면 좋겠다니,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아니란 말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카페 실외 테라스의 탁자와 의자에는 눈이 앉아 있었다. 세상에 빈 곳은 없는 것이다.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돌덩이에도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하물며 한 인간의 영혼이 녹아 있는 소설, 신경숙에게는 그것이 바로 삶이면서 사람이다. 생명이다. 그는 자신의 원고지 위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어머니의 손바닥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지금은 어떻게들 지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마치 그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죠. 상상이 아니라, 진짜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있어요. 오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눈이 많이 와서인지. 지금 그 ‘사람’들 잘 지내고 있을까요? 어디서 미끄러지지는 않았을까? 춥게 지내지는 않을까? 밥은 먹었을까?”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닥터 지바고’를 읽는 동안에는 방문을 열면, 눈 오는 밤에 그가 어딘가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장길산’을 읽으면서도 그러했다. 완구점 앞을 지나갈 때는 쇼윈도 안에 오정희 선생의 소설 속에 나오는 ‘완구점 여인’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거리에는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주인공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의 한 만화 주인공이 작품 속에서 죽자 독자들이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줬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사랑한다면 죽지 않는다. 잊히는 것이 죽는 것이다.
신경숙의 눈빛 속에는 고향이 들어 있다. 나만 그럴까? 그와 한참 이야기를 하다 그의 눈을 보면 거기에는 오두막과 같은 집 몇 채와, 그 집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강아지가 마당에서 뒹구는 그런 마을이 숨어 있다.
마침 창으로 폭설이 내려 평창동의 산동네 집들은 감출 게 많은 사람들처럼 숨어 있다. 문득 그의 산문집 생각이 났다. 신경숙의 사적인 기록이 풍부한 그 책에 수록된 글 중에 어머니가 육남매를 목욕시킬 때 볼기짝을 철썩 때리면서 한 놈 한 놈 씻어내는 장면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그가 환하게 웃는다.
“정말, 그래요. 가끔씩 어머니가 손바닥으로 철썩 때려줬으면 할 때가 있어요. 얼마나 아픈지 수도승들의 수마(睡魔)를 쫓아내는 큰스님의 죽비 같아요. 그래도 그 두툼한 손바닥이 그리운 건 뭔지. 등짝이라도 한번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아요.”
어머니의 손바닥으로 등짝을 맞듯이 그는 등단했다. 1985년 중편 ‘겨울우화’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등단한 지 5년 만에 그녀는 첫 소설집 ‘겨울우화’를 냈다. 이 책은 내게도 추억이다. 광화문의 한 찻집에서 책의 맨 위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서명한 그의 책을 받았다. 그의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참으로 조용하고 단아한 사람이었다. 그게 17년 전이다.
아버지의 회갑 선물
열여섯 살 이후로 그는 한 번도 돈을 벌지 않은 적이 없다. 일하고 글 쓰고 하는 나날들. 출판사,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 여동생에게 용돈도 줬다. 그렇게 서른 살이 되었다. ‘겨울우화’는 그가 20대에 일하면서 쓴 소설이다. 고려원 소설 시리즈의 한 권으로, 이미 이 책으로 그는 소설가로서의 가능성을 독자에게 보여줬다. 이 책은 잠시 절판됐다가 ‘강물이 될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복간됐다. ‘신경숙이라는 작가가 소설미학의 정도를 찾아가는 예술가의 정열이 뜨겁게 지나가는 책’이라는 문학동네의 설명글이 적절했다.
신경숙은 약사인 여동생의 도움으로 서른 살이 되던 해의 1년을 오로지 소설만을 쓰고 살 수 있었다. 그 1년간 쓴 것이 바로 오늘날의 그가 있게 한 ‘풍금이 있던 자리’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서른 살은 그에게 무엇이었나?
“여자 나이 서른이 된다는 건, 뭐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나이예요. 거울을 보면 늙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러다가는 분열증이라도 걸릴 것 같아서.”
동생에게 1년 동안 글만 쓸 테니 용돈을 달라고 했고, 동생은 한술 더 떠서 유학을 가면 어떻겠냐며 힘을 실어주었다. 29세 겨울, 방송국 클래식 프로그램의 원고를 쓰다가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땐 정말 행복한 나날들이었어요. 동생이 출근하면, 행촌동 독신자 아파트에서 소설을 썼어요.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책상에서 쓰고 싶은 대로 썼지요. 내 맘대로 쓰자. 첫 작품집은 아무래도 소설기법에 충실하게 마련이니까 말이죠. 쓰고 나서 이게 소설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래서 어떤 날 밤에는 그날 쓴 것을 허수경 시인에게 전화를 해서 읽어주기도 했지요.”
