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에서의 선(善)의 상대화와 간화선(看話禪)의 절대화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학 교수
몇 년 전에, 오태양이 한국 불교사상 최초로 불교적인 신념을 근거로 병역거부를 선언했을 때에 필자로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제도권 불교의 반응이었다. 한편으로는 불교 윤리의 출발점이 불살생계(不殺生戒)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 권력이 듣기 싫은 소리를 애써 하지 않으려는 하는 그들은, 드디어 불교의 윤리를 제대로 지키겠다는 "진성 불자"가 나타났을 때에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공식적 입장 정리가 끝내 없었던 것으로 봐서는, 제도권 불교에서는 불교 윤리의 근본을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는 국가권력과의 유착의 줄을 끊을 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때에 침묵이 황금이라 할까? 그런데 비공식적으로 한국 승가 (僧伽)의 대표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양심은 불성(佛性)으로 표현되며 마땅히 존중되고 지켜져야 할 가치이지만, 병역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단지 자신의 의지와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다면 대한민국의 어느 누가 군대를 가려 하겠습니까?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불교의 불살생계는 무조건적으로 살생을 금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호국불교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신라 원광법사의 세속오계가 보여주듯 불교는 원칙적으로 살생을 금하고는 있지만 가려서 살생하는 살생유택(殺生有"�)을 또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보시와 희생은 보살의 첫째 덕목입니다. 나의 보시와 희생이 더 많은 이웃들을 살리고 평화롭게 할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불교를 실천하는 것이며 '하화중생(下化�\生)'의 길입니다" (국방부 군종실장 김말환 법사, 법명은 혜명)
여기에서 불자들에게의 살생 훈련 강요에 대한 해명은 세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 부분에서는, "국민"으로서의 의무 등 "종교적 양심"보다 우선돼야 하는 "세속적인 의무 관계"들이 강조된다. 굳이 불교적인 논리를 철저하게 따르자면 "국민"도 "국가"도 "환상이나 이슬이나 물거품이나 꿈이나 번개나 구름"과 같은 것이고, 국가가 강요하는 "의무" 수행에 따르는 편안이 잠시뿐인 반면 국가를 위한 살인에 따르는 악업이 쉽게 소멸되지 않는 것이긴 한다. 한데, 국방부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법사에게는 불교 그 자체의 논리는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닌 듯하다.
두 번째 부분은, 이미 태평양 전쟁 때 친일 승려들이 한국의 젊은 스님들을 전쟁터에 보내기 위해 자주 써먹었던 화랑의 세속오계와 호국 불교의 이야기다. 세속오계를 따를 사람들이 일반 민중이라기보다는 그 신분이 육두품으로 추측되는 장군 무은 (武殷)의 아들인 화랑 귀산 (貴山)과 같은 준(準)귀족, 즉 전쟁을 직업적으로 해야 할 위치에 있는 특권층이라는 역사적인 사실(김부식 지음, 이재호 옮김, <삼국사기>, 광신출판사, 1993, 718-720쪽)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고대사를 현대적 군사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리는 없다.
