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시인 정호승
“외로움은 상대적이지만, 고독은 절대적이죠”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초가을 즈음에 새벽기도를 다닌 적이 있다. 새벽잠을 꿀처럼 빨아먹고 살던 내가,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 새벽길을 나서면 무척 피곤했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한 한 달이었다. 하지만 그런 몸을 이끌고 예배당에 가고, 거기에서 기도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평온해지고 가끔은 휘몰아치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불가의 수도승이 하안거나 동안거에 들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나, 일상에 지친 범부가 새벽기도를 하는 시공간은 일상의 담장을 잠시 헐어내는 시간이다.
1시간 정도의 기도를 마치고 새벽담배를 피운다. 교회에서 내려와 점점 밝아오는 태양을 보면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벽의 ‘본 모습’을 본다. 새벽은 내가 깨어야 할 나의 ‘자아’이며, 타인에 대한 ‘사랑’이고, 간절한 ‘기도’다. 그렇게 새벽은 깨어 있는 자들의 몫이다. 이제 아침이 오면 저 고요한 거리는 인파로 북적댈 것이다.
나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침을 오게 하는 빛을 보았다. 그것은 예감이었고, 축복의 햇살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살면서도 같은 시간을 품고 있으며, 그 시간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곳에 가끔 가을날 감나무처럼 시가 서 있기도 하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찰나다. 그 찰나에 정호승(鄭浩承·57) 시인은 서 있다.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시 ‘슬픔을 위하여’ 중에서
시인은 때론 간병으로 밤을 새우고 나와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는 여인의 모습으로, 우유 배달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가끔은 청소부의 모습으로 새벽에 나타난다. 그를 본 적이 있는가? 독자는 어쩌면 그런 시인의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정호승 시인은 기도한다.
기도하는 시인 정호승. 토요일 오후에 긴 이야기 자리를 벗어나 인사동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정호승 시인을 ‘기도하는 인간’으로 보았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 나타났을 무렵엔, 분명 기도하는 인간들도 같은 땅 위에서 살았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이거나 혹은 우리가 분류해낼 수 없는 원시 인류로서 나는 ‘기도하는 인간’이 저 원시의 공간을 수만년 지배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빙하기에 매머드나 주라기의 공룡과 같은 존재로서의 인류는 ‘기도하는 인간’인 거인이 지배했을 것이다. 선생의 단정하고 자그마한 체구, 그 몸 안에는 거인이 살고 있다. 큰 키에 대단한 몸을 가진 마음의 거인이 세상사의 자잘한 모습을 읽고 안타까워한다.
“선생님은 서정시인입니까?”
뜬금없이 서정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은 허허 웃으면서 서정이란 시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서, ‘나의 서정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서정’이라고 부연 설명해주었다.
“꽃 하나를 보아도, 그 자연물 속에서 제가 보는 건 인간이지요. 저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징이나 꽃과 별과 같은 자연물은 모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매개물입니다. 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고,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시란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
자웅동체의 생명처럼, 시는 인간을 이해하는 길인 동시에 목적지이다. 그런데 선생은 인간의 삶을 비극으로 점철된 과정으로 본다. 석가모니의 6년 고행, 예수의 골고다 언덕이 바로 인간의 바다이고 인간의 길이다.
“기쁨은 잠시 피었다 지는 봄날의 꽃 같은 거고, 삶은 우리들이 밥 먹는 것처럼 아주 구체적인 비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인간의 삶을 시로 적어놓은 거지요. 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인가. 선생이 직접 뽑은 선생의 시선집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부제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이다. 선생은 인간의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늘의 시인이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그 그늘이 바로 나의 그늘이고, 어쩌면 앞으로 나의 그늘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과 더불어, 그 그늘을 떼어버리고는 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의 슬픔은 자신의 기쁨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는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시 ‘슬픔이 기쁨에게’ 중에서
새벽기도를 하면서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울고 있었다. 불 꺼진 교회당은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의 공간이다. 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고 그들의 슬픔만을 보고 슬펐다. 새벽에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깨어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밤새워 슬픔의 길을 걸어온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꽃밭
일상에 지쳐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달콤한 꿈의 기쁨에서 깨어난 나에게 새벽은 언제나 기도하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오늘이 바로 어제의 슬픔이 드러나는 날이라는 걸 알려주었지만, 그건 기쁨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기쁨은 슬픔의 길을 걸어가다 잠시 드러나는 물거품 같은 것이다.
