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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 폭력성 못버리면 불교 아니다

slowdream 2007. 11. 20. 13:32
 

“禪, 폭력성 못버리면 불교 아니다”


  조계종불학硏 세미나서 비판 “체계적인 점검 필요” 지적도


 

 


오랜 세월 선(禪)을 가장 수승한 불교수행법으로 일컬어 왔으나, 최근 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조계종의 한 중진 스님이 공개석상에서 “선수행자들이 무턱대고 앉아만 있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는가 하면, 오랫동안 선수행을 했다는 한 초기불교 연구자 스님은 “화두로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심지어 “간화선의 권위가 무너져야 한국불교가 산다”는 극단적인 얘기까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조계종 불학연구소가 11월 1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간화선의 인간상과 수행관’ 세미나는 간화선에 대한 자화자찬 대신 세간의 비판을 들어보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간화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명상상담연구원장 인경 스님은 간화선의 역기능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스님은 “오늘날 한국선은 상구보리의 측면에 치우침으로써 대승의 기본 정신인 자비실천을 못하고 있으며, 초월만을 강조함으로써 현실문제에 대응하는데 무능하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이어 “급진적이고 인정과 타협이 없는 조사선과 간화선의 방식이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효용성을 강조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점검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간화선은 현대사회에서 혹독한 정체성 논란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위기에 내몰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모든 불교 가운데 간화선이 가장 수승하다는 일방적 주장은 고타마 붓다는 물론 수많은 선지식들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파천왕이 되고 만다”며 “간화선도 불교의 수많은 방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간화선이 형성될 당시에 불교는 ‘주도적 상식’으로 누구나 불교를 듣고, 불교를 말하고, 불교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 따라서 이 시대는 불교로 하여금 선이 아니라 교학에 우선 집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선이 대승의 연장선상이라기보다 소승의 연장선이라는 견해도 ‘지혜’에 집중할 뿐 또 다른 날개인 ‘자비’에 소홀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간화선 수행자들이) 입만 열면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거대한 환상과 오해의 진원지는 아닌가”라고 되물으며 “이 환상과 오해에서 삿된 해독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근본적 점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강사인 김종인 박사는 불교의 영원한 모델인 석가모니의 인간상과 간화선 수행자의 품성에 대해 고찰했다. 그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신중하고 치열한 수행자이며 온건하고 합리적인 품성의 소유자였지만 선 수행자는 석가모니와는 달리 냉정하고 성급하며 과격하며 비합리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또 선 수행을 해보겠다고 발심한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불교가 무엇이며, 참선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온화한 태도와 논리적인 언어로서 가르쳐주는 스님을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물다는 것. 김 박사는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몽둥이찜질과 주먹질 등이 통용되는 것이 과연 불교적인가”라고 반문한 뒤 “탐진치 삼독을 없애지 못하면 선은 불교수행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벌컥벌컥 화내며 어찌 탐진치 소멸하겠나”


  옛 것 매달리는 선은 모순…시대따라 변해야

  탁상공론-객기 치부 앞서 진지한 자성 필요



“선(禪) 수행자들은 냉정하고 성급하고 과격하고 비합리적이다.”

“선은 모든 권위와 관념을 타파하는 것인데 지금은 오래 앉았다는 것이 훈장처럼 간주된다.”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는 게 수행인데 선수행을 오래하고도 화를 벌컥벌컥 내는 사람들이 많다.”


선(禪)이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찬탄과 더불어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끊이질 않고 있다. 여기에는 선수행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선어록 등에 나타나는 파격과 폭력성에 대한 비판도 병존한다.