그리고 끝으로 세 번째 부분은, "전쟁이 바로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하는 중생 교화"라는, 보다 본격적인 폭력 옹호의 철학적 논리다. 얼핏 보면 이 부분이 불교의 왜곡으로 보이기만 한다. 아니, 중생에 대한 살해가 어떻게 중생 교화로 둔갑될 수 있는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와 같은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는" 도덕적인 상대성의 논리를, 국방부 군종실이 독창적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가 기득권 세력들과 유착한, 사변적이면서도 "의례" 중심의 거대 종교가 된 아쇼카 왕 이후의 인도에서부터, 귀족층 출신의 불교 사상가들은 이미 "선(善)의 상대성"을 가르친 일이 없지 않아 있었다. 예컨대, 북방 인도의 바라문 (성직자 계급) 가문 출신의 아상카 (Asa�ga, 無著: 기원후 4세기)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열반에의 도달의 지도서"인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 Yogacara-bhumi-sastra)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이 주목을 끈다:
"만의 하나에 보살은 재산을 탐내어 많은 중생을 죽이려는 도적이나, 덕망이 높은 승려, 정진을 하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聲聞), 혼자서 깨달음을 이룬 이(獨覺) 내지 보살을 해치려는 악한, 그리고 또 최악의 지옥으로 떨어질 만한 어떤 악업을 지으려는 악인을 보거든, 다음과 같이 발심하여 생각한다: '내가 이 악한 중생의 목숨을 끊는다면, 결국 지옥에 떨어져 쉴 사이 없이 큰 고통을 받게 돼 있다. 그런데 차라리 내가 그를 죽여 지옥에 떨어져 쉴 사이 없이 끝 없는 고통을 받는 편이 낫다'. 보살이 이렇게 흔쾌히 생각하여 그 악한 중생을 대할 때에는 착한 마음, 내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마음 (無記心)으로 대한다면, 그리고 이 일이 불가피한 줄 알고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 자비스러운 보살핌의 마음으로 그 악한 중생의 목숨을 끊는다면 이와 같은 인연이 보살의 계율이 위반되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공덕을 쌓게 한다" <"유가사지론", - <大正新修大藏經>, 제30권: T1579.30. p0517b09-17. >
"의롭고 불가피하다"고 생각되어지는 폭력은, 이 경전에서는 "필요악"도 아니고 "선" (善)이자 공덕이 된다. 일정한 조건을 전제해놓고 "의롭다"고 판단되어지는 폭력을 정당화, 미화하는 것은 꼭 제도화된 불교만의 특징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국가적 위치에 도달한 거의 모든 거대 종교 집단들은 이와 같은 논리를 취하게 된다. 기독교만 해도, 4세기초에 로마 제국에 의해 공인된 뒤에 비전론 (非戰論: 전쟁 반대론)에서 의전론 (의전론: "의로운 전쟁" 옹호론)으로 입장을 선회하지 않았던가?
서방 기독교의 교부 (敎父) 중의 한 명인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도 그의 역저 <신국론> (神國論)에서 전쟁이라는 현상을 개탄하고 평화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하면서도 "전쟁하는 이들도 결국 평화를 갈구하는 것이 아닌가? 전쟁의 끝에 결국 평화가 오지 않는가? 그리고 의롭지 못한 평화의 상황보다 의로운 전쟁이 더 나을 때가 있지 않는가"와 같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전쟁이란 "절대악"이라기보다는 이 세계 질서의 "불가피한 일부분", "의로운 목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물리력의 사용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제19장) Schaff, Philip, < St. Augustin's City of God and Christian Doctrine>,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0, pp. 1273-1290:)
아우구스티누스는 같은 방법으로 노예제도도 "인간의 원죄로 인한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합리화하고, "주인을 섬기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공포에 의해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 충정으로, 충직하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편이 낫다"고 노예들에게 충고(?)하기도 한 사람이다. 그런데 종교 집단의 국가적인 "제도화"에 의한 폭력 관련의 태도 변화란 세계종교사의 보편적인 현상이라 해도, 불교의 경우에는 이 태도 변화는 또 원래의 불교 교의의 몇 가지 특징으로 인해서 비교적으로 쉬웠다. 한편으로는 이상적인 목적 (해탈)을 얻기 위해 관련자들의 근기 (根機)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수단, 즉 방편들이 동원될 수 있다는 불교의 "방편론"이 일종의 "대중 영합주의"의 가능성을 늘 열어두는 부분이 있었다. 만약 대중 근기의 수준이란 아직까지 살인이 보편화되어 있는 저(低)수준이라면 불교도 이 상황을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방편론"으로부터 쉽게 파생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의 업설(業說)이 잘못 해석될 경우, 살인자가 되거나 피살자가 되는 "인연"이 늘 "과거의 업"으로 설명되어 "불가피한 일"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전쟁을 "불가피한 일"이라고 봤듯이.
인도에서 "기록"보다 "기억"을 중시하는 문화가 특히 고대에 강했기에 불경(佛經) 이외에는 인도 승가 역사 관련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비교적으로 이른 시기의 인도 불교 풍토에 대한 기록 중의 하나는 장안의 스님 법현(法顯: 4세기말-5세기초)의 구법(求法) 여행 일기다. 아직 중국에서 완성되지 못한 계율 관련의 문헌을 그 본고장에서 구하겠다는 열정으로 불탔던 법현은, 399-414년에 실크로드를 따라 북인도에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 부처님의 성지를 두루 순방하고 현지에서 계율 학습을 한 뒤에 자바를 통해 남방의 수로 (水路)로 남중국에 돌아왔다.