선생은 그 물거품을 그냥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론 꽃으로 피어나고, 맹인부부가 구걸하기 위해 어설픈 연주를 하는 길거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만이 선생의 시가 아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아름다운 것들, 선생은 그걸 그대로 쓰고 우리에게 읽어주는 것이다. 시를 읽어주는 선생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떨림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기뻐한다. 역설적으로 선생을 읽는 순간 나는 기쁘다. 나도 모르게 나의 가슴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입은 짐승을 달래주는 선생의 시는 따뜻한 손길이다.
초기 시집인 ‘슬픔이 기쁨에게’에 담긴 슬픔과 눈물의 시편, 그 시원은 어디인가. 당연히 모든 시인이 그러하듯 선생의 유년시절을 알아야 한다. 선생에게 유년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마치 짧은 시를 쓰듯이 몇 장면을 이야기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짧게 눈을 감기도 했다. 이제 육순에 가까운 선생은 아주 먼 옛날의 일들을 선명하게 펼쳐 보여주었다.
“제가 살던 시골집 마당에 꾸며진 꽃밭이 떠오릅니다. 어머닌 거기에 꽃을 많이 심었지요. 채송화, 백일홍, 수국 같은 꽃들, 그리고 감나무 같은 유실수들이 있던 공간입니다. 거기에 꽃을 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 꽃밭이 내 유년의 기억에 남아 있고.”
꽃을 심는 어머니의 모습은 슬픔을 심고 있는 시인의 모습과 다름없다. 선생의 슬픔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라면 궤변이거나 과언일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선생의 그 어린 공간에 어머니가 심어놓은 것은 채송화나 수국 같은 꽃이라기보다, 나중에 선생이 그 꽃의 이름을 시로서 호명하는 그런 이름 모를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마당에 꽃을 심는 존재다. 그 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그런 숨겨진 의미가 아이의 마음에 자란다.
“그리고 눈사람이 떠오르네요. 제가 살던 대구는 분지이기 때문에 저 어릴 땐 눈이 무척 많이 내렸지요. 그래서 아이들과 눈사람을 많이 만들었는데, 지금처럼 따뜻한 장갑이 드물던 시절이라 고무신에 손을 넣어 눈을 굴리고 밀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찍은 흑백사진이 한 장 있는데, 사촌누나, 형들과 함께 엄청 크게 눈사람을 만들고 그 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어요.”
결핍의 순간
이 유년의 두 장면은 매우 행복하다. 어머니의 꽃밭, 사촌 형제들과 만든 거인 눈사람과의 추억. 슬픔의 씨앗이 떨어지지 않은 행복한 유년시절은 은행원이던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눈사람처럼 녹아내렸다. 아직 인생의 봄꽃이 피어 있던 중학교 2학년 즈음, 아버지가 사업을 하면서 꽃은 지고 만다. 믿었던 사람에게 속고, 사기를 당하는 이야기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아버지의 불행은 곧 가정의 불행으로 밀려온다. 그러한 불행 속에서 선생은 꽃밭에 꽃을 심던 가냘픈 어머니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몰락으로 어머니가 일수 돈을 쓰신 것 같아요. 일수 돈 알아요? 목돈을 빌리고 매일매일 이자를 붙여서 갚아 나가는 거지요. 요즘에도 장사하는 사람들은 매일 현금이 생기니까 그걸 쓰기도 하지만, 그땐 가정집에서 그런 돈을 빌려 쓰곤 했지요. 일수 돈을 받으러 오는 일수쟁이에게 시달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떠올라요. 어머닌 마치 죄인처럼 그 일수쟁이 할아버지가 오기만 하면 고개를 숙이면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어떤 장면은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고, 어떤 장면은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선생을 행복하게 한 눈사람은 사진으로 남아 있고, 어머니의 고단함은 동영상으로 남아 아직도 선생의 가슴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이 ‘작가 열전’을 계속 읽은 독자는 이미 다음 문장을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부연하면 내가 만난 작가나 예술가들은 모두 결핍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 고통은 마치 놀이터의 시소처럼 작가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 그 작가가 성장해서 몸무게가 늘고, 명예나 부가 축적되어도 그 고통과 결핍은 같은 무게로 늘어난다. 그래서 그 시소가 움직이는 것이다. 정호승 선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 또한 청소년기를 지독한 가난 속에서 보낸 것 같다. 그것은 이렇게 문득 찾아온 것일까. 선생에게는 어린 시절에 갑자기 당한 폭력의 기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인 걸로 기억합니다. 어떤 집 대문 앞을 지나는데 어른이 나오더니 갑자기 내 멱살을 잡고 ‘너 돌 던졌지’ 하면서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선 마구 패는 거야. 아마도 어떤 애들이 그 집에 돌을 던지면서 몇 번을 지나간 모양인데 내가 공교롭게 그 앞을 지나가다 봉변을 당한 거지요. 아픈 거도 아픈 거지만, 심한 모멸감과 억울한 생각에 눈물이 났지요. 그때 일이 잊히지 않아요.”
