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승기신론으로 선도산 마애삼존불 읽기 <상>
산신각 사찰로 바뀐 설화 불교의 토착화 과정 상징
마애삼존불이 조성돼 있는 선도산의 바위는 정을 대기만 하면 부서져 나간다. 이런 곳에 굳이 마애불을 조성한 신라인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회·종교·예술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경주 중심가에서 해가 떨어지는 쪽을 바라보면 서천을 끼고 펼쳐진 탑정동 일대의 두드리 들을 지나 불쑥 솟은 산봉우리들이 보인다. 그 산들 가운데 제법 높은 산, 뾰족한 삼각형이지만 둥그런 곡선을 한 봉우리를 한 산이 있다. 그 산의 정상 바로 아래쪽을 쳐다보면 서천 건너편의 도심지에서도 마애불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라보며 경주 시청이나 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바로 서악, 선도산이다.
높이는 380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 선도산 성모 사소(娑蘇)의 사당이 있는 산이다. 무열왕릉, 진지왕릉, 헌안왕릉과 이름 모를 고분들이 줄지어 있고, 그 고분군을 지나 오르면 정상의 바로 아래쪽에 성모사유허비(聖母祠遺墟碑)가 있으며, 그 옆으로 100여 미터 오솔길 따라 가면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성모사가 보인다. 성모사 옆으로 선도산 마애삼존불(보물 62호)이 있다.
아침 햇빛에 붉게 물드는 마애삼존불을 보기 위해 허겁지겁 산을 올랐다. 예전엔 사람 하나 간신히 걸어갈 수 있는 오솔길이었는데 이제는 자동차도 다닐 만큼 큰길이 성모사 앞까지 뚫렸다. 숨을 헐떡이며 올랐는데 다행히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동살만 희붐할 뿐이다. 서천과 두드리들 너머 경주 시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성모사의 관리인인 노인 한 분이 낙엽을 쓸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사진기를 준비하니 막 새벽 햇빛이 번진다. 붉은 빛줄기들이 서서히 조금씩 정상에서 바위 절벽을 훑더니 주불의 상호에 다다른다.
상호는 상반부가 떨어져 나가 코의 아래 부분과 턱, 입만 볼 수 있다. 남은 부분도 균열투성이다. 다른 불상과 달리 인간이 훼손한 것이 아니다. 자연과 시간의 손길 탓이다. 원래 이곳은 불상을 새길 수 없는 터다. 바위는 부서지기 쉬운 안산암이다. 마그마 상태였던 것이 결정화하면서 사각기둥 모양으로 절리를 이루었기에, 정을 갖다 대면 사각형 기둥 모양으로 떨어져 나간다. 아미타불의 몸체 부분도 형상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잘려나갔다. 아미타불만 겨우 조형하고는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은 다른 곳에서 새겨 이곳으로 모셔온 것으로 보인다.
중창불사 도운 선도산 신모
지금 내 앞에 놓여 눈에 보이는 이 마애불은 상(相)이다. 부처의 진리가 장인의 손을 매개로 하여 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상과 내가 만나 감동을 하고 그에 담긴 진리를 찾는 감상과 해석 과정은 용(用)이다. 이 용을 통해 불상의 숨은 진리인 체(體)가 드러난다. 용의 과정에서 체를 짐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신라인들은 왜 그 많은 산과 바위를 놔두고 하필 불상을 조성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 바위에 아미타불을 모신 것일까?”이다.
이를 알기 위해 관련기록을 뒤진다. 그 기록을 종합하여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 불상을 조성한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맥락을 재구한다. 논증을 생략하고 간략히 살펴보면, 불교가 들어오기 전 신라인들은 산신신앙을 믿었다. 신라인은 그 중에서도 경주 인근의 삼산(三山)과 국토의 중앙과 동서남북 네 방위에 있는 산인 오악(五嶽)의 신을 가장 귀중히 여겨 신라가 망하는 순간까지도 나라에서 주관하는 산천제를 지냈다. 사로국 시절 서악은 이름 그대로 이 나라의 서쪽을 지키는 산신이 계신 곳이었다. 이 산의 산신의 이름은 거룩한 어머니란 뜻의 성모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엔 이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세월의 풍파에 훼손된 주불의 두상
진평왕(眞平王: 579?632) 대에 지혜라는 여승은 행실이 어질었으며 안흥사에 살았다. 그녀가 새로 불전을 수축하고자 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못하더니, 꿈에 한 선녀가 아름다운 자태로 머리를 보옥으로 꾸미고 와서 위로하여 말하였다.
“나는 선도산의 신모이니라. 네가 불전을 수리코자 하는 것이 반가워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니 내가 앉은 자리 밑에서 금을 찾아다가 주장 부처님 세 분을 꾸미고 벽에다가 오십삼불과 육류성중과 여러 천신들과 오악의 신들을 그리도록 하라. 또한 매년 봄, 가을 3월과 9월 10일에는 선남선녀들을 모으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열어 이를 규례로 삼으라.”