그리고 허 시인에게 물었다.
“이거 소설 맞아?”
“아주 좋은 소설이다. 경숙아.”
첫 창작집인 ‘겨울우화’는 소설 작법에 충실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답답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보면 그 소설이 예쁘고 예쁘다. 착한 학생같이.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눈치보지 않고 신경숙의 소설을 쓴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을 뜯어내고 벗어나고 싶은 충동은 원고지 위에서 소설로 태어났다. 말 그대로 온종일 소설만을 쓰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책의 소설들은 거의 외울 정도로 퇴고를 거듭한 것들이죠.”
마침내 1년이 지났다. 그간 쓴 소설을 묶어, 문학과지성사 편집장이던 임우기(현 솔 출판사 대표)에게 원고를 넘기고, 아버지 회갑연에 맞추어 책을 내줄 것을 부탁했다. 다른 형제들은 가족을 이루어 회갑에 참가했지만, 독신이던 그가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은 분신과도 같은 그 책 ‘풍금이 있던 자리’였다. 뜻대로 책을 아버지의 생일상에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행복한 1년이 지났으니 이제 다시 돈벌이 전선에 복귀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단편집의 판매부수는 한정적이다. 문학 독자의 손에서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깨졌다. 직장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출판사에서 2000부를 더 찍는다고 했다. 1주일 만에 또 2000부를 더 찍는다고 하다가 금세 1만부를 더 찍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소설만 쓰면서 지금까지 온 거죠.”
수업시간에 소설 베껴쓰기
전업 작가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산 것은 책상이었다. 책상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 좋은 책상을 꼭 갖고 싶었다고 한다. 오빠들에게 치여서 책상에서 책을 보다 오빠가 비키라면 비켜야 하는 동생의 처지. 그는 늘 밥상에서 책을 보고 그림 그리고 글을 썼다.
전업으로 소설만을 쓰면서 그는 그동안 ‘외딴방’ ‘깊은 슬픔’ 등의 장편을 비롯해 많은 작품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상문학상(2001년)을 비롯한 문학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 사랑으로 작가의 길을 걸어가니 신경숙의 독자 사랑 역시 각별하다.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스타라고 뻐길 만도 한데 전연 그런 기미가 없다. 인터뷰 도중에도 한 독자가 다가와 사인과 사진 찍기를 청하자 수줍게 응했다. 잠시 비켜나 앉아 독자와 작가, 아름다운 두 여인의 환한 웃음을 보았다.
그는 습작시절에 필사를 많이 했다는 소문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죄와 벌’을 다 필사했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중에 물어봐야지 했는데, 지금에서야 물어보았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아니고, 한국 소설을 필사했어요. 그것도 좀 사연이 있어요.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는 그냥 그것밖에 할 일이 없어서 말이지요.”
무슨 말인가?
“저의 고교시절이 평범하진 않았잖아요. 낮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상업고등학교였지요. 그런데 전공 과목인 부기나 주산 같은 것이 싫었어요. 그래서 학교에 가기 싫었고. 어느 날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어요. 혼자 있는 나를 보고,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고 해서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더니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제적이 된다면서 학교에서 뭘 해도 좋으니 나오기만 하라고 하셨어요. 학교에 나갔더니 정말 뭘 해도 아무 말 않는 거예요. 아마 선생님이 다른 과목 선생님들에게 뭔가 언질을 주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정말 교실에서 소설을 베껴썼어요. 그때 필사한 건 조세희 선생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어요. 처음엔 잘 이해되지 않아 한 줄 한 줄 적다가 결국 한 권을 다 쓴 거죠.”
그리고 시골집에 가서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노트에 소설을 옮겨 적었다. 그 노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한 작가의 가장 예민한 시절 필적이 담겨 있는 그 노트에는 분명 소녀 신경숙의 영혼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 노트들은 전부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꼭 소설을 쓰기 위한 습작이라기보다는 그냥 지루하고, 춥고, 덥던 시절을 견디기 위한 행위였다고 하는 게 옳아요. 그래요, 그게 맞을 거예요.”