단란한 가정에서 유년을 보낸 선생에게 찾아온 가난은 어느 날, 대문 앞을 지나다 끌려가 마구 폭행을 당한 것처럼 선생의 삶을 ‘패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찾아온 집안의 가난은 이후 전개되는 선생의 일상, 즉 경건하고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직장인의 미덕을 갖추게 한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주위 사람에게 신세를 지면서 사는 시대는 천상병 선생 이후로는 그만 해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까까머리에 전해진 따스한 손길
마침 선생과 만난 장소가 인사동이었다. 보리수라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다음에 술자리를 옮기듯이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천상병 선생의 부인이 운영하는 찻집 ‘귀천’이었다. 천생 소년 같은 천상병 선생의 생전 모습을 보면서, 시인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한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호승 선생의 시는 별을 보고 쓴 시들이다. 즉 주경야독, 낮에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시는 별빛을 보고 썼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시는 늘 밝게 빛난다. 그리고 그 별들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빛나고 있다.
먼 하늘의 별빛을 노래하기에 그의 낮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래서 그는 태양 아래서 본 사람들의 모습을 그 별빛으로 끌어당겨 원고지에 적어놓았던 것이다. 한 사람을 보기 위해 하나의 별을 탄생시키는 시의 밤은 미루어 짐작만 해도 눈물이 난다. 고생해본 놈이 고생한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법이다.
문학에 눈을 뜬 계기는 아버지였다. 대구 계성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민중서관 판 ‘한국문학전집’을 집안에 들여놓았고, 그 덕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소년의 눈에 새로운 세상으로 보였다. 겨울방학 내내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는데, 어머니가 짜준 털옷 팔꿈치가 해져 ‘빵꾸’가 날 지경이 되도록 읽었다고 한다. 한겨울 이불을 쓰고 어두운 불빛 아래 엎드려 읽는 자세는 시력을 나쁘게 했고, 이후로 안경을 써야 했다. 그때 박계주의 ‘순애보’ 같은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다고 한다.
그 무렵 문학소년들에게 꿈의 지면이던 ‘학원’지에 산문 ‘석의 심정’을 투고해 우수작으로 뽑혔다. 하지만 문학에 대해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럼 선생은 어떻게 시를 쓰게 됐을까. 그를 시인으로 만든 이는 당시 계성중학교 국어담당 김진태 교사가 아닐까 싶다. 소설가 김진태 선생 얘기를 하면서 정호승 선생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지금도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이 머리칼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수업시간에 숙제로 쓴 시가 정호승이 쓴 최초의 시다. 제목은 ‘자갈밭에서’. 대구에는 자갈이 많다. 한 소년이 수성천변의 자갈밭을 걸어가면서 한 생각들, 즉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같은 사춘기의 감정적인 생각을 짧게 적은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수업시간에 교탁에 오르지 않고, 아이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날도 여전히 아이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다가 정호승 옆에 와선 “네가 쓴 시를 읽어봐”라고 했다. 소년 정호승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읽었고, 두 눈을 감고 낭송을 다 들은 선생님은 자리에 앉은 소년의 까까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도 있겠다.”