꿈에서 깬 지혜는 무리를 데리고 신당으로 가서 자리 아래를 파보았다. 꿈속의 신모 말대로 그곳에 황금 160냥이 있어 그것으로 신모의 지시대로 과업을 잘 성취하였다. 그 사적만은 일연이 살았던 당시까지 남아 있었으나 불법행사는 이미 고려 당시에 폐절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체득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머물면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더니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어 부쳐 이르기를, “솔개를 따라가다 그것이 머무는 곳을 집으로 삼아라.”고 하였다. 사소가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았더니 이 산에 이르러 머무르므로 따라와서 이곳을 집으로 삼고 땅 신선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신모가 오랫동안 이 산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보위하니 신령한 이적이 매우 많았다. 이 산은 나라가 창건된 이래로 언제나 세 개 신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그 차례도 여러 산천제(山川祭)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상이 『삼국유사』, 「감통」 편 ‘선도 성모가 불교행사를 좋아하다’ 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악, 선도산의 산신인 성모 사소는 신라에서 가장 으뜸인 산천제를 지낼 정도의 위상을 갖는 제일의 신이다. 위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산신이 있던 자리가 절로 변하고 산신과 부처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설화는 『삼국유사』에 수없이 나오며, 한국 사찰의 연기설화를 보면 산신이 직접 부처로 변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왜 산으로 내려왔을까? 산신이 왜 갑자기 부처님으로 변하며 산신이 있던 자리가 왜 절로 변하는가? 위의 설화에서도 왜 선도산 산신이 불전을 수축하는 경비를 대고 불교의 의례인 점찰법회를 열라고 하는가?
이 의문을 풀려면 먼저 불교가 이 땅에 전해져 수용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 수로왕비인 허황옥이 가야에 인도 불교를 전한 것이 48년이다. 그런데 신라문화와 가야문화는 건국초기부터 서로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보수적 산신신앙 순교로 포용
고구려나 백제에 없는 각배와 토우가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출토되고 있고 금관, 고분, 토기 등을 보면 가야와 신라의 것이 많이 유사하다. 여러 분야에서 문화교류가 있었는데 불교만 교류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또 고려 민지(閔漬)의 금강산 ‘유점사 기문(楡岾寺記文)’에 의하면 천축에서 53불을 모신 배가 안창현(지금의 고성) 포구에 닿은 것이 신라 남해왕 원년(서기 4년, 漢 明帝 永平 11년)으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보다 65년 전의 일이라 한다.
산둥반도 공망산에서 후한대 마애석상이 발굴된 것은 이미 후한대(23~220)에 인도 불교가 비단길(Silk Road)인 북중국을 경유하지 않고, 인도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와 중국 남동해안을 거쳐 한반도로 오는 ‘자기의 길(Ceramic Road)’, 혹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 중국 서남부로, 다시 양쯔강을 따라 내려와 항주, 명주, 양주 등에서 한반도로 오는 길을 따라 직접 한반도와 신라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뜻한다. 1∼2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제주도의 불교 유적도 이 길을 따라 들어왔을 확률이 크다.
위의 사실을 신빙성이 없다고 무시한다 해도 묵호자가 와서 불교를 전파한 것이 눌지왕대다. 눌지왕은 417년에서 457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늦어도 457년에는 불교가 전파되었다. 소지왕은 재위 10년(489)에 까마귀와 쥐의 가르침에 따라 궁궐에 들어가 거문고 집을 쏘니 ‘내전분수승(內殿焚修僧)’과 궁주가 간통하고 있어 처형하였다. 궁주는 왕비, 또는 왕의 친척이나 궁녀를 가리킨다. 왕이 이들을 간통한 죄로 처형한 점, 왕이 먼저 거문고집을 쏘지 않았다면 이들이 왕을 죽였을 것을 감안하면 궁주는 왕비로 보아야 한다.
이는 이미 왕궁 안에 승려와 내불당이 존재했고 왕비가 승려와 간통할 정도로 승려층과 왕족이 가까운 사이였음을 뜻한다. 법흥왕 조의 기록을 봐도 왕과 이차돈 모두 이미 불교신자다. 이들은 불교를 진흥시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는 신라사회에 1세기경, 아니면 늦어도 457년 이전에 전파되었고, 489년 이전에 이미 왕실에 수용되었으며, 528년(법흥왕 15년)에 귀족과 합의를 거쳐 공인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가 전파되자마자 오래되지 않아 공인되었는데 신라에서는 왜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불교가 거부되었는가? 그것은 새로운 사상을 이단화할 만큼 신라 고유신앙의 틀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고유신앙이란 다름아닌 풍류도다. 진흥왕이 불교를 널리 일으키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말썽을 부리며 반대했다고 한다. 왕이 원해도 귀족들이 반대하여 공인을 미루었다는 것은 왕권이 귀족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귀족들이 고유 신앙을 더 중히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는 이런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필연적 통과의례였다.
별처럼 빛나는 불국토로 승화
아무튼 이차돈의 순교를 통하여 공인된 불교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공인된 지 20년이 못 되어 누구에게나 제 집을 떠나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상황에 이르고, 왕이 부처의 사리를 맞으러 흥륜사 앞으로 친히 나가며, 황룡사 등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 재정이 소요되고 수많은 백성을 동원해야 하는 대형 사찰을 속속 짓는다. 원광이 점찰법회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점찰보를 두자 여신도가 기꺼이 전답 1백 결을 바친다.
진정의 어머니는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솥을 불사에 희사하고 홀어머니인 자신이 죽고 나서야 출가하겠다는 아들을 꾸짖어 그 즉시 의상대사를 따르게 한다. 400여 미터에 이르는 조그만 남산에 지금까지 발견된 절터만 140곳이 넘는 것을 보면, 『삼국유사』에 “절이 별처럼 들어섰다.”고 표현한 것이 그리 과장은 아니다. 불법은 그렇게 찬바람 이는 설산을 넘어, 폭풍우가 몰아치고 큰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건너, 폭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을 가로질러 이 땅 신라로 와 찬란한 꽃을 피웠던 것이다.
불교는 이 땅에서 왜 그리 빨리, 깊이 퍼졌을까? 불교 자체의 위대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불교가 신라 고유의 신앙으로 샤머니즘과 산신신앙의 종합품인 풍류도(風流道)와 결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불교, 특히 풍류도가 포용력이 강하고 다른 문화에 잘 적응하며 창조력이 있기에 양자는 만날 수 있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된 것은 풍류도와 당시 불교가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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