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아는 만큼이 아니라 읽는 만큼 본다 하

slowdream 2008. 7. 7. 01:47
 

18. 아는 만큼이 아니라 읽는 만큼 본다 하



작품 읽는 것은 내 안의 부처 만나는 과정


 작품을 읽는 것은 학자나 비평가의 견해를 읽거나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작품을 대할 때 자연의 아름다움은 비극이 되기도, 또는 희극이 되기도 한다.


그럼 아는 것을 넘어서서 불교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는 마음공부다. 마음이란 모든 법이 의지하는 주인이다. 원효의 말대로 “참으로 이 마음이 모든 법을 통섭하며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이 일심(一心)이기 때문”이다.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서 처음에 바가지의 단물로 보았을 때는 그리도 달던 물이 다음 날 아침 해골에 담긴 것으로 보자 토한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짓는 것이다.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에 따르면, 의식은 대상을 지각하는 주체인 견분(見分)과 견분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인 상분(相分)으로 변하여 나타난다. 정신작용이란 정신이 스스로 변화하려 하거나 실제로 변화하여 대상을 이루고 대상에 따라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예술을 창조하거나 해석하는 ‘내’가 견분(見分)이라면, 예술가에게 대상, 독자에게 작품은 상분(相分)이다.


내 앞의 돌은 늘 돌인가? 흔히 우리 앞의 대상을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대상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 앞의 돌은 독재정권을 향한 저항일 수도, 아름다운 추억의 매개체일 수도, 불법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선지식일 수도 있다. 나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은 그 돌을 보고 아름답다며 오랜 동안 넋을 잃고 감상하지만, 어느 날은 발로 걷어찰 수도 있다. 불상을 조각하는 장인과 대상, 그 불상을 감상하는 독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짓는 바에 따라 나도 변하고 저 불상도 변한다.


세계를 읽는 주인은 마음


임제는 “어디에 머물든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머무는 곳마다 모두 진리이다.(隋處作主 立處皆眞),”라고 말한다. 이처럼 마음이란 세계를 해석하는 중심이면서 읽기의 주체다. 어느 맥락에서 어떤 예술작품을 만나든, 그를 읽는 내가 바로 주인이다. 온갖 아는 것들, 곧 타인이 말한 것, 이미 정설로 귀결된 것, 권위가 있는 학자나 예술가가 평한 것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그 작품을 읽을 때 비로소 나는 주인이 되는 것이며 그 작품이 숨기고 있는 진리에 다가가게 된다.


실례로 마츠오 바쇼오의 하이쿠[俳句]를 읽어보자.

“거친 바다여, 사도섬 가로지른/하늘의 은하(荒海や佐渡に橫たふ天の河)”

하이쿠는 5·7·5조로 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형식이다. 일본에서 하이쿠를 읽는 법은 철저히 아는 것에 의존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작가에 관련된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석하거나, 하이쿠에서 계절마다 만나게 되는 사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 낱말로 압축한 시어인 계어(季語)를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와카[和歌]나 다른 하이쿠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방식이다. 아니면 의미 없이 이미지만 음미한다.


이 하이쿠는 파도가 몰아치는 황량한 바다와 예로부터 유배지로 슬픈 역사가 겹쳐져 있는 사도섬, 그 위에 그 바다와 섬 사람들의 애환과 상관없이 하늘 가득 보석을 깔아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하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계어는 “하늘의 은하”로 칠석일이 머지않은 늦여름날 바닷가의 하늘이 배경 이미지를 형성한다. 키레[切れ]는 “거친 바다여,”로, 휴지(休止)를 두어 그 여백의 빈틈에 바다의 황량함, 사도섬 사람들의 험난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은하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웅대함에 빠져들다가 곧 거친 바다를 몸으로 체험하여야 하는 사도섬의 어부들이나 유배자의 삶의 맥락 안에서 감상하게 한다. 황량한 바다의 어둡고 검은 이미지와 은하의 밝고 하얀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체로 이 정도로 감상하는 것이 일반이다. 이를 넘어서서 마음에 따라 읽어보자.


