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두가지 의미
김형효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이것은 기독교가 단순한 신앙의 종교라는 것과 대조된다. 신앙은 열광의 강도를 늘 최고로 여기나, 수행은 자기를 변혁시키는 마음의 다스림을 본질로 삼는다.
수행은 두 단계로서 설명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회적 자아를 자연적 무아로 전이시키는 것이고, 둘째로 그것은 또 자연적 무아를 사회적 무심으로 옮겨놓는 일을 가리킨다. 자아는 사회생활의 반영이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떠나게 되면, 그의 자의식은 점차로 희미해진다. 자의식은 남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복잡한 콤프렉스의 소산이다. 사회생활은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먹고 먹히는 소유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유식학은 사식론(四食論)이라 부른다. 우선 음식을 요리해서 남들을 의식하면서 잘먹는 단식(段食)이 있고, 그 다음 남녀간에 성욕해결을 위하여 피부로 먹고 먹히는 촉식(觸食)이 있고, 셋째로 사회생활의 의사소통에서 이기고 지는 의사식(意思食)이 있고, 마지막으로 지식으로 타인들을 능가하는 식식(識食)이 있다. 모두가 남들을 의식해서 늘 지배자의 위치에 서 있고자하는 소유욕이 발동한 것이다.
이런 소유욕이 남들과의 경쟁해서 질투시샘과 원한감정,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을 동반하면서 자의식을 강하게 키운다. 불교의 수행은 소유욕이 원인이 되어 작용하는 탐진치 삼독의 사회생활을 떠나 자연적 상태로 마음이 전이되게 하는 길을 말한다.
자연상태의 마음은 소유의식을 지움에서 출발한다. 그러기 위하여 일체의 소유의식이 우리를 모두 괴롭게 한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자각에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마음자리로 마음이 넘어가야 한다. 일체개공의 마음자리가 바로 사회적 자의식이 증발되어버리는 곳이다. 거기에 자연의 여법한 진리가 드러난다. 자연은 서로 그물망처럼 얽혀 있으나, 한곳에도 이기적 소유를 위한 배타적 행각은 없다.
비록 자연에는 상극작용이 있어서 서로 죽이는 끔직한 현상이 생기나, 그 죽음의 상극은 인간의 사회생활처럼 이기배타적 소유를 획책하는 자의식의 투쟁이 아니라, 상생을 가능케 하는 여법한 존재의 법칙일 뿐이다. 왜냐하면 상극이 없이는 상생이 또한 존재론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이기배타적 소유의식이 자연적 존재구조인 자리이타로 회심(回心)하는 것이 반야지혜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고, 이것을 『반야심경』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표현했다. 모든 현상존재(色)는 소유 불가능한 공이다. 이것은 수행의 일차적 의미로서 반야지혜를 열기 위함이다.
그러나 불심은 자연심이 아니고 사회심이다. 이차적 수행은 자연심이 사회심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 부처가 되는 길이다. 자연 속에 남들과의 소유경쟁이 없이 홀로 있으면, 누구나 추상적으로 부처가 된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화경』의 가르침처럼 이 고통스런 사바세상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오셨다.
사바세상은 참고 견뎌야 하는 사회생활을 말한다. 불심은 사바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을 자연적 존재방식으로 되돌려 놓는 일을 한다. 자연심을 사회심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불국토 사상이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도(道)를 마음은 익혀야 한다. 자연적 공은 비어 있으나 결코 고갈되지 않는 무진장한 힘의 원천이고, 또 무한한 현상적 존재(色)의 그물망을 보시하고 있다. 이 공즉시색을 자연심에서 건너온 사회심이 다시 닮으려 한다. 이것이 자비의 문이다.
불교의 수행은 사회적 일체를 비소유적 공으로 보는 지혜사상과 자연적 존재일체를 무진장한 공의 보시로 읽는 자비사상을 사회적으로 적용시키는 길과 같다. 수행을 너무 아득한 고행으로 보거나, 이데올로기화 하지 말자.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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