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기돗발"이 정말로 꼭 "세야" 하는가?

slowdream 2008. 1. 25. 14:38
 

              "기돗발" 정말로 "세야" 하는가?

 

                       박노자 /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에 대한 관대한 냉소"라 해야겠다. 사회악을 이야기해도 통상적인 반응이 "이것이 인간 본성의 문제 아니냐"는 식이지 않은가? 전쟁에 대해 대개 "인간의 공격적인 본능"을 들먹여 당연히 여기려 하고, 축구 월드컵이 상징하는 상업화된 대형 스포츠에 대해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성을 축제로 돌린다"고 하여 옹호하고 예컨대 유명 가수 신해철이 이번 월드컵 옹호의 논리를 그렇게 폈다(김지연 기자, "신해철 "월드컵 첫골 선수에 평생 '님'자 붙이겠다"", - <스타뉴스>, 2006년4월11일).


심지어 성매매와 같은 "경제력에 의한 강간"까지도 "남성의 성욕을 분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기도 한다. 물론 양성평등의 논리가 어느 정도 기반을 확보한 오늘날에 와서야 "남자의 배꼽 밑의 일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느냐"는 식의 이야기라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전쟁이나 스포츠에 대해서는 "좋든 싫든 인간으로서 하게만 되는 일"이라는 통념이 그대로 강해만 보인다. 전쟁을 할 "합법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국가라는 조직에게 세금 바치라 할 때에 바치고 살인 훈련(군복무)을 하라 할 때에 그 훈련을 순순히 하는, 월드컵이 도래하기만 하면 텔레비전의 화면에 달라붙는 '나' 자신에 대해 관대하게 봐주고 싶기 때문인가? 아니면, 폭발력이 큰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생각조차를 회피하려는 "안일에의 지향" 때문인가? 인간의 본성을 분명히 선한 것으로 보고 전쟁이나 경쟁을 적어도 당위적인 차원에서 죄악시했던 유교에 대한 기억이 이미 까마득하게 된 "덕분"인가? 어쨌든 과거의 '친일파'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당장에 도덕군자가 되어서 "훼절"을 준엄하게 꾸짖는 사람들은, "인간 본성론" 펴기만 시작한다면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 그 이상으로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전쟁이나 스포츠와 함께 대개 거의 당연시되는 또 하나의 현상은 기복적인 종교 신앙, 예컨대 불교계에서의 "신통력"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이다. 입시 시절에 기도객의 인파로 붐비는 대구 갓바위 기도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우리가 놀라기라도 하는가? 7년 전처럼 "돈이 되는" 기도 도량을 놓고 유혈 충돌을 빚는 불교계의 파벌 싸움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지 몰라도, 약사여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정도야 우리에게 거의 불교의 대명사다. "기돗발이 센" 사찰이나 스님 이야기를 들으면 찾아가서 기도해볼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게 우리 전통 불교"라고 생각하여 "전통의 상업화"만을 한탄하는 "지식인형 불자"들이 있을 것이다. 불상, 제사, 기도가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을 지경이다. "안식처를 찾으려는 마음이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전쟁이나 스포츠와 마찬가지로,"신통력" 신화까지도 우리의 통상적인 "인간 본성론"의 일부분이 된다.


계급 형성의 맹아가 북돋우는 인간 집단들이 재물을 놓고 서로 살육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신앙과 기도를 통한 개인적, 사회적 공포심의 "순치" (馴致)도 원시 시대에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도 엄연히 사실이다. 한국사만 해도, 만약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을 믿는다면, 3세기의 고구려인부터 만물을 탄생시켜주고 포용해주고 도와주는 생력(生力)의 여신, 즉 수신(隨神)을 믿어 10월마다 하늘의 남신과 물과 땅의 여신인 수신에게 동맹제라는 형태의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오늘날 자비의 여신으로 취급되는 관세음보살에게 소원을 비는 모양이나, 고구려인들이 수신에게 풍년을 감사하고 다산(多産)과 풍족을 빌었던 모양이 본질적으로 그렇게까지 다른가? 물론 고구려인들이 어디까지나 "모두들의 행복"을 빌었을 테고 우리가 경쟁적으로 각자의 "성공"을 비는 것이야 다르지만, 기도의 "신통력"에 대한 믿음 그 자체는 "전통"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한국 불교의 전통"이라고 할 때에도 솔직히 별다른 반박을 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신라 불교 공인의 시말(始末)을 한 번 들여다보자. 이 텍스트를 관통하는 코드는 딱 하나, 바로 "신통"이다:


" 처음 눌지왕 때(417-458), 중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왔었다. 그 곳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를 편히 있게 했다. 이 때 [중국]의 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주었으나 임금이나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관리에게 향을 주어 여러 곳을 다니며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말해주면서 ‘이것을 태우면 향기가 피어나고, 그 정성이 신성(神聖)한 곳에 이르게 되오. 소위 신성이란 3보(三寶)를 일컫는 것이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요, 세째는 승가(僧伽)라오. 만일 이것을 태우며 원하는 바를 기원하면 반드시 영험 (靈驗)이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그 때 왕의 딸이 병으로 위독했었다.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태우며 서원하게 하였다. 왕녀의 병이 치유되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묵호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 [법흥왕] 때에 이르러 왕도 역시 불교를 흥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불교를 믿지 않고 반대가 많았으므로 왕도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근신 이차돈이 (�) 왕에게 ‘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분분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소서’라고 말했다. 왕은 ‘본래 불도를 흥하게 하려는 것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차돈은 ‘만약 불도가 시행된다면 소신이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요즈음 중의 무리를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이는 영원히 진실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들을 방치한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저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차돈은 홀로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들어보면,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강경하여 이를 꺾지 못하겠고, 너만이 혼자 견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두 편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형리로 하여금 그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을 앞두고 말했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의 영험이 있다면 내가 죽고나서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피가 솟아 나왔는데, 그 색깔이 젖빛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하였다."

           

향의 영험, 삼보의 신성, 공주 병의 신비스러운 치유, 순교가 불러일으킨 기적… 물론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의 국가적인 공인을 강행한 왕은 단순히 "기적"들을 보고 외경심을 느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귀족 집안마다 다 "하늘에서 내려온 위대한 조상의 후예"임을 자칭했던 그 당시의 신라에서 귀족들을 제압하여 왕실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구조의 기반을 다지자면 귀족들의 조상은 물론, 하늘까지도 능가하는 "최고의 신성"이 왕실로서 절실히 필요했다. 범천(梵天)과 같은 하늘 신들이 붓다를 옹위하고 그 설법을 듣고 귀의하는 불교야말로 신라의 자칭 "천손" (天孫)들을 제압하기에 좋은 종교이었다.


그런데, 한 종교의 위대성이 꼭 "영험", "기적적인 병 치유", "순교 직후의 기적" 등으로 재단되고 평가되는 사실에 유의해주시기를. 고대인들에게 "종교"란 바로 "신통"을 의미했는데, 불교의 도래가 그 고정관념을 바뀌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킨 셈이다. 붓다가 어느 하늘 신보다도 더 "영험이 많은" 신으로 인식되고, 승려들이 기존의 무속인에 비해 "신통력"이 더 강한 천인간(天人間)의 매개자로 자리매김됐다. 특히 7세기 중엽 이후부터 도입이 된 밀교의 승려들이 "최강의 도력"으로 이름을 날리는 모양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다면, 7세기의 유명한 신라 왕족 김양도(金良圖)가 어린 시절에 전신마비와 같은 병을 얻었을 때에 무당이 도움 되지 못해도 밀교의 명승 밀본(密本)이 대력신(大力神)과 천신(天神)들을 총동원하여 병마를 내쫓았다. 자장, 원광, 의상, 원효 등 신라 초기의 고승부터 고려후기, 조선초기의 승려까지 그 전기들을 보면, "신이"(神異) 기록이 안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평생 일으킨 기적이란 없다 해도, 적어도 어머니의 태몽에 신비스러운 스님 한 분이 나타나는 것은 "기본"이었다. "신이"가 거의 고승대덕의 "자격증"쯤으로 인식된 것은 한국 불교 전통임에 틀림없다.


