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어법(oxymoron)과 ‘현자(賢者)의 돌’
‘침묵의 소리’‘달콤한 슬픔’‘색즉시공’…대립으로 빚어낸 역설의 미학
이윤재 번역가, 칼럼니스트 yeeeyooon@hanmail.net
모순어법은 활발한 두뇌활동의 결과물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단어를 결합시켜 우리를 더 높은 진리의 세계로 안내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사용된 모순어법은 사고의 폭도 한없이 넓혀준다. 삶의 부조리를 포착하는 통쾌한 ‘말놀이’를 통해 인생의 묘미를 느껴보자.
우리는 1970~80년대를 ‘암울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유행한 노래가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다. 이들의 미성(美聲)과 화음은 어두운 뉘앙스를 풍기는 시적인 노랫말과 어우러져 전설이 됐다. 한국에서는 침묵이 깊어질수록 그 반동역학이 강해져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며칠 전 TV에서 방영된 콘서트에서 사회자가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학창시절 소풍을 갔는데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한 학생이 나와서 약 30초간 가만히 있었다. 사회자가 ‘왜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고 묻자 그 학생은 ‘The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를 노래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인기상을 받았다.”
다음은 ‘The Sound of Silence’의 노랫말이다.
And in the naked light I saw ten thousand people, maybe more,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People writing songs that voices never share.
And no one dare disturb the sound of silence.
(그 환한 불빛 속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지만 속마음을 말하는 사람들을’,
‘듣는 척하지만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을’,
‘소리 내어 부르지 않는 노랫말 짓는 사람들을’.
아무도 감히 ‘침묵의 소리’를 막지 못하네.)
“Fools” said I, “You do not know silence like a cancer grows.
Hear my words that I might teach you.
Take my arms that I might reach you.”
But my words like silent raindrops fell,
And echoed in the wells of silence.
(나는 “바보들, 침묵이 암(癌)과도 같이 자라고 있음을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군요.
당신들을 깨우치는 내 말을 들으세요.
당신들에게 내미는 내 손을 잡으세요”라고 말했지.
하지만 내 말은 ‘소리 없는 빗방울’처럼 떨어져,
‘침묵의 샘에서 메아리’쳤지.)
‘The Sound of Silence’, 즉 ‘침묵의 소리’라는 제목부터가 모순어법, 즉 옥시모론(oxymoron) 수사법을 사용한다. 노랫말 군데군데에도 옥시모론 기법이 드러난다. 잘 알려진 침묵에 관련된 수사로는 thunderous silence(천둥과 같은 침묵), a silent demonstration(침묵시위), Silence is gold, speech is silver(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 등이 있다.
사이 좋은 이혼?
겉보기에는 논리에 어긋나는 듯한 양면가치(ambivalence)를 모순어법을 동원해 기교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1979년 10월26일 밤 박정희 대통령이 급서한 후 신군부세력은 집권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 혼란을 원했던 측에서 보면 당시의 모습은 clear confusion(깨끗한 혼란)이자, fine mess(멋진 혼란)이었다. 그때의 혼란은 ‘우연을 가장하여 고의적으로(accidentally on purpose)’ 야기된 것이었다.
이미 격언이 된 의미심장한 모순어법도 많다. 영국 시인 테니슨의 His honour rooted in dishonour stood, and faith unfaithful kept him falsely true(그의 ‘영예’는 ‘불명예’에 뿌리박은 채 서 있고, ‘불충한 충성’은 그를 ‘거짓으로 진실’하게 하였소)라는 말이나, 스코틀랜드의 시인 제임스 톰슨의 Loveliness is, when unadorned, adorned the most(아름다움은 ‘장식하지 않을 때’ ‘가장 장식하는 것’이 된다)라는 말, 존 밀턴이 ‘실락원’에 쓴 Out of good still to find means of evil(악의 수단은 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이란 문장은 모순어법의 전형이다.
생활철학의 요소가 깃들인 모순어법도 있다. less is more(덜 받는 것이 득이다), agree to disagree(서로 견해차이를 인정해 다투지 말라), fall back in order to leap the better(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라) 등이다. More haste, less speed(급할수록 천천히)와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Haste makes waste)는 모순어법으로 표현한 경구다.
