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박에 깨달아 부처가 된다?… 그건 착각!”
“세간에 간혹 ‘단박에 깨닫고 나니(돈오·頓悟) 더 닦을 것이 없더라(돈수·頓修)’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부처님처럼 전지·전능한가?’ ‘내가 부처님처럼 위대한 지혜와 한량없는 자비심을 갖추었는가?’ 더도 말고 이것만 물어보세요. 조금이라도 미비점이 있으면 아무 소리 말고 자신의 현재 수준을 정확히 측정한 후 점진적으로 닦아 가시기를 바랍니다.”<‘윤홍식의 수심결강의’(봉황동래)에서>
해방 후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頓悟頓修·홀연히 깨치면 미혹과 망념에서 벗어나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를 주창한 이래 돈오돈수론이 한국 불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젊은 학자와 수행자 사이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한번 깨친 뒤에도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를 주장하는 이들이 잇따르고 있다.
동양철학자이자 명상가인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는 최근 내놓은 ‘윤홍식의 수심결강의’를 통해 돈점(頓漸) 논쟁에서 돈오돈수 주장이 득세하면서 고려시대 지눌스님 이후 1000년의 한국불교 법통을 뒤흔들어 버렸다”며 “돈오점수가 부정된다면, 지눌을 비롯, 서산, 경허, 혜월, 용성, 한암, 효봉 큰스님으로 이어지는 고승들이 깨달음의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한 것이 돼 버린다”고 말했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한국 불교계에서 구경각(究竟覺·완전한 깨달음을 얻음)의 증거로 주장하는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정신이 한결같음), 몽중일여(夢中一如·꿈속에서도 정신이 한결같음), 숙면일여(熟眠一如· 깊은 잠 속에서도 정신이 한결같음)는 12단계로 구성된 불교의 수행 경지 중 초보적인 1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윤 대표는 자신의 수행과 깨달음 체험을 근거로 유·불·선의 고전을 두루 섭렵, ‘대학, 인간의 길을 열다’, ‘조선선비에게 배우는 마음챙김의 지혜’, ‘한국큰스님에게 배우는 마음챙김의 지혜’ 등의 저작을 낸 바 있다.
윤 대표에 따르면 불교의 수행단계는 화엄경,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에 적시돼 있듯이 1∼12지(地)까지 승급, 승단체계가 엄밀하다. 돈오(견성, ‘참나’가 확연히 드러남) 이전의 단계를 승급단계라고 한다면, 참선 끝에 화두를 타파해서 얻는 돈오는 초단으로 승단을 한 것과 같은 경지로, 1지를 얻는 것에 불과하다.
윤 대표는 “동정일여 등의 경지로, 어디서나 ‘참나’를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힌두교에서는 동정일여나 숙면일여 등의 기준으로 깨달음을 검증했으나 부처는 이를 부인했으며, 이 정도 하면 나도 부처려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는 것이다.
윤 대표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삶은 끝없는 윤회의 한가운데 있으며, 과거생은 현재생의 원인이고 미래생은 현재생의 결과”라며 “현상계의 몸을 받은 인간이 무수한 생을 통해 점수의 과정을 겪지 않고 궁극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최근 ‘붓다의 호흡법, 아나빠나삿띠’를 번역한 위파사나 수행가 김열권 법사도 “간화선 수행으로 화두를 타파한 뒤에도 완벽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점수의 과정이 필요하다”며 돈오점수를 편들었다. 1979년부터 10여년간 간화선을 수행, 숙면일여의 경지까지 갔던 것으로 알려진 김 법사는 숙면일여가 구경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미얀마와 태국, 인도 등지를 돌며 위파사나를 수행하고 이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바 있다.
한편 서울대 수학과를 나온 뒤 수학과 신학을 접목한 수리신학으로 미국에서 반향을 일으킨 윤직홍(미국 종교아카데미(AAR)정회원·서강대 신학대학원 박사과정)씨도 최근 펴낸 저서 ‘바오로의 회심은 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예지)에서 수학적 논증으로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이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 주목을 받았다. 윤씨는 책에서 “바울의 ‘수행→깨달음→수행→깨달음→영생’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점수→돈오→점수→돈오→구경각(또는 해탈)’에 이르는 지눌의 돈오점수와 다르지 않다”며 “결국 기독교의 영생이나 불교의 해탈은 그 목적이 같으며, 따라서 소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문화일보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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