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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Mantra)과 불교수행

slowdream 2007. 11. 5. 00:39
 

진언(Mantra)과 불교수행


정리 : 황순일

(본지 편집위원, 동국대 교수)


인도에서 종교적 생활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진언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인도철학회에서는 이러한 진언이 불교수행에서 가지는 의미와 역할을 주제로 제24회 춘계학술대회를 위덕대학교에서 개최했다. 서울과 수도권에 편중되었던 학회활동의 영역을 지방으로 확산하고 영남권의 불교열기를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서울, 부산 그리고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었던 인도학 불교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진언은 한국불교의 수행체계에서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육자진언으로 유명한 ‘옴마니반메훔’,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천수경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등과 같은 다양한 진언들을 한국불교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다양하게 응용되고 실천되고 있다.


진언을 통해서 주력이 성취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진언수행은 주력신앙으로서 신비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짧고 명료한 구호들이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의지를 다지는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야구경기에서 선수들이 ‘화이팅’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스스로를 게임에 몰입시키고 승리의 의지를 다지듯이, 유명한 테니스 스타 마리아 사라포바가 ‘야’와 같은 큰 기합으로서 자신의 스트로크에 혼을 불어넣고 있듯이, 불교적 수행을 행하는 사람들은 진언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고 불교적 깨달음을 향한 의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학회에서는 김무생, 장익, 허일범, 선상균, 김호성 교수가 발표자로 참여하여 초기 대승불교에서 티베트불교에 이르기까지 진언수행이 갖는 의미와 역할을 살펴보고 바람직한 진언수행의 방향을 제시했다. 여기에서는 이날 발표된 다섯 편의 논문을 요약 소개한다.



1. 진언수행의 의미와 전개 - 김무생(위덕대학교)


진언은 어떻게 정의되고 어떻게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을까? 비록 진언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의 다양한 종교 활동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사용되어 왔다는 점으로부터 개별적인 진언을 사용하는 종교전통마다 각기 다른 나름의 정의가 형성되어 왔다. 진언은 브라만전통에서 ‘성인(?sis)들에 의해서 알려지고 형상화된 내적으로 신성한 힘을 가진 영원한 진리’로, 밀교전통에서 ‘전통에 의하여 인증되는 효력을 가지고 정해진 규칙과 환경에 따라서 사용되는, 일정한 형태를 가진 양식 또는 소리’로 정의된다.


한편, 진언은 인도불교전통에서 ‘소리에 내재하여 있는 신비적 힘으로 그것의 무의미성을 통해 법계의 공성(空性)을 깨닫게 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그리고 티베트 불교전통에서는 ‘특수한 불격이나 기대되는 결과와 관련을 맺고 있는 전통에 의하여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인증되는 신비한 양식으로 명상과 조화를 이루는 염송에 의하여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진언이 ‘특별한 힘을 지닌 소리의 양식’이고 실재와 현상을 이어주는 ‘상징체계’란 점으로부터 진언을 ‘궁극적 실체(법성)에서 현현하여, 성립된 전통내의 독특한 상징체계를 통하여, 때로는 스승과 제자의 전수과정을 거쳐, 적절한 규칙에 따라 수행하면 응분의 효력을 나타내고, 또는 궁극의 경지를 실현하게 하는 성능을 가진, 미묘한 진동을 품고 있는 소리의 양식’으로 발표자는 정의하고 있다.


진언은 소리· 양식· 의미란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염송과 명상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염송의 대상이 진언의 소리라면, 명상의 대상은 진언의 양식과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된다. 양자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으로 진언은 가장 순수한 소리이면서 가장 청정한 상징양식이 된다. 따라서 진언의 소리가 심리적 육체적인 변화를 유도하게 되고 염송의 과정을 통해 수행자는 진언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진언의 상징성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 실체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고 한다.


진언이란 기본적으로 언어이다. 일상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종교적 상징 언어로서 일상적인 경지가 아니라 무한한 신비의 경지에 대한 종교적 체험을 표출하는 하나의 형태이다. 진언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진언은 종교적 수행 도구로서, 때로는 종교적 신행의 대상을 상징하는 양식이 된다. 따라서 진언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추상적인 성격을 가지기도 하고, 구체적인 개별 진언을 지시하기도 한다. 특히 딴뜨라 불교 전통에서는 종교 수행의 총체로서 삼밀수행(三密修行)의 중요 요소로서 자리 잡으면서 진언이 수행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독자적 위치를 정립할 수 있게 된다.