예전에 없던 상황이 시대가 변하며 생긴 것도 있다. We are living apart together(우리는 별거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에서는 live apart (별거하다)와 live together(함께 살다)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상황은 커플의 애정에 이상이 없다 해도 복잡다단한 요즘 흔히 발견되는 현실이다. friendly divorce(사이 좋은 이혼)라는 것도 시대의 산물이다. home office는 원래 ‘회사의 본사’나 ‘본점’을 의미했으나 오늘날에는 ‘재택근무 사무실’을 말하고, home school은 ‘학교에 보내지 않고 부모가 가르치는 가정 학교’를 말한다.
일상사에서 사용되는 모순어법의 예는 실로 많다. faultily faultless(불완전하지만 결점이 없는), hopeful pessimist(가망성 있는 염세주의자), crowded solitude(군중 속의 고독), cruel kindness(지독한 친절), open secret(공공연한 비밀), current history(당대의 역사), genuine fake(진짜 가짜), laborious idleness(고된 나태), full-time hobby(직업 같은 취미), creative destruction(창조적 파괴), cold hotdog(식어버린 핫도그), roughly account(개략적 정산), accurate estimate(정확한 견적) 등이 그것.
모순어법은 대립적인 사실이나 상반된 생각을 모순되게 표현함으로써 상황의 특이성을 강조, 맛과 멋을 극대화하는 언어표현법이다. 백두산 천지의 장관을 보고 ‘위대한 자연’이 아니라 ‘위대한 절망’이라고 표현한다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창조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을 인간의 왜소함에 견주어 더욱 강조하는 한 차원 높은 수사가 된다.
모순(矛盾)이라는 단어는 창과 방패라는 사물에 근거를 둔 어휘고, 옥시모론은 인간을 모델로 한 어휘다. 영영(英英)사전에서는 oxymoron을 ‘상반된 어휘가, 때로는 강조와 효과를 위하여 함께 사용된 수사법’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oxymoron은 1640년에 처음 영어로 표기됐는데, 고대 그리스어인 oxymoros(oxys와 moros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우둔한 천재, 뉴턴
oxys는 ‘날카로운(sharp)’ 혹은 ‘예리한(keen)’을 의미하고 moros는 ‘어리석은(foolish)’을 의미한다. 따라서 oxymoron은 문자 그대로 sharp fool(똑똑한 바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순어법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적이다.
불세출의 천재 뉴턴이 나이가 들어 어느 날 난로 앞에 앉아 있었는데, 불이 너무 뜨거워 하인을 불러 벌겋게 달구어진 석탄을 꺼내도록 했다. 하인은 “왜 의자를 난로에서 조금만 옮겨 떨어져 앉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또 뉴턴은 크고 작은 두 마리의 고양이를 길렀는데 그놈들이 서재에 들어오려고 소란을 피울 때마다 문을 열어줘야 했다. 그는 성가신 나머지 기발한 방법이랍시고 문짝에다 큰 놈을 위해서 큰 구멍을, 작은 놈을 위해서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다. 작은 놈이 작은 구멍으로만 들어올까? 이럴 경우 ‘우둔한 천재(foolish genius)’라는 모순어법이 적절할 것이다.
미 육군 원수 맥아더가 저세상 사람이 된 지 어언 40년. 그는 지금 이 땅에서 마치 도마에 오른 생선처럼 이리저리 잘리고 있으며, 그의 동상은 부관참시당할 뻔했다.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옥시모론을 적절히 배합해 시(詩)와 진배없는 감동적인 기도문을 썼다.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오 주여, 이러한 아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약할’ 때는 ‘용감하게’ 자신을 지키는,
‘두려움’에는 ‘대담’하게 맞서는,
정직한 ‘패배’에는 ‘당당한’ ‘꿋꿋한’,
‘승리’에는 ‘겸손’하고 ‘온순한’ 자식을 저에게 주옵소서.)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바라옵건대,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이 아니라,
‘고난’과 ‘도전’의 ‘긴장’과 ‘자극’ 속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learn to laugh, yet never forget how to weep;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이러한 아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마음이 ‘깨끗한’, 목표가 ‘드높은’ 아들이,
‘타인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복’할 줄 아는 아들이,
‘웃음’도 알되 ‘울음’도 아는 아들이,
‘미래’로 나아가되 ‘과거’를 잊지 않는 아들이.)
An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그리고 진지하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자신을 얽어매지 않도록,
‘넉넉한 유머감각’이 있는 아들이 되도록 하여주시옵소서.)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아들에게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어,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음을,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여주시옵소서.)