여기서 계어는 1차적으로 환유(met onymy: ‘보름달’에서 시공간적으로 가까운 ‘추석, 대보름’나 경험적으로 연관이 있는 ‘이태백, 늑대’ 등이 떠오르는 것처럼 ‘인접성’을 매개로 한 유추와 연상)로 읽힌다. “하늘의 은하”는 ‘늦여름’이나 ‘칠월 칠석’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환기시킨다. 공간적으로 ‘은하가 빛나는 하늘, 천상계, 신, 또는 성(聖)의 공간’을 떠올린다.


독자가 이 하이쿠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면, “하늘의 은하”를 환유에서 은유(metaphor: ‘보름달’에서 그처럼 둥그런 ‘엄마얼굴, 호수, 빵’이 연상되듯 ‘유사성’을 매개로 한 유추와 연상)로 바꾸어 읽는다. 우선 은하와 형상이 닮은 ‘강, 젖줄, 모래, 보석’이 떠오르겠지만, 독자들은 이왕 은유로 읽은 이상,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사라지지 않음’을 은하의 본질로 파악한 이들은 이에서 ‘영원성, 상(常)’ 등의 의미를 떠올리며, ‘무한함’을 이의 실체로 본 이들은 이에서 ‘광대무변, 무한, 실체, 도(道)’ 등의 의미를 추출한다. 하늘에서 빛나는 것이 은하의 중요한 짓[用]으로 파악한 이들은 이에서 ‘신들의 보석, 천상계의 보석’ 등의 의미를 읽는다. 은하가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것을 이의 짓으로 인식한 이들은 ‘하늘나라, 천상계의 다리’ 등의 의미를 떠올린다.


‘거친 바다’는 비극이자 무상계


이 의미 모두가 유효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사도 섬 가로지른”이 “하늘의 은하”를 한정하고 있다. 은하는 은하이되, 은하 일반이 아니라 사도섬에 가로놓인 개별적인 은하다. 사도섬은 고유명사이기에 환유로 읽힌다. 사도섬의 환유는 사도섬에 얽힌 역사와 사실, 허구적 이야기 모두이기에 함부로 단정짓기 어렵다. 키레를 보아야 한다.


키레는 “거친 바다여,”이다. 바다를 “거친”이 한정하고 있다. 바다는 바다이되, 거친 바다이다. 경험적으로 보면, ‘거친 바다’는 ‘수장(水葬), 폭풍, 쓰나미, 바다에 얽힌 경험과 섬사람들의 비극적 삶과 이와 관련된 작품들’과 환유관계를 갖는다. 그러니 ‘거친 바다’엔 바다에 대한 비극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이 바탕으로 깔려 있다. 이처럼 물질성과 구체성을 갖는 ‘거친 바다’에 이어 느닷없이 ‘하늘의 은하’가 이어진다. ‘거친 바다’는 자연스레 ‘하늘의 은하’와 이항대립구조를 형성한다. 이 이항대립구조에 ‘사도섬’이 끼어들어 양자의 매개 역할을 한다.


‘거친 바다’가 어부들이나 유배자들이 태풍, 쓰나미, 조난, 실종, 부상, 이별, 굶주림, 고문, 죽음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현실이라면, 은하는 하늘에 떠서 빛나는 이상이다. 전자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의 세계라면, 후자는 하늘에 높이 떠서 삼라만상에 빛을 뿌리니 자비행이자 이를 행하는 부처이다. 전자가 인간이 생을 영위하는 속스런 공간이라면, 후자는 신이 주재하는 성스런 공간이다. 전자가 유한의 세계라면, 후자는 광대무변한 무한의 세계이다. 전자가 변함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무상의 세계라면, 후자는 변함이 없는 상(常)의 세계이다. 양자 사이에 사도섬이 경계를 설정하면, 현실과 이상, 속과 성, 중생과 부처, 유한과 무한, 무상과 상상이 대립한다. 반대로 사도섬이 매개 역할을 하면 양자는 하나로 어우러진다.