그 시대치고는 거의 "세계 일주" 격인 이 여행의 일기인 <법현전> (法顯傳, < 歷遊天竺記"�>라고도 알려져 있음)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Bodhgaya)이야기를 한 뒤에 그 당시에 그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듯한 한 가지 전설을 전한다. 그 전생에 아쇼카왕이 아기 때에 한 번 가섭(迦葉: Ka�yapa) 부처님(과거 시대의 부처 중의 한 분)에게 공양을 드린 공로로 앞으로 몇 번 태어난 뒤에 이 세계를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겠다는 수기(受記), 즉 약속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결국 후생에서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쥔 아쇼카왕은,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지옥에서 악인을 처벌하듯이, 온 세상을 다스릴 자신도 악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인공 (人工) 지옥"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가 중생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는 가혹한 사람을 고용하여, "지옥"으로 지정된 특별한 건물 앞에 나타나는 사람을 다 업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할 "악인"으로 간주해 체포하여 고문해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죽이기를 명령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건물 앞에 맨 처음에 나타난 사람이 다름이 아닌 한 스님이었다. "인공 지옥"의 관리자들이 그를 체포해 고문해서 죽이려 했었는데, 죽을 만큼 겁을 낸 그 스님이 제발 마지막으로 점심을 먹게만 해달라고 빌었다. 관리자들은, 스님에게 점심을 먹을 참을 주기로 하고, 그 대신에 또 다른 사람을 마구 붙잡아 커다란 절구에 집어넣어 그 몸을 돌공이로 쳐부수어 그 절구에 빨간 거품이 나오도록 했다. 사람의 살과 피가 이렇게 빨간 거품으로 변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스님은, 갑자기 그 순간에 삶도 죽음도 결국 고통일 뿐이라는 진리를 깊이 깨달아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아도 될 아라한(阿羅漢)이 됐다. 결국 그도 고문을 당하게 됐는데, 들끓고 있는 뜨거운 물로 고문을 당하는 중에 갑자기 각종의 영험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문 기술자들이 아쇼카왕에게 이 일을 알려 왕이 직접 고문실로 찾아갔는데, 스님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에게 불교를 설법했다. 이 설법에 감동되어 불자가 된 아쇼카는, "인공 지옥"을 부수고 자신의 죄업을 회개했다 "법현전", - <大正新修大藏經>, 제51권: T2085.51.pp0863b18-c20: 영문 번역: James Legge (trans.), , Oxford: Clarendon Press, 1986, pp. 90-93.
물론 전설은 전설일 뿐, 교리서도 계율서도 아니다. "죄인에서 현자가 된다"는 것은 세계 보편적인 전설의 줄거리이며, 여기에서 "인공 지옥의 고문실"이란 죄과의 극단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수사(修辭)로 이해될 수도 있다. 회개 이전의 아쇼카의 죄과가 극단적인 만큼, 회개 이후의 그의 공덕 역시 무궁했다는 것은, 그의 덕을 입은 인도 승가의 주장이 아니었던가? "극단적 죄업"과 "무궁한 공덕"은 여기에서 전형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세계 보편적인 "전설 만들기"의 테크닉 이외에도 이 스토리에 "악"의 문제에 대한 불교 나름의 철학도 개입된 듯하다. "인공 지옥"을 건설하여 단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무고한 백성들을 고문으로 잔혹하게 죽이는 것은 "극악"이지만 이와 같은 권력자가 회개하여 그 막대한 재원으로 불교의 후원자가 되기만 한다면 과거의 악업은 얼마든지 소멸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즉, "권력" 그 자체의 내재적인 문제성을 짚는 것보다는, 불교 철학자들은 불교 진흥의 "방편"으로서의 권력에 그 호의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권력도 하나의 "방편"이지만 권력이 저지르는 악행, 즉 "돌공이로 몸을 쳐부수는" 그 처참한 고문도 스님을 깨닫게 만드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깨달을 만한 "업"을 타고나지 않았던 한 사람이 이미 그 돌공이 밑에서 "빨간 거품"으로 화하여 비명에 돌아갔지만, 일단 그의 고통이 "전생의 업이 좋다"고 생각되어지는 스님의 깨달음의 발단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스토리는 "해피엔드"다. 고문이라는 "방편"이 깨달음을 촉발시켰고, 고문의 피해자도 스님도 아쇼카왕도 각자 그 인연, 그 업대로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대체로 통속화된 4-5세기의 인도 불교에서는 폭력의 문제를 이와 같은 "방편론적" 시각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었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 국방부 군종실에 고용된 법사의 "보살도(菩薩道) 연장선상의 전쟁론"도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는가? 전쟁의 "악"이 보살도 실천이라는 "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편적 성격의 악'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글쎄, 그렇게 믿어야 1500년 전의 인도에서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도 살기가 편하고 좋다.