맥아더는 이렇듯 글에 멋을 내는 문필가였을 뿐 아니라, 선글라스를 끼고 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문 모습이 그야말로 포토제닉 했던, 배우 뺨치는 군인이었다. 1980년대 초 맥아더를 다룬 영화 ‘오! 인천’의 주인공 그레고리 펙은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 하루 전에 발표되는 골든 래즈베리상(조롱하기 위해 장난스럽게 만들어진 최악의 영화상)에서 최악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명배우지만 맥아더의 ‘연기’만큼 훌륭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맥아더의 기도문
그런데 맥아더의 인간됨을 깊이 들여다보면 유명한 이 기도문은 곧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와 철저한 분석능력의 소유자였다. 위기에 처해도 대담하고 냉정하며 침착하면서도 자신만만했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심을 유발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자였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나 시저(카이사르의 영어명), 때로는 나폴레옹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오만함과 자존심, 독단과 과시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트루먼은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한다. 맥아더는 일부러 대통령을 영접하러 비행장에 나가지 않았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맥아더는 고졸 농부 출신인 트루먼에게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에어포스 원(미국대통령 전용기)은 비행장 상공을 수차례 선회했다. 트루먼의 자존심과 맥아더의 오만함의 대결이었다.
수사법의 귀재, 셰익스피어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잘못하는 것은 인간의 일,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라는 말을 했다. 이 걸출한 표현은 이제 전통적인 영어 격언이다. 그는 1711년 ‘An Essay on Criticism(비평소론)’에서 다음과 같은 옥시모론 수사법을 거침없이 발휘했다.
All nature is but Art, unknown to thee;
All Chance, Direction which thou canst not see;
All discord, harmony no understood;
All partial evil, universal Good:
And, spite of Pride, in erring Reason’s spite,
One truth is clear, WHATEVER IS, IS RIGHT.
(모든 ‘자연’은 다만 그대가 모르는 ‘예술’일 뿐
모든 ‘우연’은 그대가 알지 못하는 ‘방향’
모든 ‘불화’는 깨닫지 못하는 ‘조화’
부분적인 ‘악’은 편재(遍在)하는 ‘선’
‘거만’과 그릇된 ‘이성’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하나의 진리,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옳은 것’.)
그러나 이보다 약 130년 전,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옥시모론 수사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작품의 창작연도는 1595년경으로, 같은 해 처음 상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와 베니스 중간에 있는 베로나다.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므로 여러 가지 번안이 나왔다. 원작에서는 사건이 9개월 사이에 벌어지지만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단 5일로 단축시켰다. 이 작품에서 캐플릿이 딸 줄리엣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해 듣고 내뱉는 아래의 탄식(4막 5절 86∼90행)은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절묘한 도구로 사용된다.
Our instruments to melancholy bells,
Our wedding cheer to a sad burial feast,
Our solemn hymns to sullen dirges change,
Our bridal flowers serve for a buried corpse,
And all things change them to the contrary.
(‘축하음악’은 ‘슬픈 종소리’로,
‘혼례식 축배’는 ‘슬픈 장례식 음식’으로,
‘장엄한 찬미가’는 ‘음울한 장송곡’으로,
‘혼례식의 꽃’은 매장되는 ‘시체 장식용’으로,
이렇게 사태는 모두 정반대로 바뀌는구나.)
셰익스피어는 모순어법으로 ‘위대한 이야기 예술(great narrative art)’을 창조했다. 그는 1막 1장 175∼181행에서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모순적 세계를 모순어법을 빌려 다양하게 표현한다. 하나의 특정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열거하며 주제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Here’s much to do with hate, but more with love.
Why, then, O brawling love, O loving hate,
O anything of nothing first create,
O heavy lightness, serious vanity,
Misshapen chaos of well-seeming forms,
Feather of lead, bright smoke, cold fire, sick health,
Still-waking sleep, that is not what it is!
(독한 ‘미움’이여, 그보다 더 진한 ‘사랑’이여.
그러면, 오 ‘싸우는 사랑’이여, ‘사랑하는 미움’이여,
오 ‘태초의 무(無)’에서 ‘창조한 유(有)’여,
오 ‘무거운 가벼움’이여, ‘진실한 허영’이여,
‘보기 좋은’ 것 같지만 ‘보기 흉한’ 혼돈이여!