김진태 선생의 과묵한 성품으로 보아 이것은 굉장한 칭찬이었다. 정호승 선생은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는 말보다는 ‘열심히 노력하면’에 더 의미를 둔다. 그는 이 얘기를 하면서 “시는 재능으로 쓰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쓰는 것이다. 재능이란 다름 아닌 노력이다”라고 강조해서 말한다. 우리는 신의 은총을 받은 대천재 모차르트가 아니라, 노력하고 천재를 질투하는 살리에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문예장학생으로 입학
이것은 선생의 시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선생의 시는 그 노력의 흔적이다. 그 노력으로 삶의 외로움과 괴로움과 그리움을 견디고 써내는 것이다. 누구의 가슴속에나 천하의 절창이 숨어 있고, ‘죄와 벌’ 같은 걸작이 숨어 있다. 작가는 그것을 써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써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리는 낭만주의 시인들도 부지기수다.
그때 선생님의 손바닥에서 까까머리로 전해지던 온기가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백일장만 되면 친구들이 자신의 등을 떠밀어 나가게 되었는데, 처음엔 백일장이 백일 동안 어디에 가서 장보는 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백일 동안이나 어디에 가고 싶지 않아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백일은커녕 교내 숲에 모여서 원고지 몇 장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처음 나간 중학교 백일장에서 받은 제목은 ‘불’이었고, ‘등불’이라는 시를 써서 장원을 한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계성중학교는 문예적인 분위기의 학교였다. 그래서 매달 학생들의 문예작품을 모집했고, 1등 한 학생에게는 상품을 주었다.
상품은 학교 매점에서만 쓸 수 있는 상품권이었다. ‘삼립 크림빵’이 1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매달 응모해서 탄 상품권으로 매점에서 아이들과 빵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가끔은 체육복도 사 입어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됐다.
시간이 흘러 정호승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원’지에 ‘역(驛)’이라는 시를 응모해 시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 상을 받으면 고교생 사이에는 기성 문인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다. 산문과 시를 동시에 쓰다가 시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선생이 다니던 대륜고등학교 문예반의 영향이다. 대륜고등학교에는 박해수 시인, 이성수 시인 등이 있어 정호승 시인의 시밭에 거름을 줬다.
정호승 시인은 경희대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시가 아니라 평론이었다. 시인이 평론으로 입학하게 된 것은 고3 때이던 1967년 9월 경희대 백일장에서 선생이 4등으로 입상했기 때문이다. 3등까지만 문예장학생이 될 수 있었다. 조병화 선생의 심사평을 보니 ‘정호승 군의 작품은 등수에 넣자니 그렇고, 떨어뜨리자니 아까워 4등을 준다’고 되어 있었다. 고교생 정호승은 조병화 선생이 내 시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싶어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 읽은 문예지의 평론 스타일을 모방하며 쓴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원고로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한다.
문예장학생에 연연한 것은 학비 때문이었다. 장학금을 못 받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문예장학생 학비는 1년만 지급됐다. 계속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장학금이 필요했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신춘문예로 문단에 등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3년 내내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그때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부모님이 매달 5000원을 보내주셨는데, 2500원이 방값이었어요. 유부국수가 30원 했는데, 방값 내고 남은 돈으로 매일 유부국수 세 그릇 사 먹으면 바닥나게 돼 있었죠. 한창때라 밥을 많이 먹고 싶은 나머지 전농동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밥집에서 한 달 2500원을 내고 밥을 먹으면서 학교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그 무렵 교정에서 어떤 여학생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땡전 한 푼 없는 고학생 정호승. 하지만 문예장학생이라선지 그의 남루한 옷차림도 여학생의 눈에는 낭만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여학생을 선생은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차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떡하긴 어떡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갔지.”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필자는 40대 중반, 선생은 50대 후반(12년 차이의 소띠 띠동갑이다). ‘우리 기쁜 젊은 날’엔 그렇게 못 들은 척하면서 지나간 일들이 많았다. 선생이 대학을 계속 다니려면 신춘문예에 당선하는 길밖에 없어 학교 도서관에서 신춘문예 준비를 고시 공부하듯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해 조선일보에 응모했는데 최종심 4편에만 이름이 오르고 낙방했다. 2학년을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휴학을 하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당시 동대문 전차 종점 자리가 헐리고 호텔이 들어섰는데 그 호텔 사우나에서 카운터를 봤습니다. 6촌 아저씨의 배려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계산이 매일 틀리는 거야. 늘 조금씩 모자라 아저씨가 ‘호승아, 니는 이런 것도 못하나’ 하면서 눈치도 주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그렇다고 나를 생각해주신 아저씨 처지를 생각하면 무작정 그만둘 수 없고 해서 부모님께 편지를 썼지. 여기에 있기 힘드니까 그냥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 한 장 보내달라고 말이야. 그래서 서울을 떠날 수 있었어요. 1969년이었지요.”