과연 스님들이 "머리를 깎은 큰 무당"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민들의 소박한 "소원 빌기" 욕망을 방편 삼아 불교를 민중 속으로 유통시키려 해서 그랬을까? 물론 그러한 부분도 있었다. 사실, 현실적인 "이득" 중심의 "소원빌기" 차원뿐만 아니라, "신이"는 민중적 영웅으로서의 민중 불교 승려의 이미지를 그리는 하나의 "서술 언어", 비유의 언어이기도 했다. 예컨대 그 유명한 원효(617-686)의 스승격이었던 승려 혜숙(惠宿)을 생각해보자. 한 때 화랑이었다가 나중에 민중 속으로 들어가 정토 신앙을 유포시키는 데에 주력하게 된 그는, 사냥 중의 국선 구참공이 살생유택의 지혜를 무시하고 무고한 동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죽이는 것을 보다 못해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소반에 올려 구참공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죽이는 것을 몹시 즐기고 남을 해치고 자신의 몸만 키우는" 구참공의 불인 (不仁)을 나무란 것이었다. 다리 살을 베어 올렸다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신비스러운 초인(超人)에 대한 찬양에 더 가까운데, 여기에서 비현실적인 상황을 설정한 이유는 살생을 즐기는 잔인한 지배자와, 자기를 해치면서라도 남을 보살피려는 민중적 승려의 대조적인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고대, 중세의 민중은 기복적인 성격의 "신이"도 필요로 할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의 뜻이 담겨져 있는 신이담(神異談)을 즐겼다. 예컨대 혜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진평왕(眞平王)이 [혜숙의 신이한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서 자는 것을 보고 사자는 이것을 더럽게 여겨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7, 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혜숙이 대답한다. '성 안에 있는 시주(施主)집에 가서, 칠일재(七日齋)를 마치고 오는 길이오.' 사자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니 또 사람을 보내어서 그 시주집을 조사해 보니 그 일이 과연 사실이었다."


군비 확장을 도모하고 백성들을 토건 공사와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 등으로 괴롭혀온 진평왕(579-632)을 "도력"을 통해 골탕 먹인 셈이었다. 노동력, 군사 동원에 시달려온 백성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신이담들이 얼마나 통쾌하게 들렸겠는가? 그런데 "도력"을 통해서든 일반적인 방법으로든 권력자와의 "한 자리"를 거절한 고승대덕이 1945년 이후의 한국 불교사에 많은가? 자본주의의 피해자인 농민과 도시 빈민 중에서 불교 신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6세기말 - 7세기초의 혜숙, 혜공, 대안 등의 민중 승려만큼 피해자들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지금 한국 불교 교단에 있는가?


물론 고대, 중세 불교에서의 "신이"의 강조는 불교의 대중화와 관련이 있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현세적 이득을 위한 기복만이 민중이 선호한 유일한 "신이"는 분명히 아니었다. 또 고대, 중세의 민중 불교의 방법은 꼭 "신이"에만 머무르지도 않았다. 서민 사이에서의 포교를 원효처럼 춤과 노래로 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신이"의 주된 "수요자"는 사실서민보다도 왕실이었다. 통일 신라나 고려의 왕실의 권위는 상당 부분 불교의 기복적인 의례에 의존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궁중의 기복 의례 중의 상당부분은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불교와 거의 무관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고려시대에 147차례나 궁중에서 열렸던 가장 대표적인 국가적 기복 의례인 소재도량(消災道場)은 별들의 "나쁜 영향"으로 인해서 발생된다는 천재이변을 주문을 외워 막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주된 문헌적 근거로 당나라 때의 위경(僞經)으로 간주되는 "불성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재일체재난다라니경" "佛說大威德金輪佛�熾盛光如"硐磺袨碾y陀羅尼經", -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大藏經)이라는, 이름부터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밀교적 경전을 이용한 그 의례는, "별들의 침범을 당해 재난이 발생되거나 나라의 변방이 평화롭지 못할 경우 도량을 베풀고 불상을 안치하고 다라니 (주문)만 외우면 일체 중생이 다 축복을 얻게 되고 일체 재앙이 다 사라진다"는 인식에 의거했다.