2. 초기 대승경전과 다라니(陀羅尼) - 장익(위덕대학교)


초기 대승불전에서 경전을 기억하고 보존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지닌다는 의미로 사용된 다라니(陀羅尼)란 용어는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불교적 수행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으며 대승보살의 수행덕목이자 중생교화를 위한 방안으로 사용되면서 밀교의 진언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발표자는 《반야경》《화엄경》《법화경》으로 이어지는 대승불교경전에서 다라니라는 용어가 점차적으로 확대 해석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다라니를 불교적 수행의 목표인 삼매 및 깨달음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다라니(陀羅尼, dh?ra??)란 잡다, 유지하다(保持)’는 뜻의 동사어근 dh?에 접미사 -ana가 합성된 것으로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고 유지한다’란 의미의 dh?ra??에서 유래했다. 이 용어는 요가(Yoga) 전통에서 ‘정신을 통일하여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비록 마음을 집중한다는 것으로부터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고 유지한다는 뜻을 유추할 수 있지만, 불교이외의 문헌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상용된 경우를 발전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持)’ ‘집지(執持)’ 혹은 ‘총지(總持)’로 번역되는 한역(漢譯, gzu?s)으로 번역되는 티베트 역은 ‘지니고 유지한다’는 다라니의 근본적인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초기대승의 반야경 중에서도 대품계의 반야경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초기부파불교에서 진실어(saccakiry?)나 파리타(paritta) 또는 명주(明呪, vidya)란 의미로 다라니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다라니를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고 유지한다고 보는 것은 초기대승불교의 독자적인 용어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반야경》에서는 점차적으로 다라니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대승보살사상의 핵심적인 수행문으로 다라니가 정착하게 된다. 이때 다라니는 내용적으로 보았을 때 주술적인 의미보다 경전의 내용과 관련되며 대승의 선구적인 경전인 반야경의 교설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이를 선양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야경의 다라니에서 정법의 수호와 깨달음을 위한 실천 수행이 강조되었다면, 《화엄경》의 다라니에는 중생구제를 위한 신통력의 의미를 추가하여 주문(呪)으로서의 기능이 다라니에 투영됨을 알 수 있다. 《화엄경》의 여러 곳에서 다라니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반야경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문지→수행→삼매→연설→신통력으로의 다라니의 기능이 확대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의 내용에 부합되는 법사호신과 자재 신통력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의미를 지니는 대승보살의 수행으로 다라니가 해석되기 시작했다.


《법화경》에 이르게 되면 다라니가 지니는 문지(聞持)와 억지(憶持)를 통하여 정각을 획득할 수 있는 단순한 기능에 그치지 않고 경전을 지니는 자와 그 법사 등을 옹호하는 주문(呪)의 기능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다라니가 법사를 옹호하는 호신주(護身呪)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고대 인도종교와 초기밀교 경전에 등장하는 현세 이익적이고 주술적인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법화경》에서는 별도의 <다라니품(陀羅尼品)>을 두고, 주오수(呪五首)를 배열하여 다라니에 주문(呪)의 기능을 더하고 있는데,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다라니 자체가 삼매(三昧)를 의미하는 선다라니(旋陀羅尼)나 삼매 이후의 일체음방편(一切法音方便) 다라니(陀羅尼)와 같이 수행목표를 달성한 이후의 중생교화를 위한 다양한 법음(法音)의 선교(善巧)한 방편(方便)을 의미하는 삼매의 결과로서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반야경 이후 《화엄경》과 《법화경》에는 다라니주(陀羅尼呪)로서의 새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 변화는 대승불교가 중생교화를 위한 방안으로 다라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아마도 다라니와 불교의 수행목표인 삼매 또는 정각과의 관련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 마니칸붐에 나타난 닝마파 진언 수행에 관한 고찰 - 허일범(진각대학)


불교의 수행 중에서 진언수행은 진언의 독송을 통한 주력성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주력성취는 신비적인 힘을 획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것은 밀교적 수행방법의 하나로 받아 들여졌다. 어떤 강력한 힘을 획득하거나 수행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수단이 진언수행이며, 주력신앙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밀교에서 진언은 삼밀행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세간과 출세간적인 성취를 이루는 수단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반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언은 명주나 다라니등과 혼용되어 주술적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따라서 주력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진언수행은 밀교적 입장에서 보면 진언이 가지는 역할의 단편적인 면만이 부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밀교경전에서 진언은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먼저 밀교에서 진언은 인· 진언· 관이라고 하는 삼밀행 체계에 의한 수행중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진언은 불의 신밀과 구밀과 의밀을 수행자가 직접 나타낼 때, 수행자의 입으로 독송하는 구밀을 가리킨다.


