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상황’이 바뀌면, 누구라도 악랄해진다
▲루시퍼 이펙트…필립 짐바르도|웅진지식하우스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웃고 있는 미군 병사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라는 유명한 심리 실험이 있다. 1971년 8월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평범한 대학생들을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의 역할로 나눠 모의 감옥 실험을 했다. 그런데 실험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이 ‘수감자’들을 가학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도 갈수록 ‘창의적’으로 악랄해졌다. 성적 수치심을 주는 학대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수감자 역할의 학생들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거나 교도관에 무조건 복종하는 등 진짜 수감자처럼 행동했다. 감독관으로 참여한 짐바르도마저 참가자들을 쥐고 흔드는 교도소의 ‘권력자’로 변해갔다. 실험은 결국 6일 만에 중단됐다.
35년 뒤, 그동안 세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 충격적 실험의 전말이 공개됐다.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는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과 실제 사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선과 악,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뒤늦게 책이 나온 데에는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포로 학대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TV에서 나오는 사진들을 보고 저자는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벌거벗은 수감자들의 ‘피라미드’ 뒤에서 웃고 있는 병사들, 수감자의 목에 개줄을 묶어 끌고다니는 여군, 자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수감자들의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이 사건의 군법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30여년 전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부활을 목도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했던 ‘루시퍼’가 천사에서 사탄으로 돌변한 것과 같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적당한 상황만 주어진다면 사악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자는 ‘사악한 행동은 개인의 기질에 원인이 있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상황과 시스템의 힘에 주목한다. ‘썩은 사과’ 몇 개가 문제가 아니라 ‘썩은 상자’, 나아가 ‘썩은 상자 제조자’가 문제라는 것. 선량한 소시민이 죄의식 없이 포로를 학대하는 잔악한 병사로 변하게 된 데에는 공격과 폭동에 대한 두려움, 열악한 근무환경 등 상황적 힘과 ‘학대 문화’를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는 시스템의 압력이 컸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이라크 주둔 미군 고위 지휘관은 물론 럼즈펠드 국방장관, 체니 부통령, 부시 대통령까지 심판대에 세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공포를 조장하고 학대와 고문 행위를 부추긴 ‘행정 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평범한 사람들을 사악한 행동으로 유도하는 다양한 심리적 동인들을 소개한다. 집단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는 집단 동조의 힘과 권위에 대한 복종이 대표적이다. 1978년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정글 속에서 목사 짐 존스의 명령에 따라 900명이 넘는 신도들이 집단자살한 ‘존스타운 사건’은 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규칙과 역할, 익명성, 탈개인화, 비인간화 등도 ‘썩은 상자’를 구성하는 심리적 절차들이다.
당신의 눈에 비치는 건 하얀 천사들인가, 검은 악마들인가.
그림은 M C 에셔의 ‘Circle Limit Ⅳ’. ⓒ 2007 The M.C.Escher Company-Holland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결코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뿌리째 뒤흔들기 때문이다. 책에는 겉보기에 선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행을 일삼는 경악할 만한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1994년 르완다의 후투족은 어제까지 친구나 이웃이었던 투치족을 100만명 가까이 살해했다.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 수 만명을 학살한 독일 101예비대대는 막 징집된 신병들로, 모두 노동자 출신의 가정적인 중년 남자들이었다.
저자는 아울러 “도와주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복하거나 내부고발의 필요성이 있을 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악”이라고 규정한다. 엔론 같은 부패한 회사에서 회계장부가 조작됐을 때 이를 못본 척한 직원들이나 르완다나 수단 다르푸르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졌을 때 이를 묵인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하지 않는 악’의 역할이 컸다고 질타한다.
저자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인용한다.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아이히만의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그와 같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도착자나 사디스트가 아니었으며, 무섭고도 두려울 정도로 정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악의 평범성’에 대비해 ‘영웅적 행위의 평범성’도 강조한다. 악의 유혹에 저항하고 불복한 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왔고, 이들은 ‘평범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사람들을 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상황과 시스템의 힘을 억제하고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사회가 시민들에게 ‘(평범한) 영웅에 대한 상상’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하지만 두려우면서도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사회심리학적 연구 결과들을 사회적 문제 의식과 열정으로 엮어내 한 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이충호·임지원 옮김. 2만8000원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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