혜성 등의 성변 (星變)이 나타나면 재앙이 닥쳐온다, 주문만 외우면 지진, 강풍, 홍수 등을 방지할 수 있다… 자연 재해와 같은 고통을 고해(苦海)인 이 세상에서 어떤 마술적인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다고 보는 불교의 기본 입장으로서는 이와 같은 주술적인 세계관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데다, 점성술과 같은 잡업(雜業)은 불교에서 명시적으로 계율상 금지돼 있다.  그럼에도 왕실과 국가를 마치 "나라와 백성을 부처의 신비한 힘으로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주체로 가장하기 위해서 고려의 왕실은 백성으로부터 갈취한 재물을 마구 써가면서 불교를 빙자한 부질 없는 미신을 "국가축제"로 만들었다. 불교와 본질상 상관없으며 재래의 주술적인 우주관에 그대로 의존하는 기복적인 왕실 의례는 한두 가지이었던가? 결코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배자들의 주술적인 "권위 세우기"에 계율상 안 되는 일인 줄 알아야 했을 승려들이 왜 이처럼 쉽게 동원됐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불교의 여명기로 잠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막 들어왔던 1-2세기에 중국 지식인층이 부처를 도술과 유교적인 인(仁)을 겸비하는 일종의 "서역의 초인(超人)"으로 파악하여 도교의 신비주의적 요소를 불교에다 그대로 투영했다. 불교적 수행자의 이미지를, 그들이 도교적 신선(神仙)의 모습대로 그렸다. 중국에서 생산된 최초의 불교 서적,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서 불교의 아라한(阿羅漢: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을 "가고 옴이 자유롭고 변화를 마음대로 하여 영겁토록 목숨을 누리며 하늘과 땅에 잘 머무르며 하늘과 땅을 잘 움직이는 사람",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오늘까지 온 누리에 있는 바를 보지 못함이 없고 알지 못함이 없으며 듣지 못함이 없이 일체지 (一切智)를 얻는 사람" 등으로 묘사했다. 도교적 색채가 강한 초기의 한인(漢人) 불교도 그랬지만 4세기초부터 북중국을 차지하게 된 유목민들의 샤머니즘이 섞인 불교의 이해는 더했다. 예컨대 갈(?)족이 319년에 오늘날의 북경의 근처에서 세운 후조(後趙)라는 나라에서 불도징(佛圖澄: 232-348)이라는 서역 출신의 고승이 군사 고문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를 잡았다. 승려가 군사고문이라 하니 의아하게 여길 사람들이 많겠지만 불도징이 그 "뛰어난 술법"으로 후조의 장군에게 "작전의 길흉"을 점쳤다는 것이다. 물론 후조 군대에 의한 무차별적 살육을 막기 위해 "신술"(神術)을 방편삼아 군주의 신임을 얻어 정복 왕조의 악정을 완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지만 불도징과 같은 "신승"(神僧)의 국가적인 출세는 불교의 기복화를 촉진했다. 불도징의 유명한 제자 도안(道安: 312-385)의 문인 중에서는 "술법으로 대중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일"이 없었다는 등 그 당시의 북중국 출신의 승려라고 해서 다 기복으로 기울인 것도 전혀 아니었다.