‘생명의 체온’ 같은 소설
신경숙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미 자신이 사랑하는 시인들의 시를 엮어 단상을 적은 책도 한 권 출판했다. 글이 잘 안 풀릴 때 시집을 찾아 읽기 좋아한다.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시가 좋아요. 성장기에는 셋째오빠가 시를 좋아했어요. 황동규 시인의 ‘삼남에 내리는 눈’,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축제’ 같은 시집들은 오빠를 통해서 알게 되었죠. 그래서 큰시인들을 어린 나이에 접할 수 있었어요. 오빠는 시집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시집에 자신만의 느낌을 깨알같이 적어놓는 버릇이 있었어요. 아마도 그 시에 대한 단상들이겠죠. 그때부터 시를 읽었고, 지금도 즐겨 읽어요….
아마, 시가, 시심(詩心)이 문학의 정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김훈 선생도 좋은 시를 보면 어떻게 그렇게 좋은 걸 썼을까, 당신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죠. 공감해요. 간혹 문학 지망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이 좋아하는 시 50편 정도는 가지고 있어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걸 외우고 있으면, 대화할 때 좋다. 말이 막힌다거나 적절한 순간에 시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용을 하면 품위와 교양이 있어 보이니 얼마나 좋니?’ 이번 연재소설이 끝나면 시를 더 정성껏 읽고 싶네요. 사실 지난 1, 2년 시 읽기에 게을렀어요.”
우리가 음악이나 미술,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영혼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이나 공기 그리고 밥처럼 우리의 곁에 존재한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한 게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처럼. 어떤 시대에는 밥이 우세하고 예술이 열등하다. 어느 시절에는 예술이 우세하고 밥이 열등하다. 그러나 이 둘은 항상 같이 간다. 그림자와 몸통처럼, 태양과 달처럼.
시뿐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과의 교감도 그에게는 큰 세상이다. 단편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쓸 때에는 같은 제목의 고흐 그림을 옆에 끼고 살았다.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예술은 서로 교감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그것을 보고 느끼는 순간에 자기 정서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 마치 천국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신경숙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소설은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오히려 더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가”라고 했다. 음악을 듣는 것, 그림을 보는 것보다 소설은 더 큰 참여를 원한다. 책 속으로 몰입하기까지, 몰입하고 나서 자신이 직접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꼼꼼한 독서는 일종의 예술행위이기도 하다. 긴 소설을 한 편 읽는 데는 그만큼의 정성과 시간과 열정이 필요하다. 어쩌면 보수적인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신경숙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한국 문학의 위기
“저의 소설이 생명의 체온이었으면 좋겠어요. 그저 따뜻한 손난로 같은 것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체온 말이죠. 체취 같은 것.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알게 되는 그 사람만의 체취와 체온이 묻어 있는 그런 소설이었으면 합니다. 그래요. 제 소설을 읽을 때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강아지를 좋아한다면 강아지를 품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소설은 생명의 손을 잡는 것이다. 손에 대한 그의 생각은 각별하다. 필기구들의 디자인은 손의 형태를 닮았다. 손이 쓴다. 마음으로 쓴다거나 머리로 쓴다는 건 관념이다. 작가는 손으로 쓴다(미술평론가 손철주는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잘 쓸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글 쓰는 사람들은 글을 무엇으로 쓰느냐는 농담을 진지하게 한다).
손의 연장선인 글 쓰는 도구는 붓에서부터 연필, 만년필, 타자기, 전동타자기, 컴퓨터로 진화했다. 그것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까. 혹자는 작가들이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부터 글의 질이 떨어졌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신경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만지면서 이야기했다.
“손은 적응력이 대단해요. 도구에 금세 익숙해지면서 적응하지요. 컴퓨터 글쓰기가 정말 문제인가 싶어요. 그래서 제 작품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어요. ‘바이올렛’을 쓸 때 처음에 모니터에 쓴 것을, 손으로 옮겨 쓴 적이 있어요. 그렇게 탈고를 했는데 큰 차이를 못 느꼈어요. 컴퓨터 때문에 글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손으로 옮겨 적을 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요. 일종의 쾌감 같은 건데 눈으로 보는 것 하고, 손으로 적어내는 것은 달라요. 그런 적은 있어요.”
외국 소설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높다. 특히 일본 소설이 그렇다. 누구는 우리 문학시장에 ‘일류(日流)’가 침투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글들이 있다. 그는 이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지엽적인 현상이고 문학 작품을 베스트셀러 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폐단이다. 문학의 위기, 죽음 따위의 소리는 안개처럼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우리의 작품은 축적된 것이 많다.