실제 선어록에서는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몽둥이로 두들기고 귀를 멀게 하고 다리 불구로 만드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스승의 뺨을 때리거나 고양이의 목을 싹둑 자르는 것도 불사한다. 이는 다른 수많은 불교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로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전부 보시한다는 불교의 보편적인 자비사상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부처를 한 몽둥이로 때려 죽였을 것이다’는 등등 선가의 용어도 선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사뭇 잔인하게 판단할 수 있는 측면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선학 연구자들은 위빠사나와는 달리 “선은 몸과 마음의 현상관찰이 아니라 불성 혹은 본성을 체험하는 수행법”으로 “선가의 언어는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위한 언어 이전의 언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일부 선수행자들에게 나타나는 과격성과 폭력성이 그런 선어록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고려대 강사인 김종인 박사는 “자신의 팔을 자르고 손가락을 불로 태우고 찾아온 가족을 내쫓는 등 사례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선가에서 반복되고 있다”며 “부처님의 삶의 궤적과 크게 다른 만큼 선수행자의 품성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선의 대중화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많다. 역대 수많은 선사들이 교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이뤘지만 현대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 스님이 최근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 스님이 깨달은 후 한 일은 화엄경을 읽은 것”이라며 “간화선은 앉아 있는 묵조선을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도로 주저 앉아버렸다”고 비판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특히 간화선이 현대사회에 따른 변화를 거부하며 옛 것에만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반 간화선적이고 비불교적인 행위’라는 비판도 있다.


즉 간화선도 시대와의 소통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간화선 효과의 수승 정도는 둘째치고 불교의 교설에 따라 간화선도 불교의 역사 속에서 개발된 것임을 알 일”이라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모든 난 것들의 운명이라면 간화선도 그 운명의 예외가 아닐 수 없다는 겸허 정도는 가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최근 불고 있는 간화선에 대한 혹독한 비판에 대해 종단과 수행자들은 ‘일부 학승들의 객기’나 ‘학자들의 탁상공론’으로 치부하기에 앞서 이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함께 대안을 모색해 나갈 때 ‘선의 황금시대’를 다시 구가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우희종 교수 “깨달음, 無明 포장 수단으로 전락”


“확철대오라는 깨달음의 주제는 종교가 지니는 위계적 구조 및 배타성 속에서 더욱 신성시되고 신화화되었으며, 더불어 깨달음이라는 것 또한 일반인에게 너무도 접근하기 어려운 화석화된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불교학연구회가 11월 10일 동국대서 개최한 추계학술대회에서 ‘복잡계 이론으로 본 깨달음의 구조’라는 논문을 통해 오늘날 대다수 불자들이 입으로는 늘 깨달음을 말하지만 정작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깨달음’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찰했다.


우 교수는 “깨달음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문제로서 접근되거나 논의되지 않을 때 매우 공허한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논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오각성에서 대오(大悟)와 각성(覺醒)은 본바탕에서 보면 굳이 나눠지지 않지만 수행을 전제로 한 차별계에서는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며 “일상생활 속의 삶으로서 나타나는 깨어 있음에 대한 인식 부족과 더불어 깨어 있음과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체험만을 관념적으로 강조함으로서 오히려 깨달음의 신화만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깨달음이라는 인식전환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새로운 상태를 불가의 전통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은 ‘깨어 있음’으로 비록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悟)이라는 것에 가장 의미를 두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은 깨어 있음(覺)에 있어야 한다는 것. 즉 붓다를 ‘깨어 있는 자(覺者)’라 하고 ‘깨달은 자(悟者)’라고 부르지 않듯 깨달음은 현실 속에서 구현되고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깨어 있음을 전제하지 못한 깨달음에 묶여버릴 때 깨달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질곡의 모습이나 무명(無明)을 포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며 “한국 현실에서 비록 깨달은 자는 많겠지만 과연 깨어 있는 자는 얼마나 있을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우 교수는 “불행히도 지금의 한국 불교는 일반인들의 삶과 유리된 깨달음만을 강조하면서 진정 부처님 말씀이 필요한 곳에서는 불교를 찾아볼 수가 없다”며 “선종을 표방하는 한국불교가 매달리고 있는 산중의 ‘목적으로서의 관념적 깨달음’으로부터 우리들의 삶 속에 있는 ‘과정으로서의 살아 있는 깨달음’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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