한데, 승려의 "신술"을 국가의 신비로운 권위 세우기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 이미 착안한 중국의 지배자들이 "술법을 부리는 일"을 그 때부터 승려들에게 자주 요구하게 됐다. 수나라나 당나라 때에 승려들에게 "국군 승리를 위한 기도"를 시키는 정도는 중국 국가 불교의 기본이 됐고, 원칙상 모든 것에 초월적인 태도를 가져야 할 교외별전 \(敎外別傳)의 선종까지도 국가의 힘에 의존하는 한 이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선의 분파 중의 하나인 정중종(淨衆宗)의 조사격인 지선(智詵 : 609-702)선사가 측천무후('t天武后) 앞에서 신통력을 시범하여 인정을 받은 일이 있지 않았던가? 내부 저항도 없지 않았지만, 이미 중국에서 이루어진 불교의 국가와의 유착은 불가피하게 국가로서 이용가치가 높은 기복적 요소의 강조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한국의 승려들도 불교의 최초 도래부터 이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의 대(對)국가, 대(對)사회 관계의 맥락에서 기복적인 요소들이 다소 강화되고 보편화됐다고 볼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요소들이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과연 중국이나 한국에서 고대부터 이 정도로 비대해질 수 있었겠는가?  초기 불교에 과연 기복적인 요소들이 존재했는가 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물음은 사실, "예"나 "아니오"로만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재래 종교들이 갖고 있었던 신비주의적 부분들에 대한 붓다와 그 제자들의 태도는 사실 자기 모순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수행자를 "신통 (神通)이 있는 특수한 사람"으로 보는 인도의 전통 종교와 달리, 이 세계가 고해 (苦海)라는 사실, 그리고 고해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주축으로 했던 붓다의 가르침은 굳이 "신통"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초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초능력이 그 보유자나 타자들의 고통의 인(因), 즉 개인과 사회 전체의 탐진치(貪瞋癡: 탐욕, 성냄, 어리석음)를 없앨 수 있는가? 신이나 초능력 보유자에게 빌어서 소원 하나 이루게 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해 또 계속해서 불행을 느끼지 않겠는가?


붓다가 재래 종교 신격(神格)들의 존재를 애써 부인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가르침은 사실상 무신론(無神論)의 일종으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다. 신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의 무명(無明: 밝지 못함, 무지)이 고통으로 이어지는 연기(緣起)의 법칙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분율> (四分律)이라는 주유 율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대로, 한 번 붓다의 제자 빈돌라 (Pindola: 賓頭盧 )가 기나긴 막대기에 걸려 있는 발우(鉢盂)를 얻어서 군중의 신심을 일으켜보려고 군중에 뜨는 등 "신통"을 부렸을 적에  붓다가 그를 엄준히 꾸짖었다.


" 네가 한 짓은 옳지 않다. 위의가 아니요, 사문의 법이 아니요, 청정한 행이 아니요, 수순하는 행이 아니어서 할 바가 아니거늘 어찌 속인들 앞에서 신통을 나타내느냐. 헌 발우 하나를 얻고자 신통을 부리다니, 마치 음녀가 돈 한 푼을 위해 여러 사람 앞에 제 몸을 드러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뉘앙스가 내재돼 있다. 붓다가 속인 앞에서의 "신통력 시범"이라는 "적절치 않은 상황"을 지적했지 신통력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수롭지도 않은 대상물을 취득하기 위한 신통력 행사를 매매춘 행위에 비유했는데 (그 비유법 자체는 매우 남성 중심주의적이었지만), 매매춘 행위 이외에 "정상적인" 부부 섹스가 있듯이 "위의가 아닌 신통 부리기" 이외에도 "용납할 만한 신통 과시"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빈돌라의 이야기를 뒤잇는 텍스트를 계속 읽어보면 이제 다름이 아닌 붓다 자신이 "신통"을 부리기 시작한다. "외도", 즉 붓다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다른 스승들의 "신통력을 보여달라"는 도전적인 제안들을 전해주는 여러 국왕들의 요청을 계속 뿌리쳐온 붓다는, 자신의 열렬한 후원자인 코살라(Ko�ala: 拘薩羅 )국의 프라세나지트왕(Prasenajit: 波斯匿王)의 요청에 못이겨 코살라국의 수도 스라바스티(�r�vast�: 舍衛國)의 근처에서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신통력 시범"을 보였다는 것이다.