그러면, 초기 불교 같은 경우에는 "방편론"과 "업설"이 남용, 악용되는 일들이 있었는가? 초기 불교 문헌들이 후대의 불제자 손에서 만들어진 만큼 부처님의 "진짜" 행동과 말, 그리고 후대의 가탁(假託)을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현존하는 텍스트로 봐서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끝없이 이상주의적인 "해방에의 의지(意志)"와 현실 순응주의적인 "방편론적 현실 수용"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인과 노예 간의 "사랑"을 전제로 하여 긍정을 한 노예 제도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를 보자. 한편으로는 부처님이 인신매매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최초의 종교인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증지부경전(增支部經典 A�guttara-nik�ya: 한문 대장경의 증일이함경: 增一阿含經)에서는, 독약, 술, 칼, 짐승을 사고파는 행위와 함께 인간을 사고파는 행위를 승속(僧俗) 모두에게 엄금했다 "Upàsakavaggo",-,5:18:
자신의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한 때에 "악인"으로 알려졌다가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 제자의 제1 결집을 후원하기도 했던 아사세왕 (阿?世王: Aj�ta�atru)에게 승려 생활의 공덕을 설명할 때에 부처님이 그에게 "당신의 노예로서 당신의 안색이나 겁이 섞인 눈으로 살피면서 눈치를 봤던 이가, 굴종의 생활에 지쳐 숲속으로 달아나 거기에서 덕망이 높은 수행자가 되어 당신 앞에서 다시 나타난다면 당신이 그를 종전의 노예 격으로 대접할 것인가, 덕이 높은 고승으로 대접할 것인가"라고 물어, "나의 궁전을 떠난 종전의 종이라 해도 이왕 덕망이 높은 수행자가 된다면 수행자로서 존경스럽게 대접할 것"이라는 답을 얻어낸다 "Samaññaphala Sutta", -
부처님이 원칙상 속량(贖良)되지 않는 노예들을 자신의 교단의 승려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처럼 "숲 속으로 도망친 임금의 종"을 "영적인 성공"의 사례로 들 만큼 그 비참한 형편을 벗어나려는 노예들의 움직임에 동정적이었다. 그가 태생적인 신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을 차별하려는 바라문에게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시오, 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믿음이 깊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마음으로 행동을 삼가면 고귀한 사람이 되는 법이오"라고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불을 섬기는 사람 순다리카", - 법정 옮김, <수타니파타>, 이레, 1999, 163쪽.)
그런데 그렇다고는 그가 노예제도와 같은 인신 예속을 근간으로 했던 그 당시의 사회, 정치 체제에 직면으로 맞서려 했던가? 만약 초기 불경의 자료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가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필요할 때마다 종전의 사회제도를 "방편" 삼아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용하기도 했다. 예컨대 암밧다(阿摩': Ambattha)라는 이름의 젊고 말이 거친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그에게 함부로 대하자 부처님이 자신이 속하는 순혈(純血)의 크샤트리야(刹帝利: 전사와 정치적 지도자들의 계급)계통이 바라문보다 더 존귀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신이 속하는 석가(釋迦) 가문이 왕족으로부터 발생되어 바라문 암밧다 가문보다 전통적인 혈통의 위계 질서에 훨씬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조목조목 했다고 한다.