‘납으로 된 나래’, ‘밝은 연기’, ‘차디찬 불’, ‘병든 건강’이여,
늘 ‘눈떠 있는 잠’이여,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
엘리자베스 시대의 관객은 오늘날의 관객보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대사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명이나 무대장치 등 연출의 기술적인 분야가 발달하지 않아 관객은 극작가가 묘사하는 말, 특히 수사적 표현을 듣고서 무대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비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표현은 더 뛰어난 수사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시대의 극을 ‘수사의 극(The Play of Rhetoric)’이라고 부른다.
‘언어의 마술사’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입을 통하여 절묘한 모순어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것은 작품 전체에 놀랄 만한 향기를 불어넣는다. 프랑스의 작가요 사상가인 볼테르는 32세 때인 1726년 영국으로 망명, 3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문학에서도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그를 압도했고, 등장인물의 수사적 표현에서 흘러나오는 활력과 줄거리의 극적인 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랑과 슬픔의 공존
sweet sorrow(달콤한 슬픔)는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구사한 말이다. 그는 작품 전체에서 gall(쓴 것), sorrow(슬픔), bitter(쓰라린), fearful(무서운), division(이별)이라는 어휘를 번갈아 sweet(달콤한)와 결합시켜 사랑의 ambivalence(반대 감정 병존)를 나타낸다.
Love is a smoke made with a fume of sighs;
Being purged, a fire sparkling in lovers’ eyes;
Being vexed, a sea nourished with lovers’ tears.
What is it else? A madness most discreet,
A choking ‘gall’ and a preserving ‘sweet’.
(사랑이란 ‘한숨’으로 된 ‘연기’
개면 연인의 눈 속에서 ‘불꽃’이 번쩍이고;
흐리면 연인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네.
그밖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장 ‘분별’ 있는 ‘광기’이고,
‘숨막히게 하는 쓴 약’이며 ‘생명을 구하는 달콤한 사탕’.)
2막 2장 185∼186행에서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사랑을 맹세한 후 이렇게 작별인사를 한다.
Good night, good night! Parting is such ‘sweet sorrow’
That I shall say good night till it be morrow.
(안녕, 안녕, 헤어진다는 것은 ‘감미로운 슬픔’이니
날이 샐 때까지 줄곧 안녕이라는 말만을 하고 있을 거예요.)
슬픔이면 슬픔이지 왜 sweet sorrow(달콤한 슬픔)라고 했을까. 일단 의문으로 남겨두자. 3막 5장에서 새벽이 다가옴을 알리는 종다리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로미오와 줄리엣의 하룻밤 부부의 행복은 끝나게 된다. 로미오는 떠나야 되고 줄리엣은 종다리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가져다준 슬픔을 한탄하며 다음(3막 5장 29∼30행)과 같이 말한다.
Some say the lark makes ‘sweet division’
This doth not so, for she divideth us.
(종다리 소리를 들으면 ‘달콤한 이별’을 한다는데
저 소리는 달콤하지는 않고, 우리를 떼어만 놓는구나.)
5막 3장에서 가사(假死)상태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진짜 죽어버린 애인의 뒤를 따른다. 5막 3장 161∼166행을 보면 이들이 부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What’s here? A cup, closed in my true love’s hand?
Poison, I see, hath been his timeless end.
O churl, drunk all, and left no friendly drop
To help me after? I will kiss thy lips;
Happily some poison yet doth hang on them,
To make me ‘die’ with a ‘restorative’.
(이게 뭐지? 잔이 로미오님의 손에 꼭 쥐어져 있네?
독약을 마시고 순식간에 죽었나 보다.
이 인색한 사람 좀 봐! 다 마시고 내가 뒤따라가지도 못하게
단 한 방울도 안 남겨 놓았단 말인가? 그럼 당신 입술에 키스하리다
혹시나 독약이 아직도 묻어 있다면,
‘생명의 묘약’처럼 날 ‘천당’으로 보내주겠지.)
왜 ‘달콤한 슬픔’이라고 했는지 그 의문을 풀어보자. 헤어짐(parting)은 슬픔(sorrow)이지만 ‘달콤한(sweet)’이란 말을 붙여 헤어짐을 운치 있게 그려냈다. 생명의 묘약(restorative)으로 죽음(die)을 승화시켜 결국 부활(restoration)이라는 행복의 상태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비극 아닌 비극
이 극은 일종의 해피 엔딩이다. ‘비극 아닌 비극’이다. 작품은 비극이지만 비극의 침울함을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의 인연은 불행하게 끝나지만 그 불행은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승화시킨다. 빛과 생명을 준 사랑은 어둠과 죽음을 초래하나, 이는 오랜 원수지간이던 양가를 화해시키고, 시민들의 싸움을 종식하는 새로운 사회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 극의 주제인 모순적 사랑은 지상의 것이지만 천상의 것이며, 생명이면서도 죽음이다. 이러한 애정관을 플라톤은 ‘사랑의 사다리’라고 칭했다.
sweet sorrow는 오늘날 많이 쓰이는 작별인사(farewell)다.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이렇게 퇴임 연설을 했다.