바쇼오가 선(禪)을 추구한 시인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이 하이쿠가 선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하고 읽으면, ‘바다’는 환유에서 은유로 전환한다. 바다는 끝이 없다. 이는 무한, 무시무종, (진여)실체, 궁극(적 진리), 도(道) 등의 의미를 떠올린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강들이 흐르지만 모두 바다로 들어가 하나가 된다. 바다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반야와 유식, 돈과 점 등 서로 다른 쟁론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일미의 세계이다. 바다는 소금이 있어 늘 맑으니 정화와 청정의 의미를 갖는다. 바다는 수평을 이루고도 절대 평등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파도를 쳐대니 정진이고, 이를 통해 이룩한 무등(無等)의 세계이다. 바다는 들어갈수록 오묘하고 온갖 보배를 담고 있으며 달을 비롯하여 삼라만상을 모두 비추니 중중무진의 세계요, 인다라망이자 화엄의 연화장이다.


학자의 눈에서 벗어나야


선사가 바다로 향한다는 자체가 도, 깨달음, 일심, 일미 등을 향한 지향이다. 바쇼오가 바다로 향한 여행은 이에 이르려는 정진이다. 바다가 거칠다고 한 것은 이에 현실의 장애가 있음을 의미한다. “거친 바다여,”란 깨달음을 향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낀 자의 회한에 찬 영탄이다. 이 괴리를 처절하게 인식하는 순간, 바다 위로 은하수가 펼쳐졌다. 사도섬을 지나 광대무변의 우주를 가로질러 흐르는 은하수는 자연의 장엄함이자 경이 그 자체다. 웅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의미를 갖는 존재가 아니다. 은하를 보는 그 순간 시간은 멈추며, 개인은 우주의 한 부분이 된다. 아상(我相)을 벗는다. 그러니 시적 화자는 바다, 도(道)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광대무변한 하늘에서 반짝이는 은하를 보고서 바다와 하늘,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님을, 자신이 은하를 바라보는 사이에 우주의 한 부분이 되어 찰나의 순간이나마 무상을 극복하고 상(常)의 세계에 진입하였음을 깨닫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하이쿠에 대해 기초지식도 없고 일본어도 못하며 바쇼에 대한 연구서적을 한 권도 읽지 않은 필자가 감히 하이쿠의 최고봉인 마츠오 바쇼오의 하이쿠에 대해 위의 시에 두 수를 더하여 세 수를 놓고 각각 50장 가까이 되는 분량으로 해석하여 하이쿠의 본산인 일본 동경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하였다. 발표 후 이 대회를 주관한 동경대의 스가와라 교수는 일본에서도 이 하이쿠에 대해 이 정도로 깊이 있는 해석을 하지 못했다는 평을 하였다. 필자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마음으로 읽은 탓이다.


교과서에 실린 시에 대해서는 참고서의 풀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던 학생들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시를 주고 나름대로 해석하라 하면 비평가 이상으로 발표한다. 대학생이 아니라 초등학교나 중학생에게 실험해도 마찬가지다. 중생 모두에게 불성(佛性)이 있듯, 우리는 누구든 낱말에서 은유와 환유의 연상을 하며 작품을 나름대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비평가나 학자가 그 작품에 대하여 해설하고 평가한 것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잠재한 부처, 곧 그 작품과 만나 끈기있게 진솔한 대화를 하여 담긴 의미를 찾아내 그로 나를 성찰하고 타자를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 그 작품을 꼼꼼히 파헤쳐보며 그 속에 담긴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환희심을 내어 자신도 모르게 청정한 세계를 살짝 맛보는 그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