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⑤ 의상법사
법을 위해서라면 천길 낭떠러지가 두려우랴
화엄은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다. 삼국시대 수용된 화엄은 통일신라시대에 의상(625~702)법사가 화엄종을 열어 신라 교학의 큰 물줄기를 형성했다. 신라 하대 선종이 이 땅에 전해지자 고려초 균여 스님에 의해 재정비된 화엄은 대각국사 의천 스님과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중심에 자리 잡았고, 조선후기 교학 진흥의 흐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한국불교사의 중심에 위치했던 한국 화엄사상의 중추는 의상 법사의 화엄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효대사와 더불어 한국불교사의 양대 산맥인 의상법사 그를 만났다.
▷먼저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부터 묻겠습니다. 의상할 때 ‘상’은 湘, 想, 相의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로 인해 여전히 학계에서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느 것이 맞나요?
“『삼국유사』와 『송고승전』에 ‘상(湘)’을 쓰고 있다. 아마도 신라 헌덕왕 휘 ‘양상(良相)’을 피하려고 쓴 것 같다. 그러나 『법계도기총수록』 「백화도량발원문」, 균여 스님의 『일승법계도원통기』에는 ‘相’으로 쓰여있다. 내 직계제자 도신의 저술에도 ‘相’으로 나와 있지 않은가? 내 이름은 ‘義相’이다.”
▷스님께서는 당시 신라불교 1번지였던 황룡사가 아니라 황복사로 출가했습니다. 왜 황복사를 선택했습니까?
“황룡사는 원광, 자장법사를 거치면서 정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난 그런데 관심이 가지 않았다. 승·속이 운집해 조용히 공부하던 황복사가 내 성향에 맞았다.”
▷스님은 화엄의 종조로 천 수백년간 받들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화엄이 뭡니까?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인간의 지혜와는 다른 부처님의 지혜로 쓴 진리의 가르침이다. 이 경전에 뿌리를 둔 화엄은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간의 조화의 철학이기도 하다. 중중무진으로 얽혀 있는 화엄의 궁극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본래 부여받은 광명을 각각 남김없이 발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아름다운 장미도 길거리의 들풀도 그리고 온 우주가 생명의 환희에 차게 될 것이다.”
▷스님을 얘기할 때 흔히 원효대사를 떠올리는데 어떤 관계였습니까?
“원효 스님은 나보다 8년 선배로 고구려 보덕 큰스님으로부터 열반경과 유마경을 함께 배웠다. 또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계획해 고구려 판도였던 요동까지 갔다가 국경수비대에 붙들려 곤혹을 치른 적도 있다. 길은 조금 다를지라도 원효 스님은 내가 평생 흠모했던 분이었다.”
▷무덤에서의 하룻밤 후 원효대사는 큰 깨달음을 얻고 발길을 신라로 돌렸습니다. 그때 스님의 심정은 어땠는지요?
“솔직히 부러웠고 자괴감도 느꼈다. 그러나 남이 먹은 밥에 내 배가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애초 작정한 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라도 가야했다.”
▷한중일 삼국이 아직까지도 스님을 흠모했던 선묘를 기리고 있습니다. 부석사에 선묘각도 있고 일본에는 국보로 지정된 선묘상이 있을 정도라니까요. 그런데 어찌 그리 매정하게 선묘의 프로포즈를 거절했습니까?
“나는 도를 구하고자 이역만리 먼 길을 찾아온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다.”
▷매달리는 선묘에게 무어라고 하셨기에 선묘가 용이 되어서까지 스님을 돕고자 했던 것일까요?
“덧없는 사랑에 몸과 마음을 던지지 말고 불법에 귀의, 극락왕생하여 영겁을 함께 하자고 간곡하게 얘기했다. 그러니 선묘도 ‘세세생생 스님에게 귀의해 대승을 익히고 대사를 성취하도록 돕겠다’고 맹세했다. 참으로 고마운 인연이다.”
▷스님은 중국 종남산에서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 스님으로부터 공부를 하며 법계도를 완성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법계도의 저자 문제를 두고 중국은 지엄 스님이 지었다고 아직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스님이 지으신 것 맞나요?