People ask how I feel about leaving. And the fact is, ‘parting is such sweet sorrow.’ The sweet part is California and the ranch and freedom. The sorrow the goodbyes, of course, and leaving this beautiful place.
(떠나는 기분이 어떠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떠나는 기분은 시원섭섭합니다.’ 좋은 것은 내 고향 캘리포니아로 가서 목장과 자유를 얻는 것이고, 슬픈 것은 작별하고 이 좋은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감산(甘酸·달고 신맛), 쓰고도 단맛, 괴로움과 즐거움, 씁쓸하면서 달콤함, 희비가 엇갈림, 시원섭섭함’을 영어에서 the sweet and the sour, the sweet and the bitter, pleasures and pains, joys and sorrows 등으로 표현한다. 아예 bitter와 sweet가 합쳐져서 bittersweet란 단어가 사전에 등재돼 있다. 다음은 팝계의 흑진주로 불리는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I’ll Always Love You’라는 노래로, 영화 ‘보디가드’의 삽입곡이다.
Bittersweet Memories
That is all I’m taking with me.
So goodbye. Please don’t cry.
We both know I’m not
what you need.
And I will always love you.
I will always love you.
(아쉽지만 아름다운 기억들
나는 그 기억들만을 가지고 떠나오.
잘 있어요. 그리고 제발 울지 말아오.
우린 둘 다 알잖아요, 제가 당신께 짐만 될 뿐이라는 것을.
영원히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사랑하겠어요.
영원히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사랑하겠어요.)
미들급 권투선수 같은 근육질 체형의 폴 뉴먼이 주연한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영화는 원제목이 ‘Somebody Up There Likes Me’다. 직역하면 ‘하늘에 계신 분도 날 좋아하나봐’다. 이 말은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한다. 챔피언이 된 주인공을 축하하는 오픈카 퍼레이드에서 그는 높이 솟은 빌딩을 쳐다보며 옆자리에 앉은 부인에게 “Somebody up there likes me”라고 말한다. ‘종이를 뿌려주는 저 빌딩 위의 사람들도 날 좋아하는군’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랜 가시밭길의 고통을 견뎌내며 이룬 값진 승리를 우린 곧잘 ‘상처뿐인 영광’이라 표현하고, 또 단어를 뒤바꿔 ‘영광의 상처’라는 표현도 곧잘 써왔다. 여하튼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상처뿐인 영광’은 우리나라에서 대단한 유행어가 됐다. 역시 옥시모론을 동원한 멋진 제목이다.
호탕한 성격과 육중한 체구의 소유자로 유명한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길버트 K. 체스터턴은 ‘거인(The Giant)’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It is remarkable that in so many great wars it has been the defeated who have won. The people who were left worst at the end of the war were generally the people who were left best at the end of the whole business.
(그렇게도 많은 대 전쟁에서 ‘승리자’가 ‘패배자’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전쟁의 종국에서 ‘최악의 상태로 남은 사람들’은 결국 모두 결산하고 나면 ‘최선의 상태로 남은 사람들’이었다.)
불경과 성경의 모순어법
예를 들자면 프랑스혁명은 패배로 끝났다. 혁명의 주동자들은 최후의 싸움에서 패했다. 그러나 혁명은 첫 목표를 달성했다. 혁명은 깊은 간극을 만들었다. 세계는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들을 단지 딛고 걸어가는 바닥으로만 여길 수가 없었다.
‘반야심경’에 나타난 공(空) 사상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빼어난 모순어법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불(不)’이라는 부정의 단어를 통해 부정의 논리를 펴고 있으며, 이어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즉(卽)’이라는 긍정의 단어를 통해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다. 결국 비슷한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시간적 관점에서 무상(無常)을 설명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간적 관점에서 무아(無我)를 설명한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란, 지금은 육진(六塵· 인간의 본성을 흐리게 하는 여섯 가지 욕정)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因)과 연(緣)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공이 아니므로, 부득이하게 부정의 논리로써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강한 긍정의 논리를 편다.