후대의 가탁(假託)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최소한 이와 같은 방식의 이야기를 초기 불교 집단에서 부처님에게 가탁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모든 계급과 가문, 혈통의 상대성을 다 파악한 부처님이 가문 자랑을 했다 하니 못 믿을 독자들이 있겠지만 결국 이와 같은 전통적 질서에의 호소는 바라문 암밧다의 오만한 기를 꺾어 그를 부처님의 착한 제자로 만들기 위한 "방편"인 셈이었다 T.W.Rhys Davids & J.E.Carpenter (trans.),
이외에도 부처님이 초기 불교 문헌의 곳곳에서 현실적인 필요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계급인 크샤트리야가 하급 계급인 바이샤(Vai�ya: 농민과 수공업자, 상인)나 수드라(拔dra: 노예, 천민)보다 존귀하다는 "통념"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노예에 대한 주인들의 "자비스러운 태도"를 요구하면서 노예제도 그 자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Kwangsuu Lee (이광수),
물론 "방편으로서의 선택적인 순응"이라 해도, 승려들의 폭력 행위에의 가담이나 재산, 노예의 소유 등의 최악의 현실이나마 실천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부처님과, 예컨대 노예, 토지 소유와 승병(僧兵) 조직을 "당연지사"로 알았던 제도권의 고려시대의 승려들[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지음, 신현숙 옮김, <한국불교사>, 민족사, 1987, 123-176쪽.] 사이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부처님은 "해방적 이념"을 제시하면서도 부단히 그 실천의 방법으로 타협적인 "방편"들을 선택하곤 했지만, 고려시대의 주요 거대 사찰의 승려들에게도 오늘날의 한국의 "주류" 승려에게도 석화된 교학(敎學) 공부나 "세속으로부터의 영적인 도피"쯤으로 전락된 개인적인 "깨달음" 이외에는 어떤 "해방적인 이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타협"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라는 공동 분모는 분명히 있다.
오늘날의 폭력적인 현실을 연기론(緣起論)적으로 과거의 인(因)에 의해서 발생된 과(果)로 인식하게 하는 "업설"도, 그 최악(最惡)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방편적으로 "차악" (次惡)을 임시적으로 인정하여 이용하는 지혜도, 분명히 불교의 태생적인 장점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단점들은 바로 우리의 장점들의 연장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이것은 바로 불교에 그대로 해당되는 이야기다. 수행자를 특권화시키는 인도의 종교 문화 풍토에서는, 현실에 대한 "방편적" 수용을 전제로 하는 종교 운동은, 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모으는 "정신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국가/지배체제와 유착할 여지를 언제든지 갖고 있었다. 문제는 그 운동을 지휘하는 "스승"의 의지이었다.
부처님 자신과 그 직접 제자의 일부, 그 뒤를 이은 일부의 수행자들은 불평등과 폭력이 없는 승가 사회의 건설과 불평등, 폭력으로부터의 속인들의 탈출을 염원했기에 초기 불교에서는 그 시대로서 보기 드문 "해방적 색깔"은 뚜렷했다. 바로 이 "해방적 색깔"은 민중 사이에 불교가 빨리 인기를 얻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에의 의지"를 갖고 있었던 초기의 지도자들이 가고 없어진 뒤에는, 현실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방편론" 등이 불교의 발 빠른 "국가 종교화"의 밑바탕이 됐다. 그 뒤에는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불교 교단의 현실적 순응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그 이론적인 "뼈대"는 그대로이었다. 즉, 법현 등의 중국 구법승(求法僧)들이 목격한 소작인들을 부리는 부유한 인도 사찰들의 권위주의적 승려들[Kwangsoo Lee,
결국, 국가의 기미에 거스른다고 해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진실된 불자다운 실천까지도 국가가 바라는 대로 불인(不認)하는 승단(僧團)의 태도를 고치려면 재가 신도로서 어떤 마음가짐과 이론적인 기반이 필요할 것인가? "교황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 (More Catholic than the Pope) 되려고 한다는 것이 서구에서 지나친 종교열(熱)을 조소하는 속담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부처님의 후대의 제자는 물론, 부처님 자신보다도 부처님이 제시하신 근본적인 원칙에 충실해야 할 듯하다.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가장 근본적인 "룰"이 무엇인가? 우주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쉴 사이 없이 달라지고 바뀌고 탈바꿈되는 만큼 불변적이며 고정된 대상물이란 우리의 착각이라는 법칙 ("제법무상": 諸法無常)이고, "나"라고 상상되어지는 주체 역시 갖가지 요소와 인연의 일시적 합침으로 만들어진, 늘 고통을 받고 있으며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법칙 ("무아": 無我) 등 두 가지이다.
