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로]시들지 않는 기쁨
고진하 / 시인· 숭실대 겸임교수
지난 겨울 사원 순례를 위해 인도를 다녀왔다. 신들의 나라답게 웅장한 사원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숱한 신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 신상들을 만나는 놀라움과 기쁨도 컸지만, 사원 주변에 사는 인도 토박이들을 만나는 기쁨 또한 컸다. 벵골 지역에서 한 칼리사원을 찾아가다가 만난 삼십대 중반의 오토릭샤 기사. 이름은 카틱이라고 했다. 그가 몰고 다니는 릭샤는 승객의 내장을 뒤집어놓을 듯 털털거리는 폐차 직전의 고물이었고 그의 행색도 릭샤처럼 남루했지만, 그의 말과 표정과 몸짓에서는 아이 같은 천진함과 야생의 체취가 물씬 풍겨 나왔다.
우리는 그런 성품에 반해 며칠 동안 그의 고물차를 이용했다. 사흘째 되는 날이던가, 우리는 한 노천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느닷없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더니 담담히 대답했다.
“집에는 닷새쯤 먹을 수 있는 쌀과 감자가 있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매일 아침 숲에서 땔감을 구해다가 차를 끓여 줍니다. 아내가 끓여주는 차는 아주 맛있습니다.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질문을 던진 이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카틱이 그런 대답을 의도한 듯이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생존의 숱한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터득한 삶의 달관이 느껴졌다. 끝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이전투구하며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길든 사람들과는 달리, 주어진 여건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족의 품성도 넉넉히 몸에 배어 있는 듯싶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욕망의 갈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문득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주인공의 말이 떠올랐다.
“욕망의 갈증을 다 채우려는 이에게 화 있을진저!”
그 지역을 떠나기 전날, 카틱은 우리와의 작별이 아쉬운 듯 자기 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10평쯤 될까, 나지막한 흙집이었다. 살림살이를 돌아보니, 마치 소꿉장난을 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살림살이는 그렇게 간소했다. 그들이 지닌 소유가 삶의 짐이 될 것 같지 않은 살림살이였다. 소유가 삶을 짓누르는 짐이 될 때, 그 소유는 우리에게 ‘살림’이 되지 못한다. 수도자들처럼 자발적 가난은 아닐지라도, 카틱 가족이 보여주는 소박한 살림살이는 그 동안 과잉욕망을 불지르며 살아온 내 일그러진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었다.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란 그 자체로 이 지구별을 더럽히는 흉한 오물덩어리에 다름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지구별의 주민들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고 말하는 듯싶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카틱의 아내는 말린 소똥으로 화덕에 불을 피워 따끈한 홍차를 끓여주었다.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는데, 카틱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다며 인도 민속악기인 시타르를 들고 나와 타고르 송을 불러주었다. 악기는 낡아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종달새처럼 감미로웠다.
“당신이 내 노래에서
기쁨을 얻으시리라 믿습니다
오직 노래하는 자만이
당신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꽃얼굴로 부르는 그의 신명어린 노래에 우리는 흥건히 젖어들었다. 악보라고는 가없는 지평선 위로 내리 퍼붓는 땡볕 악보뿐이었지만, 신명에 겨운 그는 먼 지평선에 눈길을 던지며 타고르 송을 연거푸 세 곡이나 불러주었다.
그의 노래에 젖어드는 동안, 나는 “내 생명에 깃든 거칠고 모난 모든 것들이 한줄기 감미로운 화음으로 녹아드는”(타고르) 듯한 흥취를 맛볼 수 있었다. 그의 노래는 우리가 낯선 타인이 아니라 한 지구별 가족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의 가난에 연민이 일어 속으로 눈물을 찔끔거리던 나에게 새삼스러운 각성을 던져주었다. 소유는 적어도 존재는 넉넉할 수 있음을! 시들지 않는 기쁨이 바로 여기 있음을!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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