육진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곧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色)을 마주한 이(是) 정신은 공(空)이다’는 말이 ‘색즉시공’이며, 반대로 ‘공(空)을 마주한 이(是) 정신은 색(色)이다’는 말이 ‘공즉시색’이다. 색즉시공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空)이다’, 즉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공즉시색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현상에 불과하지만 그 현상의 하나하나가 그대로 이 세상의 실체다’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타난 모순어법도 다양하다. having nothing, having it all(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living on handouts, yet enriching many(동냥으로 살지만 많은 이를 부유케 하는), terrifically alive, though rumored to be dead(죽었다는 소문에도 끈질기게 살아 있는), ignored by the world, but recognized by God(세상에 무시당하나 하나님께 인정받는), immersed in tears, yet always filled with deep joy(슬픔에 잠겨 있으나 항상 깊은 기쁨으로 가득 찬) 등이 있다.
모순어법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부조리하지만, 깊은 차원에서는 심오한 진실을 담은 표현법이다. To lead the people, walk behind them(남을 이끌고자 한다면 그들의 뒤에서 걸어보라)는 동양에서 나온 말이요, Do 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남을 대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이다.
충무공의 명문구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으려고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임전훈(臨戰訓)은 반동역학으로 작용하여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나 그의 이름은 불멸(不滅)했다.
33세에 생을 마감한 예수처럼, 45구경 권총에 피격당한 김구 선생처럼 ‘죽어서 태어난(born dead)’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퇴임 후에는 ‘living dead(숨죽이며 사는)’ 사람도 있다. ‘born dead’나 ‘living dead’는 모순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표현들이다. 이러한 어구들은 세상이 다양하게 발달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삶이란 다분히 모순적인 여정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정반합’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말 중에 It is an ill wind that blows nobody (any) good(아무리 거센 바람이라 할지라도 득 보는 사람이 있다)이란 속담이 있다. 태풍이 엄청난 해를 입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늘 해로운 것만은 아니란 뜻이다.
태풍으로 파고가 높아지면 물이 순환하면서 바닷속 용존산소량이 많아지고, 따라서 생물학적 자정작용도 활발해진다. 해수를 뒤섞어 순환시킴으로써 플랑크톤을 용승(湧昇) 분해해 바다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 이때 적조(赤潮)는 큰 파도에 휩쓸려 정화된다. 이렇듯 대기의 폭군인 태풍은 유용한 면도 지니고 있다. 자연계의 양면성과 모순성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Poison, properly used, turns to medicine(독도 적절히 사용되면 약이 된다)이란 말도 있다.
인류의 미래는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슈펭글러의 비관주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한 처방전을 새로 써가야 한다. 자연법칙은 변할 수 없으나 인간의 사상체계와 행동은 변할 수 있다. 사이버네틱스(인공지능학)와 생태학, 도시와 농촌, 서양과 동양,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등 대립되는 것들을 관통하는 새로운 정반합(正反合)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중화, 화합, 통합, 희석을 넘는 새로운 역학이 창조돼야 한다. 대립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는 모순적 세계에서 생명력을 찾아야 한다. 모순이 창과 방패처럼 서로 충돌할 때는 파괴로 귀결되지만, 반동으로 작용하면 창조와 승리라는 고귀한 힘을 갖게 된다.
고대에는 물질세계가 더운 것과 찬 것, 젖은 것과 마른 것, 양성과 음성, 남과 여 등 정반대의 개념에 의해 작용한다고 봤다. 이후 납과 같은 천한 물질을 금과 같은 귀한 물질로 변성시키는 연금술이 발전했다. 거의 모든 연금술사가 취한 방법은 섞으면 금이 되는 특별한 물질인 ‘현자(賢者)의 돌(Philosophers’ Stone)’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연금술과 ‘현자의 돌’
카를 구스타프 융은 연금술의 공정을 마음의 치료를 위한 정신분석 과정에 적용해 독자적 분석법을 창출했다. 연금술이란 메시지는 단순한 물질 조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체계로 각자의 참된 운명,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메시지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용기를 동물의 자궁에 비유하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기 위해 특별한 고통, 심지어 죽음도 감수했다고 한다. 모든 동물이 태어날 때 고통이 따르듯, 고통이 수반돼야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자의 돌’이 아닌가. 연금술사의 현자의 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출처 신동아 200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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