진언은 불교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주력성취를 위한 독송용 진언뿐만이 아니라 삼밀행이나 종자관법 등으로 활용되었다. 그것은 아시아의 각 지역에 밀교가 전파되면서 활용방법과 목적이 다양화되고, 그에 따른 찬술집도 독자적으로 편찬되기에 이르게 된다. 티베트의 《마니칸붐》, 일본의 《반야심경비건》, 우리나라의 《천수경》《육자대명왕경》등이 그 대표적인 경전들이다. 《마니칸붐》은 티베트 닝마파 전승으로 진언독송의 공덕성취법, 진언종자관법, 진언염송차제 등을 대승과 밀교의 핵심교리를 수용하여 진언행법화 하고 있다.

 

진언수행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진언독송의 공덕성취가 목적일 것이다. 따라서 진언수행에는 파릿타의 호신주적 성격이 있는가 하면 대승불교의 정신집중을 위한 다라니의 억지력, 그리고 밀교의 진언을 통한 구밀의 상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마도 진언수행은 불교경전의 전개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생각된다.


진언은 남방불전의 주장(呪藏)인 파릿타에서 수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건도주(建度呪), 공작주(孔雀呪), 당수주(幢首呪), 아타나티아주 등의 호주(護呪)들이 독송되었다. 이러한 성격을 계승한 대승불교의 다라니가 호주와 더불어 지혜증진을 위한 억지(憶持)의 성격을 띠면서 대승적 차원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한층 분화하여 법(法), 의(義), 주(呪), 득보살인(得菩薩忍)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다라니의 독송을 통해서 기억력을 증진시키고, 이익을 증진시키며, 재난을 없애주고, 지혜를 밝히게 해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어서 대승불교 후기에 이르러 밀교경전이 등장하면서 진언은 실지성취와 세간적 공덕성취를 함께 이룰 수 있는 단계로 까지 전개되었다.


티베트 《사자의 서》가 사자를 위한 교전이라면 《마니칸붐》은 생자를 위한 교전이다. 비록 《마니칸붐》은 《반야심경비건》과 같이 경전전반의 교리를 분석하여 육자진언에 배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지만, 대승과 밀교교리의 핵심적 내용을 육자진언에 배대하여 독송과 염송을 통한 공덕성취와 교리실천, 제불공양, 지혜획득 등의 실지체득을 위한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의 다양한 적용을 통해서 《마니칸붐》에 나타난 닝마파 진언수행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언독송을 통해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 육자진언을 독송하면 “‘옴’에 의해서 天에서 윤회하여 떨어진다는 괴로움을 소멸, ‘마’에 의해서 싸워 다투는 아수라의 괴로움을 소멸, ‘니’에 의해서 사람이 죽음에 떨어진다는 괴로움, ‘파드’에 의해서 무지몽매한 괴로움을 소멸, ‘훔’에 의해서 뜨겁고, 차가운 괴로움을 소멸한다.”라고 설한다. 즉, 윤회를 소멸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 진언독송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진언염송을 통해서 교리를 실천할 수 있다. “옴마니반메훔을 육바라밀에 배당하면 ‘옴’은 보시바라밀다, ‘마’는 지계바라밀다, ‘니’는 인욕바라밀다, ‘파드’는 정진바라밀다, ‘메’는 선정바라밀다, ‘훔’은 지혜바라밀이다” 라고 설한다. 즉, 각각의 종자에 육바라밀을 배당하여 밀교의 종자관법과 실천법을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육바라밀다를 원만구족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하나의 바라밀다를 염송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한다.


셋째, 제불을 공양하고 지혜를 획득할 수 있다. 먼저 육자진언의 종자자를 육신(六身)에 배당하여 하나하나의 종자는 부처(佛)의 체(體)임을 밝히고 있다. 즉 “‘唵’은 법신, ‘마’는 원만보신(圓滿報身), ‘니’는 변화신(變化身), ‘페’는 자성신(自性身), ‘메’는 현전보리신(現前菩提身), ‘훔’은 불변금강신(不變金剛身)”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 육신(六身)을 불격(佛格)에 배당했을 때, “‘옴’은 일체중생을 섭수하는 대자대비존(大慈大悲尊), ‘마’는 비로자나불, ‘니’는 금강살타보살, ‘파드’는 보생불, ‘메’는 무량수불, ‘훔’은 불공성취불”에 해당한다고 본다.


