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대승기신론으로 선도산 마애삼존불 읽기 <하>

slowdream 2008. 6. 23. 02:44
 

16. 대승기신론으로 선도산 마애삼존불 읽기 <하>


부서지는 바위 위에 부처 새긴 신심이여


 

       석굴암 본존불이 원융미의 정점이고 부처골 감실부처상이 질박미의 정수라면

                 선도산 마애삼존불은 신심과 예술혼의 정화다.


당시 신라에는 불교의 여러 신앙체계 가운데 기존의 고유신앙과 크게 맞서지 않고 현실에서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불러오며 신이함과 신령스러움을 강조하는 밀교 계통의 신주신앙(神呪信仰)이 먼저 뿌리를 내린다. 신라인이 굳게 믿었던 이 신앙의 실상은 무엇일까? 당시에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금 기독교도들에게 성경과 같은 구실을 하여 국가 의례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삶과 행동의 준거가 된 경전을 살짝 들춰보자.


“1백개의 불상, 보살상, 나한상 등과 곳곳의 대중을 청해 이 경을 즐겨 듣고 … 1백명의 법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 1백가지 향을 피우고 1백가지 빛깔의 꽃을 뿌려 불법승 삼보의 공양을 하면 … 국토 안에 있는 1백부의 귀신들이 … 그대들의 국토를 지키리 … 나라가 어지러우면 귀신이 먼저 난을 일으켜 백성이 혼란에 빠지니 … 또 만일 불의 재난, 물의 재난, 바람의 재난 등 일체의 온갖 재난이 있을 때면 위에서와 같은 법의 쓰임에 따라 이 경을 강독하라. 대왕이여 다만 나라를 지킬 뿐만 아니라 또 복과 덕을 지키는 힘도 될 것이니…”(구마라집 역,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 「호국품」)


신라 최초의 국통인 고구려 귀화승 혜량은 진흥왕 12년(551)에 위의 경전에 의거하여 1백 명의 스님을 청해 1백 분의 부처님을 모셔놓고 공양을 하여 나라의 호국을 기원하는 의례를 열 것을 건의한다. 이에 따라 국가의례로 행한 것이 바로 백고좌회이다. 진흥왕은 백고좌와 함께 전몰장병을 위령하는 팔관재를 열었는데 이것은 고려까지 이어진다. 불교를 처음 전한 묵호자는 향을 피우고 서원을 읊은 것만으로 왕녀의 병을 고치는 이적을 보인다.


불교의 대중교화를 처음 시도한 원광은 중국유학에서 귀국하여 진평왕 15년(613)에 백고좌강회를 열고 경을 읽으며 자신의 업보에 대하여 점을 쳐보고 참회하는 점찰법회를 시행한다. 밀본은 흥륜사 승려 법척이 고치지 못한 선덕여왕의 병, 무당과 승려가 모두 실패한 승상 김양도의 병을 치료하여 무불습합이 불교나 샤머니즘 자체보다도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명랑은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다. 이런 신주적神呪的이고 무불습합적인 관념체계는 왕실, 승려, 귀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국가 규모의 의례인 백고좌회, 팔관재회, 점찰법회에서부터 개인의 신앙에 이르기까지 풍류도와 밀교를 융합한 여러 의식이 전적인 호응을 받으며 의례로 정착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온 신라인에게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졌음을 뜻한다.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업과 고통을 없애고 복을 구하려는 밀교 신앙은 ‘지금 여기’ 현실에서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불러온다는 풍류도의 제재초복(除災招福)의 원리와 서로 통하였다. 당시 신라인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복을 닦아 죄를 멸한다는 수복멸죄(修福滅罪)의 길로, 국가의 차원에서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흥국이민(興國利民)의 방편으로 불교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왕실은 중세의 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와 호국의 도(道)로, 귀족은 출세하고 명예를 높이는 수단으로, 백성들은 현세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불교를 택했다. 오랜 동안 풍류도라는 고유의 샤머니즘을 유지하였던 신라인들은 불교가 들어오자 이것과 융합하였다. 신라인들은 풍류도의 산신이나 천신과 함께 부처님에 기대어 현세에서 재앙을 없애고 행복을 가져다 달라고 빌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토신앙과 화엄철학이 꽃을 피우기 이전의 시대, 곧 527년에서 675년에 걸쳐 무불(巫佛)을 습합(褶合)하던 세계관을 ‘풍류만다라(風流蔓茶羅)’, 그 시대를 풍류만다라 시대로 명명한다.