“한국 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죽 따라 읽다보면 굉장한 것을 느낄 거예요.”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필자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문화 사대주의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필리핀이나 베트남, 몽골의 작품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문학에 대한 열기가 가득 차 있는 나라예요. 시집 출판을 비롯해서 문학을 이렇게 사랑하는 나라는 많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좋은 시장에서 좋은 정보를 자꾸 교환하면 판매도 자연히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외국의 작품들과 경쟁할 때는 아무래도 서사가 있는 장편이 유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요.”
첫 작품집을 낸 신인의 경우 다음 작품을 쓸 때, 그 열정을 장편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어떨까, 라고 후배작가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성공한 선배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이야기니 후배들은 새길 만하다.
그가 좋아하는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들었다. 이유가 있었다. 악령은 자신이 괴로울 때, 이 시간이 제발 지나가기를 바라는 그런 시간에 읽는 소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방인’은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를 그런 소설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강렬한 인상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그런 유의 소설, 그는 그 소설의 완벽한 구도에 매력을 느낀다. 아마도 독특한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은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슬픔을 다루는 예술가
독자에게도 여러 번 읽고 싶은 소설을 가지라고 권했다. 5권 정도의 목록이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 목록에 신경숙의 소설 한 권이 들어가기를 원한다. 여러 번 읽으면 그전에 읽어내지 못했던 것들이 드러난다. 태양이 떠오른다고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는 일.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두 번 보고 세 번 보면 책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신경숙은 그러한 경험을 독자와 같이 나누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눈이 녹으면 눈물처럼 흐른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슬픈 적이 많았다. 그 슬픔이 나에게는 거름이 되었다.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독자에게 나는 그가 슬픔을 다루는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밖의 풍경이 어두워지면서 눈이 더 밝게 빛난다. 그 위에는 가로등이 있다. 그녀는 말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슬픔과 친해져야 할 것 같아요. 깊은 슬픔의 강을 지나야 그 물결 위에 기쁨, 행복, 유머 같은 것이 새겨지면서 더 고마운 마음이 들지요. 그래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생에 죽음말고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 싶어요.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데, 슬픔과 괴로움이 친한 동무가 되면 생의 다른 것들과도 친해지고 폭이 넓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걷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다시 걸어가는 그런 것 말이죠.”
신경숙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러나 어쩌면 신경숙은 불행한 사람이다. 환자의 환부를 다루는 의사처럼 그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쓰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그것은 절대 의무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려 어쩌다 시간의 벌판에 서게 되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뒤를 돌아본다. 그때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신경숙의 소설을 비롯해 많은 예술작품은 그러한 빈 들판에서 웃어주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나무이거나, 그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다. 그의 소설 ‘깊은 슬픔’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한다.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아무래도 마무리는 신경숙의 글을 표절해야겠다.
‘나, 신경숙을 만나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으로 이 시절을 견딘다.’
결혼의 행복
인터뷰를 마치고 시인인 그의 남편과 같이 우동을 먹었다. 추운 날씨에 집에서 걸어온 시인의 몸에서 찬 기운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말라고 했고, 소설가는 더 크게 쓰라고 하면서 웃었다. 아내가 “왜 쓰지 말라는 거냐”고 하자 “그래야 당신이 더 돋보이지”라면서 웃는다. 시인이 오기 전에 신경숙에게 물었다. 결혼하니까 뭐가 좋으냐고.
“새벽까지 글을 쓰고 잠자리에 들 때, 결혼 전에는 찬 자리였는데 그이의 체취로 데워진 자리에 눕는다는 것, 그리고 어둠 속에서 진우씨 하고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 잠결에 대답을 해요. 신호가 오는 거죠. 그때 느낌 같은 것, 결혼하고 나서 달라진 것 참 많아요.
아침에 물어보면 남편은 자신이 대답한 것을 몰라요. 그 사람 차갑다고들 하는데 안 그래요. 다정하고,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인지, 내가 글을 쓸 때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 글을 쓴다면 뭐든지 다 오케이. 이젠 적당히 빈틈이 있어 닦달하지 않고 여유로워요. 삶을 수용하는 자세가 좀 넓어진 것 같아.”
중요한 건, 상대에게 왜 그러냐고 다그치지 않는 것, 묻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이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일까.
출처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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