또한 이들을 육지(六智)에 배당하면 “‘옴’은 법계지(法界[體性]智), ‘마’는 대원경지([大]圓鏡智), ‘니’는 평등성지(平等[性]智), ‘파드’는 묘관찰지([妙]觀察智), ‘메’는 성소작지(成所作智), ‘훔’은 구생자연생지(俱生自然生智)”에 해당한다고 본다. 나아가서 이들을 수행자의 “발[보리심]심에 배당하면 ‘옴’에 의해서 원보리심([行]願菩提心)을 일으키고, ‘마’에 의해서 이보리심(入菩提心)을 일으키고, ‘니’에 의해서 불이보리심(不二菩提心)을 일으키고, ‘파드’에 의해서 법성보리심(法性菩提心)을 일으키고, ‘메’에 의해서 지혜보리심(智慧菩提心)을 일으키고, ‘훔’에 의해서 승의보리심(勝義菩提心)을 일으킨다.”고 본다. 여기서는 육자진언과 불신과 불과 지혜와 보리심의 관계를 밝힘으로서 진언수행을 통해서 불에 대한 예경을 표하고, 불과의 상응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마니칸붐》의 교설은 지극히 자의적이며, 티베트적이기 때문에 어떤 규범에 맞추어 진언수행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진언의 독송이나 염송을 통해서 공덕을 성취하고, 교리를 실천하며, 제불에 예경하고, 불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언을 독송하면 육자진언이 지니고 있는 구소의 힘을 성취하고, 자비와 재보를 획득하며,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진언의 염송을 통해서 대승의 육바라밀행을 염하고 항상 스스로 점검하고 실천하며, 육자진언을 염송하면서 각각의 종자에 불과 지혜를 관함으로써 불에게 예경심을 발하고, 각 존의 지혜를 체득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게 된다.


이상으로 보았을 때, 티베트 닝마파는 진언수행을 통해서 대승과 밀교의 교리핵심을 총망라하고, 그것을 독송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문적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불교의 핵심교설과 진언수행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4. 불교수행에서 진언의 역할 - 선상균(위덕대학교)


진언은 수행적 측면에서 상징 언어의 성격을 가진다. 이 때 상징 언어로서의 진언은 상징되는 실체와 상징하는 기호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러한 진언의 상징성에 가장 충실한 수행법이 밀교의 삼밀수행법이다. 삼밀수행은 수행자로 하여금 인계(신밀), 진언(구밀), 관법(의밀)을 매개체로 하여, 수행자의 신체와 언어와 마음을 우주의 근본원리인 법신불의 신체와 언어와 마음과 서로 감응시켜, 법신불의 진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삼밀수행은 진언과 제존(諸尊) 또는 인계(印契) 그리고 삼매야(三昧耶)형의 상징적 표현이 다양한 불교의 관법과 결부되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중기밀교의 대표적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에서는 진언을 중심으로 한 수행의 체계로서의 삼밀수행법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불교수행에서 진언의 역할은 밀교의 삼밀수행을 중심으로 하며, 삼밀수행에서 진언의 역할을 통해서 인도 최후기 불교라고 일컬어지는 밀교의 수행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산스크리트어의 ‘mantra’에 어원을 두고 있는 주문에 대해 불교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술(呪術)로 한역되는 mantra의 사용목적이 붓다 당시의 주술사들에 의해 사명자활(邪命自活) 즉 삿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붓다 또한 주술사용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불교의 수행을 깨달음의 성취라고 본다면, 수행은 깨달음을 위한 마음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그러한 마음을 닦는데 있어서 주문 또는 주술은 방해가 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인식이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주문의 사용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으며, 주문의 올바른 사용이 권장되게 된다. 즉, 주문의 힘을 불교수행의 목표인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으로 한정한다면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일경》과 《금강정경》으로 대표되는 밀교의 경전들은 주문(呪) 즉 mantra를 진언(眞言)의 의미로서 수행체계상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진언을 중심으로 수행의 체계를 세우게 된다. 따라서 짧은 진언 속에 불교수행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진언은 점차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상징하는 상징 언어로서 그 위상이 확립되었다.


진언을 통해 상징되는 실체는 진언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목표가 된다. 따라서 진언을 통해 상징되는 것은 붓다에 의해 깨달은 있는 모든 것의 실제모습(實相)과 붓다의 진실어로서 법계의 모든 성품들을 가리키는 가르침으로서 법신설법이 된다.