대상도, 주체도 고정돼 있지 않는, "인연"의 추이에 따라 늘 유동적으로 바뀌면서도 "고통"을 면하기 어려운 속세에서는, 어느 누구의 이름으로도 자신과 남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안겨주면 안된다. 어떤 국가, 단체, 운동이 "폭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결국 나중에 그들의 이념이 허구로 밝혀질 것이고, 그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로운 고통을 추가시킨 것은 결국 "악인"(惡因)이 되어서 폭력자를 비롯한 모두들에게 "악과"(惡果)를 가져다줄 것이다. 민중을 수탈 기구로부터 방어하는, 진보 운동가로서 특정 상황에서 면하기 어려운 "민중 방어적 폭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피한 차악(次惡)이 될 수 있어도 선(善)이 될 수 없기에 "방어적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그 폭력의 악과(惡果)를 인식하고 그 정지를 열심히 탐구하는 길 밖에 좋은 길이 없을 것이다.
"민중 방어적 폭력"도 "출구"를 급히 구해야 하는 "길이 막힌 골목"이지만, 더더군다나 자본이 부추기는 경쟁이나 국가가 유지시키고 훈련시키는 군대 등 억압적 성격의 상설의 폭력 기구들은 "악인" (惡因) 이외에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국가 특히 군대 당국 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의 원인 제공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교,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 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자비", - 법정 옮김, <수타니파타>, 59쪽.]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할 하등의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부처님께서 기존의 사회 질서와 타협하신 부분, 현실에 순응하신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이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고, 귀족 출신 남성으로서의 부처님 자신의 한계다. 이 한계는 부처님의 기본 교리와 충돌되는 경우에는, 우리는 그 근본 교리의 쪽을 선택하여, "악의 씨"인 제도화된 폭력으로서의 국가,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자본에 대한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할 명분과 필요가 있다.
불교 교단이 부처님의 원리의 진실된 실천자가 되려면, 양심적 병역거부라든가 부처님 자신도 주장하셨던 평등한 분배의 전제 조건인 부유세 도입, 그리고 최악의 고통인 고질적 불안감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는 고용의 비정규화에 대한 반대 투쟁과 대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아힘사(ahimsa: 비폭력)은 자본주의적 국가 사회의 제도화된 폭력의 무저항적 수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아힘사는, 제도화된 폭력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이다. 부처님과 그 후대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투쟁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한 사실은, 그들의 가르침의 정신을 배반하는 그들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이 잘 알다시피, 위와 같은 일들을 한국의 제도권 승단이 해나갈 확률은 0,0%다. 왜 그런가? 지배 체제와의 유착의 전통도 문제지만, 지금 "정통"으로 취급되고 있는 수행법(修行法)에도 문제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은 신라말기의 가지산문(迦智山門)과 같은 선종(禪宗) 계통의 종파를 그 법통의 출발점으로 여기고, 고려말기의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가 주로 이용했던 간화선 (看話禪)이라는 독특한 수행법을 수행의 "정통"으로 인정한다. 즉, 대한민국의 최대의 종단이 "불교"라고 내세우는 것은, 부처님 자신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중국과 신라, 고려, 조선 선사(禪師)들의 해석이다.
선(禪)은, 궁극적인 진리인 "깨달음"을 개개인의 내면 속에서 구하려는 차원에서 의례나 교조적 교학(敎學) 등을 초월하려는, 극단적으로 개성적이며 내향적인, 어쩌면 전근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띤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 (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殺佛殺祖)는 선(禪)은, 말 그대로 그 원리원칙상 파격적이며 우상파괴적이다. 우상파괴적인 만큼, 형식과 교조(敎條)에 지친 당나라의 지식인 사회에 선(禪)이 새로운 바람을 넣을 수 있었고 동아시아 전(全)지역에서 오랫동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문제는, 선(禪)이 "안으로"만 향하는 만큼, "바깥"에 대한 뚜렷한 주의주장이 없으며, 대체로 "바깥"의 상황을 "내면"에 비해 훨씬 덜 중요한 것으로 평가한다. "바깥"을 향한 "자비"에 대한 부처님의 강조는, 선(禪)에서는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사들이 "바깥"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은, "바깥"의 부조리한 점들을 인식해서가 아니다. "깨달음"의 절대적인 우선 순위를 믿고 있는 선(禪)은, "바깥"의 폭력적인 질서를 아쇼카 이후의 승가의 (왜곡된) "전통"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즉, "안"에서의 절대적인 "깨달음 추구"와 "바깥"에서의 권력 관계에 대한 절대적인 순응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선(禪)이 국가 종교와 같은 위치에 오른 송나라(960-1279) 시대에 사대부층 후원에의 의존과 국가와의 유착은 거의 절정에 달했다. 선종 사찰에서 관례상 주기적으로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성(祝聖) 의례를 행하고 송나라 군대의 전승을 기원했는가 하면, 한국의 선사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던 대혜 (大慧, 1089-1163) 스님과 같은 고승들이 "충군애국" (忠君愛國)과 불교의 깨달은 마음, 즉 보리심(菩提心)이 같은 것이라고 인식하고, 금나라와의 지속적인 전쟁을 주장하고(주전론: 主戰論), "윗사람에 대한 공경"과 같은 유교의 전통적 사회 질서를 수행자가 당연히 여겨야 하는 우주적인 법칙인양 받아들였다.