신도들이 바친 양짓대, 즉 고대인의 "치솔"을 붓다가 씹었다가 그 "치솔"이 갑자기 화려한 나무로 변한 것이고, 그 나무에서 향기로운 꽃과 맛이 있는 과실이 익어 참가자들에게 관람거리와 좋은 음식이 된 것이고, 땅에서 연꽃이 피는 연못이 생기고, 붓다의 몸이 갑자기 여러 몸으로 나누어졌다가 합치고, 신들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외도"의 연단을 쳐부수고, 13일 동안이나 계속됐던 이 "신통력의 향연" 결과, 수많은 대중들이 붓다 가르침의 진리를 믿게 된 것이었다고 경전이 전한다. 그리고, 예수가 일으켰다는 기적들이 그 뒤에 거의 2천년 간 기독교 미술의 주된 소재가 됐듯이, "스라바스티의 기적"도 2세기 이후로 인도의 불교 미술의 주된 주제 중의 하나가 됐다. "신통력 이야기"가 과학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지금도 불교 성지 순례를 알선해주는 국외의 여행사들이 "기적의 현장 스라바스티"를 최고의 인기 성지로 꼽기도 한다. 그 만큼 "신통력 이야기"가 고금을 막론하여 동원력이 강한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해탈 지향"에 충분히 호소할 수 있는, 극히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가르침이 이처럼 인간의 상상을 압도하는 "신통력 신화"까지 동원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붓다 자신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붓다에게 초기 불교 교단의 모든 관습의 기원을 가탁하고 붓다를 마치 "신인"(神人)으로 묘사하려 했던 후대의 교계가 그랬는지 지금으로서 확인할 길이 없지만, 초기 불교에서 "신통"을 우선시하지 않았으면서도 하나의 쓸 만한 "방편"으로 여긴 것 같다. 인간이 각자 서로 많이 다른 만큼 불교도 역시 그들의 세계관과 수준에 맞추어서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데, "신통"을 하나의 "현실"로 인식하는 사회에서라면 그 사회의 통념과 어긋나지 않게 "신통의 신화"를 중생의 구제에 이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붓다와 그 제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 인도의 종교적 사고 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신통"과 전혀 무관한 스승이 과연 그와 같은 환경에서 "스승"으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신통"에 대한 이와 같은 "방편론적" 이해가 그 뒤에 대승불교에서 가일층 굳어져 <법화경>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대승경전에서 관세음보살 등이 말 그대로 "무한 신통의 신격"처럼 나타나는 것인데, 그건 결국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일으켜 나중에 진리에 도달케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변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신통"을 "고매한 수행자가 당연히 구사하는 능력" 쯤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있었던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이용했던 방편을, 신통에의 호소를 신도들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압도"로 인식할 수도 있을 만큼 이미 진보된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써도 되느냐 라는 것이다. 즉, 갓바위에 가서 기도를 드리면 영험이 있겠다는 이야기는, 1500년 전 같았으면 불교로서 "품위손상"이 아닌 "불가피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더 이상 "불가피"해 보이지 않는다.  "임기응변"의 지혜를 살리자면 더 이상"신통력"을 "사실"로만 보지 않는 현대 사회의 상식에 불교도 그 가르침을 하루 빨리 맞추어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영험" 이야기가 벌어다 주는 소득 때문인지 불교계에서 기복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도 구체적인 대응책이 마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그것은 불교만의 문제인가? 국내 기독교의 "은총" 신앙이나 "안수 치료"를 봐도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붓다와 같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과연 사실과 다르다 싶은 이야기를, 아무리 방편적으로 이용 가치가 있다손 치더라도 알면서도 유포할 생각을 가지셨겠는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 초기 불교의 경전을 보면 붓다  내지 그 가르침을 정리한  제자들  가운데 수행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사람이 "신통력"이 생긴다는 것쯤을 그 당시의 수행자 사회의 "통념"대로 믿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함의 가르침에 의하면 여래나 그 제자들의 "신통력"의 뒷받침이 되는 것은 바로 "네 가지 신성한 다리" (Catv�ra-�ddhi-p�dan�m, 四神足), 즉 위대한 선정에 들려는 욕망과 그 선정을 얻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 그 선정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마음에 대한 통제력과 지혜의 힘 등이다.