정호승 선생은 전보를 받자 그 길로 경주 외할머니 댁으로 갔다. 토함산 기슭에 보덕암이라는 초가 암자가 있었다. 객실과 부처님을 모셔놓은 작은 방이 있는 초막이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그곳에서 시를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또 낙방이었다. 이제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이 훗날 ‘첨성대’라는 시를 쓴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정호승은 군에 자원입대했다.
군에서도 어떻게 시를 써야 하나 궁리하다, 군 막사 밖에 있는 군 교회 군종들의 생활이 좀 여유가 있어 보여 군종사병이 되었다. 군 교회의 시멘트 바닥에 해진 매트리스를 깔고 전우들이 잠자리에 들며 전 부대가 소등을 하면 그 교회에서는 별이 떠올랐다. 군종사병 정호승은 올빼미처럼 일어나 시를 썼다. 그때 별빛이 아니라면 무엇을 보고 시를 썼을까. 그에게 시는, 그리고 신춘문예 등단은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느냐 못 다니느냐의 갈림길이었다.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72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한일보 문화부’ 발신 소인이 찍힌 노란 전보용지 한 장이 군종사병 정호승 병장의 손에 쥐어졌다. 응모한 시 ‘첨성대’가 당선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한다는 노란 전보용지, 지금도 아마 서재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정말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노란 전보용지는 시인에게 기다림이란 무엇이고,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면 응답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성경책 한 쪽과 같았으리라. 그래서인지 선생의 e메일 주소는 ‘첨성대’다. 그의 첨성대는 눈물로 쌓아올린 화강암이었다.
할머니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시 ‘첨성대’의 첫 연
선생은 이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도 당선됐다. 상금 7만원. 이 돈으로 어머니께 틀니를 해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춘천 우두동에 있는 군대 교회에 성막을 만들어 기증했다. 그 성막의 맨 아래에는 ‘병장 정호승 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남루한 이야기이지만, 가난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파출부를 나가기 위해 당신 이름 대신 직업소개소에서 부여받은 번호로 자신을 소개하며 전화를 거는 모습. 그야말로 ‘숟가락 몽둥이’ 하나 없이 가난하게 살던 일. 그때 저는 나는 절대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가족 부양은 하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그리고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살았어요, 허허.”
시는 돈과 절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선생은 직장을 선택한다. 첫 직업은 숭실고등학교 국어교사. 하지만 3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를 위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임을 하고 ‘주부생활’ ‘여성동아’ ‘월간조선’ 등의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한다. 선생의 주옥같은 시집들은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된 것들이다.
“절대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그리고 샘터사에 근무할 때 상사로 만난 작가 정채봉 선생과는 ‘족보에 없는 형제’로 호형호제하는 평생지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선생은 소설가로도 등단했다. 의대에 다니던 친형이 당시 재래식 해부학교실을 구경시켜준 적이 있는데, 그때 충격을 받고 해부실의 풍경, 사체가 포르말린에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를 가지고 그대로 소설을 써 ‘위령제’라는 작품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장편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왠지 소설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시세계는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 시와 인생에 대한 그의 잠언적인 말 몇 가지를 소개한다.
“시간은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주는 겁니다. 자기가 주지 않으면 그냥 휙 지나가는 게 시간이라는 거지요. 인생은 시간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물리적인 시간들을 자신만의 절대적인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그 균형이 깨어지면 졸작을 쓰게 되지요.”
“저의 스승인 황순원 선생은 소설 이외에 잡문을 쓰지 말라고 했고 당신도 그렇게 했지만, 그건 그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시인으로 소설도 쓸 수 있고, 또 시인이 쓸 수 있는 소설이나 산문이 있을 겁니다. 그런 욕심은 가지고 있어요.”
