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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홀로 선다면 그대 불안하리라 그러나 자유로우리라

slowdream 2008. 4. 6. 02:16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⑫ 불안-홀로 선다면 그대 불안하리라 그러나 자유로우리라



소설가 현은 10년 만에 평양을 찾았다. 평양성과 부벽루(浮碧樓), 연광정(鍊光亭)과 청류벽, 그리고 대동강이 우직한 순정으로 맞아주었다. 평양 거리에는 머릿수건 한 여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인 머릿수건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현은 폐허가 주는 서글픔에 사로잡혔다. 친구들을 만나 대동강변 동일관에 가서 술을 마셨다. 현은 장구 장단과 ‘방아타령’이 좋은데, 친구 김은 유성기와 댄스를 고집했다. 가뜩이나 불편한 심사가 누적되어 있는데, 친구 김은 현에게 세상에 잘 팔리는 글이나 쓰라며 핀잔을 주었다. 현은 기어이 상을 뒤집어엎고 강가에 나가 물결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 ‘주역’에 있는 말이 생각난다.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어름이 올 것을 각오하란 말이다. 현은 술이 확 깨여진다. 저고리를 여미나 찬 기운은 품 속에 사모친다. “이상견빙지 … 이상견빙지 ….”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 - 이태준‘패강랭(浿江冷)’(1938)


1930년대 후반, 세상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가혹해졌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문화는 하나하나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소설가는 이러한 정세 변화에 민감했고, 그럴수록 마음은 불안했다. 시대 변화를 감지하고 격분해도 그는 무력하기만 했다. 이제 곧 두꺼운 얼음이 얼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선 땅에 암운이 드리워진다고 생각하니, 술이 확 깨었다. 이 소설의 뿌리에는, 시체처럼 차가운 정세를 감지한 이태준의 불안이 놓여있다.


기원전 222년쯤 가을,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일행은 흰 옷과 흰 갓 차림으로 역수(易水·지금의 북경 서남쪽) 가에 모였다.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나는 형가(荊軻)를 전송하는 자리였다. 형가는 친구의 축(筑)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는 역수를 건너 떠나갔는데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후 형가는 자기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죽음의 길을 떠나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인물로 기억되었다. 그가 부른 ‘역수가(易水歌)’는 천고의 비장한 노래가 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자객열전’의 내용이다.


사람들은 그를 신념의 화신, 비범한 인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이는 박지원의 말처럼, 사마천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고, 부엌 바닥에서 숟가락을 주워들고 ‘심봤다’고 외치는 격이다. 사마천은 이 사건의 앞뒤에,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 주도면밀하지 못한 일 처리, 결행 앞의 머뭇거림, 거사 실패 뒤 의뢰인의 신분을 노출하는 장면 등을 배치하였다. 떠나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음은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진실을 직언했다가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의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신념을 위해 결연하게 죽음의 길을 떠나가는 인물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장면의 구성만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마음을 얻었다면, 우리는 형가에게서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불안에 가득 찬 떨림을 감지할 수 있다.


외지에서 온 도시의 고독자 처용은 아내의 외도를 목격했다. 아내와 역신의 동침은, 역병에 걸린 아내를 은유한다. 그는 넘어서기 어려운 거대한 운명 앞에 선 것이다. 당시 역병은 인간으로선 불가항력이었다. 아내는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다. 처용은 절박한 마음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아내의 병을 고치려고 했다. 처용 이야기는 거대한 운명 앞에 선 작은 인간의 무력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염원과 절규를 담고 있다. 그의 아내는 죽었고, 대신 처용의 염원과 절규는 주술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후 처용의 이야기는 종교로, 무용으로, 문학으로 거듭나기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1000여년이 흐른 뒤, 김춘수(1922~2004)의 ‘처용단장(處容斷章)’은 이렇게 시작한다.


바다가 왼종일 /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 이따금 /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무의미 시’ 운운하며 처용과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림없는 말이다. 세상에 의미 없는 말이 어디 있을까, 알아내지 못할 뿐이다. 내가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본다. 바다의 눈은 어둠 속에서 몰래 응시하는 생쥐의 눈이다. 나는 그 넓은 바다에 의해서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늘게 몸을 흔드는 느릅나무 잎들은 나의 마음이다. 남의 시선을 느끼며 떨고 있음은 바로 불안의 표지이다. 병든 아내 앞에서 절감한 처용의 무력감은, 1000여년 뒤 세상과 대면한 시인의 불안으로 바뀐 것이다.


