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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slowdream 2007. 11. 13. 02:00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ㆍ본지 주간)



인도 불교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했는가, 아니면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는가?


이 질문은 시카고 대학의 불교학 교수인 스티브 콜린스(Steven Collins)가 옥스퍼드 대학 박사학위 심사과정에서 외부 심사자였던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현 프린스턴 대학 사회학 교수)로부터 받은 질문이었다. 질문은 단순하며 답도 자명해 보인다. 만약 이 질문이 대학교 불교학 개론 중간고사나 기말시험 문제로 출제되었다면 답을 못 쓰는 학생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불교적 모범답안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특히 인도불교에서 종교적 목표는 열반이다. 열반은 ‘윤회를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윤회는 ‘반복되는 삶과 죽음’을 의미하므로 인도 불교인들의 목표는 삶과 죽음, 둘 다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불교에서 죽음이란 육신과 의식의 완전한 소멸(身智滅)을 뜻한다. 그러나 윤회를 전제로 할 경우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현생(現生)으로부터의 출구이면서 동시에 내생(來生)으로의 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죽음과 재생(rebirth) 간의 시간적 격차를 인정하지 않는 상좌부 전통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죽음의 문제는 다른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붓다의 전기(傳記)에서만 보더라도 죽음은 붓다 자신의 삶과 그의 가르침에 몇 가지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죽음은 젊은 싯다르타가 집을 떠나게 되는 네 가지 계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한 계기가 된다. 소위 사문유관 중의 하나인 ‘죽음의 목격’이다. 성년이 된 싯다르타가 그 나이가 되도록 ‘죽음’이 뭔지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이 에피소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이 싯다르타가 출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출가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문제이자, 자신이 당면한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존재의 발생과 소멸의 메커니즘을 관찰하는 12연기법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통해서 붓다는 최종적 깨달음을 성취한다. 이 깨달음의 순간 최고층(最古層)에 속하는 팔리 율장의 《마하박가(Mah�vagga)》에서는 붓다가 “나는 불사(不死, amr.ta, deathless)를 얻었다.”라 선언하였다고 전하고, 또 다른 경전에서는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붓다가 스스로 선언한 ‘불사(不死)’의 의미는 다른 종교에서의 ‘영원’의 의미도 아니며, 일반적 의미의 ‘불사(不死, immortality)’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불사’는 지금 성취하였다고 하는 현재완료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차 올 죽음 뒤에 다시 오게 될 또 다른 삶이 없다는 의미에서 미래에 성취될 ‘불사(不死)’이다. ‘불사(不死)’를 성취한 붓다는 45년 뒤 실제로 ‘죽음’을 맞이한다. 불교 경전들에서는 팔십 노구를 이끌고 유행(遊行)하는 붓다의 육체의 고단함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스승의 임박한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 아난에게 인간 생명의 유한함을 담담하게 설하는 붓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붓다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에게 유위법의 무상함과 무상함을 극복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죽음은 보편적 법칙이며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에게 죽음이란 유위법인 육신의 죽음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열반의 지혜는 목숨의 무한한 연장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지혜인 것이다.


《대반열반경》에서는 붓다의 입멸과정을 묘사하면서 정념(正念)과 선정(禪定)을 강조하고 있다. 육신의 소멸과정에서 의식의 ‘깨어 있음(念, sati)’은 열반을 획득한 자의 또 다른 징표가 된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까지 유지되는 ‘깨어 있음’ 그리고 ‘다시 태어남이 없음’ 이 두 가지가 바로 불교적 의미의 죽음에 대한 극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선사들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소위 임종게(臨終偈)이다. 죽음에 임박하여 선사들은 자신의 죽음조차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철은 임종게를 통해 “평생 수많은 남녀의 무리들에게 사기를 쳤으니 그 죄가 수미산에 닿는다”고 했지만 이는 자신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니들 내 말에 속지 말라”라고 경책하던 그 레토릭의 한 연장일 뿐이다.


김영욱 박사는 임종게와 관련하여 “발가벗겨 본분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씌운 포장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의 지적대로 ‘포장’을 드러내면 거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평생의 가르침이 나타난다. 어쩌면 임종게뿐만 아니라 죽음의 현장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 자체가 죽음의 문제에 대한 선(禪)적인 대답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사들은 형식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형식을 중시한다. 고정된 형식 혹은 형식주의를 배척할 뿐이다. 앉아서 죽고, 서서 죽고, 물구나무 서서 죽는 등 마치 세인들을 조롱하는 듯한 다양한 ‘최후의 모습’들, 제자들의 묻는 말에 딴전피우기, 엉뚱한 대답, 역설, 모순 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형식적 장치들이다. 그런 점에서 선사들에게 있어 죽음은 김영욱의 말처럼 “삶이라는 바둑판에 최후의 결정적인 한 수로 착점”하는 것으로 수행과 깨달음의 정점이 된다.


이처럼 열반에 비추어진 삶과 죽음은 동일한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태어나지 않음을 통해 죽음을 극복한다는 초기불교의 열반관이나, 삶의 마지막 순간의 죽음조차도 ‘생사일여’라는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는 장치가 되는 선사들의 깨침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중생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중생에게 삶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며,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압박해오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생사일여’는 저쪽 언덕에서 선언되어진 표어일 뿐이며, 당면한 현실에서 절감되는 어떤 것은 더욱 아니다. 그야말로 언명에 그칠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깨침을 지상과제로 삼아 모든 삶의 지향점을 깨침의 획득에만 두는 수행풍토와 고매한 철학적 담론에 빠져서 희론 아닌 희론을 일삼는 우리 불교 이해의 풍토는 깊이 반성되어야만 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깨침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성도 후 부처님의 삶이 중생을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온전히 두어졌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중생의 눈높이에서 다시 출발하는 불교가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