진언이 갖는 이와 같은 상징성을 통해서 진언은 밀교의 삼밀수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실체로서의 진언과 상징기호로서의 진언을 밀교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가르침의 근원으로서의 만물의 실상으로, 더불어 법신의 생명성과 그 생명성의 활동인 법신불의 당체설법 나아가 생명적 활동의 구체적인 불보살의 모습과 가르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징기호로서의 진언은 관법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면서, 수행자와 절대법신의 삼밀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유형의 상징문자인 ‘字(種字)’와 상징적인 법구를 이용한 삼매야형과 제존(諸尊)의 모습을 관하는 종삼존관은 특징으로 하는 밀교의 관법에서 진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세간의 문자를 진언으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 삼밀가지를 통해서 수행자는 진언에 함축된 우주의 궁극적 실재로서의 절대법신의 경계 즉 법신의 진실을 체득하고 체현하여 법신의 생명적 활동으로서의 당체설법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지게 된다.



5. 반야심경의 진언에 대한 고찰 - 김호성(동국대학교)


《반야심경》의 주제는 반야바라밀이다.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이 곧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 본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아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다. 이는 반야일 뿐만 아니라, 그에 입각해서 이미 번뇌의 세계를 건너가 버린 상태가 된다. 따라서 일체고액을 건너게 됨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는 능력으로서 반야바라밀 그 자체는 주문과 같은 위신력을 갖게 된다고 《반야심경》은 말하고 있다.


《반야심경》은 앞부분에 이렇게 반야바라밀다를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는 것으로서 대신주· 대명주· 무상주· 무등등주라고 하면서, 끝부분에서는 이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gate gate p?ragate p?rasa?gate bodhi sv?h?, 揭諦 揭諦 般羅揭諦 般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라는 유명한 진언을 반야바라밀다의 주문(呪)로 들고 있다. 불연 이기영 박사는 다분히 현교적인 입장에서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부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 부분은 아마도 후대에 삽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발표자는 티베트 역으로 남아 있는 위말라미뜨라(Vimalamitra), 즈냐나미뜨라(J??namitra), 와즈라빠니(Vajrap??i), 쁘라샤스뜨라세나(Pra??strasena), 까말라실라(Kamala??la), 아띠샤(At??a), 마하자나(Mah?jana), 그리고 스리심하(?r?si?ha)의 여덟 가지 주석서에서 마지막 진언부분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먼저 《반야심경》의 각각의 부분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해석학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즈냐나미뜨라(J??namitra), 쁘라샤스뜨라세나(Pra??strasena), 그리고 아띠샤(At??a)의 주석을 통해서 진언부분의 위상을 살펴보자. 즈냐나미뜨라와 쁘라샤스뜨라세나는 불연 이기영과 같이 이 진언부분을 무용한 것으로 보지는 않지만, 이 부분이 경전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서 경전을 끝내는 정도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반야심경》을 7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즈냐나미뜨라는 이 마지막 부분을 지혜의 다라니(?ik?itavyam boddhisattvena)라 하여, 관자재보살에게 반야바라밀다에서의 행을 물었던 사리자의 물음에 대한 응답을 총괄적으로 맺음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반야심경》을 10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쁘라샤스뜨라세나에 있어서도 이 마지막 부분은 지혜의 다라니(boddhisattvena)로서 경전을 매듭짓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아띠샤는 이 마지막 진언 부분을 경전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욱 높은 경지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띠샤는 《반야심경》을 이 마지막 진언 부분을 기준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경전 부분은 하근기의 중생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마지막 진언 부분을 상근기의 중생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설명하고 있다.


즈냐나미뜨라나 쁘라샤스뜨라세나에 비해 아띠샤의 해석은 강력한 밀교적 성향을 띄면서 세세한 부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아띠샤는 청법의 대중을 하근기와 상근기로 나누어 놓고서 《반야심경》의 앞 경전부분을 전자를 위한 것으로 《반야심경》의 뒤 진언부분을 후자를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무게의 중심이 진언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반야심경》의 각각의 용어들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이 진언부분의 위상을 살펴보자. 마지막 진언 부분에 대한 해석이 빠져 있는 까말라실라(Kamala??la)와 아띠샤(At??a)의 주석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가지 주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즈냐나미뜨라(J??namitra)는 이 마지막 진언 부분을 지혜의 다라니로서 언급하고 있지만, 다라니 자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것이 신비적 또는 밀교적 차원인지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으며 어원적 해석 역시 시도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 마지막 진언부분을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째, 마하자나(Mah?jana)는 마지막 진언 부분을 별개로 구분하지 않지만, 다라니 자체를 수행의 과정이란 측면에서 견도 수도 무학도 과보 그리고 축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gate gate p?ragate’는 견도의 단계이고, ‘p?rasa?’은 수도의 단계이며, ‘gate’는 무학도(無學道)의 단계이고 ‘bodhi’는 그 결과이며, ‘o?’과 ‘sv?h?’는 반복의 효과를 얻기 위한 축복의 술어로 주석하고 있다.