‘선도산 성모’ 귀족 세력 연합 상징


풍류만다라 세계관에 따라 풍류도와 불교는 빠르게, 그러나 평화적으로 융합한다. 풍류도의 신격과 부처님은 사이좋게 어우러진다. 산신이 내려오던 자리에 부처님이 내려온다. 산신과 부처님이 함께 섬김을 받고 산신이 부처로 변하기도 한다. 산신을 섬기던 산왕당이나 산신당은 그대로 놓아두고 그 주변에 절을 세운다. 신라계 사찰을 가면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없는 절을 보기 어렵다. 사찰의 연기설화를 보아도 사찰을 짓기 이전의 재래 신격의 설화에 불교적 포장을 한다. 진평왕대에 여래상이 새겨진 돌이 하늘에서 산의 정상으로 떨어지거나 산 아래 땅에서 사방불이 나타나거나 하여 이들 산에 절을 세운다. 문무왕대에 영취산의 산신은 불교의 천신 가운데 하나인 범천의 비가 되는 변재천녀로 묘사되고, 신선이 미륵선화로 변모하기도 한다. 지리산신 성모천왕은 석가모니의 모후 마야성모로 승화한다.


산신 중에서도 하필 왜 서악의 성모일까? 지금 전임 교황이 불교도로 개종했다 상상해보라. 당시 신라에서 재래 신앙 가운데 최고의 신격이 불교를 받아들인 일은 혁명적이었으리라. 이런 까닭에 선도산 성모가 나타나 비구니 지혜에게 불전을 수축하도록 금 열 근을 시주하고 선남선녀를 모아 점찰법회를 열라고 한 것이다. 점찰법회는 먼저 목간을 만들어 그 위에 죄과의 명칭을 적어놓고 이를 던져서 나온 죄과목을 보고서 자기 죄과를 지장보살에게 참회하여 모든 죄를 씻는 의례이다. 지장보살은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교화를 맡겠다고 서원한 보살이다. 그러니 점을 쳐서 현세의 죄를 없애고 행복을 비는 것은 풍류도적이며, 길흉이 운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선악, 나아가 전세의 업(業)에 관련된 것이라며 참회하여 깨우침으로 이끄는 것은 불교적이다.


산신각과 절의 공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산신을 믿던 세력과 불교 세력이 평화적으로 연합하였음을 의미한다. 생략하였지만, 인용한 부분에 이어지는 『삼국유사』 이야기에서 선도산 성모인 사소는 중국 황실의 딸이라 하였다. 이것을 그대로 믿으면 중국 유민이 신라에 와서 지배 세력을 형성하다가 죽은 후 신격화한 흔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선도산 성모인 사소가 혁거세를 낳았다고 하였으니 혁거세는 중국계 이주민 세력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천신족이자 밝사상을 가진 기마민족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이 괴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선도산 성모 세력이 중국계 이주민임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사실이지만, 혈연적으로 혁거세의 어머니라 보기는 어렵다. 신라 사회는 사로국을 형성한 6촌 사이에도 어머니와 아버지, 아들과 딸의 관계를 설정하였다. 그러니 선도산 성모 세력과 혁거세 세력의 관계는 혈연적이라기보다 정치적, 문화적으로 모자관계일 것이다. 혁거세와 알영 세력이 혼인관계로 연합하였다면, 선도산 성모 세력은 모자관계로 동맹을 맺은 것이리라. 지리적으로 보아도 알영정과 나정이 이웃해 있고 바로 서천 건너편이 선도산 성모의 세력권이다. 혁거세와 알영세력이 혼인으로 연합한 다음, 중국 유민 집단으로 선진문명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선도산 지역의 사소 세력과 모자관계로 동맹을 맺어 경주평야 중앙으로 진출하여 사로국의 맹주가 되어 신라를 건국한 것이다. 사후에 혁거세는 시조신으로, 사소는 선도산의 성모로 신격화한다.(이상 『삼국유사』의 해석은 졸저,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에서 많은 부분 인용함)