“시 쓰는 일은 자기 삶을 표현하는 한 양식입니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기 삶을 표현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 삶의 양식으로 저는 시를 선택했을 따름입니다. 누구나 자기 삶의 양식을 충실히, 그리고 열심히 표현한다면 그의 인생이 바로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끔 새벽에 일어나 청소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내 삶의 양식이 저들 삶의 양식보다 더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 반문합니다. 아마 내 진정성이 그들보다 더 떨어질 겁니다. 청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한 자리와 안 한 자리가 너무나 명징하게 드러나지요. 과연 나의 시도 그러할까요?”
밥은 별이고 별은 밥이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의 양식이 있는 것이다. 시 쓰는 일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한 양식일 따름이다. 어부가 고기를 잡듯이. 선생은 다른 삶의 양식에 비해 시가 오히려 더 열등한 것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선생의 시에 절창으로 빛난다. 모든 삶의 양식에는 밥상이 있다.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산다.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시 ‘밥 먹는 법’ 중에서
그래도 선생의 가난은 따뜻하다. 선생은 시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배고픔과 더불어 그 하늘에 떠오른 따뜻한 별들을 노래한다. 그것은 죽음마저 따뜻하게 바라본다. 선생의 시와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 나는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이런 가정은 부질없긴 하지만) 정호승 시인이 소설을 쓰고 아사다 지로가 시를 썼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호승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아사다 지로는 정호승의 시를 쓰지 않았을까. 국적과 언어는 달라도 작품 속에 떠오른 별들엔 국적이 없다. 아사다 지로는 장편소설 ‘지하철’에서 현실은 추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역시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런 세상에도 아름다운 것은 늘 확실히 존재한다면서 이런 문장을 남긴다.
‘그 아름다운 것을 나는 아름다운 그대로 쓰고 싶다.’
이 문장은 정호승 선생의 시 세계인 밥과 별과 다를 게 없다. 정호승 시인의 밥은 별이고, 별은 밥이다. 이 둘은 두 바퀴처럼 정호승의 몸을 굴리고 민다. 선생의 시는 바퀴다. 밥과 별로 만들어진 바퀴. 그걸 읽으면 그런 바퀴를 굴리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늘 확실히 존재한다.’
고독의 영역
금연 찻집인 ‘귀천’에서 잠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왔다. 선생은 찻집 주인과 환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는 천상병 선생의 귀천을 마음으로 읽으니, 귀동냥으로 들은 천상병 선생의 일화들이 낮게 날아오는 잠자리 날개처럼 떠오른다. 그 쓸쓸한 이야기들이 퇴락하는 가을날의 햇살 속으로 스며든다. 거리에 놓인 돌확에 고인 물방울들, 천상병 선생의 눈물이었을까 싶다. 빨리 담배를 피우고 들어갔다.
선생이 시인으로서 영향을 받은 스승이 궁금하다.
“내 시의 스승들은 내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시인들이에요.”
그래도 윤동주, 만해, 서정주와 같은 별들을 이야기한다. 이름만으로도 시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과 밥을 같이 먹었던 행복한 사람들. 그 다음엔 역시 김수영, 신동엽과 같은 시인들이다. 그리고 고독하게 선생의 정신에 자리하고 있는 시인이 김현승 선생이다.
“김현승 선생의 시를 열심히 읽었어요. 우리 시에서 고독의 영역을 넓히셨지요. 선생의 시가 좋아서 선생에게 개인적으로 시를 보내기도 했지요.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시를 보낸 건 선생이 처음이에요. 군종사병으로 있으면서 타자기로 정성스럽게 정리해서 보낸 거죠. 선생이 답장을 보내셨는데 ‘휴가 나오면 한번 들르라’고 했지요.”
김현승 선생은 당시 숭실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선생의 답장을 받고 나서 선생의 연구실을 들렀다고 했다. 그를 환하게 반겨줬다. 별 말씀은 없었지만 책 속에 파묻혀 있는 존경하는 시인의 모습만으로도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기독교적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김현승 시인의 이 말씀.
“고독의 영역은 신도 인간도 아닌 제3의 영역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정호승 시인의 화두다. 이 가을날 고독한 시인의 고독에 대한 잠언은 우리 모두가 한번쯤 품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외로움은 상대적이지만, 고독은 절대적이지요.”