즉, 대혜는 내면의 공간에서의 개인의 창조적인 영적인 추구를 주장한 반면 "바깥"에 대한 한 개인의 사회에의 절대적인 순응을 당연시했다. "안"에서는 "영적인 혁명"이 추구됐지만 "바깥"에서는 개인이 사회와 국가의 요구에 그대로 응하는 것이었기에 이는 현실적으로 참 "편안한 혁명"이기도 했다. 대혜의 수행법인 간화선은 화두(話頭)라는, 모든 지식과 분별이 결국 다 공허하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수수께끼"에 대한 참구(參究: 모든 힘을 집중시키는 내면적인 탐구)를 의미했었는데, 그 화두 참구의 목적은 사리분별, 즉 사변적인 사유를 끊고 더 이상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믿음"으로 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승려뿐만 아니고 속인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민주성"을 특징으로 하긴 하지만, 사변적 사유의 극복을 필요로 하는 사회 계층은 일차적으로 유산계급의 유식층이었다[조명제, <고려후기 간화선 연구>, 혜안, 2004, 35-96쪽.].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탈 기구에 몸을 담고 또 한편으로는 화두 참구를 "영적인 취미" 삼아 행했던 12세기 송나라의 사대부들은, 부처님의 무(無)계급적인 "자비"의 실천과 이미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지극히 계급적이면서도 일종의 "정신적 유희"의 성격을 가진 저들의 불교는, 이미 초기 불교라는 원형에 비추어봤을 때에 "불교"라 하기도 어려웠다. 문제는, "바깥"에서의 교화와 거의 무관하다 싶은 간화선과 같은 수행법들이 고려말기에 한반도에서까지 지배적인 위치를 공고히 하여, 조선조를 거쳐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오늘날에 와서 조계종단에서 "공식 이념"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국가의 '국민적' 질서에 안주(安住)하고, 사찰의 경제적인 문제들을 기복적인 의례와 유산층의 기부 등 각종의 자본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해결하고 있는 조계 종단 등의 "주류" 종단들은, 송나라의 귀족적인 간화선을 내세워 "문화 자본"을 획득하기도 하고, 민중의 욕구들을 계속 외면할 수 있는 "수행에의 전념의 필요"와 같은 명분을 얻기도 한다. 불교가 보살펴야 할 중생, 즉 노동자나 영세민들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무한 경쟁의 지옥에 떨어져 신음을 해도, "용맹정진"을 내세우는 주요 종단들의 "원로", "중진"들에게 이는 관계없는 일이다. 일단 "무엇보다 먼저 깨쳐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부처님이 설하신 "자비"의 윤리를 상대화시킨 반면 송나라의 귀족적 승려들의 "영적인 유희"를 절대화시킨 오늘날의 종단 불교에 과연 미래가 있는가? 필자는 없다고 본다. 지금 전쟁과 경쟁의 나락으로 이끌려가는 이 사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산 것들이여, 편안하라, 안락하라"의 적극적인 대타적 원력 (願力)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수행 원리로서의 선(禪)은 필요하다 해도, 불자의 궁극적 목적은 신비화된 "깨달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행복이다. 부처님의 원리원칙과 초기 불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재가자 위주의 새로운 민중적 불교를 석화된 "전통"과 무관하게, 백지(白紙) 상태에서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짐이 될 뿐인 "전통"들이 폐기돼야 살아 숨쉬는 불교가 거듭날 수 있다.
출처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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