이와 같은 뒷받침이 있으면 고급 수행자가 "여섯 가지 신통" (�ad-abhij��, 六神通)을 얻는 것으로 돼 있다. 어떤 공간의 장애와 허공일지라도 마음대로 통과하고 날아다닐 수 있으며, 몸을 몇 개로 나눌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세상의 모든 것을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볼 수 있는 능력, 즉, 모든 공간적 막힘을 투명하게 뚫어볼 수 있는 능력인 천안통(天眼通), 보통사람이 들을 수 없는 세간, 천상의 모든 소리를 남김없이 듣는 능력인 천이통(天耳通), 자신보다 법력이 높은 존재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나 신, 짐승 등의 일체 중생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선악을 모두 아는 능력인 타심통(他心通), 자신과 다른 사람의 과거와 그 생존의 상태를 모두 아는 능력인 숙명통(宿命通), 그리고 마지막으로 번뇌를 모두 끊어서 두번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게 되는 상태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계들을 다 초월할 수 있다는 누진통(漏盡通)… 누진통 얻기에는 아라한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만 앞에서의 다섯 가지 신통한 힘을 꼭 붓다나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뿐만 아니라 수행의 경험이 어느 정도 돼 있는 어떤 사람도, 심지어 불교를 배척하는 "외도"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불교 경전들이 "현세의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


고려의 뛰어난 고승 지눌(知訥: 1158-1210)이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육신통을 바라지 말라, 이것이 성인의 지엽(枝葉)일 뿐이다, 하지만 신통의 지혜는 불심을 바로 믿는 법의 힘을 따라 더욱 수행하여 공을 쌓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지눌이 속했던 선불교가 원시불교와 많은 점에서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지만 신통에 대한 지눌의 설명에 붓다나 그 제자들도 동의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눌 자신이 신통을 특별히 강조한 적이 없었지만 "죽고 나서도 그 몸에서 수염과 머리털이 계속 자라났다"는 것이 그에 대한 전승이었다.  대덕고승을 신통을 부리는 초인으로 보려는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무아의 지경에 이른 적이 없었던 필자, 그리고 이와 같은 경험의 맛을 보지 못한 대다수의 독자들로서 그 지경에서 생긴다는 "신통"에 대한 불경이나 지눌과 같은 비범한 수행자의 설명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 과학의 수준으로 이해 못할 일을 내일의 과학이 설명하겠다는 종교계의 재반론이 또 들어올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다수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의 보유, 그리고 다수의 상식을 초월하는 "기적"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은 결국 다수에 대한 권위주의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쉽게 연결된다는 것. "겸손한 민중적 도사(道士)"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고대나 중세의 "신통력" 신앙이 국가와 지배계급에 의해서 부단히 이용 당해 온 것이었고, 현재의 "도력", "기돗발" 이야기는 종교의 자본화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국가에 의한 악용도 종교의 자본화도 한국에 있는 모든 종교들이 똑같이 겪는 문제이지만 불교의 경우가 특히 아쉽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신론인 불교의 본질상 "신통력" 담론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본질로 따지자면 내 아들이 서울대 입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내 아들 네 아들 없이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가져 학벌 타파 운동을 물심 양면으로 해야 할 것이다. 붓다 시대에 그 당시의 수행자에 대한 다소 신비주의적인 인식이나 사회적 욕구 등에 따라 불교가 "신통"을 하나의 부차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다 해도 2500년 후의 불자인 우리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이 비본질적인 부분을 과감히 수정해야 할 듯하다. 우리의 종교는 신과 기적, 기도의 종교가 아니고, 일체 중생들이 서로에 대한 아끼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껴안고 보살펴주면서 함께 살아가게 해주는, 이성과 자비의 무신론적 종교다.  



출처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