그리고 선생은 당신의 시가 윤동주나 김현승의 시처럼 명징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때 저는 시가 사랑이라고 한 적도 있고, 명예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아닌 거 같아요. 시가 뭐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든 일이겠지만, 제 생각에 고통 없이는 시가 없을 겁니다. 그 고통이 시로 나타날 때 내 시가 명징해지지 않을까요? 중학교 은사님 말대로 열심히 살면 드러나는 충실한 삶의 ‘거시기’가 시가 아닐까 합니다.”
아련한 첫 키스의 추억
선생은 문득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첫 키스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 먼 친척 누나에게 느낀 연정이었다. 친척 누나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자신이 질겅질겅 씹어 먹던 오징어 다리를 쟁반에 올려놓았는데 누나가 그걸 거리낌 없이 집어 먹는 모습을 보고 ‘아, 누나도 나를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더럽지 않게 여기는 것. 그것이 키스이고 사랑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창가 쪽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누나가 창밖에서 자신을 불렀다.
“호승아, 뭐 하노?”
소년 정호승은 창문으로 누나의 예쁜 얼굴을 보았다. 소년이 대답했다.
“응, 공부한다.”
그러자 누나가 그 창문에 입술을 대었고, 소년 정호승도 그 창문에 입술을 댔다. 그게 시인의 첫 키스다. 창문이라는 투명한 마음을 매개로 한 이 키스는 육순이 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그 누나 상당히 미인이었어” 하는데, 소년보다 더 순수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누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영원성을 지닐까.
“사랑은 근본적으로 모성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적인 그 무엇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느끼는 건, 조건이 많아서 그런 겁니다. 조건이 없는 상태, 어미가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심경. 그런 게 사랑입니다.”
선생은 영세를 받은 천주교 신자이면서, 마음속에는 부처가 살기도 한다. 명동성당의 성모 마리아상 앞에 ‘장괘대’라는 자리가 있다. 무릎을 대고 앉는 자세를 고정시켜주는 기도 도구인데, 선생이 한번은 그 장괘대에서 몸을 낮추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글로 쓸 수는 없으리라, 갑자기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넘치는 눈물은 새벽기도 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모습이다.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는 아미타불을 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처에게 절을 올렸다고 했다. 부처 앞에 몸과 마음을 낮추고 절을 할 때 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운주사의 못생긴 부처들
이미 ‘서울의 예수’와 같은 작품으로 당대 참혹한 현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인은 많은 시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의 편에 서서 울고 그 눈물로 시를 적어내는 삶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다가 운주사의 못생긴 부처들 사이에 허름하게 앉아 있는 삼존불을 보았다. 세 부처 가운데 있는 부처. 이 땅의 백성처럼 허름하고 남루한 모습. 게다가 세월의 풍파에 마모된 그 조각상 앞에서, 삶과 시인을 응시하는 부처의 눈길 앞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감동과 그 무너진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위안을 동시에 느꼈다.
“그건 손바닥을 내려놓고 영원을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그 부처 사진을 봅니다. 운주사 삼존불 가운데 부처의 미소는 내가 힘들 때마다 바라보는 삶의 위안이지요.”
마치 무거운 짐을 들고 가다가 그 짐을 내려놓고 부처를 바라보는 심경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 ‘소년부처’가 탄생한다. 우리 모두는 부처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정호승 시인에게 목 잘린 부처를 바라보게 하고 이런 시를 쓰게 한다.
경주 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시 ‘소년 부처’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정호승의 시가 소년 부처와 같은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선생의 시는 그런 미소로 다가온다. 나는 환자와 같은 심경이 되어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은 의사가 되어 미소로써 나를 맞아주었다. 그때 선생의 미소를 보고 나의 환부는 이미 치료된 것이다. 선생의 미소가 내게는 위안이고 위로였으며, 말씀은 치유였고, 시였다. 인사동에서 안국전철역까지 선생과 같이 걸어가면서, 나는 수많은 부처가 우리 곁을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미소로 내가 살고 시가 산다.
출처 신동아
'***풍경소리 > 착한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깨달음으로 금욕을 하는가? (0) | 2007.12.11 |
---|---|
진정 붓다는 없는 것인가? (0) | 2007.12.07 |
시들지 않는 기쁨 (0) | 2007.12.02 |
수행의 두가지 의미 (0) | 2007.11.28 |
루시퍼 이펙트 (0) | 2007.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