“은사께서는 나를 처음 만나기 전날 동방에 뿌리를 둔 큰 나무가 가지와 잎이 무성해져서 중국까지 덮었고, 봉황의 집이 있어 올라가보니 마니보주 한 개가 있어 밝은 빛을 멀리서 비추는 꿈을 꾸셨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부족한 나를 지성으로 가르치셨고 나는 그 뜻을 받들려고 애썼다. 스승 지엄화상께서 없으셨다면 내가 어떻게 법성게를 완성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스님이 쓰셨으니 법계도 밑에 ‘의상’ 두 글자만 표기했더라도 중국이 이렇게 억지는 쓰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법조차 공(空)하다고 말했는데 공한 것에 어떻게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겠는가. 인연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법계도는 ‘법(法)’으로 시작해 ‘불(佛)’로 끝나는 210자의 정방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 가로 15자, 세로 14자의 그물을 이루고 54번의 굴곡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난해한 법계도를 만든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주의 진리를 담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산란한 마음을 집중시켜 사도(邪道)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길을 가도록 하기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법계도의 형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취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나의 진리인 것을 상징한 것이고, 많은 굴곡을 둔 것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가르침의 방편이 달라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 첫 글자인 ‘법(法)’과 끝 글자인 ‘불(佛)’ 두 글자는 각기 수행방편의 원인과 결과를 나타낸 것으로서, 이 두 글자를 중앙에 둔 것은 인과(因果)의 본성이 중도(中道)임을 보이고자 했다.”
▷스님께서 당나라의 침략을 미리 신라에 알린 것이나 비록 스님께서 거부는 하셨지만 문무왕이 왕실 사유지와 노복을 보시하려 했다는 점 등을 결부지어 스님의 화엄사상이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립시키는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는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때문인 것 같은데 여기에서의 일(一)은 어떤 절대적 개별체가 아니며 우주의 일체 만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동시에 그 하나 역시 일체 만상에 융합되는 조화와 평등을 강조한 것이다.”
▷스님 문하의 10대 제자 중 훗날 화엄사상을 주도했던 진정대사는 기층민 출신이라고 하던데요.
“우리의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과 귀함과 천함이 없다. 진정 스님은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이며 효자였다. 내가 소백산 추동에서 3000여 대중에게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한 것도 그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 때문이었다.”
▷스님께서는 관음신앙을 우리나라에 뿌리내리신 분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관세음보살님은 『법화경』에 주로 나오지 않습니까?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관세음보살께서 남방의 포탈라카산에 상주하면서 대비법문을 설하여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계시다. 신라에 관음신앙을 정착시키고자 했던 것은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우리 중생들의 고통을 관음의 가피력으로 덜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지을 때 아미타불을 동향으로 모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관세음보살께서 모시는 분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이시다. 나도 아미타부처님께서 계시는 서쪽을 평생 등지지 않고 항상 예배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그리 지었다.”
▷후대에 스님을 금산보개여래의 화신으로 보는 분들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요?
“나는 진리를 알기 위해 거센 파도를 헤치고 수만리를 오갔으며,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법을 위해서라면 내 몸쯤은 언제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 나는 여래의 화신이 아니라 올곧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평생 살고자 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속고승전』, 『삼국유사』, 허남진 외 『삼국과 통일신라의 불교사상』, 이기영 『화엄일승법계도의 근본정신」, 김지견 「의상의 법휘고」, 김상현 「신라 중대 전제왕권과 화엄종」, 해주 스님 「일승법계도의 저자에 대한 재고」, 정병삼 「의상의 화엄사상-성과와 과제」, 김호성 「저자의 부재와 불교해석학」, 고영섭 「의상의 통일학」, 「불교춘추」15, 「win」(1995.7) 등
의상법사 어록
“대원경지인 관음대성께 귀의하고자 합니다. 나의 전심전령이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있고 당신 또한 내 마음속에 항상 같이하여 주옵소서. 이 몸이 가루가 되고 모진 업보가 이 몸으로 더불어 다하게 될 때 천수천안 당신의 자비의 곁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백화도량발원문」 중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과 귀함과 천함이 없습니다. 열반경에 여덟 가지 깨끗하지 못한 재물에 대해 설했는데 어찌 왕실의 사유지를 가지며 노복을 부리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로 집을 삼고 발우로 농사지어 법신의 혜명이 이 몸을 의지해 사는 것입니다.”
「속고승전」
후대의 찬탄
“스님은 뛰어나고 존엄하며 언어는 웅장하고 통달하였으며 참으로 이른바 위엄이 있으면서도 거칠지 아니하였다” (신라 최치원)
“(의상은)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과 약소를 지어 일승의 핵심을 포괄하였기에 천년(千年)의 귀감이 될 만하기에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고려 일연 스님)
“의상은 원효에 비해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지만 동아시아를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의상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민영규, 사학자)
“의상의 정치사상은 종교 본연의 자세를 지키면서 위로는 능히 왕을 설득하고 아래로는 불쌍한 백성을 어루만졌다는 점에서 탁월한 종교사상가였다.”(김지견, 불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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