셋째, 스리심하(?r?si?ha)의 아주 짧은 주석서에서 다라니는 대승불교의 보살행과 관련하여 설명되고 있다. 즉, ‘gate’는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 ‘gate’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해서, ‘p?ragate’는 자기 자신의 복지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더 이상 다른 곳에 대한 열망이 없음을, ‘p?rasa?gate’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서 다른 사람의 복지를 완성시킴을, ‘bodhi’는 제자들에게 반야바라밀의 의미로써 일어나는 무연자비를 그리고 ‘sv?h?’는 제자들의 마음의 자기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석하고 있다.


넷째, 위말라미뜨라(Vimalamitra)는 《반야심경》에 대한 방대한 주석을 남겼는데, 그는 ‘반야바라밀 자체가 만트라이다’라고 말하면서 다라니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다라니가 상근기의 중생들을 위한 것임으로 하근기의 중생들에게는 이 주문 자체의 심오한 의미가 비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섯째, 와즈라빠니(Vajrap??i)는 이 다라니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tadyath? o?’은 행위의 일어남을, ‘gate gate’는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이고, ‘p?ragate’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p?rasa?gate’는 공삼매(空三昧)를, ‘bodhi’는 무상삼매(無相三昧)를, 그리고 ‘sv?h?’는 무원삼매(無願三昧)를 가르키는 것으로 주석하고 있다. 와즈라빠니의 이러한 해석은 다라니를 삼매와 결합하여 해석한다는 점에서 선적이고 명상적이며 밀교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섯째, 쁘라샤스뜨라세나(Pra??strasena) 이 다라니의 공능으로서 초세속적 지혜와 지식의 획득을 얻을 수 있는 이외에 세속적인 어떤 공덕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 반야바라밀의 만트라는 세속적 공덕과 초세속적 공덕을 얻는 원인으로 기능한다. 세속적 공덕은 번뇌, 악마들, 그리고 장해 등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독송자를 매우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게 한다. 초세속적 공덕에 대해서는 이 다라니에 의지함으로써 지혜와 지식의 원인으로서 기능한다’고 하여 공덕의 획득이라고 하는 다분히 밀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발표자는 즈냐나미뜨라와 마하자나의 해석을 현교적인 것으로 스리심하, 위말라미뜨라, 와즈라빠니, 그리고 쁘라샤스뜨라세나의 해석을 밀교적인 것으로 보면서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 부분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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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회 학술대회에서는 이상의 발표논문들에 대해서 문을식, 최종남, 변순미, 곽만연 교수가 논평자로 나서서 진언과 불교수행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필자는 불교에서 진언 또는 다라니가 초기대승경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초기대승경전이 성립된 시기는 불교의 경전들이 본격적으로 문자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즉 초기부파불교에서와 같이 경전을 외워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경전을 필사하는 공덕이 경전을 외우는 공덕만큼이나 중요하게 이야기되기 시작하였고, 많은 종류의 대승경전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비록 이렇게 경전들을 외워서 보존해야할 필요성은 점차적으로 감소되었지만, 경전을 합송하는 전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자화와 함께 대승경전들의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개별적인 경전의 요지를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몇몇 문구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들이 다라니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대승경전에서 다라니는 경전을 기억하고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대승불교가 발전해 나가면서 이러한 다라니에 깨달음으로 가는 보조적 수단이란 의미가 첨가되고 대승불교의 수행관과 결합되면서 점차적으로 다라니는 주문(呪) 또는 진언으로서 어떤 힘을 지닌 것으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도불교가 급격하게 밀교화되어 가면서 진언은 어떤 신비적인 힘을 넘어서 부처님이 깨달으신 가르침의 근원으로서의 만물의 실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진언을 통해서 불교의 핵심교리를 설명하는 문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티베트의 마니칸붐, 일본의 반야심경비건, 우리나라의 천수경, 육자대명왕경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헌들을 통해서 진언은 불교수행의 핵심적 교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들의 종교생활 전반에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