불교 수용 이전에 신라인은 삼산오악(三山五嶽)신앙에 따라 성모사(聖母祠)를 세워 서악의 산신으로 성모를 섬겼다. 불교 수용 후, 특히 본지수적설에 따라 이 땅 신라를 불국토로 간주하면서 경주의 서쪽에 있는 이 산을 서방정토로 비정하였다. 여기 서악이 극락정토이니 당연히 아미타불이 계셔야 하며, 그 아미타불은 서악의 돌 속에서 화신으로 나투셔야 한다. 이런 까닭에 성모사 옆에 있는 바위가 하필 안산암이라 부처를 새길 수 없는 상황임에도 굳이 아미타불을 조성한 것이다.


정을 대자마자 툭툭 돌이 덩어리로 떨어져나갔을 터인데 어떻게 하여 아미타불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불상을 새길 수 없는 바위에 불상을 만든 장인은 과연 누구이고 그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상호도 잘 보이지 않고 5미터가 넘는 높이인데다 가슴도 당당하게 넓어 장중하지만 일견 투박해 보이는 저 불상 앞에서 최고의 예술미에 달한 불상보다 더 숙연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상 최고의 불상을 새긴 예술가도 정만 갖다 대면 균열이 가고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이 바위 절벽에 저 불상을 새긴 장인의 솜씨와 극락정토를 향한 지극한 염원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말리라.


 

                         천진한 미소년 얼굴의 관세음보살상.


원융미의 정점에 석굴암 본존불이 있고, 질박미의 정수가 부처골 감실 부처상이라면, 신심과 예술혼의 정화가 바로 이 불상이라는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장인은 돌이 떨어져나갈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솟을 때마다 자신의 신심이 부족함을 탓하며 더욱 지극 정성을 다하여 불상을 새겼을 것이다. 장인이 정질을 하는 동안 아마 이 바위 아래에서 장인의 아내는 매일 삼천 배를 드리지 않았을까. 현재의 모습만 보고 미술가들이나 불자들이나 이 마애불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예술혼이 부족한 예술가들, 신심이 부족한 신자들은 당연히 이곳에 와서 영감을 얻고 신심을 다시 일으켜야 하리라.


아니, 적당주의에 빠진 한국인 대다수가 이곳에 와서 장인을 떠올리며 통렬하게 자신을 성찰하여야 한다. 결국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불상이 서자 이곳은 공히 정토가 되었다. 이 산자락에 그리 고분이 많은 것도 신라인들이 이곳을 극락정토로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조성하니 비로소 정토


아침 햇빛은 이제 삼도를 지나 가슴을 훑고 내려간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정토요, 나는 지금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있다. 저것은 바위에 불상을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숨은 불상을 드러낸 것이다.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여 정토에 왕생하게 하리라는 아미타불의 서원이 체(體)라면, 그 마음이 지극한 장인을 통해 형상을 띠고 저 마애불로 자리한 것이 상(相)이요, 장인과 아미타불의 공덕으로 중생들이 구제를 받는 것이 용(用)이다. 그래서 저 불상은 1천여 년이 넘는 풍화 속에서도 모든 중생의 두려움이 없게 한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중생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준다는 시여원인(施與願印)만큼은 남겼으리라.


천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년의 얼굴을 한 관음보살은 “이곳에 오는 누구에게든 자비를 베풀리라.”며 그리 잔잔하면서도 신비로운 미소를 띠고 옆에 서 계신 것이리라. 굳은 의지를 가진 청년의 모습을 한 대세지보살은 “정토가 바로 여기이니, 한량없는 힘을 북돋아 주겠노라.”며 입을 꼭 다물고서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리라. 양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의 발은 지상에서 떨어져 있음에도 아미타불만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 내세인 정토로 인도하는 아미타불의 발이 땅에 붙은 의미는 현실에 굳게 발을 디딘 채 이상을 지향하는 신라인의 미학과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리라.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