근대 이후 문학작품에서 나를 향하는 타자의 시선은 불안 형성의 조건으로 자주 등장한다. 남편 몰래 정부를 만나고 나오던 이레네는, 정부의 전 애인이었다는 여인에게 협박을 당한다. 그날 이후 이레네는 그 여인의 경멸에 가득 찬 시선과,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듯한 남편의 차가운 시선을 떨쳐내지 못한다. 강박감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자살을 결심한다. 슈테판 츠바이크(1891~1942)가 지은 ‘아내의 불안’의 줄거리다. 루쉰(1881~1936)이 지은 ‘광인일기(狂人日記)’의 주인공도 남들의 시선 때문에 극심한 불안을 체험한다. 개도 자신을 노려보고, 노인의 눈길도 이상하고, 아이들의 시선도 심상치 않다. 그는 결국 미치고 만다. 현대인들에게 불안은 타인의 시선으로 밀려온다.


신의 뜻과 사회의 법을 모두 외면한 23세의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만의 의지와 판단대로 살인을 단행한다. 살인 후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고심하는 가운데 지쳐간다. 비극을 직감한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오지만, 물어보지는 못하고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다. 소냐의 권유로 자수를 결심한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뜨거운 사랑을 고백한다.


“어머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에 대한 어떤 소문이 들리더라도, 다른 사람이 어머니께 저에 관해 어떤 얘길 하더라도, 지금처럼 변함없이 절 사랑해주시겠습니까?” - ‘죄와 벌’(장실 옮김)


각자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소진되어가던 모자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언제가 이 장면에서 책장은 더 이상 넘겨지지 않았고,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 적이 있었다. 아들은 자기가 저지른 일을 말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는 알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아들은 어머니의 두려움을. 어머니는 아들 생각에 마음이 아플 뿐이고, 아들도 어머니가 걱정될 뿐이다. 어떤 어머니와 자식의 사이가 그렇지 않을까.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불안하다. 형가처럼 우리는 낯선 상황에 직면해서 불안하고, 죽음과 병 때문에 불안하다. 모든 현상은 변화와 운동을 내포하고 있으니, 미묘한 파장, 섬광 같은 떨림,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은 불안하다. 식민지 백성 이태준이 그랬고, 나치즘의 광풍이 일던 1940년대 초반 유럽에 절망하여 자살한 츠바이크도 그런 경우이다. 신의 품을 외면하고 세상에 홀로서기를 시도한 사람들은 개성과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수반되는 고독과 불안도 함께 떠안아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루쉰, 김춘수의 불안은 힘들게 얻은 자유의 대가이고, 또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진짜 삼우(三友)는 불안과 불면 그리고 우울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나무 한 그루 서있는 시골길에 서서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린다. 이들은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버틸 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지껄이며 고도를 환기한다. 이들이 계속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 말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사뮈엘 베케트(1906~89),‘고도를 기다리며’(1952)) 불안하기 때문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며, 글을 쓴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50년째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언제 올지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다.


“아빠, 이거 되게 재밌어.”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불쑥 말했다. “이거 있잖아, 몽상가 … 불안 ….” 내 방 문에는 후배의 시 ‘몽상가 K씨의 불안-정신병원’이 붙어 있었다. 그게 뭐가 재미있냐고 묻자, 아이는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재밌잖아”하고 말끝을 높인다. 아이가 재미있다고 한 부분은, “내 머리 속에 애벌레가 득실거려요 / 나비가 아니라 날개 가진 도마뱀이 되려고 해요” 같이 은유가 살아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내 시선은 자꾸 “누군가 내 머리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요”라든가, “문을 열 수가 없어요”와 같은 구절에 가서 머문다. 나는 후배의 불안을 ‘질병의 징후’로 보았음에 반해, 아이는 ‘생동(生動)의 표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이는 내게 불안은 질병이 아님을 가르쳐 준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불안하며, 그 불안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관습과 상투성, 상식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석 같은 안정감을 견디지 못하고, 의심하고 돌아보며 길을 떠난다. 불안을 통해서만 생동하는 삶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불안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친근한 존재로 소개해준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 이승수 경희대 연구교수 〉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